A level 2 assassin wants revenge RAW novel - Chapter 278
278화 중독 2
* * *
“모르는 척하기는. 국가가 우러러보는 영웅이 될 수 있는 기회란 말이야. 중간에 약혼녀와 헤어지는 게 꺼림칙할 테지만, 그 전까지 별 사이는 아니었잖아?”
결혼을 약속이 아니라 거래의 일종으로 보면 맞는 말이었다. 이득과 사익에 따라 저울추가 흔들릴 테니.
카인은 퀘이사를 쳐다보았다.
천연덕스러운 미소 안에 담긴 감정은 그 무엇보다 진득하면서도 시꺼맸다. 그는 충동적이지만 머저리는 아니었다. 거미처럼 줄을 치고 기다릴 줄 알았다.
어느새 주위는 고요해졌다.
모두 흥미롭다는 듯 쳐다만 볼 뿐이었다.
우리 안의 원숭이가 따로 없었다.
카인이 지팡이를 두드리기 직전, 타나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녀가 나서자 과열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자중하거라, 퀘이사. 여기가 네 놀이터는 아니지 않느냐.”
“일생일대의 고백 중이었습니다, 타나 님.”
“그렇다고 해도 때와 장소를 가릴 줄 알아야 하느니라. 아니면 여기에 모인 사람들을 우롱할 셈이느냐? 고작 네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죄송합니다.”
면목없다는 듯 퀘이사가 고개를 숙였지만 그가 진심으로 반성했다고 믿는 이는 없었다.
* * *
결국 1일 차 대륙 회의는 전초전조차 치러지지 못한 채 흐지부지 막을 내렸다.
수사 협력 기관 결성 논의로 시작해 이황자의 공개 구혼으로 끝났다는 게 우스울 따름이었다.
그런 게 역사로 기록된다는 게 부끄러울 정도.
결론만 말하자면 엉망진창이었다.
조직에 대해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눠도 모자란 판에 퀘이사의 고백에 모든 포커스가 맞춰져 있었으니까.
중진들도 사춘기 소녀가 되어 어떻게 될까 속삭일 정도였다.
“진정하거라. 이황자의 제안은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테니까. 아니면 강제 명령 계약서라도 작성해야 마음이 풀리겠나?”
“그럴 리가요.”
다만 석연찮을 뿐이었다.
카인이 알기로 퀘이사는 가늘고 길게 사는 황자 중 한 명이었다. 망나니이긴 해도 쾌활하고 낙천적인 성격으로 인맥도 많은 편이었다.
레서 왕국에도 몇 번 방문한 걸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당시에 그가 세라에게 관심을 보였다는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았다.
‘이렇게 소란을 피운 걸 보면 당시에도 소문이 흘러나올 법도 한데 말이야.’
타닥.
상념을 지운 카인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보다 타나 님은 왜 따라오시는 겁니까?”
“퀘이사, 그 아이가 했던 헛소리를 신경 쓰고 있을 것 같아서 이렇게 따라왔다.”
“간단해서 좋군요.”
“미안하구나.”
“타나 님이 사과할 일이 아니잖습니까.”
“하지만 나를 빼면 사과할 아이가 없겠더구나.”
연신 쭈뼛거리는 게 여간 잔망스러운 게 아니었다. 이쪽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평범한 무인이 아니라 머지않아 십좌의 자리에 오르게 될 후배로 대해주는 걸까.
‘설마 그 무신에게 이런 대접을 받을 줄은 몰랐는데.’
기분이야 좋았지만, 거기에 매몰될 생각은 없었다.
개인 관계가 나쁘지 않다고 해도 소속된 국가가 달랐으니까.
추구하는 이상이 다른 이상, 항상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껄끄러운 사이가 될 게 분명했다. 일찍이 라프만과 타나가 그랬던 것처럼.
“타나 님은 어떻게 보십니까. 헛소리가 사실이 될 가능성은 없겠습니까?”
“자비얀이 묵인해 주어도 한계가 있을 거란다. 인륜대사는 당사자 간의 합의가 중요한 거니까.”
