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63
063. 기억 (2)
“나쁘진 않은데······.”
한숨 같은 목소리로 덧붙이는 박동진 감독.
그 뒤로도 한참을 고민하던 그가 펜대를 굴리며 송은혜 작가를 바라봤다.
“어떤 것 같아?”
“스토리에 얼마나 녹아드냐가 중요할 것 같아요. 새로운 에피소드를 넣어야 할지, 아니면 지금 콘티를 유지하면서 끼워 넣을 방법을 찾을지. 고민을 좀 해봐야겠는데요? 아직 후반부 촬영이 남아 있으니 누구처럼 갈아엎는 수준은 아니라 불가능할 건 아닌데······.”
뭔가에 푹 찔린 박동진 감독이 흠흠 거린다.
피식 웃은 송은혜 작가가 물었다.
“감독님 생각은 어떠신대요?”
“괜찮은 아이디어 같아. 내 생각엔 엔딩크레딧에 넣어도 그림이 괜찮을 것 같은데?”
“오, 커튼콜처럼요?”
“그래. 그렇게 얘기하니까 뭔가 딱 느낌이 사네. 커튼콜.”
“그러면 확실히 부담은 덜 되겠어요. 엔딩크레딧이지만 스토리에 벗어나진 않게 몇 년 후의 에필로그를 보여주면······.”
두 사람의 생동감 넘치는 눈빛이 교차하며 ‘합창’이란 단어 하나에 점차 살이 붙는다. 그리고 단단해진다.
나는 그런 모습을 보며 신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악상이 선율로 완성되는 과정을 보는 듯하다. 동시에 음악가들과 하나의 주제를 놓고 밤새 떠들던, 옛 모습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니 기분이 묘할 수밖에.
그때 박동진 감독이 내 쪽을 돌아보았다.
“서호야. 근데, 네가 가능하겠어? 추가 작업해야 할 곡도 많고, 나름대로 바쁠 거 아냐. 콩쿠르 수상자는 리사이틀도 하고 그럴 텐데. 합창곡 특성상 작곡 난이도도 높은 편이고, 후작업도 많이 들어갈 거고.”
우려 섞인 목소리에 나는 잠시 시선을 내렸다.
덩그러니 놓인 빈 오선지.
하지만 그걸 보며 떠올리는 것들까지 비어있진 않았다.
가편집본을 보는 내내 차곡차곡 쌓인 영감과 악상이 단순히 추상적인 영역에서 벗어나 수학처럼 명확하다.
······그러니까.
“저는 충분할 것 같아요.”
지금 당장이라도 연필만 쥐면,
음표를 가득 채울 수 있을 것 같다고.
#
한편, 사운드필름 스튜디오의 직원들은 난데없는 몸살을 앓고 있었다.
지난번처럼 회사에 위기가 생긴 건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였다.
원래대로라면 영화사들이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 회사에 OST 의뢰를 맡기지 않는 게 당연하겠지만, SJ 그룹의 투자를 받게 되면서 그게 대수냐는 듯 일이 정상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메이저 음악 스튜디오로 발돋움하게 된 사운드필름은 직원들을 점차 늘렸고, 그에 맞게 의뢰를 받아왔다.
그런데, 갑자기 의뢰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정확히 한서호가 한국으로 귀국한 시점부터.
영화사들의 의도는 당연했다.
“JJ 필름이요? 아··· 잠시만요. 지금 대표님이··· 한서호요? 소프라노 작업도 아직 한창인 거로 알고 있고, 다른 스케줄들도 많을 것 같아서 사실 이렇다 확답을 드리긴 어려워요. 네네, 네. 일단 메모 남겨놓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덜컥.
수화기를 내려놓은 직원이 입맛을 다셨다.
“또 한서호 찾는 전화예요?”
“네. OST 맡기고 싶다고 하루에 대체 몇 통이 오는 건지···.”
“한서호가 OST 작곡했다니까 소프라노에 대한 언급이 배로 늘어났다면서요. 다들 그게 부럽긴 했나 봐요.”
“맞아. 지금으로선 영화 음악으로 서호만 한 선택지가 없지.”
