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174
174. 한서호가 몇 명인데? (9)
무대에서 내려와 복도로 나가려는데, 마주 오고 있던 레오와 마주쳤다.
목적지가 나였는지, 활짝 웃으며 다가오는 그.
“멋지더라. 꼭 등반하고 싶을 만큼.”
“···등반?”
프랑스식 밈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레오가 능글맞게 웃으며 내게 물어왔다.
“이제 숙소로가?”
“아뇨, 이제 공연 봐야죠.”
어깨를 으쓱거리며 답하자 레오가 두어 번 눈을 깜빡이다가 크게 웃었다.
“맞다. 잊고 있었네.”
“······?”
“한서호였지.”
그럼 내가 한서호지.
뭐, 속사정까지 얘기하자면 브리너였던 한서호였던 한서호 정도 되는 느낌이지만, 아무튼···.
레오가 씩 웃으며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나도 한서호로서는 나름 크다는 소리만 들으면서 살았는데, 여긴 아예 머리통 하나가 더 있으니 뭔가 어깨동무 당하기 이상적인 키 차이랄까.
“좋아. 그럼 나도 함께 볼까. 내 경쟁자가 너 말고도 또 누가 있을지 기대되는걸.”
“그냥 즐겨요.”
내 말에 시선을 내리는 레오.
그에게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될 만큼 대단했어요.”
경쟁자를 신경 쓸 필요 없다고 말하는 거다. 그저 자신이 가고 있는 길만 잘 닦아도 그 미래가 얼마나 대단해질지, 나는 보았으니까.
이러니까 진짜 예언가 같네. 쩝.
“······내 연주 봤어?”
“한서호잖아요.”
이번엔 도리어 내가 뻔뻔한 얼굴로 말했다.
다시 한번 웃음이 터진 레오에게 덧붙였다.
“이번에 제일 기대되는 연주 두 개 중 하나였죠. 무슨 일이 있어도 봐야 하는.”
“이야, 그거 영광인걸.”
기꺼운 얼굴로 웃던 레오가 문득, 나를 비스듬히 바라봤다.
“근데, 두 개라고?”
#
······그 이후로 우리는 콩쿠르 관계자처럼 공연장에 붙어있었고.
참가자들을 찍는 카메라마냥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연주를 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먼저 가도 돼요.”
좀이 쑤셔하는 것 같은 레오에게 슬쩍 말했다.
힐끔힐끔 내 쪽을 보던 레오가 홱 고개를 돌려 진지하게 묻는다.
“넌 정말 이게 그렇게까지 재밌어?”
“네.”
단호하게 답하자 레오가 눈을 빠르게 깜빡거린다.
“곡들도 전부 뻔하고, 실력들도······ 크게 차이가 없는데?”
저 말도 굉장히 순화시켜 말했다는 걸 알고 있다. 참가자들을 무시한다기보단··· 입맛은 높아질 대로 높아져 있는데, 먹기 힘든 음식들이 나왔다고 하면 되려나.
장 오슬로의 밑에서 수많은 명연주를 보고 들었을 그에겐 이 자리가 곤욕이었으리라.
“그래도 연주잖아요. 참가자들의 고민이 들어가 있는. 미묘한 차이도 나요. 실력차라기보단 각자 가진 느낌의 차이. 그런 게 앞으로 어떻게 변하면 좋을지 같은 것들도 떠올려보면 재밌고요.”
“그게 재밌··· 아니, 그 전에. 그게 보여?”
“들리죠.”
툭 던지듯 말하자, 레오가 ‘아’하는 입 모양으로 굳어있다가 소리 죽여 킬킬댔다.
“음악의 예언가라는 별명은 너한테 더 잘 어울리겠는걸. 음악의 예언가 알지? 브리너 백작.”
“알죠.”
“하긴, 네가 그의 헌정곡으로 초연까지 했었는데. 모를 리가···.”
말끝을 흐린 레오가 자세를 고쳐앉더니 다시 무대 위를 바라보았다.
“좋아, 나도 집중한다. 네가 듣는 걸 나도 들어보겠어.”
······그 후로는 한 번도 불편한 기색이 없었다.
다음날도, 그리고 또 다음날도.
오히려 내가 힐끔거렸을 때도 그는 흐리멍덩한 눈 대신 에메랄드빛 눈을 반짝이고 있었고, 어느 순간부턴 입가에 미소까지 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 연주자는 스승님이 아주 안 좋게 생각하는 습관을 갖고 있네. 손가락이 이렇게, 이렇게 꺾이는 거. 저것만 고쳐도 방금 프레이즈에서 더 매끄럽고 경쾌했을 거고, 론도(Rondeau)에 훨씬 어울렸을 텐데. 다음에 만났을 때 이런 얘길 하면 실례려나.”
