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127
127. 가장 유명한 신입생 (6)
강준서를 따라 들어간 술집은,
주인이 의도했든 아니든 나름대로 프라이빗이 지켜지는 분위기였다.
앉았을 때 머리 위를 훌쩍 넘는 소파 등받이가 앞 뒷사람과 눈 마주칠 일이 없었고, 옆에도 출처를 알 수 없는 문양의 칸막이가 있어 건너편 사람과도 마찬가지였다.
“학교 주변에 이런 데가 있었어?”
“우리 학교에서 아직도 저런 말 쓰는 애가 있네.”
김영태의 물음에 대답하는 이소현이었다.
나는 자연스레 궁금해져 물었다.
“왜요?”
“학교 주변 술집 중에 4분의 1만 가도 알콜 중독자 소리 들어. 캠퍼스가 좀 커야 말이지.”
“아아.”
하긴. 이 학교 주변에 술집들이 얼마나 있을지 감도 안 잡힌다.
대충 빈 테이블에 앉으며 강준서가 말했다.
“여기가, 클래식부 애들은 잘 안 오는 곳이지. 건물 위치가 좀 멀잖아.”
“그러니까. 난 당연히 ‘캐빈’으로 갈 줄 알았는데.”
“거긴 치킨 무가 맛없어.”
“그게 15분이나 더 걸은 이유냐···.”
허탈해하는 김영태에게 강준서가 킬킬 웃어 보인다.
“치킨을 보좌하는 치킨 무라면 그럴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본다. 제2 바이올린 같은 느낌이랄까. 아무튼, 여기 뭐가 맛있냐면······.”
이윽고 안주들이 깔리고, 술이 나와 잔을 채웠다.
나와 이소현은 일단 가볍게 맥주. 강준서와 김영태는 소맥. 그리고 신수아는······.
“수아는 소주지?”
“어. 맥주는 배불러.”
조금 의외네.
어쨌든, 술잔이 부딪친다.
안주는 기름이 뚝뚝 흐르는 만큼 맛있었고, 이른 시간이라 텅텅 비어있던 자리들도 어느새 강의 끝난 대학생들로 채워져 북적거리기 시작한다.
확실히, 캠퍼스 근처 술집에서만 느낄 수 있는 분위기가 따로 있긴 하다.
“이렇게 모인 거 진짜 오랜만이다. 서호 만나기 전에도 이렇게 네 명이 술집 온건 손에 꼽을 것 같은데.”
“특히, 수아가 참석이 힘들었지. 일 없는 날엔 집에 갔다가 또 연습실로 가고 그랬으니까.”
“지원 사업에 참여하고 나서부턴 신수가 훤해~그래서 신수안가?”
“미친···.”
신수아가 왈칵 욕을 내뱉었다.
나머지도 황당한 눈빛으로 강준서를 나무랐다.
“얘 벌써 취했나 보다.”
“어쩐지 서호 있다고 알쓰가 잘 마시는 척한다 했다.”
“왜! 서호는 웃는구만~.”
날 가리켜는 강준서.
덕분에 홱 돌아본 신수아와 눈이 마주쳤다. 얼른 입꼬릴 정리했다.
“···맛있어서 웃었어요. 이거. 치킨 무.”
포크에 꽂혀있는 치킨 무를 흔들었다. 일종의 백기랄까. 항복이라고.
그러자 신수아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씰룩거렸다. 웃음을 참는 건지, 욕을 참는 건지 모르겠네.
다행인 건, 이소현이 적절한 때에 새로운 화두를 꺼냈다는 것.
“그래서 수업 어때? 지루하진 않아?”
“재밌던데요. 배울 것도 많을 것 같고.”
“이제 학교에서 배울 거 없다고 말하는 애들한테 한마디씩 해야겠다. 한서호가 배우는데 니들이 뭐?”
“하하, 그러면 저 욕 먹어요.”
“아니 근데, 정말 궁금하긴 했어. 네 선택이니 왈가왈부할 건 아니지만. 솔직히 굳이 다닐 필요 없었잖아. 이럴 시간에 음악을 하면 대단한 결과물들이 더 많이 나올 텐데, 라면서 아쉬워하는 평론도 봤었거든.”
“다 때가 있다잖아요. 지금은 여러 경험도 하면서 같이 음악하는 사람들하고 이런저런 이야기 하면서, 이렇게. 즐길 때인 것 같았어요.”
방구석에 있다고 무한정 좋은 곡들이 쏟아져 나오는 건 아니니까.
오히려······.
“그리고 지금 하고 있는데요. 음악.”
“지금?”
“네. 지금, 하고 있어요.”
이 순간에도 오감, 육감이 끊임없이 자극되는 느낌이다.
