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116
116. 행방 (2)
······벌써 거장들과 만난 지 3일이나 됐다.
그동안의 시간은 정신없이 지나갔다.
“모차르트가 오죽 이곳, 만하임의 선제후를 존경했으면 궁정 악장이 되고 싶어서 여길 왔을까.”
“만약 칼 테오도르 선제후가 뮌헨으로 이동하지 않았더라면, 모차르트도 이곳에 남았겠죠. 그렇다면 클래식 사(史)가 다시 쓰였을지도 모르고요. 역사에 만약이 어딨겠느냐만요.”
“자네 정말 제대로 알고 있군! 맞아, 그 이후로 만하임은 물론이고, 독일 땅 전체가 음악적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지. 이야기할 맛이 나네!”
모든 거장들의 음악적 지식이 넓고 깊었지만, 특히 프랑코는 클래식 역사에 관련해서 엄청난 지식과 주관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과거 내가 들었거나 보았던 것들이 지금은 어떻게 알려져 있는지, 그리고 그걸 현대의 거장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낮에는 관광을 이어갔다.
모차르트의 아내가 다녔다는 성당을 들르기도 하는 등 만하임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나도 전생에 이토록 다녀본 적이 없어 흥미로웠지.
그러다 해가 지면 테이블에 둘러앉아 맛있는 음식을 깔아놓고 밤새 음악 이야기를 나눴다.
역사적인 이야기를 하다가, 대가들의 생애에 대해 논하고. 또 갑자기 그들의 곡들을 분석했고, 이런저런 논쟁이 붙었다.
나도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는지라 어르신들 얘기라고 잠자코 듣고 있지만은 않았다. 사실 내가 이들에게 어르신이라 하는 것 자체도 이상한 일이지.
‘그럼 난 대체 뭐야···.’
아니다 싶은 건 반론을 제기했고, 동의하는 부분에선 와인 잔을 들었다. 그러다 술 너무 많이 마신다고 알렉스가 타주는 논알콜 칵테일을 받아야 했다. 뭐, 우유가 아닌 게 어디냐만.
······그렇게 벌써 만하임에서 셋째 날.
어김없이 풍성한 이야기 속에서 밤을 지새운 아침이었다.
눈이 번쩍 뜨인 건, 논알콜 칵테일 덕분이 아니었다. 잠에 일찍 들었기 때문은 더더욱 아니었고.
“얼른 출발하자.”
몸을 일으켜 욕실로 향한다. 설렘이 밀려온다. 피곤함 따윈 슈톨렌(-독일 케이크) 속 건포도만도 못하다. 한편으론, 아련함이 멀찍이 서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
“눈물 보이지 말아야지.”
단호하게 다짐하고서 모든 준비를 마치고 호텔 방을 나왔다.
호텔 로비. 체크아웃을 마치고 카펫 위로 캐리어를 끌며 나서려는데, 호텔 입구 쪽 작은 카페에 둘러앉아 커피를 마시는 세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
“가려고?”
빙그레 웃으며 묻는 알버트였다. 그 옆에서 신문을 접는 데이빗과 큼직한 크로아상을 한입에 욱여넣고 우물거리는 프랑코.
가게 주인인 알렉스와 어제 과음한 니콜라이가 빠진 마에스트로 3인방이었다.
“벌써 일어나셨어요?”
“늙으면 잠이 줄어드는 법이라서.”
알버트의 말에 데이빗이 고갤 흔들었다.
“난 아냐. 원래 이랬어.”
“부정하면 추한 법이다.”
“······쩝.”
프랑코의 말에 입맛을 다시던 데이빗이 날 보며 말한다.
“잘 가게나.”
프랑코도 손을 까딱거리며 인사한다.
나는 그들에게 일일이 화답하고서 호텔을 나왔다.
뒤따라 배웅까지 나온 알버트.
“중요한 일이 다 끝나면 다시 놀러와. 한동안은 우리 모두 여기 눌러앉아 있을 것 같으니.”
“네. 일 다 보면 연락드릴게요.”
웃으며 일별하고 기차역으로 향했다. 한 시간이 채 안 걸리는 시간 동안 달려 도착한 바덴바덴엔 만하임과는 달리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새하얀 고향. 익숙하면서도 그리운 정취를 느끼며 호텔에 짐부터 풀었다. 온천을 즐겨보라는 안내원의 말에 그저 웃으며 곧장 걸음을 옮긴다.
바글거리던 사람들이 어느 지점부터 모습을 싹 감춘다. 조금 황량하기까지 한 길을 계속 걷다 보니 언덕 아래로 바덴바덴의 전경이 펼쳐진다.
“······.”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걷는다.
생크림을 뒤집어쓴 듯하던 성이 어느새 눈앞에 가득 찼다.
전혀 화려하지 않은, 다 무너져간다는 표현이 그리 어색하지도 않은 성.
나는 홀로 그곳에 들어섰다. 안쪽에도 관광객이라곤 나 말고 없었다.
온천이 유명한 곳답게 겨울이 성수기라고 할 수 있는 바덴바덴이지만, 사람들이 몰리는 곳도 온천이 있는 호텔들과 시내뿐이다.
