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vel 2 assassin wants revenge RAW novel - Chapter 340
340화 궁지 1
* * *
본디 자기애로 똘똘 뭉친 아휀이었다. 이번 위기를 통해 자신을 알리고 싶다는 마음을 가졌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일선에서 물러나 있었다니.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임에도, 아휀은 도리어 만족한다는 표정이었다.
무슨 바람이 분 건지 알 수 없었다.
부자연스러운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타나 님이 돌아가셨는데도 슬퍼하지 않는군.”
“그런 건 비생산적이니까요. 그리고 사부님도 제가 과거에 얽매어 있길 바라지 않으실 겁니다.”
회귀 전 라프만이 죽었을 때도 묵묵히 가주직에 올랐다 했던가. 그 예를 반추해 보면 저러한 반응도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석연치 않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카인의 상념은 그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아휀이 먼저 말을 걸어왔던 탓이다.
“이번에 못다 한 승부는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죠. 더 그럴듯한 무대가 준비되어 있을 겁니다.”
“내 허락도 맡지 않고?”
“글쎄요. 그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시기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만.”
꺼림칙한 말을 남긴 채 멀어진다.
아휀의 등을 가만히 쳐다보던 카인이 시선을 떼며, 짧게 혀를 찼다.
그렇게 소소한 만남이 이어졌다. 성황교 측에서는 마리에트가 대표로 나서서 감사의 인사를 전했고, 맥시모스가에서는 제네갈이 나왔다.
신변잡기에 가까운 대화뿐이라 그들에게서 실속 있는 정보는 얻지 못했지만 괴성, 그녀만은 달랐다.
어딘가 모르게 뚱한 표정으로 다가와 무거운 주제를 던진 것이다.
몇 마디 나눠 보지도 않고 카인은 돌아가는 상황을 유추할 수 있었다.
단 하나.
세트가 죽었다 살아난 건 예상 밖이었다.
“녀석의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 반응 속도가 느려졌다고?”
“방심도 착각도 하지 않았어. 하지만 녀석은 살아서 도망쳤어.”
나노 마테리얼을 다룰 때부터 세트에게 심상치 않은 내력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의 경지가 생각보다 더 높다고 해도 놀라울 건 없었다.
“그러고 보면 세트, 그 녀석은 참사 이후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지.”
워낙 많은 일이 동시에 터진지라 그의 부재를 신경 쓰는 이는 드물었다. 그 전에 후딘이 나서서 세트를 변호한 것도 컸다.
“조심해. 숨겨 둔 수가 있는 것 같으니까.”
“알았다, 유의하지.”
괴성과 헤어진 카인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볼일도 끝마쳤으니, 이제 슈발체베인가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 * *
게일 왕국의 남쪽.
맥시모스 공작령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오웬델 자작령, 그곳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평범한 시골 영지였다.
딱 하나.
영지 한구석에 있는 호수만큼은 주변에서 찾아올 정도로 깨끗한 정경을 자랑했다.
산새들이 노닐고, 사슴들이 다가와 이따금씩 목을 축이는 곳. 여름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그 호수에 이변이 일어났다. 수면 위로 자그마한 그림자가 떠오른 것이다.
비단처럼 고운 분홍색 머리카락에 등이 훤하게 드러난 원피스.
그녀는 세간에 죽었다고 알려진 무신, 타나였다.
“콜록, 콜록.”
폐부에 가득 찬 물을 내뱉은 타나는 금방에라도 끊어질 것 같은 숨을 정돈했다.
지옥의 항구 밑바닥에는 물이 고여 있었다. 그리고 그 물은 천만다행이게도 지하 수로로 연결되어 있었다.
타나는 몽롱한 의식 속에서도 활로를 찾기 위해 그곳으로 몸을 던졌다.
그 결과가 바로 이곳.
물살이 강한 험지를 뚫고 와서 그런지 이곳저곳 부딪친 상처가 가득했지만, 남는 장사였다.
솔직히 어떻게 넘어온 건지 알 수 없었다. 쥐가 파먹은 것처럼 군데군데 부실한 기억이 붙었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할 뿐.
