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244
244. 이어지는 이야기 (6)
“하프, 시코드 말이죠?”
“네.”
“하프···시코드라.”
“······.”
······일부러 저러는 건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지. 백한길 회장의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걸 보니, 꼭 친구의 짝사랑을 놀리는 학생 같지 않나.
“지금 그 표정 되게 무엄해요.”
눈을 좁히며 괜스레 나무라자, 백한길 회장이 느긋하게 웃었다.
“이번 생엔 제가 웃어른인걸요. 하필 또 동방예의지국에서 태어나셔서.”
“허!”
좀처럼 보기 힘든 그의 능글거림에 어처구니없는 웃음이 지어진다. 그게 싫지만은 않으면서도 한편으론 그의 의중을 알 것 같았다.
대화가 너무 무거워질까, 잠시 환기시키려는 거겠지.
“그나저나, 이미 토마스 브로드우드의 헌정곡은 완성이 되셨으니······ 완성될 피아노로는 새로운 곡을 연주하셔야겠네요.”
그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을 이어간다.
내심 나도 생각하고 있었던 화두.
무려 토마스의 피아노를 재현하는 일이다. 그것만으로 두근거리는데, 그걸 마침내 내 곡으로, 내 손으로 연주하는 건 어떨까.
생각만으로 심장이 벌컥거렸다.
문제는······.
“새로운 곡.”
어울리는 곡이 필요하다는 것.
툭 던지듯 말하며 이내 표정을 굳혔다.
사실 영감은 어디서든 끌어올 수 있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 음색에 어울리는 곡을 만들어낼 수 있겠지.
하지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작업은 그저 영감이 떠오를 때마다 곡을 만드는 게 아니었다.
기억을 더듬고, 전생의 브리너가 느꼈던 영감을 통해 한 사람 한 사람을 표현해내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미 모든 곡이 오케스트라 편곡으로 완성되어가는 상태.
······아닌가.
지난번 백한길 회장의 말처럼, 한 명은 빠져있나.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백한길 회장이 말했다.
“그녀도 원할 겁니다.”
팽팽 돌아가던 머리가 우뚝 멈춰 선 것 같았다.
내가 저 말을 기다렸나.
내가 되물었다.
“······그럴까요?”
그리고 재차 물었다.
“날 원망하고 있진 않을까요?”
내 무거워진 목소리에 백한길 회장이 천천히 눈을 깜빡인다.
“아니란 걸 누구보다 잘 아시잖아요?”
“나는······.”
기억의 한 페이지가 펼쳐졌다.
좀처럼 펼치고 싶지 않았던, 내겐 눌어붙은 종이 같은 기억.
‘백작님.’
눈물을 쏟던 그녀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직접 본 것은 아니다. 문 뒤에 앉아 그녀의 목소리만 들으며 내가 그렸던 장면이었다.
그녀는 나를 불렀고, 나는 내가 가장 잘하는 것을 했다.
그저 가만히 있는 것.
그때, 그러지 않았더라면 뭔가 달라졌을까?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음악가가 누군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문득 지난 수업에 받은 질문 하나가 생각났고.
“······.”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예전부터 정해져 있었다는 걸, 나 또한 알고 있었다.
#
“그리고······.”
학생들의 질문에 빠르게 답해주던 한서호가 좌중을 훑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바라보는 눈들 중에 유독 반짝이는 시선.
유채봄이 잔뜩 궁금한 표정으로 한서호를 보았고, 이를 발견한 한서호가 픽 하고 웃으며 말했다.
“지난번 유채봄 학생이 했던 질문은······ 앞으로 배울 수업 내용에 포함될 예정이라, 조금 아껴두는 거로 하죠.”
“눼에······.”
당장 대답을 듣지 못한 게 아쉬웠는지 그녀가 머리를 폭 숙였다.
옆에 앉아 있던 최겨울이 함께 고갤 숙이며 작게 물었다.
“야, 근데 너 그거 들어서 뭐 하려고.”
“뭐하냐니. 내 멘토인 교수님이 멘토 삼은 음악가를 알게 되는 거잖아. 알고 싶은 게 당연한 거 아냐?”
“음~전혀 이해 안 된다. 그러고 보면 너는 참 고등학생 때부터 독특했어.”
“칭찬이지?”
“얘랑 같이 한국예대 오게 될 줄은 진짜 몰랐는데.”
“야······.”