별생각 없이 나누는 대화가. 조금 진지한 고민이. 그 사이로 문득문득 들려오는 주변 테이블의 소음이.
그리고 내 시야에서 끊임없이 바뀌는 사람, 표정, 모든 것들이.
영감이 되어 집적되어간다.
소재를 모으는 것도 작곡의 한 과정이니, 이것도 음악을 하고 있다고 봐야겠지.
벙찐 얼굴인 이소현 옆에서 김영태가 잔을 들었다.
“······자, 짠!”
“오, 이런 느낌도 충분히 음악적으로 표현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네요.”
“에라이.”
그때였다. 갑자기 배경음처럼 흘러나오던 가요가 멈춘 것은.
다른 테이블들에도 잠시 어수선한 분위기가 찾아왔지만 이내 익숙한 듯 다시 떠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건 강준서도 마찬가지였다.
“연주하려나 본데.”
“갑자기? 누가?”
“여기 실음과 애들이 자주 찾거든.”
“아, 걔넨 여기 서문 쪽에 건물이 있었지.”
이소현이 주억거린다.
나는 흥미로워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미어캣마냥 주변을 둘러보았다. 술집 구석, 앰프가 있는 곳에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곧이어 기타 소리가 짤막하게 울려 퍼진다.
뒤이어 청아한 목소리도.
-아, 음음! 안녕하세요~.
간단한 소개와 함께 손님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실음과 학생들.
손님들 입장에선 오히려 좋은 상황인지라 환호가 넘실거렸다.
이윽고, 기타 줄 튕기는 소리와 함께 노래가 흘러나온다.
박자에 맞춰 다리를 구르며, 은은하게 취기가 오른 채로 음악을 듣는다.
“좋은데~.”
“목소리 매력 있으시다.”
“자, 짠할까?”
이곳은 영국의 한 펍처럼 운치 있지도 않았고.
기타 소리도 그곳에서 울려 퍼지던 것처럼 수준 높지 않았다.
목소리 또한, 에밀리의 보컬에 비하면 가냘프다.
그래서 이렇게나 사소하지만.
이런 곳에서도 음악은 만들어진다.
마치 선율처럼, 영감이 살랑살랑 눈앞에서 흔들렸고.
모든 게 음악으로 느껴진다.
그게 너무나 즐거웠다.
“좋다.”
작게 내뱉은 말을 들은 건지 신수아가 내 쪽을 돌아본다.
개의치 않고 소파 너머로 슬쩍슬쩍 보이는 실음과 학생들을 감상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슬며시 입꼬릴 올렸다.
······나는 내가 브리너처럼 변해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어쩌면.
그게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한서호는.
음악가가 되어가고 있었다.
브리너가 그토록 원했던, 행복한 음악가가.
#
“아, 걔네들이 서호도 알아보고 기타 한 곡 청해서 멋들어지게 연주하나 했으면 레전드 찍는 건데. 유튜브 한다더니 감들이 없네! 이 조회수 대박의 기회를!”
한껏 흥이 오른 강준서가 벌게진 얼굴로 아쉬워했다.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네. 세상은 클리셰대로 안 돌아간다고.”
“쟤 고딩 때부터 저랬잖아. 여자친구랑 놀러 갔는데 우연히 마침 거기에 바이올린이 있고, 자기가 그걸 딱 연주해서 멋진 모습을 보여줄 거라나.”
“애초에 여자친구에서부터 망상 증명됐죠?”
“에라이. 나쁜 놈들. 친구 맞냐.”
강준서가 툴툴거리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 모습을 보며 히죽거리던 김영태가 전철역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서호야, 얘 좀 잘 데려다줘라. 홀랑 가서 미안!”
그렇게 전철로 3 정류장만 가면 집인 김영태가 사라지고.
우리는 택시를 잡아탔다.
가장 효율적인 동선으로 움직여, 가장 먼저 이소현이 내렸다.
그리고 다음 목적지는 강준서의 집.
“후아. 오늘 재밌었다으아~.”
“몇 번을 말해.”
조수석에 탄 강준서의 말에 신수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서호야, 오늘.”
“아 쫌.”
“아까 네가 카페에서 말했던 거 있잖냐.”
“···?”
술주정을 부리는 줄 알았던 신수아가 짜증 섞인 말투를 삼켰다.
“어떤 거요? 형 훈남인 거요?”
“흐흐, 그건 아침에 거울 보면서 나도 느끼는 거고. ······그거 말고. 많이 달라졌다는 거.”
“그거 왜요?”
“고맙다고. 네 덕분이니까.”
“아녜요. 형 실력이 좋아진 건데 왜 저한테 고마워요.”
