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vel 2 assassin wants revenge RAW novel - Chapter 369
369화 대승 1
* * *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죽는 것.
그게 아휀이 가장 무서워하는 종류의 죽음이라는 걸 카인은 알고 있었다. 세상 혼자 살 것 같은 재능의 소유자지만 그도 결국 외톨이였다.
고아인 아휀이 남길 수 있는 건 그 이름 두 글자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허용되지 않는다면?
“내 여자가 되었는데 거짓말을 할 리 있나.”
“당신의 여자라니요?”
“알면서 묻지 마라.”
“……그럴 리 없습니다.”
“현실을 부정하는 건가.”
아휀이 타나를 배신한 동기는 분노와 실망. 바꿔 말하자면 그건 기대했다는 뜻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바람에 응해 주기를.
조금이지만, 그 감정이 각별했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거 어쩌지. 이미 타나 님은 내 차지가 되었는걸. 누구누구 씨 덕분에 말이야.”
“카인 슈발체베이인!”
“닥쳐라.”
어떠한 충격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아휀이 발작을 일으켰다. 하지만 소용없는 발악이었다. 전세는 역전되었으니까.
시뻘겋게 달아오른 아휀의 눈동자와 마주한 카인이 송곳니를 드러냈다.
“후세에도, 내세에도 네가 있을 곳은 없다. 너는 추악한 이단자로 기록되어, 배은망덕한 녀석으로 기억될 테니까.”
넘실거리는 마력을 검지에 담은 카인이 앞으로 내밀었다.
“잘 가라, 멀리 안 나간다.”
손가락 끝에서 오색찬란한 빛이 터져 나왔다. 아이슬로우의 의념마저 뛰어넘는 극렬한 일격은 모든 걸 집어삼켰다.
푸욱.
미간이 꿰뚫린 아휀은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남긴 채.
길고 긴 악연에 종지부를 찍은 순간이었다.
* * *
니켈은 조금씩 타나를 압박했다. 올가미에 걸린 사슴의 반응을 살피듯이. 그녀는 퍽 볼만한 사냥감이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을 감상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학적인 욕구가 충족되었던 탓이다.
다리를 걸어 타나를 넘어뜨린 니켈이 낮게 웃었다.
“이 정도 장난도 받아치지 못하다니, 무신이라는 이름이 울지 않겠나. 아, 그러고 보니 그 이름은 슈발체베인 공작이 가져갔었군. 사과하지.”
벽을 짚고 일어선 타나가 턱이 부러져라 어금니를 깨물었다. 공방을 나눈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전신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부러진 갈비뼈는 폐부를 누르고 있었고, 어긋난 발목은 중요한 순간마다 한 박자 느리게 반응했다.
“정말 볼품없는 꼬락서니군. 대륙에서 가장 존귀했던 여성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후후, 그래. 이렇게 당한 건 나도 처음이구나.”
타나가 쓰게 웃었다.
이마에서는 연신 핏물이 떨어져내려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무의 세계에 진입했을 때부터 타나는 강자였다. 그래서 한때는 싸우는 게 제일 즐겁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약자의 입장에서 마주하니 그게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하나도 즐겁지 않았다.
치욕스럽고, 수치스러울 뿐.
그제야 타나는 자신의 본심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녀가 즐거웠던 건 싸우는 게 아닌―
‘거기에서 얻을 수 있는 승리였나.’
항상 이기는 입장이었기에 싸움을 만끽할 수 있는 거였다. 약자의 입장이 되어보지 못한 이의 자만.
순간, 카인이 어렸을 때 한 말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천재는 운 좋게 금화를 주운 행운아에 불과합니다.’
그 말이 맞다. 천 번 옳다.
가지고 태어난 재능이 남들보다 월등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행운아가 제 행운에 겨워 유흥을 즐겼을 뿐이었다.
무신이라는 자리는 자신에게 과분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질 수는 없지 않겠느냐.”
주먹을 움켜쥔 타나가 자세를 바로잡자 니켈이 감탄성을 터트렸다.
“아직도 맞설 힘이 남아 있었나. 슬슬 쓰러지지 그러나. 보고 있는 쪽도 지치거든.”
눈 깜빡할 사이에 접근한 니켈이 손을 내뻗는다. 벌겋게 물든 손바닥에 닿은 타나가 침음을 삼켰다. 공격을 허용하기가 무섭게 수포가 피어올랐던 것이다.