김윤주 실장이 사무실로 들어오며 말을 받았다.
몇몇 직원들의 눈빛이 반짝인다. 가장 최근에 뽑은 직원들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작업실로 온대요?”
“아마도? M&ACT 미팅 끝나면 그러지 않을까? 아, 그러고 보니 너흰 처음 보는 거지?”
머리통들이 격하게 끄덕인다.
그 모습에 김윤주 실장이 피식 웃었다.
“하긴, 두 달 새에 너무 유명인사가 돼버려서 나도 신기할 판에 너흰 오죽하겠어.”
“영화 OST 회사라 연예인 볼 일은 별로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뭔가 연예인 보는 기분일 것 같아요.”
“저도요. 워낙 요즘 핫하기도 하고, 얼굴도 잘생겼잖아요.”
“실물은 더 잘생겼어.”
슬쩍 덧붙이는 김윤주 실장.
그녀에게 신입 직원 중 한 명이 물었다.
“예전엔 거의 매일같이 학교 끝나면 회사로 출근했다면서요. 이제 자주 마주치겠죠?”
“친해지고 싶어서?”
“흐흐, 네. 한서호랑 형 동생하면 진짜 가문의 영광. 저 완전 팬이거든요.”
그런 직원의 바람에 김윤주 실장이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다.
“생각보다 자주 못 마주칠걸?”
“왜요?”
“와보면 알아.”
“···?”
이윽고, 자동문이 열리면서 나는 알람음이 들려온다. 외근 중인 직원들도 많고, 오 사는 작곡가들도 많기에 별생각 없이 각자의 할 일을 하던 직원들의 앞으로 교복 차림의 한서호가 나타났다.
“저 왔어요!”
활기찬 인사.
김윤주 실장을 비롯한 직원들이 벌떡 일어나 그를 반겼다. 신입 직원들은 총총총 그 뒤를 따른다.
“키가 더 큰 것 같은데?”
“네. 조금요.”
“이제 180 넘겠는데~. 완전 모델이야!”
“하하, 그 정도는 아니구요.”
“아니긴. 그래서 M&ACT 미팅은 어땠어?”
“기대하고 갔는데 충격이었어요.”
“음? 왜?”
“가편집본을 봤는데, 이미 그것만으로 너무 잘 뽑혔더라고요.”
“아~ 난 또. 이번에 박 감독, 송 작가 듀오가 작정한 것 같다고는 하더라. 네 얘기 들으니까 더 궁금해지네.”
“기대하셔도 좋을 것 같아요.”
빙긋이 웃은 김윤주 실장이 끄덕였다. 그리고 뒤이어 인사를 주고받는 직원들을 보다가 슬쩍 소개했다.
“그리고, 여기 얘네가 너 엄청 기다렸어.”
“절요?”
동그래진 눈이 낯선 직원들을 향한다.
“안녕하세요!”
“와, 실물 대박···.”
“팬입니다. 콩쿠르 빠짐없이 전부 봤습니다. 진짜 멋있었어요.”
칭찬에 면역이 없던 한서호였지만, 이런 일을 자주 겪어서일까. 이젠 멋쩍은 미소 대신 가볍게 웃어넘길 줄도 알았다.
“감사합니다.”
흐뭇하게 지켜보던 김윤주 실장에게 한서호가 물었다.
“아버지랑 박 팀장님은 녹음실에 계세요?”
“응. 아마 오늘 내로 못 나오실 듯해. 너도 작업할 거 많지?”
“네.”
빙그레 웃는 한서호.
김윤주 실장이 푸스스 웃으며 혀를 찼다.
“어휴, 좋단다. 대표님보다 더한 일 중독자가 될 것 같아. 아니, 이미 된 것 같아.”
“그럼, 일 중독자는 이만 들어가 볼게요~.”
킬킬대며 웃던 한서호가 다른 직원들에게도 인사하며 휘릭 사라졌다. 일하러 가는 것과는 좀처럼 매치되지 않는 사뿐한 발걸음이었다.
김윤주 실장이 신입 직원들을 돌아본다.