조금 시끄러워졌다.
죽음을 몰고 다니면서 지가 탐정이라는 몸집이 작아진 녀석처럼, 참가자의 연주를 들으며 계속 뭔가를 추리한다.
······그래, 사람마다 스타일이란 게 있는 거니까.
다음 참가자가 무대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보며 나는 다시 장작을 넣었다. 이번엔 완벽하게 마른 장작이다. 기대감을 활활 타오르게 하는.
“왜?”
내 변화를 느꼈는지 레오가 물어왔다.
“아는 사람이어서요.”
빙그레 웃으며 말하자 그의 시선도 무대 위로 올라간다.
실크 재질처럼 번들거리는 은빛 드레스를 입은 신수아.
“오, 예쁘다. 방금 이쪽 본 것 같지 않아?”
“······.”
“아닌가.”
갸우뚱한 레오가 무대 위에 시선을 박고서 속삭였다.
“이번엔 어떨지 한번 예측해볼까?”
이젠 아예 아무것도 안 듣고 진짜 예언을 하려고 하네.
“일단 연주를 아주 잘할 것 같아. 미모가 뛰어나신 레이디들이 선율의 아름다움도 잘 잡아내시더라고.”
궤변이네.
저도 어처구니가 없는지 실실 웃는 레오.
그를 뒤로하고 마침내, 연주가 시작되었다.
부드럽게. 하지만.
————!
강렬하게.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레오의 표정에 놀라움이 번지는 게 보이는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작은 중얼거림이 옆에서 들려왔다.
“······뭐지. 이거?”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나와 그는 이번 콩쿠르에서 다양한 연주를 보았다.
어떤 연주는 졸음을 쫓는 카페인 같았고.
어떤 연주는 귓가를 씻어내는 바람 같았으며.
어떤 연주는 자로 잰 듯 딱 떨어지는, 그야말로 건축물 같았다.
그리고 지금, 이번 콩쿠르에선 보여진 적 없던 연주가 펼쳐지고 있었다.
견고히 자신의 길을 쌓아온 이의 연주.
그 연주는 마치 눈앞에 그려지는 그림과도 같았다.
입 끝이 치켜 올라갔고, 전신에 소름이 바삭거렸다.
“하···!”
급기야 레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나는 고갤 돌려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적어도 이 연주는 듣는 것만큼 보는 게 중요했으니까.
······음이 색을 머금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음색(音色)이.
그녀를 중심으로 물감처럼 번지고 있었다.
#
콩쿠르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것과 같다.
컴컴한 하늘에 찍혀있는 무수히 많은 별들.
그중에 유독 빛나는, ‘거장(巨匠)’이 될 자격을 가진 별들을 가려내는 것.
그렇게 가려낸 별들을 사람들은 ‘신성(新星)’이라고 부른다.
평소 기사를 일부러 찾아보지 않는 나조차도, 오늘만큼은 핸드폰을 붙들었다. 이미 나와 레오의 기사는 포화 상태였다. 둘이 붙어 다니며 다른 참가자들의 연주를 감상한다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
의외로 사람들은 자극적인 경쟁 구도만큼이나 이런 기사들에도 뜨거운 반응들이었다.
아무튼, 클래식의 전성기라는 누군가의 말을 증명하듯 물밀듯 쏟아지는 기사들 중엔 이번에 급부상하는 ‘신성’들의 이야기도 더러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회자되는 건 예상대로 신수아였다.
국내 포털 사이트는 물론이고, 해외 언론들까지 그녀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다. 그만큼 멋진 무대였으니까. 장 오슬로의 연주에 절여진(?) 레오마저도 그녀의 연주가 끝난 후 장장 한 시간 동안 칭찬을 쏟아낼 정도였다.
아무튼, 기분 좋은 바람이었다. 내게 불어오진 않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해지는.
붙들고 있던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걸음을 멈췄다.
진열된 녀석들 중 가장 윤기가 좔좔 흐르는 녀석을 선택했다.
“오늘은 갈릭 와플로 할게요.”
한국인은 마늘이지.
이젠 익숙할 정도인 와플 가게 점원이 씩 웃었다.
“발음 멋지네요.”
“하하.”
브뤼셀의 경우 불어를 쓰는 사람들이 많지만, 네덜란드어 또한 공용어다.
게다가 점원의 억양을 생각해보면 그가 불어보단 네덜란드어에 익숙한 북부 사람이란 게 티가 나서 오래전에 배웠던 네덜란드어를 슬쩍 써봤다.
그러니까, 200년 전에 배웠지. 벨기에 북부 지역의 한 귀족에게.
