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vel 2 assassin wants revenge RAW novel - Chapter 95
095화 정산 1
* * *
쿠쾅.
지면을 붕괴시킬 기세로 박차며 쇄도했다.
손날을 세워 창으로, 무릎을 내질러 둔기로.
쌍검과 마주한 카인은 전신을 흉기로 바꿨다.
그 무자비한 입식 타격에 크루스는 대적하는 것보다 관망하는 길을 선택했다.
회광반조처럼 카인이 죽기 전에 마지막 빛을 발한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카인은 크루스의 생각이 훤히 보이는 것 같아 웃음이 절로 나왔다.
“어차피 시간은 네 편이라고 생각하나?”
“적어도 네 편은 아닌 게 확실하다.”
단호한 답변에 대응하듯 독이 섞인 핏물을 몸 밖으로 게워 냈다.
배출할 수 있는 상처는 얼마든지 있었다.
검붉은 핏물이 뺨에 튀자 크루스의 입가가 묘하게 비틀렸다.
해독할 수 없다고 피를 전부 빼다니, 호쾌하다 못해 무모하리만치 허술한 전술이었다.
물에 먼지가 들어갔다고 양동이째 버리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아무리 궁여지책이라 해도 제 살을 갉아먹는 것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까 너는 결국 여기까지인 거다.”
단걸음에 거리가 좁혀진다.
“……뭣?”
예상을 아득히 벗어난 속도에 크루스는 외마디 탄성을 터뜨렸다. 그가 느려진 게 아니었다. 카인이 그만큼 빨라졌을 뿐이었다.
좌시할 수 없는 이변의 등장.
이건 의지나 열정으로 되는 게 아니었다.
그제야 크루스는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 처음보다 카인이 강해졌다는 걸.
‘말도 안 돼.’
급격한 성장은 천재라 불리는 이들의 특권이었다. 방금 전까지 빌빌거리던 녀석이 절대 가질 수 없는 권리였다.
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증거가 내밀어졌다.
지난 수년 동안 동고동락했던 쌍검이 수수깡처럼 꺾였으니까.
“다음엔 다리다.”
투우가 자랑하는 뿔을 맨손으로 부러뜨린 카인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한 발자국 더 나아가 크루스의 무릎을 걷어찼다.
빠각.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지며 다리가 기이한 각도로 돌아갔다.
쌍검을 버린 크루스는 절뚝거리면서도 능숙하게 허리춤에 걸린 단검을 빼 들었다. 아직 싸울 힘은 남아 있었다.
이후,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근접전이 벌어졌다.
단검과 주먹이 교차하며 청명한 소리가 터질 때마다 주변에 있는 기재가 부서지며 비산한다.
카인과 크루스, 둘 다 서로를 죽이기 위해 독니를 밀어 넣길 주저하지 않았다.
먼저 쑤셔 넣은 건 크루스였다. 카인의 어깨에 단검을 찔러 넣은 그는 미소를 지었다. 이대로 독을 쏟아 부으면 승자는 결정될 터. 막무가내로 피를 토해낸다 해도 인간인 이상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행복한 상상도 잠시뿐.
자비를 모르는 주먹이 몸속 깊숙이 틀어박혔다. 빈틈이 드러나길 기다린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컥.”
뼛속까지 파고든 충격에 크루스는 여태까지 참았던 신음을 전부 뱉어낼 수밖에 없었다. 마치, 공성추에 맞은 것 같았다. 참는다고 참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내장이 거꾸로 치솟았던 것이다.
절호의 찬스. 카인은 찰나에 생긴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손가락 사이에 낀 단검을 으스러뜨리며 거칠게 압박했다.
라프만이 누누이 강조했던 압도적인 피지컬이 어떤 것인지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강력한 힘 앞에서 재능이나 절기는 의미가 없었다. 구태여 머리 아프게 수 싸움을 이어갈 필요도 없었다.
끝없이 확장되는 감각 속에서 크루스의 움직임이 콤마 단위로 보이기 시작한다. 그에 따라 허초와 변초 속에 섞인 진초가 속속들이 드러났다.
크루스는 좋은 교보재였다. 그를 보니 경지에 이른 무인들의 싸움이 어떠한 과정을 거치며 심화되는지 알 것 같았다.
쿵.
진각을 밟으며 정권을 내지른다. 직선을 그리며 나아간 주먹이 그대로 크루스의 가슴뼈를 박살 냈다.
기우뚱. 중심을 잃은 크루스가 뒤로 넘어질 듯 비틀거렸다. 후속타를 먹이기 위해 접근하려는 순간, 크루스의 손이 채찍처럼 휘둘러졌다.
휙.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섬광이 번쩍였다.
정확히 미간을 노리고 들어오는 단검에 카인은 허리를 비틀었다. 그리고 코끝을 스쳐 지나가는 단검을 잽싸게 물었다.
