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173
173. 한서호가 몇 명인데? (8)
다음날 오후.
쇼팽 콩쿠르 본선 진출자 명단이 공개되자마자 연습실을 찾아온 건 최성령 기자였다.
“본선 진출 축하해. 퀸 엘리자베스에서 좋은 성적 거두고 얼른 바르샤바로 넘어가자.”
환하게 웃으며 덕담을 건넨 그녀가 어깨를 으쓱거린다.
“뭐 한서호의 본선 진출이 이젠 축하할 일인가 싶으면서도 또 안 하면 섭하니까.”
“감사해요. 그리고 전 지금 엄청 좋은데요?”
“그래? 의외네. 되게 덤덤할 줄 알았는데.”
“떨어지면 아쉬울 게 많아서요.”
참가자들의 연주부터 ‘쇼팽의 후예’의 음식들과 맥주, 그리고 음악과 내가 묵었던 호텔 방까지.
···막상 나열해보니 정말 많았네. 만약에라도 떨어졌으면 속 좀 쓰렸겠어.
내 앞에 자리하는 최성령 기자와 이제는 그녀와 짝꿍처럼 느껴지는 막내 기자.
본격적인 인터뷰가 시작되기 전에 내가 웃으며 물었다.
“오늘도 막내 기자님이 질문 하나 해주시나요?”
“왜? 내 질문보다 더 마음에 들었나 보지?”
“아뇨, 그건 아니고요. 물론 막내 기자님 질문도 좋았어요. 뭐랄까. 완전 느낌이 달라요.”
“으아, 너무 감사합니다.”
세배라도 드릴 것처럼 허리를 접는 막내 기자에 나도 덩달아 허리를 굽혔다.
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최성령 기자가 괜히 코웃음을 치며 막내 기자의 어깨를 두드렸다.
“참내, 아쉽겠지만 오늘 얜 다른 임무가 있어.”
그게 뭐냐고 물어보려는데, 연습실 문이 열렸다.
재생지 봉투를 품에 안은 신수아였다.
“와플 사 왔는데, 하나 먹을······.”
기자들을 보고 놀란 신수아가 ‘아’하는 소릴 내며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갑자기 최성령 기자가 씩 웃으며 가볍게 두드리고 있던 막내 기자의 어깨를 탁 쳤다.
“마침 오셨네. 출격.”
“넵.”
막내 기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신수아가 있는 쪽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죄송합니다.”
당황한 신수아가 인사를 하며 나가려는데, 막내 기자가 그녀를 붙잡았다.
“연주자님,”
“네? 아 이거 하나 드실······.”
“인터뷰 해주실 수 있을까요?”
저거구나. 다른 임무.
신수아가 저렇게 어리바리한 건 또 처음 본다. 가뜩이나 큰 눈을 더 크게 뜨고서 막내 기자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홱홱 고개를 돌린다. 그것도 모자라 자신이 들고 있는 와플을 내려다본다.
내가 소리 없이 웃었다.
‘설마 와플한테 인터뷰를 해달라고 했을까.’
상황 파악이 어느 정도 된 그녀가 하얗고 길쭉한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저요?”
그리고 막내 기자가 해맑게 웃었다.
“네. 수아 연주자님이요.”
#
······잘하고 있겠지?
인터뷰가 잠시 소강된 사이, 옆방에 귀를 기울여보았다.
들릴 턱이 있나. 녹음실인데. 이내 포기하고 최성령 기자의 질문에 다시 집중했다.
“아 맞다. 이건 편집장님이 꼭 물어보라고 하신 건데.”
내키지 않는 질문인 듯 펜으로 머릴 긁적이던 그녀가 슬쩍 물었다.
“쇼팽 콩쿠르도 한국인 비중이 많이 커졌지만, 퀸 엘리자베스는 170명 중에 무려 21명이야. 단일 국가 최대라는 타이틀을 갖게 되었는데··· 어떨 것 같아? 이번 한국 참가자들 성적.”
“글쎄요. 제가 아직 참가자들 연주를 못 봐서.”
“하긴······.”
“근데, 관심 있게 봐야 할 연주자는 분명 있어요.”
다시 한번 고개가 문 쪽으로 향하자 최성령 기자가 말꼬릴 올렸다.
“신수아?”
말없이 끄덕였다.
“그건 나도 좀 궁금하네. 외모도 실력도 유명해서 중, 고등학교 때 기대주였는데 어느 순간 영화 음악 쪽으로 빠지면서 관심이 흐려졌던 루키라. 그 업계에선 그래도 유명했다던데. 어때, 신수아라는 연주자는?”
“멋진 연주자예요.”
“그래? 그럼 참가자들을 잘 모르니까 신수아로 한정해보자. 신수아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 거 같아?”
신수아가 놓고 간 와플을 우물거리는 그녀를 보며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개인적으로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나에게 쏠리는 건 원치 않는다.
하지만 그래서 이런 얘길 하려는 건 아니지.
“전 최대한 보고 싶죠.”
그건 자신들도 마찬가지라며 빙그레 웃는 그녀에게 내가 입을 뗐다.
“그리고.”