타나의 말이 맞다고 세라가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카인은 모른 체했다. 세상사가 모두 자신의 뜻대로 돌아가는 건 아니었으니까. 때로는 원치 않은 선택을 해야 할 때도 있었다.
“저는 이황자가 대륙 회의에 참석하지 않는 게 모두에게 이로울 거라 생각하는데 타나 님 선에서 어떻게 해결할 수 없겠습니까?”
“나 또한 그 아이가 황제에 어울리는 재목은 아니라고 생각한단다. 하지만 퀘이사는 대륙 회의에 꼭 참석해야 해. 세 명의 황자가 동등한 선에 설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평정제와 약속했으니까.”
황제의 부탁을 받았다면 카인이 왈가왈부할 사안이 아니었다.
“그보다 나는 세라 여왕과 네가 약혼한 사이였다는 게 더 마음에 걸리는구나. 처음 만났을 때 그런 말은 없었을 텐데?”
“크흠.”
끊이지 않은 의혹 앞에서 카인은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이 많았지만, 하지 않았다.
* * *
벼락이 치는 밤.
사내는 침대맡에 섰다.
한 번씩 폭음이 터질 때마다 방 안에 빛이 번쩍였지만,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침대에서 자고 있는 이가 깨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군터 베리타.’
17년간 제국을 다스린 황제.
하지만 그러한 칭호도 사내에게는 무의미할 뿐이었다. 그가 군터에게 바라는 건 권력이 아닌 혼돈이었다.
무대는 이미 마련되었다.
정상이 무너지면 그 아래는 도미노처럼 와르르 쓰러지리라.
구태여 베리타 제국 전체를, 아니 대륙 전체를 겨낭할 필요도 없었다.
“권불십년.”
쌓는 건 한세월이지만 허물어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군터의 이마에 검지를 가져다댄 사내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이걸로 파국이 시작되었다.
* * *
이른 새벽부터 봄비가 추적추적하게 내렸다.
그렇기 때문일까. 2일 차 대륙 회의는 개회되기 전부터 어딘가 모르게 어수선했다.
오고 가는 이들도 어제보다 많아진 느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자리에서 일어난 카인은 조금 다른 지시를 들어야 했다.
“귀빈 여러분은 회의장에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아직 시간이 남았을 텐데?”
소리치며 지나가는 집사를 잡은 카인이 그리 묻자 천편일률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한시라도 빨리 회의장에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황태자 저하께서 특별히 지시한 사항입니다.”
직설적이다 못해 노골적인 명령이었다. 하지만 마냥 무시할 수만도 없는 게 집사는 기사들까지 대동한 채 움직이고 있었다.
불미스러운 사건이 터진 게 틀림없었다.
뒤늦게 나온 세라가 정황을 물었다.
“대체 이게 무슨 소란이지?”
“일단 회의장에 가 봐야 알 것 같습니다.”
회의장에는 안 온 사람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이미 많은 중진들이 모여 속닥거리고 있었다. 그들 또한 황궁에 흐르는 불길한 기운을 읽은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퉁명스러운 표정이 없어지는 건 아니었지만.
어찌 보면 당연했다.
일어나자마자 가축처럼 회의장에 끌려와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뒤이어 들어온 자비얀의 한마디에 중진들의 불만은 눈처럼 사르르 녹아 없어졌다.
“지난밤, 아바마마가 중독되었다. 다행히 마리에트 성녀가 황궁에 있어 급한 불은 끌 수 있었지만, 언제 상황이 바뀔지 모른다.”
그야말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가 따로 없었다.
하룻밤 사이에 세상이 뒤바뀐다는 건 이런 상황을 일컫는 말일 터.
“그렇다면…….”
“대륙 회의에 참석한 자네들, 전부 용의자라는 거지. 혐의가 풀릴 때까지 협조 부탁하지. 불편함은 없을 거다. 시종과 시녀를 배치해 줄 테니까.”
아무리 의심된다고 해도 동의도 없이 억류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폭거였다.
