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243
243. 이어지는 이야기 (5)
······그러니, 그대도 음악가네요.
음악을 만들고 있으니, 그대도 음악가라는 말.
적어도 토마스 브로드우드에겐 그게 그저 그런 칭찬이나 위로처럼 들리지 않았다.
담담하게 전달된 브리너 백작의 한마디는, 그가 떠난 뒤에도 그에게 선명히 남아 가슴을 뛰게 했으니.
‘······음악을 하고 있었구나. 내가.’
피아노 제작자인 아버지는 내가 날 적부터 피아니스트로서 대성하길 바랐다.
그래서 자신이 평생동안 만들어온 피아노를 멋지게 연주하길 원했다.
하지만 내겐 재능이 없었다. 모든 피아노 선생님들이 백이면 백 그렇게 말했다. 음악적 재능이 없다고.
그래서였다. 건반 대신 망치를 두들기고, 악보 대신 설계도를 잡은 건.
실망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아버지.
하지만 당신의 표정이 ‘만족스럽지 못한 피아노’를 완성했을 때의 얼굴과 닮아있다는 건 몰랐을 터.
어린아이의 상처는 처음엔 아주 작았을지 모르지만, 성장하면서 그 흉터 또한 커져갔다.
그렇게 피아노는, 아버지의 염원을 이루지 못한 아들의 죄책감이자.
그럼에도 하나하나 완성해나갈 때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연주될 때마다 감격이 밀려오는.
······애증의 악기가 되었다.
그런 피아노 제작자에게, 어느 날 비를 피해 가게로 들어온, 웬 휠체어를 탄 귀족이 말했다.
내가 음악을 하고 있다고.
내가 음악가라고.
이제는 시간이 꽤나 흘러 그에게 후원을 받고, 편지까지 주고받지만.
여전히 그때를 생각할 때마다, 입가에 미소가 만들어지는 건 한결같았다.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명성이 대단하다고 여겼던 사람.
하지만 만나고 보니 그 명성이 오히려 초라할 정도로 빛이 나는 사람.
그런 사람이었다.
브리너 프리드리히 백작은.
“오늘도 열심히 했다. 음악.”
“뭘 해?”
공방 문을 닫는데, 빙글거리며 웃는 남자가 모퉁이에서 나타났다.
신문사에서 일하는 머리 좋은 친구 녀석.
“어, 왔냐.”
“다 끝났지? 얼른 가자. 일이 고돼서 맥주가 너무 마시고 싶어.”
곧장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고, 얼른 품에서 꺼낸 편지를 건넸다.
“혹시 철자 틀린 거 없나 확인해줄래?”
헛웃음을 지으면서도 익숙하다는 듯 받아드는 친구 녀석.
“어쩐지 맥주를 사준다고 하더라. 또 그 귀족한테 보낼 편지지?”
“그럼 내가 누구한테 편지를 보내겠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녀석이 편지를 대충 훑어보더니 혀를 내둘렀다.
“이야······.”
“좀 는 것 같아?”
“엉망이네. 엉망. 너 공부 부지런히 해야겠다. 요즘엔 거리부랑자들도 은근 제대로 글 쓰는 놈들이 많아. 소식 못 들었어? 우리나라가 유럽에서 문맹률 최저라니까? 신문을 봐야 해. 신문을. 우리 회사 신문 구독했어?”
“영업하러 왔냐?”
“그럼 난 편지 써주러 왔냐?”
“에이씨, 알겠으니까 얼른 봐줘.”
민망함에 재촉하자 녀석이 펜을 꺼내 첨삭을 시작했다.
슥슥, 빠르게 문장을 고치면서 툭 묻는 녀석.
“근데, 네가 만든 피아노가 그렇게 유명해졌다며?”
“네가 백작님이 우리 가게 왔었던 걸 퍼트려서 그렇잖아.”
“아니, 음악가들 사이에서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라며. 그래서 슬쩍 흘려봤는데, 알잖아. 내가 일하는 곳이 없던 소문을 만들고 퍼트리는 곳인 거.”
“없던 소문 아니고. 오히려 알려진 게 비루한 소문이라니까.”
“말이 그렇다는 거지. 완전히 추종자가 됐네. 아 참, 그 덕에 네 아버지 사업도 도움 많이 받았다며.”
“그렇더라. 어쨌든 나도 그 회사 소속이긴 하니까.”
