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50
050. 결승 (2)
백한길 회장의 서재.
박 실장은 요새 이 공간을 서재라 불러야 하는 게 맞는지 조금 의문이 들었다.
여전히 클래식이 늘 흘러나오지만 더 이상 음원이 아닌 실황 연주였고, 동시에 커다란 스크린이 하루의 절반 가까이 틀어져 있다.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 생중계.
백한길 회장은 회사 업무를 하는 동안에도, 밥을 먹고, 장 교수의 검진을 받을 때도 중계 영상을 틀어놓은 채로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한서호가 무대에 오르는 날이면 어김없이 가족들을 불러 저녁 식사를 가졌다.
자연스레 이어지는 콩쿠르 관람에 백종우는 불만이 많아 보였지만, 그것도 잠시뿐.
화제성이 커지자 흥미가 생겼는지, 오히려 인터넷 소식을 알아와 먼저 얘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요즘 모임에서 꼭 한 번씩은 콩쿠르 얘기가 나온다며 이런저런 얘기를 늘어놓았다.
“······며칠 전에 흥진 유통 사장 가족이랑, 신현 건설 사장 가족이랑 식사 모임을 했는데, 거기서도 그 얘기가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여기서 들은 거로 이것저것 아는 체 좀 했어요.”
그 모습에 백선화가 헛웃음을 지었다.
“집 가서 쉬고 싶다고 아주 질색팔색을 하더니.”
“그땐 일하느라 피곤해서 그랬지. 근데 여기서 보다 보니까 클래식도 뭐, 나름 재밌더라고.”
백선화를 향해 히죽 웃어 보인 백종우가 이어서 말한다.
“그래서 걔네들이랑 몇 시간을 떠들다 내기까지 했다는 거 아니야. 피아노 부문 누가 우승할 지로.”
“누구한테 걸었는데?”
“당연히 김세진이지. 아버지께서 늘 말씀하셨잖냐. 투자를 할 땐 그게 검증된 건지 두 번 세 번 확인하라고. 그래서 지난 콩쿠르들로 검증된 김세진에게 딱!”
그때 백한길 회장이 평온한 말투로 지시했다.
“박 실장. 얘 끌어내.”
“아버지 농담입니다. 저도 당연히 서호한테 걸었죠. 연주를 듣고 내가 울컥한 게 서호 연주가 처음이었는데.”
그러면서 이미 몇 발자국 다가온 박 실장에게 진짜 끌어내려고 그랬냐며 서운해한다.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이 터진 백선화.
가만히 그 광경을 눈에 담던 백한길 회장이 뭔가 생각난 듯 백선화를 불렀다.
“그나저나, 선화야. 해외 음반 유통사들이랑은 접촉해 봤니?”
“네. 리스트업 해서 쭉 돌렸는데, 시큰둥하더라고요···.”
“멍청한 놈들.”
혀를 차며 투덜대는 백한길 회장에게 백선화가 씩 웃으며 덧붙였다.
“···차이코프스키 콩쿠르가 시작되기 전까진 그랬어요.”
“지금은?”
“김세진은 어떻게 안 되겠냐며 딴소리하던 음반사들이 지금은 같이 하자고 아주 난리예요.”
“쯧. 아직 시간은 많으니 제대로 된 음반사를 골라. 그 멍청한 놈들 다 빼고.”
“네. 이미지 메이킹에 능하고 잘 서포트해 줄 음반사로 픽할게요.”
“만드는 건 필요 없다. 그 아이의 재능을 온전히 보여줄 수만 있다면, 그걸로 족할 테니.”
백한길 회장의 단호한 대답에 백선화가 끄덕였다.
······아버진 한서호를 대체 얼마나 높게 평가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한편으론 그런 아버지의 선견이 항상 옳았다는 걸 요즘 느낀다.
지금 상황만 봐도 그렇잖나.
아버지가 입이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던 한서호는, 지금 국내의 클래식을 양지로 끌어올린 장본인이 되었다.
계속 유지될지 금세 식어버릴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이제 고등학생일 뿐인 아이가 입지전적인 인물로 발돋움한 것만은 확실했다.
그렇기에 한서호의 앨범을 준비하는 건, 단순히 아버지의 바람을 넘어 SJ 엔터테인먼트의 이미지에 큰 도움이 될 거란 사업적인 부분도 무시할 수 없었다.
‘오늘 우승까지 한다면 더더욱 그렇겠지.’
그렇게 생각을 맺은 백선화가 문득 궁금해져 물었다.
“오늘 양 대표님은 안 오시나 보네요?”
그러자 백한길 회장의 표정이 일순 고약해졌다.
“그 친구는 가버렸어. 의리 없는 놈.”
“가요? 어딜 요?”
“어디긴. 제 자식 같은 과르네리 본다고 러시아 갔지.”
“흠-흠-.”
통통한 체형을 덮은 새하얀 정장.
앞코가 뾰족한 구두와 호피 무늬 캐리어까지.
SJ 문화재단 양가호 대표가 콧노래를 부르며 선글라스를 슥 들어 올렸다.
