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vel 2 assassin wants revenge RAW novel - Chapter 362
362화 강탈 1
* * *
알기도 싫은 기억과 정보가 범람한다.
분명 자신이 겪은 일인데도 생경하기 그지없는 경험이 전신을 휘감았다.
발끝에서부터 진창에 처박히는 감각.
있는 힘껏 발악했지만, 소용없었다. 머릿속을 헤집는 건 다름아닌 자기 자신이었으니까.
그간 꾸었던 악몽은 자의식을 삼키기 위한 전초전. 여타 꿈들과 다르다는 걸 알면서도 방치한 결과,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앞으로 고꾸라진 아휀은 발작을 일으켰으나, 그의 내면은 이미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장악한 상태였다.
여태까지 타인의 침범을 허락하지 않았던 머릿속이 조금씩 물들어져 갔다.
아휀에서 백기사로, 아휀에서 검성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간헐적으로 떨리던 몸이 멈췄다.
세상 밖으로 나온 ‘아휀’이 제일 처음 인지한 건 현실과의 괴리였다.
‘8개월 정도 오차가 생긴 건가.’
의식의 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아휀이 선택한 매개는 꿈. 파편화된 정보를 어렸을 때부터 차근차근 전달해 성년식쯤 터트릴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처음부터 어그러졌다.
심층 의식에 파묻혀 본능적인 각인만 새긴 게 전부였던 것이다.
의 결함을 의식한 도박수는 최악의 형태로 나타났다.
카인을 복제하는 데 조직의 모든 역량을 집중한 결과, 이러한 자구책을 강구할 수밖에 없었다.
고무적인 게 하나 있다면 검성이라는 이명을 이른 나이에 선점한 것.
이는 아휀조차도 예상치 못한 쾌거였다.
하지만 기쁨은 잠시뿐이었다.
카인의 얼굴을 떠올리자마자 분기가 솟구쳤으니까.
“감히!”
2급 살귀에 불과했던 버러지가 지금은 무신이 되어 대륙의 정상에 우뚝 섰다. 생각하면 할수록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자리는 본디 아휀의 것이어야 했다.
도출되는 결론은 하나.
그때 함께 돌아온 게 틀림없었다.
짐작이 가는 부분이 너무나 많아 콕 집어 말하기 어려웠다.
일찍이 ‘그녀’는 이에 대해 경고한 바 있었다.
‘나비 효과라고 했던가.’
나비의 날개짓도 폭풍을 일으킬 수 있는 시발점이 될 수 있다고.
인과 관계의 무서움을 잘 알려 주는 말이었으나, 그때 당시의 아휀은 믿지 않았다. 아니, 일부로 무시했다. 논리적인 비약이라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니, 그녀의 말이 옳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힘을 되찾는 게 우선이었다.
아휀은 자신이 얻었던 기연을 쭉 훑어보았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독식했던 기연을.
격차를 줄이는 건 시간문제였다.
* * *
“엔지니어가 그렇게 당할 줄이야.”
한탄하듯이 중얼거린 오메가가 탁상을 두드렸다. 남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자신들 조직 또한 천 년 가까이 유지되던 형세가 조금씩 기울기 시작했다. 그것도 고작 몇 달 만에.
원흉이야 뻔했다.
‘카인 슈발체베인.’
그가 엠이라는 건 라프만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10여 년 동안 조직의 눈을 피해 리벨리온이라는 걸출한 세력을 키운 장본인.
여러모로 특출난 인물인 건 틀림없었다. 무엇보다 소름돋는 건 그 성장세였다. 아무리 공작이라고는 하나, 스물도 되지 않은 그만한 결과물을 낸 것이다.
세기의 천재라도 감히 이룰 수 없는 업적이었다.
가만히 두면 엔지니어의 자리를 대신할 수도 있었다.
‘아니, 이미 되었나.’
생각해 보면 카인은 두각을 드러낼 때부터 조직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연유를 알 수 없지만, 그가 품고 있는 원한은 도저히 타협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안타깝지만 공생은 불가능했다.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
오메가를 쳐다본 아휀이 고갯짓했다. 그의 옆에는 라프만이 서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왜 부른 겁니까?”
