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115
115. 행방 (1)
만하임 악파(樂派)가 탄생한 곳.
지금은 대학교 건물이 된 만하임 궁전을 바라보며 걸었다.
완벽한 좌우대칭의 건물은 예전 그대로의 모습을 상당히 많이 간직하고 있었고, 그래서 더욱 걸음이 느려진다. 눈에 담고 싶은 게 많아서.
“···오랜만이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솟은 별관.
저기가 바로 일페르소의 꼬드김에 넘어가 처음 만하임을 왔을 때, 하이든의 연주회가 열렸던 곳이었다.
그렇기에 이곳은 내게 궁전이라기보단, 공연장으로 익숙했다.
매일 같이 연주회가 열리고, 음악이 끊이지 않았던 곳.
수많은 음악가들. 심지어 젊은 모차르트조차도 동경했던 도시.
그리고 내가 음악을 만나고, 삶에 대한 의욕이 꿈틀거렸던 순간······.
나는 궁전을 둘러보며 끝없이 향수에 휩싸였다.
동시에 이곳이 대학교로 변모했다는 점이 퍽 마음에 들었다.
18세기 중반. 유럽 음악의 중심지였던 이곳에서 수학하는 학생들이라니.
누가 계획한 건진 몰라도 정말 탁월했지.
분위기가 이러하니 제아무리 국내 최고라는 한국예대라도 학생들의 시야가 다를 수밖에.
그러니 홀랜드 교수 같은 사람의 입김이 강해지는 것이다.
쓴 입맛을 다셨다. 자연스레 해결책을 찾게 되는 건 내게도 낯선 모습이었다.
‘내가 교수도 아닌데······.’
화원예고 멘토링에 참가했던 것 때문인지.
아니면 한국 클래식 연주자들의 처우를 개선하고 싶은 욕심 때문인지.
자꾸 이런 쪽으로 머리가 빙빙 돌아간다.
‘하여튼, 하고 싶은 게 많아 큰일이지.’
간절했던 브리너와 뒤늦게 음악에 눈을 뜬 한서호. 두 사람의 열망이 머릿속에 계속 펌프질을 해댄다.
“차근차근 하자. 차근차근.”
작게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긴다.
여전히 만하임 대학 건물이 곳곳에 포진해있는 시내로 접어들어 녹색 페인트를 바르고 금박으로 ‘또 다른 꿈’이라는 상호가 적힌 가게 앞으로 다가섰다.
‘이름 마음에 드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안쪽은 휑했다.
시간대가 시간대라서인지 손님이라곤 테이블 하나뿐.
“왔구만.”
그마저도 날 반기는 알버트와 그의 친우들이니 결국 지인이 전부인 상황이었다.
“안녕하세요.”
인사하며 레스토랑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알버트의 친우일 것으로 보이는 어르신들에게도 일일이 인사했다. 그들의 면면을 바라보며.
“······.”
“아.”
어색한 반응에 문제점을 깨닫고, 서둘러 목도릴 풀었다.
안경을 빼내고, 모자까지 벗으며 다시 인사한다.
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아까와는 정반대의 표정들이었다.
“······!”
물음표가 떠올랐던 얼굴에, 느낌표가 가득했다.
#
알버트의 친우들이란 것부터 범상치 않을 거라곤 생각했지만······.
“자네가 같이 오겠다던 친구가, 저 친구였나.”
나도 솔직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나이 지긋한 이들이 둥그런 자리에 앉아 와인과 맥주 등을 홀짝이고 있다. 가장 어린 이가 중년의 끝줄에 올라있을 것 같은 모임.
“알버트와는 본에서 만나서 같이 온 거라고?”
나를 빤히 바라보던 갈색 머리의 노인이 물었다.
하지만 갈색 머리만으로 이 노인을 설명하기엔 부족할 것 같다.
세계적인 비올라 주자이자, 체코 필하모닉의 지휘자를 역임하고 있는 마에스트로 데이빗.
···일단, 눈빛이 날 향해있으니 내가 대답해야겠지.
“네. 베토벤의 생가에 들렸었어요.”
그리고 계단 반만 한 단차를 두고 만들어진 무대에서 피아노를 닦던 중년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와 의자를 거꾸로 앉는다.
“아니, 나 궁금한 게 많았는데. 어떻게 악기 두 갤 다루게 되었는지. 그것 좀 얘기해줘요. 인터뷰를 아무리 봐도 자세히 말한 게 없더라고.”
