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vel 2 assassin wants revenge RAW novel - Chapter 70
070화 연장전 1
* * *
“지지 않았다. 아무리 무신이 정보를 통제했다고 해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을 텐데?”
하긴, 나지막하게 침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아휀은 아직도 병상에 누워 있었다. 그건 타나가 숨기고 싶다고 해서 숨길 수 있는 정보가 아니었다.
“조직에서 직접 명령이 하달되지 않은 걸 보면 개인적인 용무겠죠. 그렇지 않습니까?”
“뭐, 공식적인 임무는 아니지.”
“일방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자칫 잘못하면 저도 피곤해지는 일입니다.”
“내가 슈발체베인 가의 주인이 되면 한 번 도와주지.”
“크게 나오시는군요.”
군침이 돌 수밖에 없는 제안이었다. 1급 마귀라고 해도 부평초 인생인 건 변하지 않았다. 이번 기회에 검성의 제자에게 빚을 지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보물 창고를 터는 것도 아니고, 그곳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사건이 터져도 어차피 타나가 알아서 해결할 터. 카인이 붙잡힌다 해도 라프만이 나설 테니 리스크도 적은 편이었다.
“당신이 괜히 헤집고 다니면 저만 귀찮아질 테니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나르달이 결정을 내리자 카인은 비릿하게 웃었다. 그가 슈발체베인 가의 도움을 받을 일은 절대로 없었다. 전부 공수표였으니까. 같은 귀신도 아닌데 무슨 말을 못 하겠는가.
그런 카인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나르달은 무심하게 검지를 들었다.
“저기 백년해로가 있는 건물을 지나 조금만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면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어차피 거기 하나밖에 없을 테니 헤맬 것도 없겠죠.”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군.”
아휀이 안내해주었을 때 잠깐 들린 적이 있었다. 카인은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 * *
긴 회랑을 지나 한 건물에 들어갔다. 그 안엔 테레나브스 가의 역사가 들어 있었다.
익숙한 분위기였다. 슈발체베인 가에도 비슷한 방이 하나 있었으니까.
끝없이 도열된 진열장과 곳곳에 걸린 무구. 이곳은 테레나브스 가가 이룩한 업적이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가히 박물관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멀지 않은 곳에 역대 가주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제국의 시작과 함께한 곳이라 그런지 적지 않은 이들이 자리를 빛내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각진 턱과 터질듯한 대흉근. 꿈속에서 보았던 노인과 똑같은 외견이었다.
카인은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이반 테레나브스.
전전대(前前代) 테레나브스 공작이자 타나의 할아버지가 되는 인물이었다.
죽은 동생을 대신해 잠깐 공작이 된 무인이기도 했다.
활동 기간이 짧았기 때문일까? 비록 공작이지만 얼굴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는 희한한 내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 옆에는 십좌의 정점, 타나 테레나브스가 걸려 있었다. 특이한 건 그녀의 초상화만 유달리 커다랗다는 것.
다른 이라면 당대 테레나브스 가의 성세를 보여준다고 생각했겠으나 카인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지금은 라프만의 제자가 되어 정통 무인의 길을 걷고 있지만 그는 본디 첩보와 잠입에 능한 인재였다.
숨겨져 있는 걸 찾고,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도망치는 게 특기이자 장기였다.
귀족들의 약점을 잡기 위해 금고를 터는 것에도 서슴지 않았고, 살기 위해 제국의 정예 기사까지 따돌린 적이 있었다. 그것도 수많은 세월 동안.
그 과정에서 몸에 깃든 지식과 정보는 지금 시대에는 구현할 수 없는 게 태반이었다. 그도 그럴 게, 이십년은 앞서 있었던 것이다.
‘레반토르쥬 사의 황금 방패 시리즈인가.’
카인이 2급 살귀가 되었을 당시엔 적용된 기술이 너무나 오래되어 사장된 금고 중 하나였다.
액자에 양각된 무늬를 누른다. 순차적으로 조심스럽게.
무언가 맞물리는 듯한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본디 인간이 들을 수 없는 소음이었지만, 초월 감각에 의해 확장된 청력은 그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모퉁이를 잡고 살짝 힘을 주니….
초상화가 옆으로 밀리는가 싶더니 달칵, 하는 소리를 내며 뒤로 접히기 시작했다.