그리고 아까 와보면 안다고 했던 말에 대한 해답을 덧붙였다.
“이제, 저러고 안 나올 거거든.”
작업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특유의 나무 냄새가 확 풍겨온다.
무슨 테라피라도 하는 것처럼 몸이 릴렉스 되는 것 같다.
가방을 소파에 던져 두고 테이블 앞에 앉았다.
여긴 정말······.
그대로였다.
먼지 하나 없는 테이블과 각 맞춰 정리된 오선지만이 가끔 아버지가 들어와 청소했었다는 걸 알려준다.
“······좋네.”
한참을 감회에 덮인 눈으로 훑어보다가 이내 손을 뻗어 오선지 한 장을 끌어왔다.
연필을 꺼내어 사각사각 악보를 그리기 시작했다.
한 장, 두 장, 세 장······
음표들로 빽빽해진 오선지가 반대쪽에 쌓여간다.
당연히 완성은 아니고 스케치 정도의 러프한 곡조.
정신없이 그려나가던 악보 끝에 마침내 두 줄을 세로로 그어 내렸다.
탁—치익—.
들어올 때 가지고 온 캔을 따서 벌컥벌컥 들이켰다.
갈증을 해소하고서 자리에서 일어난다.
작업실 안을 빙빙 돌며 영감과 악상에 매몰되어 있던 머리를 가볍게 비우고, 방금 그린 악보를 챙겼다.
그리고 부스로 들어간다.
오랜만에 만난 스타인웨이.
그 앞에 앉아 뚜껑을 열어젖혔다.
“······.”
느낌이 새롭다. 무려 두 달 만에 누르는 건반. 여전히 영롱한 표면을 손바닥으로 훑었다.
엄청 반갑긴 한데······.
여전히 볼프강처럼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내가 뭘 했냐면···.’ 뭐 이런 의인화는 절대 못 하겠다.
고개를 내저으며 양손을 건반 위로 올린다.
그리고 연주 직전, 생각을 이어갔다.
······하지만 토마스 브로드우드가 언젠가 말했듯, 정말 피아노에도 영혼이 있어 연주자의 연주를 모두 기억한다면.
놀라게는 해줄 수 있겠지.
지난 두 달 사이,
자신의 주인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말이다.
#
내가 백그라운드 사운드 뮤직(BGM)을 차근차근 작업해 나가는 동안,
박동진 감독은 여러 제작진과 회의 끝에 ‘합창’에 대한 작업도 동시에 진행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 연락을 받고 나는 쾌재를 불렀다.
합창곡 작곡이라니!
뭔가 내가 하고픈 걸 위해 소프라노라는 영화를 이용하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지만, 제작진들도 오케이한 마당이니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만큼 좋은 곡을 만들면 될 일이니까.
이제 학교도 곧 방학이니, 작업할 시간이 더 늘 테니까. 틈틈이 녹음도 진행하면서 합창곡 작곡을······음?
그런 생각을 하는데 매점 아주머니가 날 유심히 살핀다.
순간, 날 알아보신 건가 싶었지만 이내 그 생각을 후회했다.
“얼른 잔돈 받아요, 학생. 뒤에 다들 기다리잖아.”
“······아, 네.”
민망함에 괜스레 얼굴이 달아오른다.
요새 하도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으니 이런 오해도 생기네. 하하······ 그래, 변명이지. 연예인 병도 아니고 뭐 하는 거냐 한서호.
잔돈을 받아 돌아서자 채이연이 멀뚱멀뚱 바나나 우유를 들고 서 있었다. 그녀가 짐짓 엄한 눈초리로 내게 물었다.
“왜 그렇게 넋을 놓고 있었어?”
“아, 뭐 좀 생각하느라.”
“합창곡 생각했지?”
“하하···.”
“조심해. 밖에서도 그러면 진짜 위험하다니까.”
그러면서 바나나 우유에 노란 빨대를 콕 찍어 넣고는 우유를 빨아들인다.
곧이어 향긋한 냄새가 은은하게 퍼졌다.
“그럼 곧 다 같이 모여서 네가 만든 합창곡 연습하는 거야?”
