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145
145. 과거 (2)
“자, 그래서······.”
사락—.
펜촉처럼 뾰족한 인상의 남자가 진지한 얼굴로 프로필을 넘겼다. 그 모습조차도 냉소적이란 느낌이 들어 건너편에 앉은 곰 같은 남자는 두툼한 손을 꼼지락—꼼지락— 못살게 굴었다.
“호르니스트, 윤태환님?”
“아. 네넵!”
의욕에 찬 대답을 보냈지만, 남자의 표정은 여전히 냉소적이었다.
“기본 적힌 내용만 전달해드리면. 저희 DnM에서 앞으로 클래식 쪽에도 사업을 확장하려고 하는데, 그래서 연주자분들이 아주 많이 필요합니다. 다방면으로 알아본 결과, 윤태환 연주자님이 워낙 실력이 출중하시단 얘길 들었습니다.”
“에휴, 아닙니다. 하하.”
윤태환이 휘적거리자 남자가 프로필에서 눈을 뗐다. 그가 다 들었다는 식으로 말한다.
“아니긴요. 한서호 사단이란 얘기 들었는데.”
“아, 저 그건 그냥 제가 예전부터 녹음을 도왔던 회사라 운 좋게 서호한테까지 연결된 거라서요······.”
우물쭈물 대답하는 윤태환을 보며 남자가 픽 하고 웃었다. 그리고는 손깍지를 끼우며 끄덕였다.
“하긴, 한서호 사단 같은 건 애초에 없다는 얘기도 돌긴 하던데······. 두 번째 앨범은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할 거란 소문도 있고. 뭐, 그게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이상의 위치까지 올라갔는데 한국에서 소꿉장난은 그만하겠죠.”
별말 없이 작게 끄덕인 윤태환이 뭔가를 고심하다가 입을 열었다.
“저, 근데······.”
“네 말씀하세요.”
“기본적으로 제가 소속 연주자는 아니고 프리랜서니까, 공연이 들어와도 반드시 해야 하는 건 아니죠?”
“그럼요. 저희가 좀 귀찮아지기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저희가 호르니스트를 윤태환씨만 믿고 가는 건 아니라서요. 이미 여러 호르니스트 분들과 연락하고 있으니 먼저 스케줄 생기시면 바로바로 알려주세요. 그렇다고 미리 잡힌 스케줄을 펑크내시면 절대 안 되고.”
“네, 알겠습니다.”
“근데 왜요? 뭐, 다른 일정 잡힌 게 있으세요?”
남자의 질문에 윤태환이 고갤 저었다.
“아뇨, 그건 아닌데······ 혹시 연락 올까 해서요.”
“누구한테—.”
되물으려던 남자의 시선이 책상 위를 굴렀다. 그의 눈이 향한 곳은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윤태환의 핸드폰.
“전화 오는 것 같은데요?”
“앗 죄송합니다. 무음으로 해놓아서.”
윤태환이 핸드폰을 집었다. 남자의 시선이 쭈욱 딸려온다. 뚫어질 듯 핸드폰을 보고 있다.
그가 왜 저런 반응인지, 윤태환은 발신자를 보고 나서야 이해했다.
[고마운 서호]#
“연주자님!”
의자를 빙그르르 돌리며 내가 반갑게 인사했다.
핸드폰 건너편에서 정말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가 넘어온다.
-어, 서호야.
볼륨이 작다. 물론 윤태환에겐 이상한 일이 아니다. 워낙 소심한 양반이니까. 그럼에도 유독 소곤거리는 것 같아서 물었다.
“지금 일하는 중이셨어요?”
-어? 아. 일 얘기 하는 중이긴 했어. 어떻게 알았어?
“연주자님은 목소리만 들어도 다 티 나요. 그럼 제가 이따가 연락드릴게요.”
-아냐, 아냐. 양해 구하고 나온 거라 지금 얘기해도 괜찮아.
“정말요? 그럼 빠르게 얘기할게요.”
사양하지 않았다. 일 얘기 중이었다잖나. 그 일이 나랑 겹치면 어떡해.
머릿속에 그려진 그림에 윤태환이 빠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얼른 내뱉었다.
“저 좀 도와줘요.”
장난 반, 진담 반으로 던진 요청에.
-알겠어.
고민 따위 없는 대답이 들려왔다.
그리고 이어서 내게 묻는다.
-내가 언제 필요한 건데?
이렇게 든든할 수가 있나.