“세월이 빠르긴 하네.”
마지막으로 온 게 12년 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였다.
벌써 그렇게나 되었다는 사실에 씁쓸한 웃음을 지은 양 대표가 느긋하게 게이트를 벗어났다.
바로 앞까지 마중 나와 자신을 기다리는 재단 직원.
과르네리를 이곳으로 가져와 한서호에게 전달한 홍 실장이 그를 반겼다.
“오셨습니까, 대표님.”
“어어, 별일은 없고?”
“네. 서호 학생이 사용하지 않을 때 컨디션을 체크하고 있는데, 전혀 문제없습니다.”
다행이라며 끄덕이는 양 대표.
“···?”
수고했다고 어깨를 토닥이던 그의 시선 끝에 유명인사라도 온 듯 몰려있는 기자들이 보였다.
직원이 눈치껏 말했다.
“장 오슬로가 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눈이 커지는 양 대표.
“···장 오슬로?”
명실상부 세계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중 한 명이었다.
파벨과 마찬가지로 거장이라 불리기엔 아직 젊지만, 실력만큼은 진작에 거장이 되어도 부족함 없는 음악가.
동시에 과르네리와 세계에서 가장 비싼 바이올린으로 쌍벽을 이루는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주인이기도 했다. (-그에겐 실력만큼이나 이게 중요하다)
“······.”
직원과 함께 웅성거리는 곳을 응시했다.
기자들이 움직이며 얼핏 장의 모습이 스쳤다.
프랑스 귀족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의 미중년이 저기 그대로 있었다.
길쭉한 다리로 모델 워킹 뺨치는 걸음을 보여주며 공항을 나서고 기자들은 종종종 그 뒤를 따른다.
이를 지켜보던 직원이 나직하게 말했다.
“생각했던 대로 도도하네요.”
비단 외모만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그럴만한 일화가 있었기 때문.
재능이 돋보이는, 흔히 말해 천재라 불리는 부류들이 대부분 그렇듯 그도 제2의 모차트르 제2의 파가니니 같은 별명으로 불렸던 적이 있었는데, 그걸 단호하게 거부해버렸다.
제1의 오슬로라 불러달라며.
당연히 그 인터뷰를 본 사람들은 오만하다며 그를 비난했다.
하지만 그는 그들을 비웃듯, 자신이 최고라는 걸 실력으로 증명하고 있는 연주자였다.
“그럴만한 사람이지.”
“왜 온 걸까요?”
“자기 제자 보러 오지 않았겠어?”
그가 프랑스의 기대주 레오 뒤보셸을 가르쳤다는 건 모두가 공공연하게 아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레오가 쇼팽 콩쿠르에 바이올린 부문이 없어 세계 3대 콩쿠르 전부 우승을 할 순 없다며 아쉬워했을 때, 모두가 그의 제자답다는 반응이었지.
어쨌든.
“······아무 바이올린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거기다 사인을 받았을 텐데.”
자연스레 콜렉터의 기질이 발동했지만.
“됐다. 우리도 가자.”
아무리 그래도, 과르네리가 우선이었다.
#
“어서 오세요, 스승님!”
레오가 장에게 활기차게 인사했다.
“······.”
“스승님?”
“2라운드 영상 보았다.”
“아···네.”
레오가 침을 꿀꺽 삼켰다.
스타일을 바꿨기 때문.
사실 콩쿠르에선 사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준비하면서 실컷 연습했던 걸 뜯어고치는 거니까.
“미쳤더구나.”
“그게···.”
“미쳤지. 미쳤어···.”
그리고 날카로운 인상이 삽시간에 순박한 아저씨의 표정으로 바뀌었다.
“정말 미친 독주였다! 보면서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로. 어떻게 그런 바레이션을 생각을 한 거냐!”
······저게 내 스승님이지.
입을 닫고 있을 땐, 세상 차가워 보이지만.
막상 입만 열면 그냥 동네 아저씨가 되는.
언론에서 만들어진 이미지는, 스승님 매니지먼트의 공들인 작품일 뿐이었다.
다시금 활기차게 웃으며 레오가 답했다.
“그게, 연주를 보고 문득 떠올랐어요.”
“누구 영상? 내 건 아닐 테고, 살바토레 아카르도? 힐러리 한? 그들도 아니면······.”
“서호요.”
“누구?”
“한서호요. 지금 같이 결승에 올라온.”
정말이냐는 듯 바라보는 장.
또렷한 레오의 눈빛에 그가 새삼스럽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네가 네 또래의 연주를 보고 그런 영감을 얻었다?”
“네. 심지어 저보다 꽤 어려요.”
“그건 누가 봐도 그래 보여.”
“······스승님?”
조각 같은 얼굴로 장난스레 웃음을 터트리는 장.
“푸핫, 아무튼 대단하네. 그 친구.”
“맞아요. 대단하죠. 정말로··· 서호의 연주 보셨어요?”
“아니 아직. 얘긴 익히 들었는데 리사이틀 콘서트 때문에 너무 바빴어.”
“그럼, 저랑 같이 가서 보실래요?”
“···?”