“하나 부탁할 게 있어서 말이야.”
“부탁?”
“너라면 흥미가 동할 텐데? 카인 슈발체베인에 대한 이야기니까.”
카인, 그 단어에 반응한 아휀이 신경을 곤두세웠다. 요 근래 그는 전성기의 무위를 되찾기 위해 돌아다녔다.
어느 왕국이 잃어버린 보검, 깊은 지하에서 동면 중인 전설적인 마물의 내단, 천재적인 대장장이가 제작한 보의.
먼 훗날에나 알려지는 것들뿐이어서 경쟁자도 없었다. 하지만 단 하나, 아휀이 손에 넣지 못한 게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그녀’.
사실, 테레나브스가를 나와 아휀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그녀가 잠들어 있던 신의 무덤이었다. 하지만 그곳에 그녀는 없었다.
아무리 미래가 바뀌었다고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그곳에 있다는 걸 아는 건 아휀 그뿐이었으니까.
뇌리에 한 인물이 떠오른 건 그때.
‘그러고 보면 포다얀 백작령에서 카인을 만났지.’
함께 대리전까지 치른 기억이 있었다. 그때 당시엔 외유라 생각했지만,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그 자리에 나타난 게 분명했다.
확실했다.
카인은 그녀를 발견했고, 그녀는 카인을 따라갔다.
‘젠장.’
그녀가 얼마나 유능한 신의 인형인지는 익히 알고 있었다. 어쩌면 헤브니아의 근간마저 바꿀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 그녀가 카인의 손에 있다는 생각이 드니, 절로 조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오메가의 입에서 반가운 소리가 나온 건 그때.
“그는 지극히 위험한 인물이야. 가만히 두면 머지않아 조직도 엔지니어의 수순을 밟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그 전에 친다는 건가.”
라프만이 무심하게 대답하자 오메가가 맞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그리고 그와 함께 있을 거라 예상되는 아리아를 회수하는 거지. 그녀가 지닌 재능도 재능이지만, 어떻게 조직의 족쇄에서 풀려났는지 알아야겠어.”
카인에게 어떠한 수단이 있다면 미리 파악해야 했다. 우연의 일치로 기적이 일어났을 수도 있지만, 방심하고 방치하면 중요한 순간에 초유의 사태로 번질 수도 있었다.
라프만이 어깨를 으쓱였다.
“긴급하게 호출하길래 무슨 일인가 했더니 시답잖은 작당 모의였나. 나는 이 일에서 빠지겠다.”
“왜? 제자일 수도 있는 녀석을 치라니까 주저되는 거야?”
“웃기지도 않는 소리군.”
라프만이 코웃음쳤다.
비록 이름을 버렸지만, 그라고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않는 건 아니었다. 물론 애틋한 감정이 향하는 곳은 카인이 아니라 슈발체베인가 그 자체였다.
“어디까지나 우리 둘은 협력 관계지 일방적인 관계는 아닐 텐데? 거기에 내 손으로 내 가문을 부수라는 건가? 내가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이유가 있나?”
라프만에게 있어 슈발체베인가는 언젠가 돌아갈 곳이었다. 더구나 넓은 의미에서 그곳은 딸인 세라가 통치하는 장소였다. 아비 된 자로서 난장을 피울 수만도 없는 노릇.
“일리 있는 말이지만…….”
갑자기 오메가의 말끝이 흐려진다. 그가 손가락으로 입술을 훑자 아휀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극단적인 결정을 내릴 때마다 나오는 제스처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메가가 말을 이으면 라프만의 참전은 기정사실이 될 터.
홀로 슈발체베인가에 당도해야 하는 아휀에게는 치명적인 혹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황급히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러면 제게 맡겨 주시지요. 카인 그와는 여러 번 겨룬 전적이 있습니다.”
“부족해.”
카인이 엔지니어를 쓰러뜨리며 보여 준 무위는 오메가의 간담을 서늘케 하기에 충분했다. 신중해지는 건 당연지사.
물론 그건 그의 사정일 뿐이었다.
아휀의 입장에서는 곧 따라잡을 도달점에 불과했다. 입증할 수 없다는 게 곤혹스러울 따름.