내가 뭐라고 이런 추측을 하나 싶지만······.
내 전생의 별명이 그래도 음악의 예언가 아닌가.
“전 그렇게 될 것 같아요.”
그래서 예언 한번 해보려고.
#
보자르 홀(Bozar Hall)에 일찌감치 모인 기자들은 자연스레 결선에 누가 들지에 대한 추측을 펼치기 시작한다.
왜 우승이나 입상도 아닌 하필 결선이냐.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의 결선은 여타 다른 콩쿠르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방식의 차이도 있지만, 2주 동안 결선을 위해 특별히 작곡된 곡으로 합숙까지 해가며 연습한다는 점이 특별하잖나.
그렇다 보니 입상도 입상이지만 결선을 목표로 하는 참가자들이 유난히 많았다.
······그 주제로 한참을 떠들다가, 이번엔 한 단계 높여서 우승에 대해 논하기 시작한다.
“난 솔직히···.”
목에 땀이 난다며 공연장 출입 카드를 벗어 휘휘 돌리던 덩치 큰 백인 기자가 뜸을 들이다 비장하게 말했다.
“한서호와 레오 뒤보셸의 경쟁이 아닐까 싶어.”
동시에 기자들의 눈빛이 팍 식었다.
벨기에에 와서 뭐가 맛있을까 고민하는데 누군가 비장한 말투로 ‘와플’이라 말하는 것 같달까.
이에 또 다른 기자가 보다 나은 화두를 던졌다.
“그래서, 누가 이길 것 같은데?”
이건 좀 흥미로운 주제였다.
예로부터 싸움 구경이 최고고, 구경하며 승자를 예측하는 게 도박으로 자리 잡을 만큼 흥미진진한 것 아니겠나.
카메라 가방을 점검하던 기자가 14-24mm짜리 커다란 렌즈를 카메라에 돌려 끼우며 말했다.
“누가 그러더라. 한서호는 이제 장 오슬로와 경쟁할 레벨이라고.”
은연중에 한서호의 우위를 점치는 발언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일리 있는 얘기이기도 했다. 작은 거장이라 불리는 한서호잖나.
거장을 탄생시키는 곳에, 이미 거장인 이가 참가한 셈이었다.
물론 ‘작은 거장’이란 타이틀을 불편해하는 시선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들도 대놓고 부정은 못 한다.
한서호의 행보가 마음에 안 들지언정, 작곡과 연주 실력은 억지로 폄하하려 해도 진짜였으니까.
차라리 불편함을 지우는 게 더 쉬울 만큼 말이다.
그러자 건너편 기자가 레오 뒤보셸도 무시할 수 없다는 듯 또 다른 이야길 꺼내 들었다.
“장 오슬로가 그러던데. 레오는 이제 자신에게 더 이상 배울 게 없을 정도라고.”
그 말은 최소 장 오슬로 자신과 비등, 혹은 그 이상일 수 있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었다.
다시 무게의 추가 맞춰졌다.
기자들의 표정이 슬슬 달아올랐다. 재밌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
게다가 그들은 기자라 여기저기서 들은 것도 많았다.
의견이 하나씩 얹어질 때마다 한서호 쪽으로 기울었다가, 또 다른 의견에 수평이 된다.
그렇게 콩쿠르가 시작되기도 전에 치열한 공방이 오고 갔다.
“역시, 한서호와 레오 뒤보셸이 각자 얼마나 성장했을지가 중요하겠네.”
“근데 한서호는 그동안 활동이 너무 많았잖아. 솔직히 차이코프스키 때보다 크게 성장했을 것 같진 않은데.”
“일반적으론 실력이 떨어지지 않았으면 다행이긴 한데···근데 또 한서호라 모르겠네.”
“쇼팽 콩쿠르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더라. 혁명, 죽여줬잖아.”
“피아노는 원래부터 대단했으니까.”
“그나저나, 그쪽도 경쟁 구도 제대로 만들었더라. 한서호와 벨라 타멜리아. 흥미진진하겠던데.”
샛길로 빠졌던 이야기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뭐, 우리가 아무리 이러쿵저러쿵 해봐야 결과는 무대에 올라 봐야 아는 거지.”
“그래. 우리가 뭐 ‘음악의 예언가’라도 되냐.”
결국, 누가 결선에 오를지 모르겠다는 흐지부지한 결말로 대화는 끝맺어졌지만, 그런 건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때, 가장 처음 콩쿠르 예측을 유도했던 기자가 A4용지 다섯 장에 달하는 170명의 참가자 명단을 비스듬히 바라보았다.
“갑자기 막 다크 호스가 튀어나올 일은 없을까?”
그 질문에 잠시 조용해진 기자들.
자신들의 경험으로 빗대어 선례를 훑던 그들 중 한 명이 툭 말했다.
“모를 일이지. 자주는 아니지만, 그런 경우의 수는 언제든 열려있었잖아. 콩쿠르엔.”
#
————!
격정적인 연주를 마치고 마침내 활을 내렸다.