······대강의 계획들을 전달하고, 자세한 내용은 정리해서 보내주기로 했다. 그리고 전화를 끊자, 자동으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시선을 내려 책상 위에 올려진 프로필들을 내려다보았다. 윤태환을 끝으로 모든 전화를 다 돌렸다. 그리고 모든 이름에 체크가 되었다.
즉, 첫 번째 앨범을 완성했던 멤버가 두 번째 앨범에서 그대로 다시 모이게 된 거다.
이렇게 되길 내심 바랐지만, 막상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이 알겠다고 하니 기분이 묘하다.
스케줄이 불규칙한 연주자들 특성상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곧 다들 보겠네.”
내가 전생의 인연들과 만나는 동안, 다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얼마나 달라졌을까?
넘실대는 설렘을 느낀다.
사람들 말대로 ‘한서호 사단’, 뭐 그런 건 아니지만.
알버트가 말했던 것처럼 ‘한서호 필하모닉’은 더더욱 아니지만······.
그래.
‘동료’가 좋겠다.
#
차에서 내리자마자 얼른 학교 건물로 들어갔다.
그래도 모자를 푹 눌러쓴 덕분인지 실기실에 도착할 때까진 아무도 날 알아보지 못한 것 같았······.
“한서호! 한서호래!”
닫히는 문 사이로 들려오는 목소리.
어림도 없지.
입맛을 다시며 모자를 벗었다. 눌린 머리를 정리하며 주변들 둘러보았고, MT 때 조원들이 앉아있는 자리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무슨 소리냐! 우리가 어떻게 널 따돌려. 어디 가서 그런 소리하지 마라. 국민들한테 돌 맞는다 진짜!’
‘그래. 네가 우릴 따돌리면 모를까. 우린 네가 뭔가 연예인 같고, 또 당연히 바쁠 테니까 여러모로 말 걸기가 어려웠지. 게다가 한 달도 안 돼서 또 음악회 때문에 가기도 했구.’
MT가 무르익었을 때쯤 나눴던 대화가 떠올라 픽 하고 웃으며 빈자리에 앉았다.
복도에서 들려온 목소리 덕에 집중된 시선들이 졸졸졸 따라와 멈췄다. 당연히 조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안녕.”
“어어어, 어 안녕.”
어가 몇 번이야?
어디 보자.
김진성, 임현택··· 그리고 얘가 윤소영이고.
시선 끝에 잔뜩 기대에 찬 눈으로 날 보고 있는 여학생이 보인다. 막걸리 마시고 들어왔던······.
“강단비.”
“그러취! 기억하는구나?”
덩실거리는 강단비를 보며 웃다가 대화 주제가 MT 후일담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다음날 속이 쓰려 죽는 줄 알았다느니, 집 도착하자마자 쓰러져 잤다느니.
나는 곧장 작업실로 갔다는 얘길 했다가 벙찐 조원들을 마주했다. MT로 가까워졌던 거리감이 다시 확 느껴진다나.
그렇게 서로 농담을 주고받다가 강의 시간이 가까워지고, 과대가 낑낑거리며 가져온 비평지를 나눠주자 강단비가 입맛을 다셨다.
“뭔가 아쉽네.”
“뭐가?”
“나 지난주에 연주 끝났거든. 네 비평 듣고 싶었는데 아쉬워서······ 아 그러고 보니, 넌 연주 언제 해?”
“나 오늘이야. 연주할 차례.”
“대박······.”
“한서호 연주 직관인가.”
조원들이 눈을 빛낸다.
김진성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몇 줄 앞자리로 이동해 앉아버렸다.
“저 똑똑한 새끼.”
임현택도 얼른 그 옆으로 향한다.
그 모습을 어처구니없이 바라보던 여학생들이 내게 물었다.
“그래서, 누구 곡 연주하는데?”
“자크 타르티니.”
내 대답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게 누군데?”
#
“악보는커녕 연주 영상 하나 찾는 것도 힘드네.”
고가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연주가 끝나자 연주와 비평, 주인호 교수가 팔짱을 끼며 의자에 몸을 푹 기댔다.
그의 모니터엔 ‘자크 타르티니’라는 이름이 타이핑되어 있었다.
최근(-그래 봐야 바덴바덴 음악회가 있었던 4일 전부터) 브리너 백작의 헌정곡 중 하나를 작곡한 거로 점점 이름이 알려지고 있는 고전파 음악가.
