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3
003. 드러나는 재능 (2)
사운드필름 스튜디오.
한서호의 아버지이자 이곳의 대표인 한기준이 사무실로 들어섰다. 먼저 온 직원들이 그를 보며 인사를 건넨다.
일일이 손 인사를 하며 자리에 크로스백을 내려놓는 한기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던 곱슬머리 남자, 박재훈 팀장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여행은 재밌으셨어요?”
“아, 그럼. 네가 보낸 메일 보기 전까진 아주 좋았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박재훈 팀장이 미안한 표정과 함께 앓는 소릴 낸다.
“최 감독 그 자식, 급조된 장면이 생겼다고 거기에 넣을 배경음악이 필요하다면서 어찌나 찡찡대던지, 미쳐버리는 줄 알았어요. 에휴. 슈퍼갑 고갱님이라 뭐라 하지도 못하고······.”
“아직도 연락와?”
“어제 보내주신 거 들려줬더니 좀 안심했는지 잠자코 기다리네요.”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란 걸 한기준도 알고 있었다.
영화판이 일정에 쫓겨 돌아가는 곳이다 보니 언제 다시 연락해와 조급하게 굴지 모를 일.
덕분에 사운드필름 같은 하청업체들은 빨리 빨리가 몸에 배다 못해 절여져 있었다.
“모레까지 필요하다고 했지?”
“네, 추가 촬영한 거랑 같이 끼워 넣고 바로 영등위(-영상등급위원회)에 보낸다네요.”
고민이 깊어진다.
“추가될 영상 길이가 1분 3초. 후작업 생각하면 늦어도 내일 해뜨기 전에 끝내야 하는데······아직, 20초 정도가 부족하단 말이지.”
딱 마무리가 부족하다. 그냥 페이드 아웃 걸어버리기엔 너무 길고, 루프를 걸기엔······.
“한 바퀴 돌리는 건 어때요?”
너무 성의가 없지.
직원 중 한 명이 던진 말에 박재훈 팀장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되물었다.
“돌림노래 만들게? 얼른 회의실 가서 빔이나 틀어놔.”
“넵!”
호다닥 사무실을 나서는 직원을 보며 박재훈 팀장이 혀를 차는 동안, 소리 없이 웃던 한기준이 크로스백을 열어 노트북을 꺼냈다.
어제 그냥 닫아버린 노트북을 열자 마지막 작업물이 곧바로 화면에 떠오른다.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릴 내며 웃는 한기준. 그 모습을 본 박재훈 팀장이 목을 쭉 빼며 물었다.
“뭘 보고 그렇게 웃으세요?”
“아들 작품.”
“서호 작품이요?”
판이 깔아진 마당에 아들 자랑을 하지 않는 건, 아들 바보로서 도리에 어긋나지.
한기준이 노트북을 슥 돌렸다.
“어제 우리 애가 처음으로 나 하는 일에 관심을 보이더라고. 그래서 프로툴(-작곡프로그램) 사용법을 좀 알려줬는데, 이런 걸 해놨네.”
“가만 서호가 몇 살이더라······아, 12살. 그 정도면 이제 아빠 직업에 관심 갖고 그럴 나이네요.”
친한 동생이지만, 결혼과 육아만큼은 한기준보다 선배인 박재훈 팀장이 주억거린다.
둘의 대화에 직원들도 하나둘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귀엽다~. 서호 피아노 배웠어요?”
“아니. 피아노는커녕 음악에 별 관심이 없었어. 애기 때도 노래만 틀면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울어댔다니까?”
“또 모르죠. 대표님 닮아서 재능이 있을지도?”
평소 너스레를 잘 떠는 직원이 달콤한 의문을 던졌다.
아닐 걸 알면서도 한기준의 미소가 만개한다. 그걸 본 박재훈 팀장이 덧붙였다.
“한번 들어보죠. 서호의 첫 작곡, 궁금한데요?”
“그냥 막 눌러봤겠지.”
“그래도요. 회의 시간까지 아직 10분 남았는데 그때까지 BGM으로 듣죠.”
“뭘 BGM 씩이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손은 재생 버튼으로 향한다.
“흠흠, 그럼 한 번 들어볼까?”
달칵, 하고 스페이스바를 누르는 순간.
노트북 스피커를 통해 녹음한 소리가 작게 들려온다.
첫 음은 도. 그다음이 도#.
그저 반음씩 올라가고 있었다. 아주 느릿하게.
그것만으로 직원들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12살짜리 꼬마 아이가 처음 피아노를 눌러보며 신기해하는 그런 장면을 떠올리고 있는 거다.
덩달아 한기준도 팔짱을 끼고 아빠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도부터 시작한 스케일이 도에서 끝이 났다.
워낙 느리게 쳤기에 직원들은 정말 BGM 삼아 각자의 일을 하고 있었다.
“귀엽네요.”
“그러게.”