내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이 녀석이 펜을 내려놓고 은근하게 옆으로 붙는다.
“그러니까. 야, 우리 사업 확장해볼래? 아버지 공장도 있겠다, 내가 또 홍보엔 일가견이 있으니까 잘만하면······.”
“싫어.”
“왜? 이번에 음악가들 네 공방으로 몰려오는 거 보니까 이거 충분히 성공할 것 같다니까?”
답답한 표정으로 말하는 녀석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내가 모두 확인할 수 없잖아.”
그 어떤 작곡가도, 대신 작곡을 맡기진 않는다.
아무리 자신의 곡을 흉내 낸다 한들, 어떻게 같을 수 있겠나.
‘피아노도 마찬가지.’
단호하게 거절하고, 첨삭이 끝난 편지를 받아 다음날 바덴바덴으로 부쳤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답장이 도착했다.
툭—.
갑작스러운 비보(悲報)와 함께.
편지를 떨어트린 토마스는 상태가 좋지 못해 세워둔 목재에 기대어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끄윽······.”
하늘엔 먹구름이 가득해져, 거리가 음산하다.
비를 피해 백작님이 들어왔던 그날처럼.
비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끄흐윽······.”
브리너 프리드리히 백작의 죽음.
찬란했던 음악이.
가장 큰 빛을 빼앗겼다.
#
-누구냐면 피아노 제작자인데······.
뒤이은 마크의 말에 내가 툭 말했다.
“알아요.”
그리고 그의 얼굴을 떠올리며 슬며시 웃었다.
“베토벤에게 피아노를 만들어준 음악가.”
이렇게 이름을 듣게 될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기분이 좋아진다. 내겐 그리운 이름이잖나.
-음악가···는 아니지만, 아무튼. 브로드우드 앤드 선즈(Broadwood&Sons)사의 후계자였죠.
설명을 덧붙인 마크가 잠시 숨을 고르더니 이야기를 이어갔다.
-저희는 수년 전부터 그 사람의 피아노를 재현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어요. 물론 브로드우드 앤드 선즈와 함께요.
현재 브로드우드 앤 선즈는 아주 작은 공방 하나만 남아 있다. 하지만 명성만큼은 여전하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피아노 제작사라는 타이틀은 결코 사라질 수 없으니까.
-저희가 최근에 ‘검은 거울’이라는 굉장히 현대적인 피아노를 만든 터라, 이번엔 과거로 회귀해 보려는 겁니다.
스타인웨이는 그런 그들의 ‘작품’을 대중들 앞에 되살리고 싶은 듯했다. 혹은, 자신들의 ‘상품’으로 만들고 싶거나.
-거기에 진짜 클래식을 연주하고, 새로운 클래식의 문을 연 마에스트로 한서호가 제작과정에 참여해주시면 아주 좋을 것 같아서요.
마에스트로라는 말에 헛기침이 나올 뻔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내가 물었다.
“제가 제작에 참여하는 건가요?”
-아, 그걸 너무 어렵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어요. 최고의 전문가들이 붙어서 이미 제작에 착수했고, 마지막 단계에서만 살짝 참여해주시면 되니, 사실상 이름만 빌려주신다고 생각하셔도 무방······.
“전 제작에 참여하고 싶은데요.”
-네? 아, 네. 제작에 참여하는 게 맞습니다만······.
“아뇨, 제대로요.”
내 대답이 의아했는지 침묵하는 마크에게 말했다.
“이름만 빌려주는 게 아니라, 전문가 중 한 명으로서. 제대로 참여할 수 있게 해주세요.”
······.
“어떻게 됐어요?”
눈을 끔뻑이는 마크의 표정은 직원에게 생소했다.
지금, 당황한 건가? 아닌가? 갑자기 웃잖아?
“하겠대.”
“잘됐네요!”
“응. 그렇긴 한데······.”
마크가 연신 피식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덩달아 눈을 깜빡거리는 직원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름만 올리는 느낌은 싫다. 전반적인 제작과정에 이제라도 참여하겠다······라는 한서호의 대답.
이야길 들은 직원도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
“흐음, 그러면 돌아오는 제작 회의 때 제작자들에게도 얘길 해놔야겠네요?”
“그렇겠지?”
“솔직히 전 탐탁지 않아 할 것 같은데요.”
“그런가? 대충 이름만 올리는 아티스트들보단 좋게 보지 않을까?”