‘저 사람이 듣기엔 조금 고루한 어투였으려나.’
어쨌든, 점원이 봉투에 와플을 담아 건네기에 받아들고 연습실로 올라갔다. 곧장 내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옆방 문을 두드렸다.
역시나 대답이 없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한창 연습 중인 신수아가 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연주를 녹음까지 하는 중이었다.
소파에 앉아 그 연습을 구경했다. 그리고 연습을 마치고 나온 신수아에게 와플과 커피 한잔을 건넸다.
“와플 드세요.”
맞은 편에 앉아 와플을 확인한 그녀가 갸웃거린다.
“다른 맛이네?”
“매번 똑같은 거 드시길래 다른 거 사 와봤어요.”
“···맛있다. 이것도.”
저렇게 말할수록 눈은 슬퍼진다.
또 한동안 이것만 먹으려나···.
눅눅해지는 분위기에 내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기사 봤어요?”
“무슨 기사? 아, 내 기사? 봤지. 갑자기 붙은 별명가지고 애들이 얼마나 놀리던지.”
강준서랑 김영태가 아침부터 ‘은빛 신성’을 ‘은빛 마녀’로 바꿔서 단톡방을 도배해 놓은 걸 봤다. 엄청 웃었는데. 나도 슬쩍 한 번 불러보려다···.
“돌아가면 죽여야지.”
“······.”
잘 참았어. 나.
“근데 기사들은 왜?”
되묻는 그녀에게 씩 웃으며 핸드폰을 뒤적였다. 아무래도 못 본 것 같아서.
이미 온갖 기자들이 후속 기사를 올려 원문을 찾는 데 꽤 걸리긴 했지만, 갈릭 와플에 빠진 신수아는 재촉할 여력이 없었다.
마침내 원문 기사를 찾아 그녀에게 건넸다.
“이게 뭔데?”
“누가 누나를 언급했는지 보세요.”
“누가 내 얘길 했어?”
살짝 불안한 눈길이 핸드폰 화면으로 향한다.
나는 그 모습에 갸우뚱하면서도 뭔가를 물어보진 못했다.
이내 신수아가 온갖 감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화면 속에 들어갈 듯 집중하기에.
[어제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를 보았다.클래식을 즐겨 듣긴 하지만, 평소 콩쿠르까지 찾아 듣진 않았는데 이번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내 조력자들이 참가했으니까. 그리고 다시 한번 느끼고 싶었다. 그들의 음악을 들었던 순간을.
역시나 멋졌다. 특히, 신수아라는 연주자는 이전의 그녀가 맞나 싶을 정도로 대단해져 있었다. 그녀의 연주는 내게 수많은 영감을 불러일으켰고, 나는 당장이라도 연필을 들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조만간 ‘은빛 신성’을 원천으로 한 내 작품을 보여드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 그림의 빛을 채색해주었던 바이올리니스트 신수아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
[닐 하우저]“······.”
멍하니 바라본다. 몇 번이고 쭉 읽어 내려가더니 댓글로 넘어가서도 눈이 바쁘다. 그러는 동안에도 눈에 감정이 차곡차곡 쌓인다. 무슨 생각들이 스치고 있을까.
단순히 유명인의 칭찬에 기분이 좋은 느낌이 아니었다.
그건 과거를 곱씹는 듯했으며, 누군가를 떠올리는 듯했다.
마치 내가 전생을 되짚고, 옛 인연들을 그리워하듯이.
“저는 물 좀······.”
핸드폰은 그녀에게 맡긴 채, 나는 슬쩍 나왔다.
그녀가 자신의 감정을 찬찬히 돌아볼 수 있도록.
항상 연습실에 있던 그녀가, 지금도 여전히 연습실에 있지만.
많은 것들이 달라졌고 앞으로도 변하겠지.
그런 생각들이 머리에 번지자 자연스레 입꼬리가 올라갔다.
쫄쫄쫄——.
종이컵에 담기는 물처럼, 기꺼운 마음들이 나에게도 채워졌다.
왜 내가 즐거운 걸까.
왜 대견한 걸까. 왜 뿌듯한 걸까.
왜 내가··· 고마운 걸까.
의문은 종이컵이 비워지기도 전에 사라졌다.
‘그래, 그래서인 것 같다.’
나를 보는 것 같아서.
전생의 내가 이루지 못했던 결말을 지금 확인한 것 같아서.
슬쩍 문 쪽을 돌아보았다.
작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실루엣.
“······.”
다시 종이컵에 물을 받는다.
그렇게 나는 정수기 앞에 서서 신수아를 기다렸고.
······전생의 나를 위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