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241
241. 이어지는 이야기 (3)
“여기 온천이 너무 좋아서······.”
“그래서 그분이 뭐라고 했냐면······.”
“아랫동네에 진짜 맛있는 빵을 굽는 집이······.”
하이든의 휴가는 짧지만 강렬한 기억으로 내게 남아 있다.
아버지 한 명의 부제만으로 어쩐지 텅 빈 것 같은 성이 연일 북적였지.
특히 바덴바덴 성의 자랑인 정원은 더더욱 인기가 많았다.
“······돌아가자.”
내 말에 일페르소가 천천히 휠체어를 돌렸다.
정원을 빠져나오며 일페르소가 속삭였다.
“혹여 깜빡하셨을까 봐 말씀드리는 건데, 이제 백작님이 이 성의 주인이십니다.”
이에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래서 피하는 거야. 불편해할까 봐.”
편하게 이야기 중이었는데 갑자기 집주인이 오면 얼마나 눈치 보이겠나.
내 의중을 알아차린 일페르소가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참 귀족답지 않으십니다.”
“그런 말이 칭찬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잖아. 우리가.”
“하하··· 모든 귀족들이 백작님 같았으면 좋겠네요. 시간이 많이 흐르면 그렇게 되려나.”
“그땐 귀족이 남아 있기나 할······.”
“저, 백작님!”
불쑥 뒤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그럼에도 누군지 단번에 알 수 있었던 것은 내 귀가 특출나서였을까, 아니면 그녀의 목소리가 특별해서였을까.
“아실리 양.”
일페르소가 휠체어를 멈추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뒤이어 그는 휠체어를 돌려 내게 그녀를 확인시켜주었다.
······몸이 굳는다. 아, 나 원래 굳어있지.
“정원에서 단원들과 얘기하다가 얼핏 백작님이 보인 것 같아서······.”
“아, 아. 네. 그, 그게——.”
도망치고 있었단 말을 할 수 없어 그나마 내 마음대로 움직이는 입만 뻥긋거리는데, 일페르소가 갑자기 자신의 손목을 부여잡았다.
“어우 손목이 시큰거리네······어쩌지, 지금 시종들도 전부 저녁 준비하느라······.”
“···손목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일페르소를 바라보는 순간, 그의 표정에 스치는 부자연스러움을 확인했다.
물론 감정의 고저가 좁은 편인 일페르소의 표정이라 나만이 확인할 수 있는 미세한 느낌이었다.
“그럼 제가 해봐도 될까요?”
그러니 아실리가 저렇게 말······뭐?
“그래 줄래요?”
“이, 일페르소?”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
일페르소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휠체어를 포기하는 것도 모자라, 아실리가 지금 휠체어를 본인이 끌어보겠다고······.
내가 부르거나 말거나, 일페르소는 두어 걸음 정도 내게서 멀어졌다.
그 자리를 아실리가 채웠고, 나는 원망어린 눈으로 일페르소를 바라보았다. 그는 필사적으로 내 시선을 피했고.
“저쪽으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간 다음 테라스가 있는 쪽으로 크게 돌면 됩니다.”
···언제부터?
“제가 할 수 있을까요?”
“그럼요. 별거 아닙니다. 종종 저말고 다른 사람들이 밀기도 하는걸요.”
···그니까, 언제부터?
“백작님, 잘 다녀오십시오.”
내 눈을 보고 얘기해.
소리 없는 아우성에 저만치 달아나버리는 일페르소.
“······.”
어색한 공기가 덮쳐왔다. 당연하게도 머릿속에선 물음표들이 왈츠를 추고 난리가 났다. 미치겠다. 무슨 말을 하지?
다행(?)히도 아실리가 먼저 내게 물어왔다.
“저희 때문에 가신 거죠?”
“아, 그, 도망간 게 아니라······.”
“알아요. 저희가 불편할까 봐 피해주신 거. 근데 자꾸 피하시니까 대화할 기회가 없네요.”
그녀의 말에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심장 벌렁거리는 게 휠체어에까지 전달될까 긴장하는데, 그녀가 덧붙인다.
“저 여기 올 때 엄청 기대했거든요. 무려 음악의 예언가와 대화할 수 있는 기회잖아요.”