초월 감각이 아니었다면 당했을 회심의 한 수. 하지만 카인은 당황하는 것보다 오히려 기뻐했다. 크루스가 드디어 밑바닥을 드러낸 것이다. 잔꾀에 의지할 정도로.
그 사실이 너무나도 우습고 우스워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검날을 씹는다.
우드득.
“짐승이라도 될 셈이냐.”
“뭘 그리 놀라는 거지. 그쪽에도 잘하는 녀석이 하나 있잖아. 안 그래?”
퉤, 하고 잘게 부서진 날붙이를 내뱉었다. 이제 거칠 건 없었다. 크루스에게 남겨진 기회는 더 이상 없었으니까.
허리춤에서 또 다른 단검을 꺼내 품 안으로 들어오는 크루스를 두 팔 벌려 맞이한다.
손끝이 닿는 공간은 모두 카인의 영역이었다.
정련정심을 익힌 그에게 박투란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반자.
팔꿈치로 크루스의 관자놀이를 후려친 카인은 그 여세를 몰아 미처 부러뜨리지 못한 한쪽 다리마저 박살 냈다.
지지대를 잃은 크루스가 볼품없이 쓰러지는 건 당연한 수순. 하지만 이 지경이 됐음에도 그의 눈에는 아직도 불신이 가득했다.
아니나 다를까, 분기를 채 억누르지 못한 듯 날이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네 정체가 무엇인지 모른다. 또 바라는 게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너는 더 이상 안전하지 못하다는 거다.”
“그거 참 가슴 떨리는 일이군.”
카인의 비아냥에 크루스가 이를 악물었다.
“내가 죽더라도 내 동료들이 기필코 너를 찾아낼 거다. 대륙 그 어디에 있든.”
“조금 더 그럴싸한 구호는 없나? 실현 가능성이 없는 말을 듣고 있으려니 불쌍해서 말이야. 질리기도 하고.”
“너는 우리에 대해서 알고 있는 척 지껄이고 있지만, 그건 모두 전해 들은 이야기에 불과하다. 아마 이 끝에 무엇이 있는지 보고 나서야 후회하겠지.”
“응, 아니야.”
발악하듯 퍼붓는 저주에 카인은 코웃음을 쳤다. 크루스는 알고 있을까?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자신보다 오랫동안 조직에 몸담고 있었다는 걸.
하긴 알 수 없으니 마음대로 말하는 걸 테지.
“바라던 바니까 늦지 말고 오라 그래라. 선물 챙겨오는 거 잊지 말고.”
그 말과 함께 주먹을 등 뒤로 뺀다.
온몸의 근육이 긴장되었을 즈음, 남아 있는 마력을 전부 때려 박아 인정사정없이 내려찍었다. 주먹이 나아가는 궤적을 따라 넘쳐나는 마력이 먹처럼 번진다.
쿠궁.
지면이 거미줄 모양으로 갈라지며 지축이 흔들렸다. 바닥에 깊은 자국을 남길 정도로 강렬한 일권. 그 앞에서 인간의 머리는 스티로폼이나 다름없었다.
콰직.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뭉개진 고깃덩어리에서 붉고 화려한 꽃이 피었다. 의기양양하게 웃던 이의 얼굴은 이제 찾아볼 수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카인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호흡을 깊게 내뱉었다.
이겼다. 이긴 것이다.
순간, 긴장과 피로가 한 번에 몰려온다.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지려던 찰나, 어깨에 따스한 온기가 다가와 지탱해주는 게 느껴졌다.
“카, 카인 씨? 정신 차려요. 여기에서 쓰러지면 안 돼요. 듣고 있어요? 쓰러지면 큰일 난다니까요.”
“듣고 있으니 조용히 해라. 머리가 울리지 않나.”
“어떻게 가만있을 수 있겠어요. 이런 꼴인데요.”
만신창이가 된 카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피 칠갑을 한 것도 모자라 여기저기에 깊은 상처가 가득했다. 갑자기 객사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처. 이런데 어찌 안심할 수 있을까.
로이나는 손수건을 들어 닦이지 않는 핏물을 열심히 닦았다.
그때, 그녀의 어깨에 몸을 기댄 카인이 짧게 탄성을 터뜨렸다.
“마음이 넓은 만큼 어깨도 넓군. 아니지, 탄탄하다고 해야 하나.”
뜬금없는 감상에 로이나의 눈이 차게 식었다. 여태까지 걱정했던 마음이 쏙 들어갈 정도였다.
“생각보다 멀쩡한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몸이 튼튼한 건 몇 없는 내 장점 중 하나지.”
“몸만 튼튼해서 뭐 하겠어요, 머리가 이렇게나 아픈데.”