그래서 그는 절충안을 내놓았다.
“그만큼 지원해 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인원이 줄어들었는데 여기에서 더?”
“당신의 곁에 항상 붙어 있는 세 사람이 나온다면 사정은 완전히 달라질 텐데요.”
순간, 오메가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사실을 아는 이는 조직 내에서도 극소수였다.
“누구에게 들었지?”
“들은 게 아니라 알아낸 겁니다. 제 별호를 잊은 건 아니실 텐데요?”
하긴 십좌라면 모르는 게 더 이상한 일. 의심의 시선을 거둔 오메가가 말을 이었다.
“그래, 그들이라면 적어도 대사를 그르치는 일은 없겠지.”
“감사합니다.”
가볍계 목례한 아휀이 라프만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는 자신의 성에 있는 게 무엇인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긴 알고 있다면 이리 무관심 일변도일 리 없었다.
조직의 화살이 슈발체베인가에 겨눠졌을 때부터 아휀의 머릿속에는 하나의 신기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
상황과 조건만 갖춰진다면 시간마저 초월하는 신기 중의 신기.
그것만 있다면 실타래처럼 얽히고설킨 현실을 푸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번 생은 글렀으니―
‘다시 시작한다.’
* * *
“돈이다!”
금화 더미를 하늘 높이 던진 카인이 밝게 웃었다. 오랜 시간 동안 준비했던 테마 파크는 그의 예상대로, 아니 예상 이상으로 성행했다.
눈과 온천.
시대를 막론하고 두 개념은 실패하려야 할 수 없는 사업 아이템이었다. 더구나 시기적으로도 적절했다.
헤브니아는 이제 막 8월로 접어들었다. 대륙 곳곳에서 이례적인 폭염이 이어지는데도, 슈발체베인 공작령만큼은 겨울이었다.
더위를 피해 방문한 피서객들의 발걸음은 끊일 줄 몰랐다.
새로운 경험을 하느라 주머니가 헐거워지는 건 덤.
금화를 갈퀴로 쓸어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더구나 다음 주엔 카르비나의 특별 공연까지 예정되어 있었다. 더 올라가면 올라갔지 내려갈 상황이 아니었다. 관리 인력이 부족해 리벨리온의 인원까지도 차출될 정도이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도 마음 놓고 웃을 수 없는 인물이 한 명 있었다.
그건 바로 타나.
어느 순간, 그녀는 시름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때로는 의미없이 바깥을 쳐다보는가 하면, 때로는 한숨 소리로 온 방을 채우기까지 했다.
누가 보아도 고민이 많은 소녀의 모습이었다. 이유야 뻔했기에 섣불리 다가갈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가 사흘째 방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피아의 말에 카인은 방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었다.
똑, 똑.
“누구냐.”
“저, 카인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래, 들어오너라.”
조심스럽게 방 안에 발을 들인다. 창가 근처에 타나가 앉아 있는게 보였다. 두문불출한 것치고는 깔끔한 행색이었다.
어딘가 모르게 불만스러운 표정만 뺀다면.
“기어코 네가 왔구나.”
“고민이 많다 들었습니다.”
“별거 아니다, 단지 내 문제일뿐.”
쓰게 웃은 타나가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자신에게 필요한 게 육신적인 성장보다 정신적인 도약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수련 장소를 연무장에서 방으로 옮겼다.
어찌 보면 한 발자국 나아갔다고도 볼 수 있었다.
정확한 판단을 내리고, 그에 대한 대책을 강구한 거였으니까. 하지만 침식도 잊은 채 명상에 들어간 결과는 시원찮았다.
의욕을 잃은 건 그 때문.
내일 아침에 얻을 수도 있고, 수십 년이 지나서도 얻지 못할 수도 있는 게 깨달음이라지만 성과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만약에 말이다.”
“네, 만약에.”
“내가 힘을 되찾지 못해도 괜찮겠느냐?”
힘없는 물음에 카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래를 경험한 그이기에 그 질문은 성사될 수 없었다. 타나가 세 번째 한계를 돌파하는 건 예정된 수순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