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218
218. 죽은 자들의 증언 (3)
전 세계적으로 화제인 바덴바덴 성의 일명 ‘편지 보관소’가 개방된 지도 일주일이 지났다.
7일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지만.
적어도 음악에 평생을 사로잡힌 음악인들에겐 이미 관람을 마치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욕조에 앉아 복기하기에 차고 넘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클래식을 사랑한다 자부했던 이들 중에서 성에 차마 얼굴을 비출 수 없는 이들도 있었다.
바로, 공개적으로 한서호를 향해 손가락질했던 평론가들.
그들은 스스로가 뻗은 손가락에 입천장이 걸려 이도 저도 못 하는 상황에 놓였다.
누군가의 말처럼 방법은 두 가지였다.
평론가로서의 명예를 내려놓고 숨거나, 아니면 한서호에게 사과하는 것.
언뜻 보면 직업을 잃느니 후자가 편하지 않겠나 싶겠지만, 그렇게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이 그동안 평론이란 이름으로 절하한 연주와 연주자들이 대체 몇이겠나.
수많은 음악을 과녁 삼아 자신의 고집을 쏘아댔었지.
하지만 지금, 입장이 바뀌었다.
이번엔 자신들이 과녁이었다.
그것도 낭만주의 이후로 클래식에 가장 관심이 많은 시대에 말이다.
그러니 은퇴하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생겨날 수밖에.
원래 아무렇지도 않게 남을 평가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평가의 대상이 되는 것은 또 극도로 무서워하는 법이니까.
그래서였다.
지난 일주일 동안, 수천 명의 음악인들이 이곳을 방문했지만, 발터와 한서호를 저격했던 평론가들은 그림자조차 비추지 않았던 것은.
그러니, 한서호에게 일침을 가했음에도 이곳에 온 건······.
저벅. 저벅.
필리온. 그가 처음이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관람객이 적지 않았고, 일주일 동안 이곳에 진을 치고 있던 부지런한 기자와 이제야 이곳에 도착한 게으른 기자들도 다수였다.
하지만 그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복도를 걸었다.
사진 촬영이 불가능한 ‘편지 보관소’에 도착하기까지 그의 모든 모습들이 사진으로 박제되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저 한참 동안 유리 벽 너머의 편지를 보다가 이내 스캔본을 훑기 시작했다.
[너무나 답답하네. 누군가에겐 평생의 소망일 이 궁정 악장이라는 자리가, 내 음악에 족쇄를 채운 기분일세. 이전에 썼던 음악들을 연주하는데, 마차가 돌부리에 걸리듯 덜컹거리는 느낌을 받았네. 내 곡들이 더 이상 내 곡처럼 느껴지지 않아······]하이든의 편지였다.
자신의 상황에 불만이 가득한, 의외의 모습.
‘하이든은 자신이 궁정 악장직을 맡고 있는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새로운 주인이 음악에 무관심하다는 것에 실망하여 악장직을 내려놓았다.’
이게 세상에 남아있는 기록이었지만, 그건 은퇴를 앞당긴 ‘사건’일 뿐 원인이 될 순 없었다.
‘진짜 원인은 이것이었구나.’
작게 읊조리며 그는 아주 느릿하게 편지를 읽어내려갔다.
하지만 느긋하진 않게, 밀도 있는 시간을 보냈다.
그곳엔 무수한 하이든이 있었다.
익히 알고 있었던 전형적인 하이든, 자신의 음악에 지친 하이든, 은퇴 후 변화하는 하이든, 영국에서의 성공에 기뻐하는 하이든까지.
그리고 하이든만이 아니었다.
이곳엔 불세출의 천재 모차르트가 있었고, 위대한 음악가 베토벤도 있었다. 전설적인 파가니니가 있었고, 가곡의 왕 슈베르트도 등장했다.
지금의 클래식을 이룩한 대가들이 모두 이곳에 실존했다.
그리고 그들 중심에서 모든 이야기를 듣고 답하는 한 사람.
브리너 백작이 있었다.
······모든 편지를 읽고서, 그가 미련 없이 돌아섰다.
그리고 들어올 때 그랬던 것처럼 저벅저벅 성을 벗어났다.
지키고자 했는데.
해치고 있었구나.
#
“이렇게 될 줄 알았다니까요!?”