뼛속까지 스미는 한기에 타나는 본능적으로 헤엄쳤다.
“비러머그으을.”
온몸이 만신창이인지라, 뭍으로 기어가는데도 사력을 다해야만 했다.
그렇게 호흡을 가다듬고, 어느 정도 체력이 회복되고 나서야 그녀는 자신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엉망이구나.’
일단 극독을 없애는 것 자체는 성공했다. 하지만 그 때문에 경맥이 메말랐다. 두 번 다시 회복하지 못할 정도로. 그에 따라 근맥 또한 약해졌다. 수십 년의 수련이 무로 돌아간 셈.
무인으로서는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조막만 한 손이 눈에 들어온 건 그때. 고개를 갸웃거린 타나는 호수에 자신의 얼굴을 비추었다.
‘시발.’
이제 막 소녀티를 벗기 시작한 아이가 그곳에 있었다.
빈약하기 짝이 없는 육신은 아마도 극독의 부작용인 듯싶었다.
여기까지 내몬 장본인이 돌연 떠오르자 타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백으로 치장한 기사―
“아휀.”
그에게는 모든 걸 아끼지 않고 투자했다. 말만 제자지 사실상 양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재능만 보고 받아들인 게 큰 실수였다. 그의 마음속은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을 만큼 공허했고, 사이했다. 은혜에 배신으로 화답한다는, 금수도 하지 않을 짓을 저지른 것이다.
“찢어 죽여 주마.”
물론 그런 마음과 다르게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여기에 있는 건 무신 타나가 아니라 소녀 타나였다. 나뭇가지를 드는 것도 버거워하는.
무작정 테레나브스가로 간다고 해서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정체를 밝힌 순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고 베리타 황실에 도움을 청하는 건 언어도단.
그곳 또한 조직의 눈이 닿지 않았을 리 없었다.
“진퇴양난이구나.”
단번에 보금자리가 사라졌다. 그 사실은 타나에게 힘을 잃은 것만큼이나 큰 상실감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마냥 주저앉아 있을 수만도 없는 법.
자리에서 일어난 타나는 북쪽을 쳐다보았다.
‘슈발체베인가.’
믿을 곳은 그곳밖에 없었다.
다행히 장신구를 걸치고 다니는 습관 덕분에 금과 은붙이는 충분했다. 노잣돈으로는 넉넉할 터.
거기까지 가는 여정이 문제였다. 남부에서 북부까지. 대륙을 종단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기나긴 행군이 될 것 같았다.
* * *
엔지니어의 본거지, 은자의 비경에 도착한 카르비나는 온기 하나 없는 복도를 걸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소속된 인원에 비해 규모가 크기에 가끔씩 이러한 향취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저편에서 익숙한 거체가 보였다.
“바울.”
“카르비나인가. 다행히 약속 시간엔 늦지 않았군.”
“십좌전에 조직이 나타났다고 들었어요.”
“나타났다는 말 한마디로 끝날 수준이 아니다. 녀석들 탓에 맥시모스 공작령이 완전히 쑥대밭이 되었으니까.”
정작 그 영지의 주인인 후딘은 타나를 제치고 정점에 올랐다는 사실에 희희낙락하고 있지만. 제 스승의 얼굴을 떠올린 바울이 쓰게 웃었다.
“아쉽게도 십좌는 되지 못했네요. 드디어 엔지니어도 전력이 올라가나 싶었는데요.”
“닥쳐라.”
“그나저나 왜 저를 호출한 건가요? 왕성해지는 조직의 활동에 발맞춰 새로운 방침이라도 정할 셈인가요?”
“내가 부른 것도 아니니 묻지 말고, 따라오기나 해라.”
평소에도 시큰둥한 기색이 역력한 바울이었으나, 오늘따라 유별났다.
대놓고 불만을 토로할 수도 없는 터라, 카르비나는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얼마나 걸어가지 않아, 바울이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보라는 듯 고갯짓했다.
‘회복실?’
이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장소였다.
안으로 들어가니, 마침 유선형 캡슐에서 세트가 나오는 게 보였다. 콜몬도가 건넨 타월로 하반신을 가린 세트가 의자에 앉았다.