유채봄이 도끼눈을 뜨는데, 앞에서 본격적으로 수업 시작을 알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오늘 수업을 시작할게요.”
평소처럼 PPT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이곳은 강의실이 아닌 실습실. 커다란 스크린과 칠판 대신 육중한 그랜드 피아노가 단상 한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오늘 실습실로 모이라고 한 건 연주를 하면서 수업을 하기 위해서예요.”
유채봄이 홱 고개를 들었다. 이번만큼은 옆에 앉은 최겨울도. 그리고 나머지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실습실에 모이는 순간부터 예상은 했지만, 그럼에도 눈이 빛날 수밖에 없었다.
정말 한서호의 연주를 듣게 되는 걸까?
암표가 천정부지 가격으로 올라가는 한서호의 연주라니!
그러나 다음 순간, 그 생각이 틀렸다는 걸 모두가 깨달았다.
“음, 누구부터 하면 좋을까요.”
한서호가 턱 끝을 매만지며 등대처럼 시선을 훑었다.
피아노에 앉힐 사람을 찾는 눈빛.
갑자기? 아무런 예고도 없이?
유채봄은 놀라서 들썩였고.
“유채봄 학생부터 해볼게요.”
······어쩐지 불안한 느낌은 틀리는 법이 없었다.
옆에서 쿡쿡대는 최겨울. 그녀를 쿡 찌르고서, 쭈뼛쭈뼛 앞으로 나섰다.
피아노 의자에 앉아 한서호 교수를 올려다 보았다.
새삼 무려 한서호의 코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한다는 생각에 긴장이 차오른다.
“어떤··· 어떤 곡을 연주해야 할까요?”
“뭐든 상관없어요. 정말 아무거나 연주해도 돼요.”
무슨 생각인지 곡 선정조차 그녀에게 넘기는 그.
그나마 다행이었다.
가장 자신 있는 곡을 연주할 수 있으니까.
그녀가 선택한 곡은 아주 오래전 사운드 클라우디에 공개된 한서호의 곡들 중 하나였다.
섬세한 터치와 빠른 기교가 곡의 중반까지 이어지다가 점차 템포를 늘어트리며 옥타브 코드로 묵직하고 강렬하게 마무리되는 ‘고성(古城)’이라는 곡.
———.
연주 끝에 담담하지만 무거운 피날레가 울려 퍼지고.
이를 지켜보던 한서호가 살짝 놀랐다는 듯 말했다.
“대단한 자신감이네요.”
“네?”
“작곡가 앞에서 그의 곡을 연주하는 거요.”
그저 가장 좋아하고, 자신 있는 곡을 연주했을 뿐이라 그녀가 흠칫 놀라며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굴하지 않고 되물었다.
“어으어······근데, 이보다 더 좋은 피드백의 기회가 있을까요?”
이에 빙그레 웃어 보이는 한서호.
“자신감이 아니라, 똑똑한 거였네요. 하지만 이 연주에 대한 피드백은 나중에 따로 해야겠어요. 오늘은 수업 진도를 나가야 하니까, 일단······질문을 해볼게요.”
팔짱을 낀 그가 그녀에게 물었다.
사뭇 진지한 표정과 학생들 전부에게 들릴 만큼 큰 목소리로.
“이 곡은 고전 클래식에 기초를 두고 있어요. 어떤 점이 그럴까요?”
그리 오랜 고민이 필요한 질문은 아니었다.
“화성이요.”
“맞아요. 그리고요?”
문제는 그다음.
다시 돌아온 질문에 유채봄의 눈이 방황했다. 건반 위로 떨어져 데구르르 구른다.
······그리고?
얼른 자신의 연주를 복기해본다. 음표 하나하나까지 전부. 대체 여기에 화성 말고 어떤 고전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걸까?
가장 자신 있는 곡이다.
그러니 당당하게 연주했고.
수없이 반복해서 들었고, 연주해왔던 곡이었다.
왜냐면······.
“감성?”
처음 들었을 때부터 곡 특유의 느낌. 즉, 감성이 마음에 쏙 들었거든.
유채봄이 툭 던지듯 답했다. 이에 한서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건반 위를 구르던 시선이 스리슬쩍 올라갔다.
한서호의 옅은 미소가 보였고, 그가 답했다.
“맞아요. 이 곡엔 고전의 감성이 꽤나 짙게 들어가 있죠.”
맞춘 건가?
“휴우······.”