로이나가 매정하게 밀어내자 카인은 피식 웃으며 크루스의 품속을 뒤적거렸다.
다행히 손에 잡히는 게 몇 개 있었다.
앞으로 조직의 꼬리를 밟을 수 있는 단서가 될 터. 이것만으로도 싸운 보람이 있었다.
“그럼, 어서 나가지.”
“그전에…….”
“그전에?”
“이곳은 어떻게 할 건가요? 저희가 나가도 발견할 사람은 발견할 텐데요.”
“그렇겠군, 우리가 네 번째 탐사대였으니까.”
집요하게 이곳을 팔 거라는 건 불을 보듯 뻔했다.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다. 재수가 없으면 후발대가 출발했을 수 있었다. 이렇게 아옹다옹하는 사이에 마주칠 가능성도 존재했다.
크루스의 마지막 말도 마음에 걸렸다. 그 녀석은 뒤처리까지 도맡아서 할 계급은 아니었으니까. 따로 정리하는 귀신이 있을 터.
“아깝지만, 파괴해야겠지.”
결론은 쉽게 나왔다. 이쪽이 가지지 못하는 건 저쪽도 가지지 못해야 했다.
“방법이 있는 건가요?”
“아마도.”
전에도 한 번 신의 무덤을 폭파한 경험이 있었다. 경우가 달라 이번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앙 제어 시스템에 가까이 다가간 카인이 한국어로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영구적인 폐쇄 조치가 필요하다.”
[중앙 제어 시스템의 명령 하에 영구적인 폐쇄 조치가 이루어집니다. 관리자의 최종 승인이 필요합니다. 승인하시겠습니까?]“대신 30분만 시간을 줬으면 한다.”
[승인되었습니다. 마지막 단계를 진행합니다.]말 한마디에 카운트다운이 시작된다.
[29:59]경보음이 울려 퍼지며 장내가 들썩이자 로이나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된 건가요?”
“그래. 몇 번 만지니 되더군.”
“그걸 지금 말…… 아니죠. 후우, 한 사람이 그렇다는데 제가 어찌 토를 달겠어요.”
어깨를 으쓱인 로이나가 등을 돌린다. 모르는 척하겠다는 신호이리라.
호의를 받아들인 카인은 조용히 손을 내려다보았다.
겪으면 겪을수록 범용성이 넓은 힘이었다. 어째서 자신에게 이런 행운이 주어졌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카인!”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나이아가 다른 일행과 함께 뛰어오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시답잖은 고민은 여기까지인 듯싶었다. 어차피 계속 신의 무덤을 돌아다니다 보면 싫어도 알게 될 터. 그때까지 미뤄두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나이스 타이밍이다. 엇갈렸으면 매장될 수도 있었는데 말이야.”
“그게 무슨 말이더냐?”
“뛰어라. 이곳은 붕괴된다.”
“뭐엇?!”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는 나이아를 보며 카인은 어깨를 으쓱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시간이 넉넉히 남았다는 점만 빼면.
* * *
모험가 길드에서 그리 멀지 않은 주점.
하루 일과가 끝날 시간이라 그런지 장내는 금세 떠들썩해졌다.
소음을 피해 구석진 곳에 앉은 카인은 크루스에게 빼앗은 전리품을 쳐다보았다.
무전기처럼 생긴 기기.
한 손에 들어올 정도로 작지만,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래도 기본적인 틀은 같아 몇 번 만져보니 감이 잡혔다.
1급 마귀가 들고 다니는 단말기는 저장 장치이자 조작 장치였다.
각종 전자 기기에 접속할 수 있는 임시 계정이 있는 건 물론이고, 내부에 활용할 수 있는 메모리가 있었다.
이미 만능열쇠를 가지고 있으니 중요한 기능은 아니지만, 그래도 가지고 있다 보면 다 쓸 데가 있을 터.
무엇보다 카인의 눈길을 끈 건 그다음에 얻은 전리품이었다.
수첩.
안쪽엔 규칙성 없는 문자가 나열되어 있었다. 글을 처음 배운 아이가 쓴 것처럼.
하지만 카인은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조직에서 사용하는 암호라는 걸.
빠르게 해독하며 수첩의 내용을 정독했다.
조직의 주요 거점이나 중요 인물 같은 정보는 없었다. 기껏해야 신의 무덤에 대한 정보가 줄을 이을 뿐이었다.
가령 등급에 대한 해설. 이 부분은 카인도 주의 깊게 보았다.
조직이 체계적으로 신의 무덤을 발굴하고 다닌다는 걸 알려주는 대목이었으니까.
갑, 을, 병, 정.
조직의 분류에 따르자면 이번에 탐사한 신의 무덤은 정급인 듯싶었다.
‘그러면 성녀님을 만나기 전에 갔었던 신의 무덤은 어느 정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