그 순간 나를 옭아매던 매듭이 탁 하고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대로 훅 가라앉는 듯한 기분.
······뭘까.
분명 날 만나고 싶었다는 말인데.
나는 그 말이 퍽 섭섭했다.
#
“제가 하프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어쨌든 음계가 그렇다면······이 부분에선 이렇게, 하시면 되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이렇게 말이죠?”
아실리가 하프를 튕겼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 백작님.
그리고 그 광경을 몰래 지켜보던······.
“집사님.”
“헙, 깜짝이야.”
가장 오랫동안 이 성에서 일한 시종이 다가와 속삭였다. 화들짝 놀랜 일페르소는 손톱 하나 들어갈 만큼 열어둔 문을 닫고서 시종을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저 청소하려고······.”
“지, 지금 말고. 조금 있다가. 있다가 하도록 하자고.”
시종의 눈이 가늘어졌다.
“또 아실리 양이 와계시는 거죠?”
이미 움찔거리는 자신을 보곤 확신하는 듯한 시종. 일페르소는 결국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흐흥, 백작님께도 봄이 오려나~.”
“그렇다기엔 너무 딱딱하게 대하시니······.”
텁텁한 일페르소의 목소리에 시종이 빙그레 웃었다.
“여자는 그런 거에 또 끌리기도 하거든요.”
“이해할 수가 없는데.”
“애초에 이해하려 한다고 되는 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또각, 또각. 멀어져가는 발소리.
구석에서 나온 두 사람이 계단 아래로 사라지는 아실리의 뒷모습을 확인하고서 복도로 나왔다.
“일단 저쪽 테라스부터 청소 부탁하네. 나는 백작님과 얘길 좀 해봐야겠으니.”
“알겠습니다.”
싱긋 웃은 시종이 복도 끝으로 걸어가고, 일페르소는 백작님의 방문을 두드렸다.
“백작님.”
“······어, 왔어?”
방금 전까지 음악에 대해 이야기를 한 백작님답지 않게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어디가 좀··· 불편하셨습니까?”
“전혀.”
하지만 백작님의 대답은 분위기와 상이했다.
“즐겁더라.”
“네···?”
“음악 얘기가 통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던 건 처음이었어. 음악 얘기보다 다른 말들이 더 많이 하고 싶었던 적도 처음이었고.”
타탁, 타탁—.
벽난로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에 방안이 일렁였다.
덩달아 울렁거리는 기분을 느끼며 일페르소가 물었다.
“그래서 다른 얘긴 좀 나누셨나요?”
불안함은 역시나.
“······산책과 여행을 좋아한대.”
“······.”
피해 가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아무 말도 못 했어.”
일페르소는 백작님을 보았다.
그의 시선은 아래로 내려가 있었다.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두 다리가 휠체어와 한 몸인 양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
일페르소는 그 모습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목구멍이 따끔거려온다. 입맛이 어지간한 약을 먹었을 때보다 더욱 쓰다.
백작님의 저렇게 비참한 표정은······
음악을 만난 이후로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벽난로에 장작을 더 가져오겠습니다.”
곁에 머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이가 드니 눈물이 많아져서.
끼이익——.
도망치듯 나와 문을 닫고 기대었다.
심호흡을 하며 반대편 벽을 바라보았고, 그곳엔 백작 부인께서 가져다 놓은 십자가가 걸려 있었다.
오래도록 저곳에 걸려 있었지만, 참 한결같이 쓸모없는 것 같은······.
작게 한탄한 일페르소가 그럼에도···그럼에도 한번 바라본다.
신이시여.
감정까지 낡아버린 이 늙은이에게.
부디 저 지독한 저주를 옮겨주소서.
······.
지이이이잉——.
손가락을 지그시 미는 것만으로 휠체어가 움직였다.
창가에 다가서자 많은 것들이 보인다. 정원사들이 매일 같이 나와 관리하는 정원과 동네가 동네다 보니 폐쇄적인 저택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교회 첨탑들까지.
백한길 회장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는 지금, 이 순간이 진심으로.
······진심으로 만족스러웠다.
#
“야, 대학생 다 됐네!”
학원 근처 파스타 집에 도착하자 오랜만에 보는 학원 선생님이 달려와 껴안았다.