그에 호응하듯이 다리 또한 덜덜 떨려왔다. 하지만 타나는 그 경련마저도 축으로 삼아 니켈을 걷어찼다.
품새는 엉망이었지만, 그 끝에 실린 힘만큼은 진짜였다.
쾅!
“고집이 세군.”
가느다란 발목을 잡은 니켈은 그대로 타나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크헉.”
허리가 으스러질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타나는 정신을 잃지 않고, 현실과 마주했다.
재능이란 덧없는 것.
그 안에 자신의 것이라 부를만한 건 없었다. 그동안 타나라는 인간은 그 안에 가려져 있었던 것이다.
일방적으로 당하는 건 약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한 번도 이런 상황에 직면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더 올라갈 곳이 없다 한탄할 게 아니라, 외면했던 아래를 내려다보아야 했다.
양쪽 다 아우르지 못하면 반푼이일 뿐이니까.
‘세상에서 가장 강한 온실 속의 화초.’
밑바닥까지 떨어지고 나서야 타나는 제 본질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인지할 수 있었다.
범인만이 볼 수 있는 시점을, 천재이기에 이해할 수 없었던 영역을.
여기에 서 있는 건 무신 타나가 아닌 싸워서 이기고 싶은 한 명의 무인이었다.
돌파해야 할 건 연약한 자신의 한계.
망가진 몸을 채찍질해 일어난 타나는 튕겨져 나가듯이 쇄도했다.
더 이상 꺾이지 않는다.
더 이상 포기하지 않는다.
타나는 제 몸을 불사를 각오까지 다졌다. 그 강한 의지에 주위에 떠도는 마소가 공명하기 시작했다.
성별을 초월하고, 나이를 초월해, 종국에는 무신이었던 자신을 초월한다.
그것이 세 번째 한계 돌파.
결코 쇠락하지 않고, 도퇴되지 않는 힘이 전신에 새겨졌다. 메마른 경맥에 활력이 감돌자, 부풀어올랐던 수포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망가진 육신은 시계를 거꾸로 되돌린 것처럼 원래대로 돌아갔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전능감에 타나는 전율했다.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수십 년은 잊고 지낸 것 같았다.
이변을 감지한 니켈이 서둘러 공격해 들어왔지만, 무리였다. 맞부딪치자마자 팔목이 있을 수 없는 방향으로 꺾인 것이다.
“뭣……!”
“무얼 그리 놀라느냐. 내게 덤비려면 그만한 각오는 했어야지.”
타나가 손을 휘젓자 일대에 광풍이 불었다.
“꿇거라.”
나지막이 울려 퍼진 한마디에 니켈은 납작 엎드렸다. 아니,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쿠우웅.
주위에는 지면이 가라앉을 정도로 강력한 중력이 작용하고 있었다. 항거하는 것 자체를 불허하는 압도적인 힘.
무위를 되찾은 타나가 오연하게 니켈을 주시했다.
“네가 알고 있는 모든 걸 실토해 보거라.”
* * *
“잔재주가 많군.”
붉게 달아오른 팔뚝을 쳐다본 데미안이 짧게 혀를 찼다.
근접전에서 비로소 진가를 발휘하는 그이기에 필연적으로 거리를 좁힐 수밖에 없었다.
팔과 팔이 맞닿는 건 당연지사.
어찌해 볼 틈도 없이 중독되었다.
지금이야 넘쳐나는 마력으로 억누르고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불리해질 게 분명했다.
더구나 니켈, 본인의 경지 또한 얕잡아볼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 어느 쪽으로나 쉬이 상대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
수확제를 터트리면 형세를 역전시킬 수 있지만, 문제는 그에 충분한 충격이 누적되지 않았다는 거다.
섣부르게 행동하다 타초경사의 우를 범할 수 있었다.
“엄호하겠습니다.”
사각지대에서 불쑥 튀어나온 아리아가 단검을 내던졌다. 팽팽하게 당겨진 줄을 끊을 수 있는 유일한 비수.
적재적소에 파고드는 그녀의 원호에 힘입어 데미안은 필살로를 내질렀다.
쿵!
니켈은 밀려나면서도 데미안의 팔을 더듬는 걸 잊지 않았다.
불쾌한 감각이 지나가는 궤적을 따라 수포가 일어나자 데미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앞으로 몇 분.
이대로 패배하는 건 용납할 수 없는 바, 이르더라도 오의를 펼치기로 결심한 데미안이 강하게 진각을 밟았다.