하지만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상황이 워낙 급박하게 돌아갈뿐더러, 그 대상이 제국의 황제였기 때문이다.
가벼운 마음으로도 거론할 수 없는 존재.
더구나 이 자리에 모인 중진들이 최근 군터와 알현한 건 사실이었다.
“혹여라도 수상쩍은 행동은 보이지 마라. 지금 무척이나 기분이 좋지 않으니까. 범인도 아닌데 척살당하면 억울하지 않겠나.”
싸늘한 한기가 장내에 맴돌았다.
불안감을 떨치지 못한 세라가 카인의 손을 꽉 잡았다.
“공작.”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카인은 연신 주위를 둘러보며 세라를 타일렀다.
예상치 못한 사건이 터지는 게 인생사 아니던가. 느닷없이 황제에게 변고가 생겼지만, 그게 레서 왕국에까지 피해를 입힐 리 없었다.
‘아니, 잠깐.’
순간, 머릿속에 잊고 있었던 사건 하나가 스쳐 지나간다. 황제가 독살되어 제국 전체가 황폐화된 사건.
‘제국 대란.’
회귀하기 전에는 한참 뒤에야 벌어졌던 대참사였다. 하지만 그 재앙이 예정보다 앞당겨졌다면 지금 이 상황도 이해할 수 있었다.
평상시에 독살했다면 별다른 효용을 거두지 못했을 테지만, 이 자리에는 용의자로 지목할 수 있는 이가 몇 명이나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하나같이 치명적인 인사밖에 없었다.
일석이조.
범인을 인파에 숨겨 둘 수 있을뿐더러, 너희들은 결코 규합할 수 없다는 메시지까지 던질 수 있었다.
조직의 목적이야 뻔했다.
대륙 회의의 와해.
더 나아가 불신까지 조장할 수 있었다.
제국 대란의 진범이었던 나르달이라면 무언가 알고 있겠지만, 그는 이미 타나에 의해 불귀의 객이 된 지 오래였다.
‘그래도 그렇지. 나르달 외에도 황궁에 귀신이 있었다고? 그것도 이렇게 재빠르게 행동에 옮길 정도로 가까운 곳에?’
다시금 조직의 저력에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불행 중 다행인 건 군터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
자신이 제때 손을 쓴다면 치료할 수도 있었다.
회귀하기 전에도 군터는 며칠 동안 중독된 채로 버틴 전적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여기에서 조직이 그런 것 같다고 말하는 건 하책 중의 하책이었다. 자신이 치료할 수 있는 독이라고 호언장담하는 것도 마찬가지.
모든 건 과거에 겪었던 경험에 기반한 것뿐이라 객관적인 증거라 할 만한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어떻게 타개해야 하나.
카인이 고심하는 순간, 그의 귓가에 서릿발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인 슈발체베인.”
고개를 돌리니 자비얀이 자그마한 유리병을 들어 올렸다.
“자네의 객실에서 독이 담겼던 병이 발견되었다는군.”
화들짝 놀란 세라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여장부인 그녀라도 이런 모함에는 적응하기 쉽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2급 살귀로 살았던 카인에게는 일상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도리어 반가울 지경.
더욱이 그라고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허술했기 때문이다.
“그 병이 제 방에서 나왔다는 것 자체가 제가 범인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제가 진범이라면 그렇게 소홀히 처리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런 변명을 하기 위해서 일부러 남겨 뒀을 가능성도 있을 텐데?”
“무엇보다 동기가 없지 않습니까.”
“그거야 지금부터 찾아보면 되고.”
자비얀이 나른하게 대답하자 카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돌연 탄성을 터트렸다. 숙소에 남아 있던 네 사람이 떠오른 것이다.
“잠깐, 그러면 제 일행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투옥되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정말 결백하다면 풀어줄 테니까.”
냉정하기 그지없는 말에 카인은 주먹을 말아쥐었다. 올라오는 분기를 가까스로 억누른 그는 어금니 사이로 소리를 뱉어냈다.
“섣부른 집행입니다. 아직 인과 관계가 명확해진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네가 정하는 게 아니라 내가 정하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