“차라리 그게 낫죠. 그 사람들 자존심 엄청 세잖아요. 특히 이번엔 브로드우드 앤드 선즈 쪽 장인들이랑 협업이라 잔뜩 힘주고 있는데, 엄연히 다른 분야의 사람이 와서 이러쿵저러쿵하면 아무리 한서호라고 해도······.”
직원이 말끝을 흐렸다. 우려 가득한 표정으로.
그때 마크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턱을 매만졌다.
“한서호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는 것 같긴 한데.”
“네?”
직원이 되물었고.
마크는 좀전의 통화를 떠올렸다.
‘제작에 보다 깊게 관여하고 싶다는 말씀인 거죠? 흐음. 그래도 완전히 다른 분야의 작업이라······.’
‘전 완전히 다른 분야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분들에겐 제작 기술이 있고, 제겐 연주 기술이 있을 뿐. 결국, 소리를 만드는 작업이니까요. 좀 전에 토마스 브로드우드를 음악가라고 부른 건 실수가 아니었어요.’
곱씹을수록 묘하게 느껴지는 말들이었다.
“그냥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말했으면 오만하다고 콧방귀를 꼈을 텐데 말이지······.”
“······?”
혼잣말에 더욱 알쏭달쏭해진 직원.
그를 바라보며 마크 또한 미간을 좁혔다.
“그나저나, 우리는 한서호의 이름값이 필요했지만, 한서호는 대체 뭐가 필요해서 이 작업에 그토록 관심을 보인 걸까?”
#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내 얘기가 끝나고, 백한길 회장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이렇게 있으니 정말 전생의 생각이 안 나려야 안 날 수가 없다.
그때도 이렇게 나는 하루 동안 있었던 일, 생각 등을 나눴고, 지금처럼 서로 같은 눈높이에서 마주 보았으니.
“그래서 하겠다고 했어요. 제 친우의 이름이 걸린 일이니까.”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는 백한길 회장.
그 또한 무언가를 추억하듯, 흐릿한 눈빛으로 내게 말했다.
“토마스가 기뻐할 겁니다.”
“오히려 내가 기쁘네요. 런던 여행 갔을 때 솔직히 조금 씁쓸했거든요. 그의 흔적이 거의 다 사라져서.”
물론 베토벤의 생가에서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피아노를 연주해보긴 했다. 분명 매력적인 피아노였지만 예전의 그 느낌은 아니었지. 느껴지는 피아노 현의 진동부터가 달랐으니 소리는 딴판일 수밖에.
“공방이 있던 런던 거리가 생생하게 기억나네요. 그때 혹시라도 백작님이 비에 젖을까 정말 식겁했었는데.”
헛헛하게 울리는 웃음소리.
나는 내 우산이었고, 지붕이었으며, 창문이었던 그에게 말했다.
“그렇게 비도 피하고, 눈도 피하고, 바람도 피했는데. 아니, 피할 수 있도록 해줬는데, 죄송해요. 너무 허무하게 가버려서.”
“전혀 허무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에 목도했거든요. 무수히 많은 음악가들의 헌정을 받았던 프랑스의 전쟁영웅은 유배지에서 장송곡 하나 없이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했지만, 음악의 예언가는 수많은 음악가들이 헌정곡을 들고 찾아와 함께 슬퍼했거든요.”
저 얘기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아마 두 번째도 아닐 거다. 그때마다 백한길 회장은 그날의 연회를 이렇게 불렀다.
가장 슬프고, 가장 기뻤던 날.
“특히 토마스 브로드우드가 너무 울어서, 오히려 다들 울 새가 없었지요.”
“······몸은 우락부락한데, 속은 누구보다 여렸어.”
“그러니까요. 저와 얘기하다가 울고, 베토벤과 피아노 제작 얘길 하다가 울고.”
부드럽게 웃음 지은 백한길 회장에 말했다.
“그러니 지금 얼마나 감격하고 있겠습니까. 저도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백작님께서 재현한 토마스의 피아노를 백작님이 직접 연주하는 모습이. 무엇보다, 프로젝트 이름부터가 마음에 쏙 듭니다.”
그의 말에 나도 자연스레 프로젝트명을 떠올렸다.
마크가 가르쳐준 그것을 작게 읊조렸다.
“하프시코드(Harpsichord-피아노의 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