이 험한 길 끝에 있는 낡은 성을 누가 오고 싶어 하겠나.
‘여기가 제집이 아니고서야.’
뽀드득— 뽀드득—.
눈을 밟는 느낌이, 소리가······.
귀를 간질였고.
나는 정문에 있는 매표소 대신 성 뒤편으로 향했다.
작은 언덕. 새하얀 카펫이 깔린 곳에 회색빛 묘비가 첨탑처럼 솟아있다.
프리드리히 가문의 묘지(墓地).
들어가지 못하게 쳐놓은 펜스에 손을 얹으며.
나는 최대한 활짝 웃었다.
“저 왔어요.”
······한참을 서 있다가 천천히 목도릴 풀었다.
입술이 파르르 떨려오는 걸 애써 무시하며.
“못 알아보시겠죠?”
적어도 여기서만큼은 브리너이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네.
눈이 어깨에 토독토독 내려앉는다. 덕분에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본격적으로 입을 뗐다. 아이가 부모에게 재잘재잘 말하듯.
“혹시 저처럼 새로운 생을 사시느라 못 보셨을지 모르니, 제 새로운 삶을 짧게 얘기해드릴게요. 아, 우선.”
입술을 핥고서 침을 삼켰다. 그리고서야 천천히 한쪽 발을 내디뎠다. 보란 듯이.
“이거 봐요. 저 이제 걸어요.”
하지만 금세 고개를 푹 숙였다.
“어. 음. 그러니까···.”
더는 미안해하지 마세요.
이 말이 목구멍에 턱 걸려 나가질 않네.
다시 한번 긴 심호흡 뒤에 말을 이어갔다.
“음.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하지. 꽤 복잡한데···제가 원래 잘살고 있었거든요? 전생은 기억 못 한 채로요. 그런데, 그게 아마 순리가 아니었나 봐요. 갑자기 절 과거로 보내더라고요. 그것도 마침 유럽 여행 때로. 그렇게 브리너로서의 기억을 되찾고······.”
짧게 말한다고 하는데도 이야기가 길어진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이렇게나 많은 줄, 나조차도 몰랐다.
설명해야 하는 인물도 많았다. 지금의 부모님부터 윤 교수, 친구들, 백한길 회장과 그의 가족, 영화사 M&ACT의 사람들과 베이노프 심포니. 그리고 여행에서 만난 클래식 거장들까지.
한참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 끝에 나는 뭔가가 떠올랐다.
“아.”
그건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만약, 새로운 삶을 살고 계신다면.
다른 땅, 다른 이름으로 모든 걸 다 잊고 살고 계신다면.
지금까지 내가 한 말들은 모두, 허공에 내뱉은 것뿐.
내 새로운 생의 이야기를, 전할 방법은 없다는 걸.
잘 참았는데.
······여기서 무너져내렸다.
#
티켓을 끊고 곧장 향한 곳은 건물의 가장 높은 층이었다.
보통은 1층부터 관람해야겠지만, 나는 내 방으로 가는 게 먼저였다.
브리너의 침실이자, 생활공간. 그리고 음악을 만나기 전까진 감옥이자, 지옥이었던 곳.
백작의 방답게 널찍하지만.
한 사람의 전부였던 세계라고 하기엔 턱없이 작은 방.
도착하자, 나 말고도 한 모자가 구경이 한창이었다.
“엄마, 책상 위에 뭐 있어? 안 보여, 안 보여···.”
번쩍 안아 들자 아이가 손을 뻗는다. 책상을 만지작거리자 아이 엄마가 화들짝 놀라 아이를 내려놓았다.
“버니! 그러면 안 돼.”
“아으아! 왜—!”
“오래된 물건은 약하단 말이야. 너 때문에 다칠 수도 있어. 그리고···.”
아이 엄마가 내 쪽을 보며 속삭였다.
“저분이 잡아간다고.”
다 들립니다···. 아, 들리라고 한 건가? 고민이다. 어떻게, 잡아가려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 건지.
다행히 굳이 연기하지 않아도 효과가 있었는지 아이는 더 이상 떼를 쓰지 않고 순순히 엄마 손에 붙들려 방을 나갔다.
그제야 편안하다. 내 방에 나 혼자 있다는, 과거엔 당연했던 사실이.
천천히 테이블로 다가섰다.
전생이 떠올랐던 자리.
그곳에 다시 서서 손을 뻗었다.
12살의 나보다 간단히 손에 닿는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낡은 감촉만이 손에 느껴질 뿐이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건 없나 보네.’
혹시 테이블을 만지면 잊고 있던 기억이 좀 더 떠오르거나 하진 않을까 싶었는데 헛다리였나보다.
웃으며 손을 떼려는데,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테이블이 아니라 문밖에서.
“그새 장난감을 어디에다가 떨어트렸······.”
고개를 돌렸다.
아까 나간 아이 엄마와 그녀의 손을 잡은 아이가 날 바라보고 있었다.
“······.”
“엄마.”
“응?”
“그럼 저분은 누가 잡아가?”
······.
“그래서 잡혀갈까 봐 도망 왔어.”