“누님, 오랜만이네요.”
“그래. 그런데 왜 회복실에 있어? 다치기라도 한 거야?”
“뭐, 조금요. 누님도 알다시피 제가 십좌전에 참가했잖아요?”
“아, 그랬지. 축하해. 철성이라고 불린다면서? 롤랑 극단까지 소문이 자자해.”
“자신 있게 나섰으니 그런 칭호라도 얻어야죠. 아니면 다른 분들 얼굴 보기가 부끄럽잖아요?”
엔지니어의 수장은 엄연히 세트였다. 하지만 그에게 존대하거나, 고개를 조아리는 이는 드물었다. 세트가 수장이 되자마자 내린 첫 번째 명령이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날 부른 이유는 뭐야? 훔쳐야 할 물건이라도 발견됐어?”
“그런 것보다는 재미있는 말을 들어서요. 이걸 확인해 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내심 고민했는데 어쩔 수 없더라고요. 그렇지 않아도 요즘 바깥이 흉흉하잖아요.”
“대체 뭘 확인하고 싶은 건데?”
탁.
바울이 하나뿐인 출입구를 막아서자 카르비나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눈치가 없어도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누님이 네메시아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활동했다는 건 알고 있어요. 아, 이건 부정하지 마세요. 이야기가 진행이 안 될뿐더러 이미 조사가 끝났으니까요.”
주절거리는 세트의 말에 카르비나는 반사적으로 바울을 쳐다보았다. 이건 그가 먼저 꺼낸 이야기였다. 그것도 루드니아 공작령에서.
그녀는 떨리는 손을 애써 가리며 입을 열었다.
“아무리 작다고 해도 왕실의 금고를 터는 일이야. 현지인과의 협력은 필수적이었어. 설마 내 판단까지 걸고넘어질 셈이야?”
“아, 그렇군요. 그러면 기신을 처리한 건요? 누님이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사이즈가 아니었는데 말이죠. 그것도 현지인이 발 벗고 도와준 건가요?”
그 말에 카르비나는 저도 모르게 숨이 턱 막혔다.
사실 숨길 것도 없이 카인이 개입했다고 말하면 되었다. 하지만 그러면 그가 리벨리온의 수장이라는 게 밝혀질 수밖에 없었다.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상황.
카르비나의 얼굴을 쳐다본 세트가 유쾌하게 웃었다.
“아, 힘겹게 말하지 않아도 돼요. 누구인지 알 것 같거든요.”
“누구인지 알 것 같다고?”
“카인 슈발체베인.”
무심하게 그 이름을 내뱉은 세트가 첨언했다.
“그의 정부로 지낸다면서요?”
“그건 그쪽에서 일방적으로 엉겨 붙어서 생긴 뜬소문에 불과해.”
카르비나가 서둘러 항변했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이야말로 악수 중의 악수였다.
“그러니까요. 이제 무신이나 되는, 아니 그때부터 무신의 자질을 갖추었을 분이 누님을 가까이한다고요? 네메시아에서 만나자마자? 이건 너무나 작위적인 연출이 아닌가요?”
피식 웃은 세트가 깍지를 꼈다.
“저는 우연을 믿지 않아요. 아마 전부터 긴밀한 관계를 형성했을 테죠.”
“그건 다 내가 설명할 수 있어.”
가슴에 손을 얹은 카르비나가 입을 열려고 했지만, 세트는 어림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저번에 가지고 왔던 정보의 출처도 미심쩍어요. 누님은 쥬시에게서 얻었다고 했지만, 그렇게 보기엔 너무나 자세했거든요.”
그렇지 않아도 양질의 정보라 의심이 가던 참이었다. 그 당시엔 연결 고리가 없어 넘어갔지만, 카인이 무신이 된 순간 모든 의문이 풀렸다.
“아마도 정보를 준 것도 카인일 테죠.”
카르비나를 이용해 엔지니어의 움직임을 조종하려고 한 게 틀림없었다. 의도는 알 수 없지만, 오토마타와 충돌시키려 했다는 건 명백한 일.
“인정하세요, 누님. 그가 반푼이가 아니라는 건 이제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