이 사람은, 레스토랑의 주인······이기 이전에, 과거 쇼팽 콩쿠르를 우승했던 피아노의 거장.
······자연스레 그 옆에 덩치 큰 노인에게로 시선이 향했다. 알버트와는 대조되게 편안한 복장으로 눕다시피 앉아있는 그는 말없이 맥주를 들이켜고 있었다.
한 번에 알아보진 못 했지만, 유심히 살펴보니 알버트만큼이나 익숙한 지휘자다. 클래식을 하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세계 3대 오케스트라에 뉴욕필과 함께 이름을 올린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그곳의 수장, 마에스트로 프랑코.
와···. 만하임이 음악의 도시라면, 이 레스토랑은 음악의 전당쯤 될 것 같다.
세계 클래식 회의, 뭐 그런 게 비밀리에 여기서 열리는 건가? 킹스맨처럼? 저기 걸려있는 액자들 속 대가들의 초상화를 보니 아예 터무니없는 추측은 아닐 것 같은데.
“술 다 떨어졌네. 알렉스. 여기 와인 한 병만 더 줘. 아, 잔 하나도 더 가져다 놔야겠다.”
······아예 터무니없었나 보다. 회의치곤 너무 술판이야.
“이 친구, 마실 수 있는 나이예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여권 좀···.”
“아, 예. 여기요.”
여권을 확인한 알렉스가 안쪽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바통터치를 하듯 안쪽에서 중년 남자가 걸어 나온다. 한 손에 바이올린을 들고서.
나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저 손에 들린 녀석이 세계 3대 바이올린 중 하나인 아마티(Amati)라는 걸.
······여기 대체 뭐야?
“어, 제 또래 손님이 왔네요?”
“양심이 있어라. 반백 살을 한참 넘은 녀석이 뭔.”
맥주를 단숨에 비운 갈색 머리 노인, 체코 필의 데이빗이 말했다.
능글맞게 웃은 중년 남자가 날 빤히 바라본다.
“낯이 익은······어!?”
“네가 생각하는 그 사람이 맞을 거야.”
“우왓—! 브리너!”
저 이름이 먼저 튀어나온 건 또 처음이네.
“팬입니다! 곡 너무 잘 듣고 있어요.”
“아, 네. 감사합니다. 근데, 연주하시려고요?”
“아, 맞아요. 그러면 잘됐네!”
“······?”
“저 다음은 알버트님이고, 그다음은 서호군이에요.”
“저요?”
무슨 상황인가 싶어 되물었더니 중년 남자가 활짝 웃는다.
“네. 지각한 사람 벌칙이거든요.”
“얼른 연주해!”
“알았어요, 알았어.”
그리고는 바이올린을 들고 앞으로 나아간다.
“······.”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희대의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장 오슬로가 나타나기 전.
셀린 교수와 양대산맥으로 불렸던 바이올린 거장, 니콜라이가 무대 위로 올라선다.
······이게 비밀회의인지, 뭔진 모르겠지만 한가진 확실하지.
‘이거 진짜 돈 주고도 못 볼 광경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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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갑고 뜨거운 연주가 이어진다.
니콜라이의 연주는 기본적으로 냉소적이었다.
그렇기에 셀린 교수보단 장 오슬로 쪽에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테크니컬하고 날카로우며 서늘한 연주가 팔뚝을 스치듯 지나치고, 털을 곤두세운다.
반면 다음 주자로 나선 알버트는 달랐다.
그는 건반을 누르기 전부터 뜨거운 용광로 같았다.
그리고 주조를 하듯 곡의 형태를 잡아나간다. 벌건 쇳물은 알버트가 계획한 모양으로 유기적으로 움직이고.
그 끝에 만들어진 곡의 구조는 아름다웠고, 정교했으며, 뜨거웠다.
뜨겁게 마무리되는 피날레.
“함머클라비어라니. 알버트 아직 안 죽었네?”
자리로 돌아오는 알버트를 보며 데이빗이 혀를 내둘렀다.
“미스 터치가 너무 많았어. 버겁군.”
“근데, 그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좋았습니다.”
알렉스가 감탄하고, 니콜라이가 짐짓 진지한 얼굴로 제안한다.
“다시 피아니스트를 하실 생각은 없으세요?”
