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309
309. 외전 – 누구세요, 당신 (1)
“······.”
널따랄 강의실에 앉아 내 앞에 펼쳐진 시험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곳엔 4개의 동기(動機)가 두 마디씩 짜여 있었다.
전혀 다른 느낌과 리듬을 가진 모티브들.
이 중의 하나를 골라 바로 옆에 주어진 오선지에 곡 하나를 완성시키는 게 바로 콩쿠르의 본선.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나뿐만 아니라 이곳에 듬성듬성 앉아 있는 모든 이들이 그랬다. 예상 밖의 문제도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막막한 것은 동기의 난해함 탓도 있지만, 그 동기를 사용해 완성해야 하는 곡의 길이가 최소 64마디를 넘겨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콩쿠르나 작곡 대회의 기출문제들을 보아도 보통은 8마디. 많아야 16마디 정도인데 그 4배라니!
출제 의도는 명확했다. 하나의 주제로 곡을 얼마나 밀도 있고 길게 끌고 나갈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함일 거다.
‘벌써 머리가 아프네. 역시······.’
어딜 봐도 ‘시험’이잖아, 이건.
머리를 싸맸다. 교수님은 시험이 아니라 음악을 만드는 거라 생각하라고 하셨지만, 죄송하게도 그게 잘 안 된다.
하다못해 이 종이의 질감까지도 아주 꺼끌꺼끌한 게 중고등학교 때 지겹도록 받았던 시험지의 그것과 똑같았다.
시험장 분위기는 또 어떤가.
공기가 무겁다. 누군가 무의식중에 생각하고 있는 선율을 흥얼거리면 곧바로 뾰족한 눈 화살이 쏟아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수님의 응원을 이렇게 허무하게 저버릴 수는 없는 법.
나는 시험지를 내려다보았다. 빤히, 아주 빤히.
그러면서 되뇌었다.
‘이건 시험이 아니다. 시험이 아니다.’
그냥 나의 음악, 나의 이야기가 완성되는 과정일 뿐······.
—이라고 생각하는 게 이런다고 쉽게 될 리가······.
교수님 정도의 천재여야 세상을 그렇게 바라볼 수 있는 거 아닐까? 나 같은 범인(凡人)은 아무리 생각해도 옆자리에 앉은 참가자를 이겨야 하는 시험지로밖엔 안 보이는 걸. 그게 나란 사람의 이야기 같은 걸.
살짝 삐딱해져 턱을 괴고 시험 문제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문득 스치는 생각에 눈을 끔뻑였다.
‘나란 사람의 이야기?’
그래, 이건 내 이야기다.
교수님과는 아주 많이 다른, 내 이야기.
그러니 교수님이 하시던 방법이 아닌, 내게 맞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주문을 외듯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건 과제다. 이건 과제야.’
그것도.
‘교수님이 내주신 과제.’
시험이 과제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러면 대체 뭐가 다르겠나 싶지만, 내겐 확실히 다르다.
벌써 이 종이가 어쩐지 소중해진다. 질감도 더 좋아진 것 같고.
더는 경쟁을 위한, 운명이 걸린 종이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무려 교수님이 내주신 과제니까!
미소를 머금었다. 연필을 들었고,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내게 가장 흥미로운 동기는 어떤 걸까? 어떤 동기를 어느 방향으로 발전시켜야 지금 내 기분을 그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
사각사각——.
계획을 세우고, 오선지 위에 음표를 그려나갔다.
그렇게 콩쿠르의 본선이 아닌, 경쟁이 아닌.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나간다.
교수님의 방법과는 조금 다른.
나만의 방법으로.
#
“잘 지내셨습니까.”
장 오슬로가 자리에 앉자, 옆에 앉아 있던 만하임 대학의 교수, 카야가 사람 좋게 안부를 물었다.
이에 잘 지냈다고 화답하자 다른 심사위원도 그에게 하나둘 말을 걸어왔다.
“이번에도 제자와 음원을 내셨던데요.”
“네, 그랬습니다.”
“스승의 음악을 제자가 연주하고, 제자의 음악을 스승이 연주한다는 게 컨셉부터가 흐뭇해지더군요. 제 제자는 저 혼자서 단독 무대에 서고 싶어서 난리인데.”