레오 뒤보셸. 프랑스의 유망주를 넘어 이젠 신성으로서 완벽히 발돋움한 그는 오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바로 자신이 연주한 곡이 예전 장 오슬로가 이 자리에서 연주했던 곡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스승님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심지어 같은 예선에서 이 곡을 그대로 연주했었지.
언뜻 굉장히 뜻깊을 것 같은 구도지만, 사실 득보다 실이 많은 선택이기도 했다.
희대의 천재라 불리는 스승님과 같은 곡을 연주한다는 건 비교가 안 될래야 안 될 수 없을 테니까.
그럼에도 예선에서 이 곡을 결정했다.
자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란 듯이 연주했다.
스승님과 다르지만, 결코 모자라지 않는 연주를.
무덤덤한 스승님조차 미소를 숨기지 못했던 그 연주를.
그 어느 때보다 완벽하게!
하지만 무대를 내려와 기쁨을 만끽하며 쉬는 것도 잠시. 호텔에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뭐에 홀린 듯 다시 공연장을 찾았다.
한서호의 연주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누군가 바로 앞에서 팀파니를 두드리는 것 같았다. 그만큼 기대되는 순간이었다. 한편으론 무섭기까지 하다.
얼마나 달라졌을까?
사람들은 한서호의 활동이 워낙 다양하고 많아 연주 실력이 줄지 않았으면 다행이라고 했지만, 레오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 게 녀석에게 어떤 영향도 주지 못했을 거란 걸.
쇼팽 콩쿠르만 봐도 그렇잖나. 이름대로 혁명 그 자체였던 공연!
그러니 궁금하다.
바이올린은 또 얼마나 대단해졌을지.
내가 성장한 것과 비교하면 어떨지.
공연장은 방금 콩쿠르가 시작한 듯 생기가 돌았고, 스태프들은 지친 기색 없이 다음 순서를 준비했다.
객석에서의 기다림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한서호가 호명되며 객석에서 박수가 무대 위를 향해 쏟아졌다.
그리고. 한서호가 올라섰다.
이젠 그의 시그니처가 된 과르네리를 들고서.
———.
연주는 원래 거기서 흘러나왔던 것처럼 시작되었다.
섬세하면서도 여린, 그러니까 마치 휘파람을 길게 불어내듯 고도의 기교로 시작된 전주는 여름 바람처럼 불어와 귓가를 스치는 듯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E 단조의 밝고 쨍한 선율이 눈앞에서 맑은 하늘로 치솟는 고양감을 준다.
기존의 한서호가 보여줬던 강렬하거나 처절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서늘했던 음색이 완전히 배제된 연주.
의외였다. 힘을 뺀 것일까?
그렇다기엔······.
‘너무 좋은걸.’
한서호가 차곡차곡 쌓는 연주의 서사를 지켜보며 레오는 이내 깨닫는다.
파가니니의 곡이 아니기에 날카롭고 서늘할 이유가 없고.
모차르트의 곡이 아니기에 변덕스럽거나 교묘할 필요가 없다.
‘이 곡은 이래야만 하니까.’
—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저게 바로 한서호의 개성······.’
마치 작곡가가 살아 돌아와 연주하면 딱 이런 느낌일 것 같다는 생각이 번지는 것. 그게 한서호가 가진 능력이라 스승님은 말했지.
‘그 아인 연주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어.’
악보를 파고 또 파서 작곡가의 의도는 아마 이 정도쯤의 연주였겠지, 하고 짐작해야 하는 걸, ‘정확히 이거야.’라고 팍 짚는 것.
단순히 해석을 잘한다는 게 아니다. 잘한 해석도 완벽한 해석이라 할 순 없으니까.
음표 하나의 뉘앙스조차 천차만별인데, 어떻게 맞추겠나.
그럼 한서호가 정답인지 어떻게 아느냐고?
모른다. 어째서 자신의 무릎을 탁 치게 하는지.
그저 언어처럼. 무지(無知)에서 어느 순간 말문이 트이는 것처럼.
수준 높은 음악가라면 그냥 저게 맞다는 걸 알게 되는 것.
설령 수준이 얕아도 뭔가 다르다는 걸 깨닫는 것.
그게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음악이란 언어였고, 한서호의 진짜 능력이었다.
“대단한 녀석.”
작게 읊조렸다.
그리고 도달하는 클라이맥스.
마치, 한서호가 거대한 날개를 펼친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견주어봤다. 방금 전의 내가 한 연주는 저 거대한 새를 맞추어 떨어트릴 만했나.
···전혀.
깃털 하나 생채기 내지 못했을 것 같다.
아직 자신의 모든 걸 내보였다고 할 순 없지만, 적어도 예선에선 완벽한 패배였다.
정말 커다랗구나.
내가 넘어야 할 산은.
작은 거장이라는 아이러니한 별명이 코앞으로 다가온다.
레오는 벽을 마주했고.
그래서 미소 지을 수 있었다.
‘난, 스승님처럼 무료하지 않겠구나.’
완벽한 목표가 있으니.
그 순간, 무대에서부터 불어오는 피날레.
————!
선율은 전율이 되어 흐른다.
바람처럼, 소리가 들리는 곳이라면 어디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