박재훈 팀장이 웃으며 말하자, 한기준이 끄덕였다. 애초에 대단한 걸 기대하지도 않았다. 피아노를 배운 적도 없는 초등학생이 뭘 할 수 있겠나. 그냥 이 소리를 내기 위해 애쓰는 아들을 생각하니 사랑스러울 뿐이었다.
그랬는데.
이번엔 건반을 누르는 속도가 더욱 느려진다. 하지만 이전처럼 음을 순서대로 누르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어떤 음을 누르고, 한참 뒤에 다른 음을 누른다. 뭔가를 찾듯이, 더듬더듬 건반을 누르고 있었다.
“······.”
한기준은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점차 완성되는 음들이 불협이 아닌 건 둘째치고, 너무나 익숙했기에.
이 익숙함이 어디서부터 오는 건지, 그는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자신이 친 것처럼 화려하지도 않고, 오른손만으로 어설프게 누른 음계에 불과하지만.
분명히 자신의 곡이었다.
박재훈 팀장의 연락을 받고, 어제 집에 도착하자마자 급하게 만들었던 그 곡.
고개가 옆으로 기운다.
아무리 옆에서 반복해서 치는 걸 함께 듣기야 했다지만······.
‘그래도 피아노를 배워본 적도 없는 애가 이럴 수 있는 건가?’
그런 의문이 드는 것도 잠시.
이어지는 멜로디에 한기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한 시간을 씨름하다가 결국 포기했던, 그래서 오늘 회의하려 했던 부분을 아들의 어설픈 연주가 지나친 거다.
더 이상은 만들지 못했다. 그러니 멜로디도 끊어진 다리처럼 뚝, 멈춰야 한다.
그런데.
선율은 이어지고 있었다.
별 것 아니었던 것처럼.
놀라울 정도로 완벽한 마무리를 향해.
‘어, 어?’
자연스레 입이 벌어지고 미간은 찌푸려진다.
자신의 귀를 의심하면서도 이어지는 선율에 연이어 감탄한다.
여전히 한 음씩 누르고 있지만, 한서호가 누르는 각각의 음들은 결코, 간단치 않았다.
의문에서 시작된 놀라움은 어느새 경악이 되어간다.
그리고 마지막 음이 눌리며 하나의 곡이 완성되었을 때.
“이거 뭐예요······?”
불쑥 들려오는 목소리에 한기준이 고갤 들었다.
유일하게 어제 작업물을 들었던 박재훈 팀장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
여름 방학.
이 시기에 12살이 집에서 할 일은 대부분 비슷할 거다.
공부. 나름의 철학으로 내가 원하지 않으면 학원을 보내지 않던 엄마도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 학습지 만큼은 포기하지 못했다.
어제야 여행을 다녀온 날이었으니 어찌 피했지만, 오늘은 내 앞에 풀어야 할 학습지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무려 15일분.
큰 여행에는 큰 책임이 따른달까······.
이걸 푸느라 고통받은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번엔 안온한 마음으로 펼친다. 그리고 거침없이 문제집들을 풀어나갔다.
당연히 어려운 부분도 없다. 영재 교육도 아닌 보통의 초등학교 5학년생을 위한 진도였기에 나름 느긋하게 푼다고 풀었는데도 30여 분 밖에 안 걸렸다.
‘이거, 무슨 천재라도 된 기분이네.’
피식 웃으며 방을 나선다. 그리고 빨래를 개는 엄마에게 다가가 말했다.
“엄마, 다 풀었어요.”
“벌써?”
“네.”
시계를 보며 놀란 엄마가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꼬릴 올린다.
“말이 안 되는데?”
“근데 진짜예요.”
“······가져와 봐.”
옛날엔 저 말이 그렇게 무서웠는데.
오늘은 씩 웃으며 끄덕였다. 당당하다. 예전처럼 몇 장 뜯어서 숨기지도 않았고, 아무렇게나 찍지도 않았지.
한편, 냉큼 가져온 학습지를 훑어본 엄마의 표정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당연히 내가 제대로 풀지 않았을 거라 생각한 것 같았다.
“······정말 다 했네?”
더 이상의 확인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학습지를 내려놓는 엄마.
옆에 앉아 빨래를 돕다가 은근하게 물었다.
“그럼 이제, 아빠 방 가서 놀아도 돼요?”
“서재에?”
“네.”
“갑자기 거긴 왜? 아빠 일하는 곳인데 괜찮으려나?”
“어제 아빠가 들어와서 놀아도 된다고 하셨어요.”
“그래? 그럼 대신 조심히 놀아야 한다? 아무거나 막 만지지 말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안달 난 모습을 보이면 더욱 못 믿는다. 느긋하게 일어나 서재로 들어간다. 그리고 달칵 하고 문이 닫히는 순간.
“좋아~.”
입꼬릴 올리며 빠르게 책상 앞으로 향했다.
책상 위엔 여전히 어제처럼 신기한 장비들이 가득하다. 헤드셋을 꼽았던 복잡하게 생긴 박스와 마스터 키보드라고 부르는 작은 피아노. 그 외의 난잡한 선들과 마이크까지.