해외 포털 사이트 메인을 장식한 헤드라인들을 보며 월간 청중 막내 기자의 잔뜩 신난 목소리가 울렸다.
최성령이 어련하시겠냐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근데, 얜 도대체 언제까지 막내일까? 클래식이 이렇게 화제인데, 이쪽 업계에 오고 싶어 하는 애들이 아직도 이렇게 없나······.
쩝하고 입맛을 다시며 눈을 흘겼다.
“언젠 아티스트병 아니냐며.”
“어, 그, 그건 혹시나. 호옥시나 걱정되는 마음에 했던 헛소리구요. 속으론 믿고 있었다구요.”
“어련하시겠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최성령에 막내 기자가 헤헤 거리고 웃었다. 그러다 문득 궁금한 게 생겼는지 머리통을 갸웃거린다.
“근데 왜 아직도 인터뷰는 커녕 아무 입장도 안 내놓고 있을까요?”
“누구? 서호?”
“네. 지금 완전 전세 역전이잖아요. 이럴 때 딱 나타나서, 이럴 줄 알고 있었다 흠홧홧 하면······.”
“엄청 별로지.”
“그러겠네요. 별로네.”
“지금은 굳이 나설 필요 없긴 하지.”
피식 웃은 최성령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누군가 헛바람을 내뱉으며 뒤쪽으로 다가온 건 그때였다.
“말 잘했다, 최 기자. 한서호가 굳이 나설 일이 없어도, 우리 최 기자는 좀 나서야 하지 않을까? 네가 ‘더 클래식’ 홍보팀이야? 인맥 뒀다 뭐할래?”
“어어, 편집장님 인맥 발언. 그거 위험해요?”
“위험하긴 뭐가 위험해! 너도 내 인맥으로 들어온 거면서!”
“아, 맞네.”
‘인생 최대의 실수’라고 중얼거리는 최성령을 보며 편집장이 이마를 짚었다.
때마침 그의 신경을 긁는 벨소리가 울려댔다.
“누구 핸드폰이 이렇게 울려대?”
앞에서 눈을 끔뻑이던 최성령이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의자 뒤에 걸어둔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아, 제 거네요. 어··· 서혼데요?”
한소리 일발 장전하던 편집장이 입을 벌린 채로 멈췄다.
아직 통화 버튼은 누르지도 않았는데, 금붕어마냥 ‘받아, 얼른 받아.’라고 뻐끔거린다.
“기다리라더니, 일찍도 연락한다.”
-조금 바빴어요.
“앨범 내고 아무 활동도 안 하면서?”
-추억 여행 가서 옛날에 살던 집에서 옛날에 가지고 있던 물건도 보고 그랬거든요.
“영감 찾아 고향이라도 찾아간 거야?”
-음··· 거기에 영감이 빽빽하게 꽂혀있긴 했어요. 전부 제 건 아니지만.
······뭔 소리야?
최성령이 한쪽 눈썹만 치켜올리며 마음의 소릴 뱉어내려 하는데, 한서호가 덧붙였다.
-그리고 돌아와선 쇼케이스 준비도 시작하고···.
“쇼케이스?”
최성령이 목소릴 높이며 반문했다. 원하던 ‘소식’에 편집장도 옆에서 화들짝 놀라며 눈을 빛낸다.
-네. 근데 일반적인 쇼케이스는 아니고, 콘서트 형식이에요.”
“오 좋네!”
-무료고요.
“그건 뭐든 좋고!”
최성령의 말에 픽 하고 웃은 한서호가 덧붙였다.
-그리고 좀 클 거예요. 스케일이.
#
-···얼마나 큰데?
이어지는 최성령의 질문에 나는 잠시 가늠해 보았다.
내게 가장 컸던 무대를 돌이켜보면 두 곳이 먼저 떠오른다.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우승자로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참여했던 붉은 돛 축제.
그리고 바덴바덴에서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 꾸몄던 헌정곡 무대.
둘을 비교하면······.
축제 자체는 붉은 돛 축제가 더 규모 있었지만, 음악 무대 자체로만 본다면 헌정곡 무대가 더 컸던 것 같지.
“바덴바덴에서 했던 헌정곡 무대···.”
-그렇게나 크게?
“···보다 더 클 거예요.”
이어지는 말에 최성령이 헛바람을 삼키며 물었다.
