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195
195. 어떻게 버티셨습니까
한 달여 전.
“······.”
백선화의 시선이 자신의 아버지에게로 향했다.
로비 한가운데서 악보를 내려다보는 아버지.
그는 한동안 어떤 미동도 없었다.
“회장님, 여기 뒷면에도 글씨가······.”
그에게만 내려앉은 정적에 양가호 대표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내 말을 멈춘다. 백한길 회장이 자신은 안중에도 없이 악보만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양가호 대표가 백선화를 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양가호 대표도 끄덕이며 몇 발자국 물러났다.
‘꼭 음악을 감상하실 때랑 비슷하네.’
늘 저러셨다. 음악을 음미라도 하듯 눈을 감고서.
불러도 대답이 없을 정도로 깊게 빠지시곤 했지.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백한길 회장이 몸을 잘게 떨었다.
그 미묘한 변화를 알아챈 백선화가 다가가자 백한길 회장이 입을 달싹였다.
“잠시.”
그의 눅눅한 목소리에 백선화가 걸음을 멈췄다.
“잠시만, 혼자 있고 싶구나.”
······.
“저런 건 경매에 올리면 얼마나 하려나.”
백기우의 중얼거림을 들은 양가호 대표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여기서 ‘저런 건’은 분명 회장님이 들고 있는 악보를 말하는 거겠지.
“회장님께서 들으셨으면 바로 쫓겨났을 텐데.”
“아버지 앞이었으면 안 여쭤봤죠.”
능글거리는 백기우에 양가호 대표가 혀를 찼다.
백선화도 고갤 절레절레 저으며 복도에 등을 기댔다.
로비에 백한길 회장을 남겨두고 다 같이 안쪽 복도에 서 있다. 그렇게 잠시만 혼자 있고 싶다는 그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저 악보가 대체 뭐길래······.’
갸웃거리는 백선화.
그때 백기우가 손가락을 튕겼다.
“설마, 음표로 보물 위치를 표시한 지도라던가······.”
“······.”
잠시 뭔가 하고 고갤 돌렸던 걸 후회하며 다시 로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물론 각도상 아버지가 보이진 않았다.
그저 악보를 하염없이 내려다보던 좀 전의 아버지를 떠올려 본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던 걸까?’
걱정과 궁금증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대롱대롱 매달리는데, 마침 로비에서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울렸다.
위이이이잉—.
얼른 복도를 벗어나 로비로 향했다.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아버지.
그가 아무 말도 없이 양가호 대표에게 악보를 건넸다. 그리고 양가호 대표 손으로 들어간 악보를 면회 온 애인 바라보듯 미련 가득한 시선으로 쫓았다.
이를 느낀 양가호 대표가 물었다.
“한 번 더 보시겠어요?”
그러나 그는 괜찮다고 말하며 휠체어를 돌렸다.
“가지.”
“네.”
문화 재단 건물을 벗어나는 그들.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아버지?”
뒤따르던 백기우가 은근하게 물었고, 백한길 회장이 여트막하게 웃었다.
“아주 긴 이야기를 보았는데······.”
이어지는 말은 그들을 더더욱 미궁으로 빠트렸다.
“아무래도 그게, 내 이야기인 것 같구나.”
#
das Gedächtnis(기억)···.
die Heimat (고향)···.
der Rhein(라인강)···.
그저 떠오르는 대로 내뱉어본다.
울대를 비집고 낯선 단어들이 튀어나왔다.
어색하면서도 유창한 독어를 내뱉고서, 백한길 회장은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정신없이 사느라 영어조차 알파벳 따라 읽는 게 전부였던 자신이 난데없이 독일어를 할 줄 알게 된 것이다.
혼란스러웠고, 복잡했다. 이 나이 먹으며 산전수전 다 겪고, 모르는 것 빼곤 전부 안다고 생각했는데.
불과 3일 전에 갑자기 떠오른 기억들은 경험으로 납득하기엔 너무나 괴이했다.
악보 때문인 건가······.
정말 그것 때문에 전생의 기억을 되찾은 걸까?
‘전생이라···.’
누군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노망이 났다 손가락질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했다. 자신이 본, 오래된 이야기 속 일페르소라는 이는 분명 자신이었다.
어떻게 확신하느냐고? 모른다. 그저 내가, 나임을 깨달았을 뿐.
그렇게 마주한 전생의 나는 참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다.
자서전 권유를 수없이 받았던 현생보다 훨씬 더.