그렇게 주먹을 내지르려던 찰나, 하늘에서 무언가가 뚝 떨어졌다.
화들짝 놀란 니켈이 거리를 벌리자 데미안 또한 기세를 추스르고 돌아가는 정황을 살폈다.
거리에 널부러진 건 익숙한 외견의 사내였다.
잊을 리 없었다.
방금 전까지도 주먹을 주고 받았던 이니까.
‘니켈?’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오기도 전에 이변이 일어났다. 그 위로 한 사람이 착지한 것이다.
분홍색 머리칼을 흩날리며 등장한 소녀는 하늘에 걸린 보름달을 올려다보았다.
“기분 좋은 밤이로구나. 그렇지 않느냐?”
어려진 모습이었지만 데미안이 그녀를 몰라볼 리 없었다.
“타나 테레나브스?”
“데미안이구나. 오랜만이니라.”
“아니, 너는 죽었을 텐데? 대체 어떻게 이 자리에 있는 거지?”
“그런 시시한 이야기보다 먼저 풀어야 할 문제가 있지 않느냐.”
스스럼없이 고개를 돌린 타나가 저 편에 있는 상대를 노려보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니켈은 숨이 멎는 듯했다.
포식자 앞에 선 토끼의 기분이 이러할까.
평생 느껴본 적 없는 감각이 전신을 감싸자 그는 뒷걸음질쳤다.
도망쳐야 한다.
오로지 그 생각만이 뇌리를 잠식했다. 하늘에서 떨어진 건 다름아닌 그의 분신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안 된다는 듯 니켈의 발걸음을 잡는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왜 도망치는 거지? 네가 그렇게나 찾아 헤매는 사람이 친히 와주지 않았느냐.”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대화할 것도 없었다. 카인에 이어 타나까지 온전하다면 이번 임무는 실패한 거나 다름없었다. 더 이상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결정과 행동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니켈의 몸은 화살처럼 쏘아졌다.
부지불식간에 거리를 벌리는 그를 보며 타나가 분개했다.
“끝까지 날 능멸하는구나. 너는 내가 기필코 개 먹이로 던져 주마.”
단번에 니켈을 추월한 타나는 그의 뒤통수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사정없이 바닥에 내리찍었다. 물론 거기에서 끝낼 거였다면 잡지도 않았다.
그가각, 그그극.
타나는 그 상태 그대로 질주했다. 니켈의 얼굴이 지면에 갈리며 형언할 수 없는 소음을 내었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슈발체베인 공작령의 절반에 달하는 거리를 돌파한 타나는 니켈을 힘껏 내던졌다.
하늘 높이 올라간 니켈의 뒤를 쫓아 비상한 타나는 다리를 치켜올렸다. 순간, 발 끝에서 불꽃이 치솟았다.
초신성보다 뜨거운 불덩이가 주위를 환하게 밝힌 순간, 니켈의 몸은 양단되어 허공을 가로질렀다.
* * *
창을 돌려 밀어내는, 란(攔).
창을 안쪽으로 돌려 누르는, 나(拿).
창을 찔러 반격하는, 찰(扎).
창술의 기본 중의 기본인 기술도 환상도요와 맞물리자 이루 말할 수 없는 절기가 되었다. 인지하기도 전에 찌르고 지나갔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절묘하다 해도 석탑을 무너뜨릴 수는 없는 법이었다.
“네가 주는 시련은 이제 내게 소용없다.”
란타넘이 선언했으나, 오리올의 팔은 멈추지 않았다. 불가해한 괴력 앞에서 서리창이 몇 번이나 부러졌지만, 그건 고려할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그때마다 자인이 곁에서 보충해 주었으니까.
더구나 란타넘이라고 해서 그러한 폭거를 마냥 이어갈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창날이 부러질 때마다 그의 팔 또한 깊게 긁혔으니까. 지금에 이르러선 뼈가 드러날 정도.
끝이 머지 않았다.
하지만 오리올은 무리하게 일격을 쑤셔 넣지 않았다. 대신 창을 거두고, 한 걸음 물러났다.
“온다.”
“감히 날 현혹하려 들지 마라.”
난데없는 대응이었지만, 란타넘은 우직하게 밀고 들어갔다. 하지만 그게 패착이었다.
쾅!
저 멀리에서 날아온 불덩이가 그를 치고 지나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