그 덕분에 공개된 헌정곡 외의 다른 곡들도 사람들 사이에서 조금씩 회자되는 중이었다.
물론 아직까진 자료가 턱없이 부족했다. 인터넷 시대에 제대로 된 연주 영상 하나 찾는 게 쉽지 않을 정도로.
그나저나······.
‘생각보다 꽤 좋잖아?’
안경을 슥슥 닦으며 주인호 교수가 감상을 정리했다.
사실 곡의 짜임새에 있어서는 베토벤, 모차르트같은 대가들보다 단순한 편이다. 그만큼 곡이 단조롭고, 무난하지.
처음엔 직업이 따로 있었던 음악가라 음악적 고민이 부족했나 싶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일부러 편하게 듣기에 좋은 곡을 만들려고 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언뜻 현대의 세미 클래식이나 뉴에이지가 떠오른달까.
‘또 다른 직업이랑 어울리긴 하네.’
음악가 외의 다른 직업과 곡 스타일이 퍽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주인호 교수가 가방을 챙겼다.
그리고 한서호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이 곡을 연주해보겠다?’
이 피아노 소품곡을 연주하겠다고 했을 때, 그는 의아해했다.
‘아예 모를만한 곡을 선정하면 좋은 점수 받기 힘든 건 알지?’
사람들이 너무 잘 알아는 곡도 유명한 연주자들과 필연적으로 비교가 되니 불리하지만, 아예 모르는 곡도 마찬가지였다. 이쪽은 평가 자체가 어려워지니까.
그럼에도 한서호는 상관없다는 듯 끄덕였다. 어차피 한 달이나 음악회 때문에 학교를 나오지 않았기에 좋은 학점은 물 건너간 상황. 그래서 저러는 걸까, 아주 잠깐 의심했지만 이내 오산이었다는걸 깨달았다.
‘그냥 좋은 연주가 하고 싶어서요.’
좋은 점수보단, 좋은 연주라······.
묘한 기분이 또다시 꿈틀거리는 것 같다.
입 끝을 올린 주인호 교수가 실기실로 향할 준비를 하며 중얼거렸다.
“그래. 한서호가 돌아왔네.”
#
“자, 비평지 다 받았으면 차례대로 연주 시작하죠.”
앞에 쪼르르 불려 나온 학생들이 한 명씩 연주를 시작했다.
연주하는 연주자도, 이를 지켜보며 비평지를 채워나가는 관객들도 손이 바빠진다.
곡 선정에 관해선 자유로운 편이었기에 바로크 시대부터 근현대의 곡들까지, 다양한 연주가 이어졌다.
그렇게 앞선 세 명의 연주가 끝나고······.
“다음 학생.”
내 차례가 왔다. 무대 위로 올라가 피아노 앞에 앉자, 주변이 쥐죽은 듯이 조용하다.
뒤에서 주인호 교수가 말했다.
“작곡가랑 곡명부터 얘기하고 연주 시작하면 됩니다.”
“자크 타르티니의 피아노 소품곡 Op.7입니다.”
그리고는 잠시 좌중을 훑었다.
대부분의 표정이 아까 조원들과 비슷했다. 그게 누구냐고 묻는 듯한 눈빛들. 몇몇만 소리 없이 ‘아!’하고 놀라며 귓속말로 수군댄다. 아마 헌정곡 작곡가 중 한 명이란 얘길 하고 있는 거겠지.
역시 이 곡을 선택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손을 들어 건반 위에 얹었다.
그리고 연주를 시작한다.
D장조 특유의 밝으면서도 차분한 느낌.
나뭇가지 사이로 들어오는 햇볕처럼 화사한 정적이 느껴지는 곡.
동기가 명확한 선율이 흘러나온다.
참······ 한결같았던 자크 타르티니답달까.
자연스레 그에 대한 생각들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연주가 계속되면 계속될수록, 가랑비에 옷 젖듯이 머릿속이 온통 그에 관한 생각으로 차올랐다.
······그는 음악가였다.
듣는 이가 아무 생각 없이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음악을 만들고자 했던.
극적인 코드의 변화나 벨로시티의 폭을 줄여 잠잠한 호수처럼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음악을 선보였던.
음악이 가진 치유의 힘을 믿었던 음악가.
그리고.
동시에 그는 의사였다.
한 귀족에게 지독하게 들러붙어 있는 저주를 떼어내고 싶었던.
······무기력한 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