-그게, 우리나라에서 가능한 거야?
#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본부장의 말에 백선화 부사장이 빙긋 웃었다.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랬다.
내심 불안했던 ‘한 필하모닉’이 전세를 완전히 역전 시켰다. 덕분에 더 클래식 에이전시의 위상도 덩달아 높아졌고.
그뿐만이 아니다. 함께 일한 로얄 클래식은 미국 내 인터뷰에서 더 클래식을 계속 언급했다.
논란이 일 것을 뻔히 알고 있었음에도 한서호의 뜻을 존중한 용기 있는 에이전시라면서.
아티스트의 생각을 응원하는 에이전시.
앨범 커버에 무려 닐 하우저의 그림을 실을 수 있는 에이전시.
적어도 예술계에선 더 클래식이 무슨 자유의 땅처럼 묘사되고 있었다.
그렇담 이제 그 모기업인 SJ 엔터의 기획력을 보여줘야 할 차례.
“쇼케이스 준비는 잘 되고 있나요?”
“예. 무대 기획팀을 구성해 매일 같이 한서호와 여러 아티스트들을 만나 구상 중입니다.”
“마냥 규모만 커선 안 돼요. 디테일이 있어야죠. 무대야, 뭐······서호가 완벽하게 채워줄 테니까.”
씩 웃은 그녀가 고갤 돌렸다.
창밖에 내려다보이는 가로수들의 색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대체로 맑고, 적당히 시원한.
야외 공연을 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계절이 오고 있는 거다.
“우리, 잘 준비해봐요.”
“예.”
끄덕이는 본부장을 보며 백선화 부사장이 기대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서울이 제2의 바덴바덴이 되지 말란 법은 없잖아요?”
#
······오랜만에 도착한 더 클래식엔 반가운 얼굴들이 가득했다.
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기꺼이 내 앨범의 악기가 되어준 그들이 나를 반겼다. 아니, 반기다 못해 들었고, 던졌고 다 했다.
처음엔 내빼다가 이내 헹가래에 몸을 맡겨버렸다.
이해가 가고, 그래서 미안한 마음도 있다.
나야 확신이 있었고, 게다가 그걸 증명할 편지까지 있었으니 아무런 걱정도 긴장감조차도 없었지만, 이들은 달랐을 테니까.
“믿어줘서 고마워요.”
애초에 논란이 생길 걸 알고도 내 뜻에 따라준 사람들이기에 더욱 고마웠다.
흐뭇한 웃음을 지은 단원들이 묻는다.
“그래서 쇼케이스는 언제예요?”
“맞아요. 얼른 사람들 앞에서 보여주고 싶은데요? 봐라, 이게 정답이었다구!”
“아예, 우리한테 뭐라 했던 평론가들 초대해버리죠?”
그들의 얘길 듣다가 내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답했다.
“SJ 엔터에서 역대급 공연을 만들겠다고 눈에 불을 켜고 있어요. 그러니 저희도 준비하죠. 최고의 연주를 할 수 있도록.”
SJ 엔터가 공연장을 맡는다면, 무대 위를 채우는 것은 우리, 한 필하모닉이니까.
곧이어 우렁찬 대답이 들려왔고, 우리는 해산했다.
모두가 떠낼 때까지 기다렸다가 천천히 계단을 내려간다.
그러면서 다짐했다.
쇼케이스에서 모든 관객들에게 보여주겠노라고.
내가 직접 보았던 대가들을. 그들의 연주를.
‘그리고······.’
다음 생각으로 넘어가기 직전에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어쩐지 분위기가 어수선해 생각을 멈췄다.
날 기다렸다는 듯, 전부 내 쪽을 보고 있는 직원들.
갸우뚱하자 가장 가까이에 있던 홍보담당자가 회의실을 가리켰다.
“손님이 오셨어요. 지금 유 팀장님께서 얘기 중이신데.”
“손님 누구요?”
“평론가, 필리온이야.”
내 물음에 대한 대답이 회의실이 있는 쪽에서 들려왔다.
문을 열고 나온 유정욱 팀장이었다.
그나저나, 필리온이라면······.
그 평론계의 대부?
그에 대한 정보들이 떠오르는 순간, 유정욱 팀장이 덧붙여 말했다.
“널 만나고 싶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