보물 창고로 가는 입구가 열린 건 그야말로 한순간이었다. 하지만 카인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 앞에 앉았다.
지금 가서 레디샤를 챙기는 건 소탐대실의 전형. 보다 큰 먹잇감을 낚으려면 인내의 시간이 필요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건물 안으로 또 다른 방문객이 들어왔다.
또각또각, 발걸음 소리가 커질수록 방문객의 얼굴 또한 뚜렷해졌다.
여성이 움직이자 그녀의 몸에 걸린 장신구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맑은소리가 울려 퍼진다. 마치 처마 끝에 걸린 풍경(風磬)처럼.
달빛에 닿아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났음에도 부끄럽지 않다는 듯 당당하게 가슴을 앞으로 내민 여성은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보금자리를 짓밟힌 짐승처럼 잔뜩 성난 표정이었다.
“누구인가 했더니 너였구나.”
레디샤라도 훔쳐 가려고 했던 걸까? 불청객의 얼굴을 확인한 타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주인이 엄연히 있는데도 겁도 없이 들어오다니. 이건 그녀를 모욕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정말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라프만의 제자라고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것인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오는 것이지?”
“테레나브스 가에 머무르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 같아 기념 삼아 한 번 둘러봤습니다.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저렇게 보물 창고로 가는 문을 열어놓고?”
“신기해서 여기저기 만져보니 저절로 열리더군요. 고의는 아니었습니다.”
“뚫린 입이라고 잘도 지껄이는구나. 정녕 피를 봐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테레나브스 가에 침입하는 멍청이는 없을 거라 생각해 일부러 기사를 세우지 않았건만, 이런 식으로 의표를 찔릴 줄이야. 타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어깨를 으쓱인 카인이 별거 아니라는 듯 말한 건 그때였다.
“사실 기다렸습니다.”
“과인을 기다렸다고?”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타나 님은 저를 상대해주지 않으셨을 테니까요.”
“레디샤에 대한 거라면 듣지 않겠다. 이미 내기의 결과가 나왔으니까. 너에게는 안타까운 일이겠지만 나는 번복할 생각이 없느니라.”
예상했던 말이었다. 서운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제안하고자 합니다, 새로운 내기를.”
“내기?”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내기.”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 타나가 검지로 카인을 가리켰다.
“그러니까 과인이 너와?”
“그렇습니다.”
그 말에 타나는 크게 웃었다.
“후후, 후크크. 크큭.”
배를 부여잡으며 미친 듯이 어깨를 들썩인다. 얼마나 오랫동안 웃음소리를 내었을까.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은 그녀는 그립다는 듯 먼 산을 바라보았다.
“그래,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너 같은 아이가 나왔지.”
분위기가 일변한 건 그때였다. 송곳을 꽂는 듯한 통증이 머릿속을 잠식했다.
이례적인 반응에 카인은 본능적으로 몸을 던졌다.
동시에 무언가 들이닥쳤다.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힘.
구태여 비교하자면 그것은 폭풍이나 격류에 가까운 재해였다.
쾅!
빠른 속도로 벽에 부딪친 카인은 핏물을 토해냈다. 어찌할 틈도 없었다.
“크헉.”
다리에 힘이 풀렸다.
이 기분, 그래! 이전에도 느낀 적이 있었다.
라프만이 호른산에서 프로잔을 갈랐을 때도 이런 느낌이었다. 마치, 인간의 탈을 쓴 천재지변이 눈앞에 있는 듯했다.
“나도 많이 얕보였구나.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에게 이런 제의를 받다니. 네가 내기하자고 하면 내가 좋다고 고개를 끄덕일 줄 알았느냐.”
차갑게 카인을 노려본 타나가 일갈했다.
십좌의 정점.
말만 들으면 이보다 더 영예로운 자리는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만큼 신경 써야 했다.
이 자리는 방심이 용납되지 않았다. 햇병아리든, 노장이든, 귀족이든, 왕족이든 그게 적이라고 판단되면 자비 없이 도륙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위치였다.
진탕이 된 내부를 다스린 카인이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내기는 받아들여진 겁니까?”
그렇게나 말했건만, 어디에서 개가 짖냐는 듯 일관된 반응이었다. 타나의 입꼬리는 끝없이 올라갔다.