······먹고살 것이 없어 라인강을 따라 도시를 옮겨 다녔고, 위험천만한 상황을 수차례 넘겼다. 배고픔보다 위험한 것이 외로움이란 것도 그때 깨달았다. 기댈 곳이 필요했다.
그러다 마침내 바덴바덴의 백작에게 은혜를 얻었고, 그분의 아이를 보살피게 되었다.
그렇게, 기댈 곳을 찾아 고향을 떠난 이가 누군가의 기댈 곳이 되어야 했다.
쉬울 리 없었지. 근데, 그게 또 적성에 맞았는지 어느 샌가부터 진심을 다하고 있었다.
살기 위해 이곳까지 온 내가,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땀을 쏟고 있었다.
“······.”
그때의 기억들이 땅거미 지듯 천천히 떠올랐다.
그뿐만 아니라 감정이 요동쳤다.
백한길 회장은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
전생의 자신이 그리워하는 이의 얼굴과 목소리, 그리고 눈빛까지도.
그때 서재로 박 실장이 찾아왔다.
기억을 멈추고, 감정을 추스르고···.
백한길 회장은 박 실장을 맞이했다.
“부르셨습니까.”
고개를 숙이는 박 실장을 보며 문득 궁금해졌다.
“만약에 자네가 전생이 있다면 뭐였을 것 같나?”
뜬금없는 질문에, 박 실장의 대답은 더욱 의외였다.
“저, 제 전생 압니다.”
백한길 회장이 눈을 끔뻑인다.
안다고? 전생이 떠오르는 게, 생각보다 흔한일이었던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지만, 자신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몰랐기에 백한길 회장은 내심 놀랐다.
그러나 이어지는 박 실장의 대답은 실망스러웠다.
“전생 체험이란 거 받은 적이 있었거든요. 수백 년 전에 제가 아주 큰 상단 같은 걸 운영했답니다. 이를테면 거상이죠, 거상.”
“근데 지금은 아니라 아쉬운 눈치군.”
백한길 회장의 대답에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은 박 실장이 얼른 수습을 시작한다.
“아, 아닙니다. 그냥 재미로 전생 체험을 했던 거라. 하하핫! 어디 전생이 있겠습니까? 전부 장난이죠.”
“있어.”
“네?”
당혹스러운 물음에 백한길 회장은 대답 없이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나저나, 자네가 그런 야망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나 없는 사이에 여기 앉아보고 그러나?”
“아뇨! 회장님 절대 아닙니다.”
펄쩍 뛰는 박 실장을 보며 백한길 회장이 피식 웃었다.
이번엔 질문을 조금 바꿔본다.
“그럼, 내 전생은 뭐였을 것 같아?”
고심하던 박 실장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흐음. 전 아무래도 음악가가 먼저 떠오르네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음악가라······.
그토록 민망한 이름이 있을까.
자연스레 자신이 만든 악보가 떠오른다.
더욱 민망해진다.
백작님께 보낸 사사로운 편지인데, 그게 만천하에 공개되었으니······.
역시, 음악엔 영 재능이 없지.
“박 실장,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곳들을 받아 적게.”
백한길 회장이 괴상한 이름들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유창한 독어 발음으로. 그렇기에 박 실장은 몇 번이나 ‘예? 예?’ 되물으며 받아적어야 했다.
그렇게 완성된 이름들을 내려다보며 박 실장이 물었다.
“이게 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알려주면 내 자리 안 노릴 텐가?”
“회장님!”
클클. 유쾌하게 웃은 백한길 회장이 덧붙였다.
“유럽에 있는 오래된 성당들의 이름이야.”
“오래된··· 성당들이요?”
“아무리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이라지만, 신을 모시는 곳엔 피해가 적은 법이지.”
그러니, 원래 그곳에 있던 고서들도, 갈 곳 잃은 고서들도 모두 그곳으로 모여든다.
“그곳에서 찾아야 할 것들이 있어.”
“찾아야 할 것들이요?”
“그래.”
동조하듯 눈을 깜빡인 백한길 회장이 덧붙였다.
“한 사람이, 위대했던 흔적.”
······.
지시를 받은 박 실장이 서재를 나서고.
백한길 회장은 천천히 스피커로 다가갔다.
전생의 기억들이 겹치며 새삼 참 편리한 세상이란 걸 깨닫는다.
손가락 까딱이는 것만으로 이렇게 혼자 움직일 수 있고.
———.
음악을 틀 수도 있다.
무언가를 듣고 싶을 때 언제든.
대단한 발전이다. 세상이 개벽했다 해도 믿을 만큼.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이 병은 나을 방법이 없구나.’