내 방 바로 옆에 딸린 작은 공간.
지금은 휴게실처럼 쓰이는 비좁은 방에서 나는 피식거리며 혼잣말을 했다.
물론 스스로에게 하는 말은 아니었다.
이 방을 쓰던 이에게 건넨 말이었다.
“···시녀가 쓰던 방 아닌데.”
벽에 붙은 안내문에는 이 방을 백작의 시중을 들던 시녀가 썼을 거라 추측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구조상 원래는 그게 맞지만, 사실 여긴 일페르소의 자리였다. 더 크고 잘 꾸며진 개인 방이 바로 밑에 층에 있었지만, 그는 항상 여기서 잠을 지새웠다.
언제 발작을 일으킬지 모르는 날 위해서.
방 한가운데에 서서 둘러보다가, 한쪽 벽에 설치된 벤치에 천천히 앉았다.
시야가 낮아진다.
딱 이 정도 높이였지.
당시, 내 눈높이가.
익숙한 시선으로 마저 방안을 살피며 내가 물었다.
“잘 지냈지?”
툭 물어보고서, 말없이 궁금해했다.
내가 죽은 뒤, 일페르소.
······너는 어땠는지.
#
한서호가 바덴바덴으로 떠난 지도 며칠이 지났다.
알렉스와 니콜라이는 음식을 이리저리 나른다.
레스토랑에 가득 찬 손님들을 바라보던 알버트가 다시 서류 더미를 꺼내놓고 업무를 이어나갔다.
그와 마찬가지로 각각 체코와 베를린 필하모닉의 지휘자인 데이빗과 프랑코도 휴가가 무색할 만큼 여러 일과 전화에 시달렸다.
이윽고, 손님들이 밀물처럼 빠져나간 밤.
알렉스가 도와줘서 고맙다며 니콜라이의 어깨를 두드렸다. 니콜라이는 접시를 마저 옮기고서 털썩 자리에 앉았다. 공허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던 그가 낡은 기타를 들고 와 튕겨본다.
“소리 하나도 안 맞네.”
“음정이 문제가 아니라 음색도 맛이 갔는데?”
알렉스의 말에 몇 번 더 기타 줄을 잡아 뜯는 니콜라이.
“서호가 연주할 땐 괜찮던데.”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훌륭했지.”
“그러게.”
“쩝. 배는 안 고파? 선배님들. 배는 안 고프세요?”
“슬슬 먹을 때 됐지. 뭐야, 기타 치게?”
알렉스에게 끄덕인 데이빗이 니콜라이를 보며 물었다.
“그냥 만져봤어요. 저 못 쳐요.”
“한 번 연습해 봐. 기타 연주 듣고 싶네. 서호도 독학으로 보름도 안 됐대.”
“그 친구가 대단한 거라니까요. 아실만한 분이.”
“몰라. 몰라.”
노인의 생떼에 바이올린 거장인 니콜라이가 기타를 만지작거리다 결국 포기할 때쯤, 주방으로 들어간 알렉스가 간단한 음식과 술을 가지고 나왔다.
······가게 문을 닫았다.
블라인드를 모두 내리고, 테이블이 모여 앉은 다섯 명의 거장.
자연스레 음악 이야기가 이어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며칠 전 같지 않고, 이따금 정적이 찾아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들도 내심 느끼고 있었다. 뭔가 부족하다는 걸.
그리고 그게 한서호 때문이라는 걸.
“근데 서호는 대체 무슨 일 때문에 바덴바덴엘 간 거예요?”
“가족들과 추억을 되짚으려고 가는 것 같더군.”
알버트의 대답에 데이빗의 눈이 가늘어진다.
“설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잘 살아계셔.”
“혹시나 했네. 다행이야.”
“······.”
“······.”
“흠. 그나저나 체코 필은 올해 계획이 어떻게 돼? 오늘 이것저것 보고 받았는데 머리 아프네.”
“왜? 월드투어라도 해?”
“그건 아닌데, 그만큼 일정이 빡빡하네. 공연 요청도 엄청나고. 다 오케이 했다간 단원들 죽어 나가겠더군.”
“아아. 우리야 뭐 일단 유럽 투어는 항상 고정이고. 추가로 미국 투어를 고려 중인 것 같긴 한······.”
그때였다.
프랑코가 탁! 하고 맥주잔을 내려놓았다.
남은 맥주가 거칠게 흔들리며 기포가 일어났다.
그 모습을 빤히 내려다보며 프랑코가 말했다.
“추워.”
알렉스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요? 히터를 좀······.”
“됐고. 몸 녹일 겸 온천이나 하러 가자.”
“네? 갑자기요?”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이에 프랑코가 턱수염에 묻은 맥주를 닦아내며 씩 웃는다.
“어. 온천.”
마침 온천으로 유명한 바덴바덴이 바로 옆 동네에 있었고.
나머지도 갑자기 온천이 가고 싶어졌다.
아니, 사실 온천이 아니었어도 상관없었을지도······.
다음날.
만하임의 작은 레스토랑, ‘또 다른 꿈’의 입구에 큼직한 종이가 붙었다.
[휴가 다녀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