유채봄은 그 안에서 캑캑대며 버둥거리다가 풀려나 웃음을 터트렸다.
“어머, 봄이 화장 진하게 한 거 봐? 예쁜 얼굴에 뭘 이렇게 발랐어! 더 예뻐졌잖아! 역시 본판이 좋으니까~.”
“헤헤, 오늘은 수업 더 없으세요?”
“응. 없어.”
“요즘 학생이 없는 건······.”
“그건 아냐. 한국예대 유채봄 합격! 붙여 놓으니까 학생들이 얼마나 몰렸는 줄 아니? 학생을 가려서 받아야 될 정도였다니까?”
싱글벙글 근황을 알린 그녀가 메뉴판을 집어 들며 말했다.
“아무튼, 주문하고 얼른 얘길 좀 들어볼까?”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시작된 이야기는 카페로 자리를 옮겨서까지도 쭉 이어졌다.
마침내 요약본(?)을 모두 들은 선생이 입을 허 하고 벌렸다.
“아니, 그게 하루에 배운 내용이라고?”
“네.”
“······수업 한 번으론 턱도 없었겠는데?”
“신기하죠? 근데 전부 하루 만에 들은 내용이에요. 게다가 수업이 심지어 늦게 끝나지도 않았어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유재봄이 싱긋 웃었다.
“재밌었어요. 사람 얘기가.”
그 대답에 선생의 표정이 어쩐지 아련해졌다.
“그러게. 네 얘기 듣는 것만으로도 재밌긴 하다. 멘토님한테 들었으면 얼마나 재밌었겠어······멘토링 때도 사람 얘기였지. 약간 동화 들려주듯이 주인공인 백작이 음악가들을 후원하는 내용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게 브리너 백작 얘긴 거 같더라고.”
“그땐 브리너 백작이 유명해지기 전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진짜 멘토님, 대단하다니까. 난 괜히 나보다도 어린 애가 내 앞에서 가르치는 게 심통 나서 요러고 째려보면서 듣긴 했는데······.”
선생이 유채봄을 보며 민망한 듯 푸스스 웃었다.
“근데 내가 그때 배웠던 것들을 지금 딱 그 나이의 아이들한테 가르치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
······며칠 후.
어느덧 서양 음악사 시간이 한 바퀴를 돌아 돌아왔다.
이번에도 유채봄은 비교적 앞자리를 사수할 수 있었다.
물론 경쟁은 더 치열해졌다. 여기 앉기 위해서 이전 시간 강의가 끝나기 전부터 대기를 하고 있었지.
그럼에도 가장 앞줄이 아니라는 게 못내 안타깝긴 하다.
‘명품백 사려고 줄 선다는 얘긴 들어봤어도, 대학 강의 앞줄에서 들으려고 몇 시간 전부터 기다릴 줄이야.’
자신보다 앞줄에 앉은 괴물(?)들을 바라보며 유채봄이 입술을 삐죽였다.
그리고 복습을 시작한다. 가뜩이나 강의가 좋아서 잘 기억나는데, 심지어 학원 선생님한테 한번 썰 풀듯 이야기해서인지 머릿속에 선명하다.
쭉 떠올려보니 자연스레 기대감이 들어찼다.
‘오늘은 무슨 강의를 듣게 되려나.’
입꼬리가 배시시 올라가는데, 마침 한서호 교수가 강의실로 들어섰다.
그것만으로 살짝 붕 떠 있던 강의실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된다.
가볍게 인사를 마친 그가 좌중을 훑어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우선, 지난 수업에 대한 질문부터 받을게요.”
그 순간, 너도나도 손을 들기 시작했다. 질문이 빗발쳤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네, 질문하세요. 심영진 학생.”
학생들의 이름을 전부 알고 있다는 거다.
지난번과 자리도 바뀌었는데도.
‘얼굴까지 외우신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유채봄이 눈을 홱홱 굴렸다. 그리고 이내 번쩍 손을 들었다.
“어, 유채봄 학생.”
“혹시!”
“네, 얘기하세요.”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음악가가 누군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지난 수업과는 전혀 상관없는 질문에 학생들이 전부 유채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저런 질문도 되는 거였냐며, 아예 번호를 물어볼까? 라고 쑥덕거리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 가운데, 유채봄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 그. 전 교수님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