그렇게 말하는데, 목소리가 들려왔다.
“솔직히 너 가르칠 때, 난 자존감 완전 바닥이었거든. 내색은 못 했지만.”
강준서가 한 번도 들려준 적 없던 축축한 목소리가.
#
같은 시각.
독일의 베를린.
불과 몇 주 전 모였던 이들이 다시 한자리에 모였다.
음악과 역사, 문화에 관련된 교수, 학자, 그리고 음악가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 자리에 연방 문화 미디어부 측 새로운 인물이 자리했다는 것인데, 그 사람 한 명만으로 분위기가 이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문화 미디어부 장관, 빅터 제르필드.
그가 회의에 참석한 것이다.
“여러 분야의 전문가분들이 조언해주셔서 내부에서도 수월하게 악보들의 거취와 초연에 대한 윤곽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다만.”
부드러우면서도 강건한 그의 목소리가 회의장에 울렸다.
“아직 초연에 대해 정해야 할 것들이 남아있어 이렇게 바쁘신 분들을 다시 모셨습니다. 우선, 제가 여러 이야기들을 듣고 가장 궁금했던 건 베를린 필하모닉의 초연에 한서호가 꼭 참여해야 하는냐는 것이었죠.”
그의 시선이 한 곳에 잠시 멈췄다.
한서호를 객원 연주자로 초대하고 싶다 주장한 베를린 필의 프랑코였다.
“사실 한서호 군에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야만 하는 게 당연하죠. 그가 아니었으면 대체 얼마나 시간이 흘러서야 그 도서관에 묻혀있던 음악들을 발견했을지 누구도 장담 못 하니까요.”
지난 회의 때 한서호가 연주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드러냈던 반대파의 표정이 굳는다.
“그거에 대해선 충분한 감사 표시를 해야 하는 건 분명합니다. 하지만 장관님. 연주를 맡기는 건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모차르트의 오스트리아도, 파가니니의 이탈리아도 이에 대해 의아해할 겁니다.”
“그렇다고 하시는군요. 마에스트로 프랑코.”
장관의 말에 자연스레 모두의 눈이 그가 향해있던 곳으로 몰렸다.
프랑코는 덥수룩한 수염을 매만지며 담담하게 그 시선을 받아냈다.
“체고 필하모닉의 지휘자가 경악했습니다.”
“···?”
시선들이 의문 어린 눈빛으로 바뀌어도 마찬가지.
프랑코는 덤덤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간다.
악기의 왕이라는 피아노도.
클래식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바이올린도 아닌.
조율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낡은 통기타.
그 통기타가 하나의 오케스트라가 되었던 순간에 대하여.
“쇼팽 콩쿠르의 우승자가 전율했고, 아마티의 주인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현시점. 가장 위대한 거장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한 소년에게 태풍과도 같은 감정을 느꼈던.
그때의 이야길 이어간다.
“뉴욕 필하모닉의 거목. 제가 아는 한 베토벤을 가장 열렬히 사랑하는 지휘자가 현실에서 베토벤을 보았습니다.”
그 태풍 속엔 수많은 감정들이 있었다.
어쩌면, 말도 안 되는 재능에 대한 질투도.
그동안 이룬 것들에 대한 회의도 있었을 거다.
하지만, 모험에 평생을 바친 늙은 모험가가 자신이 지나온 길이 고작 빙산의 일각이라고 느꼈을 때.
허탈함 뒤엔 무엇이 찾아올까?
“그리고 고전을 추종하며 못난 제자를 키운, 못난 베를린의 배불뚝이 노인이. 기타 연주 한 번에 18세 소년을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환희(歡喜)다.
심장이 펌핑되고, 머리가 맑아지며, 몸이 젊어진다.
더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이닥치고.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된다.
종착한 모험가는 결국, 다시 모험을 떠난다.
······여전히 담담하지만.
그 안에 여러 감정이 담긴 대답.
좌중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여전히 속으로 콧방귀를 뀌는 이가 없진 않았지만.
대부분은 궁금해졌다.
대체 뭐가 저 거장을 저렇게나 흔들어 놓았는지.
그리고 그건.
“마에스트로 프랑코.”
“네, 장관님.”
장관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프랑코를 불러놓고, 잠시 침묵하다가 이내 깊은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전 세계를 납득시켜야 할 겁니다.”
허락인지, 협박인지 모를 대답.
하지만 프랑코는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이 정말 바이킹 같아 보일 정도로 호쾌했다.
“전 세계뿐만 아니라, 이 음악을 만든 위대한 대가들.”
그가 선언한다.
“위대한 후원자, 브리너 백작까지도 납득할 무대를 만들어 보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