고통스러웠던 지난 시간을 떠올린다.
원하던 모든 것을 거머쥔 자신에게 이 저주가 내려진 지 벌써 10년이었다.
그래, 10년······.
백한길 회장의 눈이 깊어졌다.
그가 허공에 시선을 둔 채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고작.”
#
며칠 뒤.
서재 문이 벌컥 열리며 장 교수가 헐레벌떡 들어왔다.
백한길 회장 옆에 바짝 붙어 초조해하던 박 실장이 방해가 될까 얼른 자리를 비켰다.
급박한 순간이 흘러간다. 박 실장은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비해 곧장 백기우와 백선화에게 전화를 돌렸고, 주치의 장 교수는 바쁘게 백한길 회장의 몸 상태를 체크한다.
“일단, 약을 투여했으니 머리가 무거워지고 호흡이 어려운 건 곧 괜찮아지실 겁니다.”
“다행입니다··· 회장님, 어떠세요?”
다가온 박 실장에게 백한길 회장이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툭 말했다.
“······왜 이렇게들 호들갑이야.”
방금 전 숨을 쉬지 못한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그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
그리고 장 교수에게 시선을 돌리는 백한길 회장.
“장 교수.”
“네.”
“증세를 늦출 수도 없고, 통증을 지금처럼 억누를 수도 없고, 경련을 멈출 수도 없었던 예전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네?”
되물은 장 교수가 백한길 회장의 굳은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예전 사람들은 정말 몸이 완전히 굳는 걸 기다리는 외엔 방법이 없었겠죠. 당연히 그 모든 순간이 지옥 같았을 거고요.”
“······.”
백한길 회장도.
아니, 일페르소도 짐작하고 있었다.
백작님의 고통이, 정말 지옥 같을 거란 걸.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짐작은 현실의 발끝도 미치지 못했다.
그런데.
그마저도 의학의 발전으로 훨씬 덜 고통스러운 것이라니.
“얼마나······어떻게······.”
그는 말을 맺지 못했다.
그저 소리 없이 탄식했다.
몸이 굳는 것도, 호흡이 가쁜 것도 그럭저럭 참을 만했는데.
이제야···.
이제야 찢어질 듯 아파온다.
#
······그날 이후로 통증에 잠 못 드는 날이 잦아졌다.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기력이 쇠했을 때 찾아오는, 늘 있어왔던 주기(週期).
하지만 장 교수는 항상 얘기한다. 익숙해져선 안 되는 가장 위험한 순간이라고.
백한길 회장도 이를 알고 있었다.
죽음이 다가와 데려갈지 말지 고민하는 순간이라는 걸.
‘하지만 지금은 절대 안 된다.’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일단 말씀하셨던 곳들로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보고를 마친 박 실장이 서재를 나서려다가 잠시 멈춰 섰다.
“아참, 며칠 전 밤새 편찮으셨을 때 서호한테 전화가 왔었습니다.”
“아··· 그래? 그럼 연락을···.”
“지금은 아마 콘서트 중일 것 같습니다. 쇼팽 콩쿠르 수상자들과 파이널리스트들 사이를 번갈아 가면서 투어를 도는데 현지 반응이 아주 난리라고 합니다.”
“그것참 멋지겠군.”
뿌듯한 미소를 지은 백한길 회장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오랜만에 한서호, 그 아이를 떠올렸다.
“···잠시 잊고 있었네.”
그만큼 정신없이 시간이 흘렀다.
삶에 위로가 되어준 아이의 행보를 응원하는 재미로 살고 있었는데, 더 큰 과제가 눈앞에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잘 지내고 있겠지.’
전생을 찾고 보니 그 아이에게 위로받은 것 말고도 고마워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자신조차 잊고 있던 백작님을 유명하게 만든 장본인이잖나.
한서호가 헌정곡들을 찾아준 덕분에 백작님의 업적이 조금이나마 드러나게 되었고, 음악계에서 위대한 후원자이자 음악의 예언가로 통하게 되었다.
물론, 정작 백작님은 그 아이를 퍽 싫어하실 거다.
‘유명해지는 걸 그토록 싫어하셨으니.’
아무튼, 알고 지내면 지낼 수록 참 신기한 아이였다. 한서호는.
“고맙구나.”
······정말 모든 게.
여트막하게 웃으며 손가락을 움직인다.
그는 스피커 쪽으로 향했다.
날이 저물고 있으니, 노을이나 바라보며 전생의 추억을 곱씹을 생각이었다.
한서호. 그 아이의 곡들을 배경 삼아.
195. 어떻게 버티셨습니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