딱 노트북이 있던 자리만 비어있었다. 아무래도 아버지가 가져간 것 같다.
“녹음은 못 하겠네.”
입맛을 다시며 자리에 앉았다. 헤드셋을 머리통에 얹고 작은 피아노에 손을 올린다. 그러고 나서 고민했다. 자, 뭘 쳐볼까? 어젠 아빠가 치던 걸 이어서 만들었지. 그럼 오늘은······.
입술을 핥으며 건반을 눌렀다.
달그락-.
응? 뭐야?
달그락-.
달그락-.
몇 번을 눌러봐도 플라스틱 건반이 눌리는 소리 만날 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설정이 문제가 있나?’
헤드셋이 꽂힌 박스에 볼륨을 높여보기도 하고 여러 가질 건드려봤다. 하지만 여전히 감감무소식.
결국, 노트북이 없어서라는 결론을 내린 나는 허망해졌다. 혼자서는 소리도 못 내는 피아노라니. 이런 게 왜 마스터 키보드라는 거창한 이름이 붙은 거야?
툴툴거리며 헤드셋을 벗는다. 그렇다고 포기한 건 아니었다.
늦은 퇴근이 일상인 아버지를 기다리기엔 12살의 몸이 너무 정직하다. 10시만 되면 졸음이 쏟아져.
‘어쩐다······.’
한동안 건반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뭔가 번뜩 스치는 게 있어 얼른 눈을 감았다.
천천히, 건반 위로 올린 손가락에 힘을 준다. 여전히 플라스틱끼리 맞부딪치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지만, 무시했다.
대신 방금 내가 누른 건반에 상응하는 음을 떠올렸다. 신기하게도 상상만으로 그 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그것도 제법 선명하게.
이번엔 손가락을 옆으로 움직였다. 다음 음. 그리고 다음 음.
건반을 누를 때마다 어김없이 기억 속의 소리가 재생된다.
이 정도면 진짜 소리가 날 때만큼은 아니지만 연주하기엔 충분했다.
그렇게, 조용한 서재에 피아노 소리가 가득 차오르기 시작한다.
이거야말로······.
진짜 천재가 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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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안 잤어? 먼저 자라니까.”
한기준이 슬그머니 집 안으로 들어오다 식탁에 앉아 있는 아내를 발견하곤 어색하게 웃었다.
“괜찮아. 책 좀 읽고 싶어서. 서호도 아빠 기다린다면서 버티다 좀 전에 잠들기도 했고.”
“서호가?”
“뭐 궁금한 게 많다나. 오늘 자기 방에서 온종일 있었거든. 슬쩍 보니 피아노를 열심히 두드리면서 놀던데?”
“그거 소리도 안 났을 텐데.”
푸슬푸슬하게 웃은 한기준이 가방을 내려놓고 아내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자 아내가 기다렸다는 듯이 밀린 이야기를 시작한다.
밀린 학습지를 금세 풀었다는 얘기부터, 그래서 그걸 쭉 확인했는데 틀린 걸 못 찾았다는 말까지.
유럽여행 때 만큼이나 기분 좋은 표정이었다.
새삼 자식이 가장 큰 기쁨이란 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간다.
그렇게 신이 난 아내의 얘기가 끝나자 한기준도 입을 뗐다. 그도 오늘은 할 얘기가 많았다.
“나도 오늘 회사 갔다가 서호 때문에 깜짝 놀랐잖아.”
“왜?”
서호가 자신의 곡을 따라친 것부터, 막힌 부분을 완벽하게 해결한 것까지. 모든 얘기를 마치자 아내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당신이 해결 못 한 부분을 피아노 한 번 안 쳐본 우리 서호가 완성 시켰다는 거야?”
“그치. 서호 아니었으면 나 오늘 퇴근 못 했어.”
주된 멜로디가 완성되면 나머진 그리 어려운 게 아니었다. 이미 편곡 방향까지 정해져 있던 터라 급하게 연주자를 섭외해 곡을 완성 시켰지.
“그게 그렇게 대단한 거면······ 피아노를 억지로라도 시켰어야 했나? 지금은 많이 늦은 편이지?”
아내가 괜스레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한기준이 자신의 의견을 말한다.
“그래서 말인데. 윤 교수님한테 한 번 데려가 볼까 해.”
“윤 교수님이면······ 자기 대학교 때 교수님?”
“응, 지금 예술의 전당에서 영재 교육 맡고 계시거든. 이번 스승의 날에 안 왔다고 어찌나 서운해하시던지, 바쁜 일 끝나면 꼭 찾아뵙겠다고 했는데······.”
“그때 서호도 데려가겠다?”
한기준이 끄덕였다. 아내의 대답이 궁금한 듯 눈치를 살피며.
“음······.”
잠시 고민하던 아내가 마침내 고갤 끄덕였다.
“난 괜찮은 거 같아. 우리가 너무 유난스럽나 싶긴 한데, 그래도 서호가 어디에 재능이 있는지도 모르고 지나가는 것보단 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