“하지만 이 곡만 그런 게 아니죠. 사실 어떤 곡도 고전에서 자유로울 순 없어요. 화성을 뒤엎고 새로운 체계를 만들더라도 결국 사람이 하고 싶은 메시지는 늘 비슷했으니까.”
본론을 꺼내 들은 한서호가 안도하는 유채봄을 제자리로 돌려보내고서 말을 이어갔다.
“‘클래식은 죽었다’라는 책까지 집필했었던 현대 음악의 거장, 일리야 로이드가 최근에 이런 인터뷰를 했죠. 유명한 판타지 소설이 신화에 기반을 둔 것처럼. 현대 음악도, 새로운 클래식도. 결국엔 고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
“누가 내 욕하나.”
갑자기 귀가 가려워진 일리야가 다시 노트북에 집중했다.
상단에 ‘사운드 클라우디’ 로고가 박힌 화면엔 숫자가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까뮤… 신곡 조회 수 120만] [일리… 신곡 조회 수 19만]스파크가 튈 듯 화면을 노려보던 일리야가 입 끝을 씰룩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처참하네.”
“네? 뭐가 처참해요?”
문이 열리자마자 노트북을 문 닫듯 덮어버리는 일리야.
그가 헛기침을 해대며 비서를 노려보았다.
“문 안 두드리나?”
“지난번에 두들기지 말라고 하셨는데요?”
아 그랬지.
중얼거린 일리야가 다음부턴 두드리라고 변덕을 부리고서 물었다.
“······스케줄 보고하려고 온 거야?”
“네.”
“그래, 오늘은 또 얼마나 바쁜지 보자고.”
책상 앞에서 소파로 이동한 일리야가 다리를 꼬고서 어디 읊어보라는 듯 거만한 자세를 취했다. 그게 익숙한 듯 비서가 타블렛을 들고 앞에 앉았다.
“아 참, 까뮤의 신곡이 나왔던데, 들어보셨어요?”
“······까뮤는 무슨. 그냥 장 오슬로라고 해.”
“뭐, 아무튼요.”
“들어봤어. 뭐··· 그 정도로 좋은진 모르겠던데.”
“그래요? 전 좋던데.”
“그럼 가서 걔 비서 하지 왜 여깄어?”
일리야가 톡 쏘아붙이자 비서는 이 또한 익숙한 듯 고갤 주억였다.
“오늘 좀 예민하시구나······.”
“그러니까 조심해.”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이 몰래 만든 계정에 습작들을 올렸고, 그 조회 수가 장 오슬로한테 한참 뒤져서 자존심이 상했다는 말은.
‘필리온 그 양반이 언급해줘서 그런 거야. 암. 그러니까 조회수 차이가 그렇게 나지.’
속으로 나름의 합리화를 하며 스케줄을 듣던 그가 앨범은 언제쯤 계획 중이냐는 물음에 꽤나 길게 고민했다.
“계속 습작을 만드는 중이긴 해.”
“근데 왜 저한테도 안 들려주시는 거예요?”
“뭐, 곡 만들면 내가 너한테 보고해야 해?”
“그건 아니지만요. 오늘 꽤 예민하시구나······.”
사운드 클라우디에 올리고 있다는 걸 아직 밝힐 생각 없었다. 적어도 까뮤······가 아니라 장 오슬로 정도는 조회 수가 나와줘야 당당히 밝힐 거 아닌가.
“기다려 봐.”
그렇게 말한 일리야가 문득 생각 하나가 스쳤는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나저나 한서호 얘는 언제 앨범 내는 거야? 대체 무슨 터무니없는 걸 만들길래 3년이 넘었는데 감감무소식이지?”
“그러게요. 다들 기다리고 있는데 말이죠.”
타블렛을 들고서 중얼거리던 비서도 불쑥 궁금했는지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러다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일리야에게 말했다.
“어, 한서호 기사 떴는데요?”
“언젠 안 떴냐. 허구한 날 한서호 앨범 언제 나올까 추측하는 기사들뿐이잖아.”
“그랬죠. 근데, 이번엔 오피셜이에요.”
비서의 말에 일리야도 눈을 크게 뜨고서 몸을 앞으로 쭉 뺐다.
“그래? 뭐라는데? 앨범 나온대?”
연달아 질문을 던졌는데, 비서의 표정이 묘해진다.
잠시 뜸을 들이던 그가 느릿하게 말꼬릴 올렸다.
“한서호가······피아노를 만든다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