“참 내, 무슨!”
헛웃음을 지은 알버트가 내 옆으로 앉았다.
“흉내 좀 내봤는데, 어떤가?”
“굉장했어요.”
“다행이군. 그럼, 이제 자네 차례네.”
끄덕이며 의자를 뒤로 뺐다.
그러자 알렉스가 물어왔다.
“어떤 악기를 사용할 생각이지? 피아노면 저 무대에 있으니 문제없고, 바이올린도······.”
그의 시선이 옆자리로 향한다. 니콜라이에게로. 정확히는 그의 바이올린.
“기꺼이 빌려주지.”
니콜라이가 쿨하게 말했다.
아마티라니. 그거 참 구미가 당기긴 하는데···.
그때, 무대 쪽을 턱짓하는 알버트.
“저기 기타도 걸려있군.”
내가 픽 하고 웃었다.
알버트가 가리킨 곳엔 정말 낡아 보이는 기타 하나가 벽에 걸려있었다.
알렉스가 갸웃거렸다.
“기타도 칠 줄 아는 거야? 근데, 저거 쓸 수 있으려나. 그냥 장식용으로 걸어둔 거라.”
“한번 봐도 될까요?”
“물론이지.”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로 나아갔다. 걸려있던 기타를 내려 슬쩍 만져보니 얼마나 상태가 엉망인지 확실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호텔 방에 기타를 두고 오지 말 걸 그랬네.
‘그래도 잘 만져보면······.’
조율로 음높이를 맞춘다. 물론 관리가 전혀 안 되어온 상태라 한 두 곡 정도 연주하고 나면 올이 풀려나가듯 음높이가 다시 느슨해지겠지.
그래도 상관없었다.
‘한 곡만 버텨주라.’
기타 줄을 매만지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오늘, 내가 아니면. 이 기타가 언제 연주될 수 있겠나. 그러니.
“해볼게요.”
자연스럽게 의자 하나를 가져다 앉아 연주 준비를 마쳤다.
니콜라이가 자신의 바이올린을 보며 웃는다.
“너 까였다, 야.”
웃음이 터져 나오고, 나도 입꼬릴 올린 채로 기타 줄을 튕겼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천천히 시작하는 연주.
‘소리 괜찮은 것 같은데?’
버텨달라는 부탁에 화답이라도 하듯, 음정이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소리에 거친 느낌이 있지만, 그래서 또 색다른 연주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에밀리의 교정으로 많은 것들이 달라진 자작곡.
런던의 일기.
나는 독일 만하임의 작은 레스토랑에.
그보다 작은 런던을 옮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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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자리가 무르익고 있었다.
기타까지 잘 친다며 혀를 내두르던 알렉스는 바닥난 안주를 만들러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고.
알버트는 잠시 뉴욕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으러 갔다. 니콜라이는 데이빗과 안주도 없이 부어라 마셔라.
화장실 핑계로 슬쩍 빠져나온 나는 벽에 걸린 액자들을 훑고 있었다.
그때, 뒤쪽에서 프랑코가 다가왔다.
“명예의 전당 같은 느낌이지?”
“그러네요.”
“하나 같이 전설적인 고전 시대의 대가들이지. 우리가 신처럼 모시는. 하지만 잘못된 맹신은 아무리 뛰어나도 이교도란 걸 정작 본인은 잘 몰라.”
“······.”
갑작스러운 진지함. 그 이유를 알 것 같긴 했다.
“미안하네. 제자 일 말이야.”
“마에스트로께서 미안해하실 일은···.”
“맞아. 그렇게 가르친 게 나였으니까. 나조차도 그런 생각을 가졌었거든. 클래식은 서양의 전유물이라는 잘못된 맹신 말이야. 결국, 내가 잘 못 가르친 거지.”
쓰게 웃는 프랑코에게 나는 좀 더 단호히 말했다.
“그게 사실이라 해도 여전히 저한테 미안해하실 일은 아녜요.”
“음?”
“그렇다면 마에스트로께선, 더 많은 사람들한테 미안해하셔야 해요.”
그 시간 동안 거장들의 어긋난 가르침이 대물림되며 생겨난 피해자들. 혹은 그걸 넘어 한 나라. 한 인종에게.
내 말에 프랑코가 묘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찰나의 시간 동안, 복잡한 눈빛을 보내오던 그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이 맞는 것 같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