“후후, 정말 오랜만이구나. 주제도 모르는 녀석이 내 앞에서 날뛰는 건. 설마 이야기 속의 주인공처럼 내가 네 제안에 혹해 죽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반쯤은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너는 재주가 많구나. 보물 창고를 여는 손재주부터 연장자의 신경을 긁는 말투까지. 보아하니 단명하는 재주도 제법인 것 같은데. 세상에 그렇게도 미련이 없는 것이냐.”
“타나 님에게 이만큼 흥미로운 내기는 없을 테니까요.”
타나는 곰방대에 불을 붙였다.
“착각하고 있는 것 같으니 말해주마. 내기는 서로 바라는 게 비슷해야 해야 비로소 성립하는 법이다. 이 경우에 너는 레디샤를 원하는 거겠지. 너야 일확천금을 노리는 거겠지만 나는 손해뿐이다.”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다.
“슈발체베인 가의 주인이 된 것도 아니고,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애송이에게 빼앗을 건 없으니까.”
“내기에서 지면 제 목숨을 드리겠습니다.”
“진부하구나. 그리고 시시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이 들은 말이던가. 생명의 존귀함은 알지만, 그게 곧 현실적인 가치로 이어지는 건 아니었다. 당연히 타나에게 그런 건 티끌보다 못한 쓰레기였다.
“타나 님이야말로 착각하는 것 같으니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죽는다는 건 곧 슈발체베인 가의 몰락을 의미합니다.”
“자만이 지나치면…….”
“타나 님도 아실 텐데요, 스승님의 상태를.”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튀어나왔다. 머지않아 라프만은 죽는다. 그건 타나도 익히 알고 있었다.
“저까지 없어지면 슈발체베인 가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겠죠. 또한 제자의 호적수를 미리 처리하는 셈이 됩니다. 한 번 움직이고 이만한 이득을 취할 수 있습니다. 충분히 남는 장사일 텐데요.”
도의적인 문제만 빼면 그리 틀린 말도 아니었다. 입술을 한 번 핥은 타나가 고혹적으로 웃었다.
“후후, 이거 혓바닥도 길었나.”
제 할 말만 주야장천 늘어놓은 후배가 그리 나쁘게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담력 하나는 인정해줄 만 했다.
“그래, 방만한 아이를 훈계하는 것도 선배의 역할일 테지.”
그러잖아도 변덕이 심한 성격이었다. 타나는 언제 화를 냈냐는 듯 태평하게 대응했다.
“마력은 일절 사용하지 않고 오직 신체 능력으로만 상대해주마. 내게 한 방이라도 먹일 수 있다면 네 승리. 한 방도 먹이지 못한다면 내 승리. 어때? 간단하고 좋지?”
“좋습니다.”
드디어 동일한 선상에 서게 됐다. 모두 빼앗기거나 모두 얻거나. 잔혹하기 그지없는 룰이었으나 카인은 떨지 않았다.
시작이 반이라 했다. 타나가 내기에 참여한 이상 패배는 있을 수 없었다.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다면 이 자리에 있지도 않았을 테니까.
“오거라. 대체 무엇 때문에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그 생각이 틀렸다는 걸 가르쳐주마.”
그렇게 말하며 손을 까닥인다.
그게 내기의 시작이라는 걸 깨달은 카인은 지면을 박차고 도약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원심력을 이용해 타나의 목덜미를 노렸다.
허벅지에서 발목까지. 하반신의 힘을 고스란히 발끝에 모아 내질렀다.
창을 찌르는 것처럼 강맹한 발차기였으나 타나는 보란 듯이 하품을 하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 동시에 관자놀이를 스치고 지나가는 카인의 등을 후려쳤다.
“크헉.”
가벼운 손짓이었건만 마치 바윗덩어리에 부딪친 듯 무겁기만 했다.
한없이 미끄러지는 몸을 겨우 가눈 카인은 고민하지 않고 달려들었다.
견제하면서 흐름을 볼 정도로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타나의 몸이 풀리면 실낱같은 가능성도 떨어질 터.
단기 결전.
오직 그것만이 승리로 향하는 길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타나는 이미 이쪽의 수를 파악한 듯싶었다.
주먹을 내지른 것과 동시에 아래에서 불온한 기운이 감지되었다.
초월 감각도 한 박자 늦게 감지할 정도로 빠른 일권.
카인은 황급히 팔을 내렸지만, 이미 늦었다. 허점을 정확하게 노린 카운터 펀치는 턱밑까지 치달은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