치열한 콩쿠르. 그것도 결승 직전에 다른 참가자의 연주를 보자는 제자가 낯설기만 한 장이었다. 그래서 더욱 궁금해진다.
“엄청 놀라실 거예요.”
“널 보며 이미 그러고 있다. 그래서. 언젠데?”
장의 물음에 레오가 어느 때 보다 눈을 빛내며 말했다.
“오늘이요. 결승전 가장 첫 무대예요.”
#
모든 준비를 마치고,
리허설을 위해 더욱 일찍 공연장으로 향한다.
그동안 바이올린은 음악원의 스몰홀에서 경연을 해온 것과는 달리, 결승전은 무려 차이코프스키 콘서트홀에서 진행된다.
규모로는 말할 것도 없고, 무대의 화려함에서도 이전의 스몰홀과는 비교도 안 되는 공간.
마지막 리허설을 앞둔 나는 공연장 앞에서 부모님과 잠시 작별했다.
들어가는 나에게 두 분은 특별한 말을 하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부담이 될까 봐 그러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공연 전에 관광이라도 하시라고 했는데, 그러실지 모르겠네.
또 수능 치러 들어간 아들 기다리듯 카페에만 앉아 계시는 거 아냐?
꼭 엄마랑 돌아다니시라고 톡을 보내놓고, 백스테이지로 합류해 리허설을 진행했다.
하루에 8, 9개씩이던 경연이 2개로 팍 줄어버리니 한결 여유로운 리허설이었다.
문제없이 스베틀라노프 심포니와의 합을 맞추고, 다시 백스테이지로 내려왔다.
그리고 대기실로 향하는데, 목에 주최 측 명찰을 단 직원이 날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뭐랄까. 백스테이지가 꽤 어두운데도 눈이 반짝인다.
“연주자님 팬입니다!”
“저, 저요?”
“네! 지원서를 봤을 때부터 응원했습니다!”
이제 20대 중반 정도가 되어 보이는 직원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하지만 절대 다가오지는 않는다.
결승전이니까.
“감사해요.”
“별말씀을!”
그리고는 얼른 쉬라며 복도 쪽을 가리킨다.
마지막까지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응원하는 직원에게 목인사를 하고, 웃으며 백스테이지를 벗어났다.
그리고 대기실에 덩그러니 앉아 목을 축였다.
무슨 연주 직전마냥 느릿하게 가는 시간의 흐름에 마른 입술을 적셨다.
······긴장된다.
사실 언제나 그랬다.
다만 이 긴장마저도 내가 음악을 할 수 있기에 가능한 거라서 기뻤을 뿐.
괜스레 벽에 걸린 시계를 등지고 방금 전 리허설을 떠올리다가, 슬그머니 바이올린 케이스를 열어젖혔다.
과르네리.
내 전생보다도 나이가 많을 녀석을 들어 올려본다.
손에 감기는 감촉이 따뜻하고, 턱밑에서 올라오는 진한 나무 향이 코끝에 아른거린다.
마음이 편해지는 건, 오래된 나무 냄새 때문인지 그 향이 떠올리게 하는 친우 때문인진 모르겠지만.
나는 옅게 웃으며 눈을 감았다.
“결승전인데······.”
너한텐 도토리 키재기로 보이려나?
그래도 기교 많이 늘지 않았어?
이제 중등기교 정도는 되지 않아?’
대답 없을 질문을 던지며 피식거렸다.
그리고 잠시 후, 스태프의 부름에 다시 복도로 나선다.
어두운 복도 끝에 컴컴한 백스테이지.
압도적인 공연장 크기만큼, 사람도 많은 건지 웅성대는 게 이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 소리에 파묻혀 준비했다.
내가 낼 수 있는 최고의 기량을.
그리고 그때.
-참가번호 17번. 참가번호 17번.
나를 호명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우.”
짧은 심호흡.
바이올린을 고쳐 들며 나에게 신호를 줄 스태프에게 시선을 던진다.
“···?”
그런데, 그가 평소처럼 무대에 올라서라며 손짓하지 않았다.
대신 뭔가를 기다리는 표정으로 양손을 들어 올린다.
다음 순간.
─!
밖에서부터 박수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점점 많은 사람이.
점점 더 크게.
그걸 기다렸는지 스태프도 그제야 손뼉을 마주쳤다. 그 옆에 스태프도, 그 옆에 주최 측 직원도, 모두가 날 보며 박수를 보내왔다.
나는 천천히··· 그 사이를 걸었다.
우레와 같은 박수 속에서 계단을 디뎠고, 무대를 밟았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기분.
고작 손과 손이 부딪혀 나는, 악기에 비할 수 없는 소리 지금 이 순간만큼은 팀파니보다도 더욱 묵직한 진동이 내 심장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곧 마주한다.
어느 때 보다 큰 무대와 어느 때 보다 많은 청중.
그리고 그 앞에 두 발을 딛고 서서 악기를 들고 있는 나를.
······바이올린을 턱에 대고 활을 들어 올리는 순간 그런 확신이 들었다.
나는 오늘도,
내 꿈 중 하나를 이루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