“그렇겠지?”
“좋겠다···멋지겠다···부럽다······.”
내가 피식 웃으며 말꼬릴 올렸다.
“주인공 역할인 분이 너무 욕심부리는 거 아냐?”
“그런 거랑 관계 없지이··· 물론 주인공 역할인 건 너무너무 좋은 일이지만······”
빨랫줄에 걸린 것마냥 축 늘어지는 채이연.
“좋은 배역이고 나한테 과분한 배역이었다는 것도 알겠는데 사실 그래서 더 아쉽긴 해.”
“어떤 점이?”
“주인공이 노래도 연기도 다 어중간했던 건 아닐까. 열심히는 했는데, 혹시라도 한세경 선배님께 괜히 피해가 되진 않을까··· 뭐 그런.”
네 기준이 높은 거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좋아하는 일을 잘 하고 싶은 건 나도 충분히 공감하다 보니 도로 삼켰다.
“이제 첫걸음이잖아. 앞으로 주인공을 얼마나 많이 할 건데, 벌써부터 그러면 어떻게.”
“···피, 그러다 나 앞으로 계속 주인공 못하면 어쩌려고 그렇게 자신 있게 얘기해?”
“딱 보면 알지. 노래 잘 부르게 생긴 성대처럼.”
가벼운 농담 덕분일까.
채이연의 얼굴에 잠시 드리웠던 먹구름이 걷힌다.
“······달다.”
“응?”
“바나나 우유 오늘따라 다네.”
낮은 자존감을 머금고 있던 먹구름이 사라진 채이연의 얼굴은 정말 맑은 하늘처럼 환했다.
덩달아 웃음이 지어질 정도로.
그렇게 웃으면서 교실로 들어서는데, 책상에 머릴 박고 있던 이호익이 날 반겼다.
정확히는 내가 사 온 슈크림 빵을.
“고마워, 청불소년.”
이건 뭐, 촉법소년도 아니고.
옆에서 채이연이 빵 터져서 웃는다.
···끙.
나이 서른에 청불 영화 봤다고 놀림을 당하네.
#
“왜 부르신 거지?”
남양주의 한 촬영 현장.
촬영이 모두 끝나고, 박동진 감독이 조연 배우들을 따로 불러모았다.
영문도 모른 채 모인 배우들은 궁금한 표정으로 뒷정리가 한창인 박동진 감독을 기다렸다.
“뭐, 재촬영 있나?”
“어! 나도 방금 그 생각했는데.”
“좋지~. 재촬영하면 돈도 더 받고.”
그러자 이들 중 가장 경력이 많은 중년 배우가 말했다.
“난 돈도 돈이지만, 노래 부르는 부분 좀 다시 찍고 싶어. 한 소절밖에 안 되지만 그거라도 정말 잘 부르고 싶었는데 괜히 아쉽더라고.”
“아마 저희 같은 조연들은 다들 비슷한 마음일걸요. 그래도 선배님은 한 소절이나 되시지, 전 그마저도 안 돼요.”
“근데 그렇게 배정해준 것도 이해가 가긴 해요. 주연분들이 워낙 노랠 잘하시니까. 다들 성악과 나온 줄 알았다니까요? 특히 한세경 선배님은 진짜··· 와 다시 떠올려도 소름. 그 몸에서 어떻게 그런 성량이 나오는지.”
“하긴, 우리 전부가 다 같이 불러야 그 성량에 맞출 수 있을걸?”
그 말에 배우들이 끄덕인다.
그때였다. 대기실 문을 누군가 두드린 건.
쏜살같이 달려나간 막내 배우가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더니 갑자기 놀란 듯 주춤거린다.
“어!?”
당연히 박동진 감독일 거라 생각한 배우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엉덩이를 떼다가 다들 엉거주춤한 자세로 굳었다.
“뭐야? 왜 그렇게 놀라?”
배우들이 갸웃거리며 막내 뒤통수 너머의 인물을 살폈다.
“···?”
거기엔 웬 교복 차림의 남학생이 서 있었다.
어딘가, 매우 낯이 익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