그 말에 맞장구를 치는 건 카야 교수였다.
“그만큼, 서로의 연주를 믿는다는 거겠죠.”
장은 옅게 웃으며 주억였다.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에.
이윽고 주최측 직원이 지난번처럼 오선지 뭉치를 잔뜩 들고 들어왔다.
심사위원들의 표정에 약간의 기대감이 올라온다.
“그나저나, 이번엔 또 어떤 곡들이 있을지 궁금하네요.”
“여전히 블라인드 테스트인거죠?”
“네, 결승까진 계속 블라인드일 예정입니다.”
직원의 대답에 마티유가 픽 하고 웃으며 중얼거렸다.
“어차피 각자 가진 색들이 뚜렷해서 쉽게 찾을 수 있을 텐데 뭘.”
이에 카야 교수가 빙그레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그러니, 예선에서 두드러졌던 친구들을 찾는 것도 재밌겠네요.”
그 사이 직원이 오선지를 나눠서 각자의 앞에 올려놓았다. 장을 비롯한 모든 심사위원들이 가장 위에 올려진 오선지를 들어 올렸다. 하나의 시험지를 여러 장 복사했기에 모두가 같은 악보를 보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대화하지 않고 채점을 시작했다. 그리고 직원의 안내에 따라 채점이 끝나면, 그때서야 몇몇이 각자의 감상을 슬쩍 슬쩍 던졌다.
“아무래도 아쉽네요. 뒷심이 약한 게 너무 티가 납니다. 하나의 동기로 64마디나 되는 분량을 일관성 있게 채우는 능력이 부족하네요.”
“솔직히 예선에 제출되었던 곡들은 누군가 도와준 곡이었어도 우리가 알 방법이 없었잖습니까. 하지만 본선부터는 남의 도움을 받는 게 불가능하고, 시간 제한까지 있으니 이전에 비해 퀄리티가 낮을 수밖에요. 당연한 결과긴 해요.”
“피아노 없이 곡을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감도 있었을 겁니다.”
이어지는 감상도 비슷했다. 다음 참가자들의 답안지에서도 마찬가지.
모두가 생각보다 큰 격차에 실망하던 그때, 각자에게 다음 악보가 들렸다.
말없이 채점을 하던 장의 눈에 옅은 이채가 떠올랐다.
“오.”
곧이어 옆에서 낮은 탄성이 들려온다.
장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악보가 그때 레오에게 가장 인상 깊었다고 말했던 그 참가자의 답안지라는 것을.
여전했다.
밝지만 결코 가볍지는 않았고.
그래서 선명하게 빛났다.
‘이 참가자만큼은 퀄리티 차이가 크지 않네.’
악보의 초반부에서 들었던 그 생각은 64마디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이어졌다.
하나의 곡이 시험 문제의 답안지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짜임새 있게 완성되어 있었다.
이윽고, 직원이 종이를 걷었다. 그리고 다음 심사로 넘어가기 전, 카야 교수가 헛웃음을 들이켰다.
“시험 티가 안 나네요.”
장이 고개를 돌렸다. 그게 무슨 소리냐며 물은 것은 다른 심사위원이었다.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니 시험의 결과물은 아무리 같은 분량의 곡이더라도 티가 나더라고요. 본인이 만들고 싶은 음악이 아닌, 주어진 동기에서 발전시킨 곡이니까요. 근데, 이번 참가자는 그런 느낌이 없었어요.”
그러자 다른 심사이원들이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인지 곡이 참 해맑더군요.”
“해맑다. 저도 딱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하핫.”
“이 참가자, 지난번 곡도 알 것 같은데. 혹시 한서호 지휘자의 제자일지도 모르겠네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입맛을 다시며 툭 던지듯 말하는 마티유.
“너무 가볍던데요. 동요도 아니고.”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노골적인 불편함이 섞인 평가에 지금껏 잠자코 있던 장이 입을 열었다.
“가벼운 것과 밝은 건 엄연히 다르죠.”
그리고 그와 눈을 맞부딪히며 덧붙였다.
“제게 이 곡은 밝네요.”
“허, 밝은색만 섞이면 결국 곡은 가벼워지기 마련······.”
곧바로 반박하려는 마티유의 말을 끊어내며, 카야 교수도 자신의 의견을 얹는다.
“저에게도 그렇습니다. 마치 작은 별 변주곡처럼 밝지만 그렇다고 가볍게 느껴지진 않네요.”
“지금 이 곡을 모차르트와 비교하는 건 좀······.”
“하지만 그래서 한계도 명확합니다. 특색은 분명하지만, 준결승에서까지도 또다시 이런 느낌의 음악이라면.”
카야 교수가 드물게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아마 결승에 오르긴 어려울 겁니다.”
#
······시험을 마친 다음 날 저녁.
나는 호텔 방 안에서 준결승전 진출 소식을 전해 들었다.
오매불망 결과를 기다리는 부모님께 먼저 소식을 전하고서, 침대 위를 방방 뛰어다니다가 다음 타자를 물색했다.
당연히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교수님이었다.
솔직히 부모님껜 죄송하지만, 결과 발표 직후에도 교수님이 먼저 생각났었다. 아무래도 가장 큰 도움을 주셨으니까.
“······.”
하지만 핸드폰을 쥔 채로 망설이게 된다.
“지금 바쁘시려나······.”
교수님은 세계적인 음악가시다. 세계 최고의 작곡가이자, 지휘자이자, 연주자.
게다가 세계 4대 오케스트라 중 하나인 한 필하모닉의 수장이기도 하시지.
그렇게 대단하시니, 늘 바쁘시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방해가 되고 싶진 않았다.
풀썩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 상태로 고민하다가 어떻게 되었냐는 최겨울의 톡에 답장을 하려던 그때였다.
어떤 기시감이 들며 뒷덜미에 소름이 타고 올라왔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소서】
또 그 목소리다!
꿈의 한 장면을 보기 직전 들려왔던, 뒷부분만 어렴풋이 들려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면 혹시······.’
이번에도 꿈이 보일까?
생각하기 무섭게 눈앞에 장면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마치 VR 장비를 낀 것마냥, 다른 세상에 던져진 것마냥,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달라졌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역시, 지난번에도 보았던.
‘하프···.’
유려한 곡선의 프레임과 그것을 가로지르는 은빛 선들.
하지만 이번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나는 그 이후를 보게 되었다.
하프 너머로 고풍스러운 인테리어가 보인다. 무슨 중세시대 그런 거 같은데?
나의 시선이 점차 내려갔다. 내 의지가 아니다.
꿈속 나의 의지.
일단 꿈속의 나는, 내가 아닌 것 같았다.
아마도 아주 옛날 사람으로 추정되는 여성.
그녀의 하늘색 드레스가 살랑인다. 그 위로 얹어지는 새하얀 손이 꾸물거린다. 나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고, 기대하고 있었다. 고대하고 있었다.
‘누굴······.’
그 순간.
—————!
굉음과도 같은 비명이 들려왔다.
꿈속 나는 깜짝 놀라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 나갔다.
방 안과 마찬가지로 예스러우면서도 화려한 복도. 복잡한 무늬가 가득한 바닥 위로 누군가 쓰러져 있었다.
“헙.”
내 손이 입을 가렸다. 숨을 크게 들이켰고, 그 소리에 고개를 든 남자와 눈이 딱 마주쳤다.
그리고 보였다. 고통스러움에 일그러진 듯한 남자의 눈이.
나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고작 그 두어 걸음이 어쩐지 지독하게 무거웠고.
절망에 물들어가는 남자의 눈빛을 바라보며 나는 정신을 차렸다.
눈앞에서 재생되던 장면이 연기처럼 흩어졌다.
비로소 호텔 방 안이 제대로 보였고, 나는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골랐다.
“이게 대체 무슨······.”
잠깐 침대에서 잠들었나? 근데 꿈이···이렇게 생생하다고? 가위라도 눌린 걸까?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이내 그보다 더 큰 감정이 울컥거리며 올라온다.
나는 떠오르는 대로 툭 내뱉었다.
“아파.”
예리한 무언가가 날카롭게 찌르는 듯했다.
묵직한 무언가가 거침없이 내려치는 듯했다.
심장이······.
그렇게 아파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