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95
095. 가장 거대한 악기 (2)
“왔어?”
윤태환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자, 그의 아내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다가와 물었다.
어쩐지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윤태환의 모습에 그녀는 더욱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윤태환에게만큼이나, 그녀에게도 이번 도전은 마지막 기회였으니까.
첫 연습이 별로였던 걸까?
한동안 악기 연습을 쉬어서 제 실력이 안 나왔던 걸까?
그러나 윤태환은 아무 말 없이 아내를 걱정할 뿐이었다.
“···어, 어. 몸은 괜찮았어? 아픈 덴 없었고?”
“아직 아무렇지도 않다니까. 오빤? 첫 연습 어땠어?”
“어. 그게···.”
“표정 왜 그래? 별로였어?”
“아니. 그냥. 아직도 잘 안 믿겨서.”
“응?”
아내의 반문에 잠시 망설이던 윤태환이 말을 이어갔다.
“······규모가 내 생각보다 훨씬 크더라고.”
“우와, 그래? 다행이네! 하긴 SJ에서 하는 신년 특별 공연인데 어떻겠어. 게다가 작곡가가 한국 클래식계의 희망이라는 한서호잖아.”
“그러니까. 원래도 대단했는데, 더 대단해졌더라고.”
“공연 얼른 보러 가고 싶다~.”
“부모님들 모시고 가자.”
“응. 그리고 친구들도 오기로 했어. 애들이 오빠 결혼식장에서 호른 연주하는 거 보고 완전 감동먹었거든. 또 보고 싶다네?”
뿌듯하게 웃어 보인 그녀가 돌아서며 말했다.
“얼른 씻고 와요. 맛있는 거 해놨어.”
“아까부터 냄새가 솔솔 나더라. 제육볶음이지?”
“정답! 아, 점심 도시락으로 싸줄까? 내일도 연습 가지?”
“연습은 글피고, 나머지 날엔 자유롭게 나와서 연습해도 된다는데···.”
“그럼 가야지. 여기서 부는 건 말도 안 되고, 개인 연습실도 계약 빼서 연습할 곳도 없잖아?”
멈칫거리는 윤태환을 보며 아내가 가자미눈을 떴다.
“혹시라도 일 구하러 다닐 생각하지마. 후회 없이 하라고. 매일 가. 마지막으로 오빠가 하고 싶은 거 다 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그때 구해도 늦지 않아. 로아가 8개월이나 기다려준다잖아. 아무도 없어도 매일 가서 연습해.”
단호한 대답에 잠시 울컥한 표정으로 심호흡을 하던 윤태환이 이내 푸스스 웃었다.
“···아무도 없진 않을 거야.”
“그래? 그럼 도시락을 좀 넉넉히 싸야겠네! 같이 연습하기로 한 분들 뭐 못 드시는 게 있으려나?”
“아마 한 분이··· 매운 건 안 될 것 같아.”
“으흠, 맵찔이시구나~.”
“풉.”
······굳이 외국인이라는 얘긴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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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 한 번 한식당에 방문했던 적이 있어요. 단원들 중에 한국인이 있었거든요. 이게 한국 가정식이라고 들었는데, 맞나요?”
알버트가 불고기를 어설픈 젓가락질로 국수처럼 뜨고서 묻는다. 바들바들. 금방이라도 후두둑 접시로 떨어질 듯하다.
한편 그의 물음에 윤태환이 눈을 끔뻑였다. 아직 통역사가 오지 않아서 내가 슬쩍 말을 전했다.
“한국 가정식이냐고 물어보시는데요?”
“아, 예스. 예스.”
“다른 음식들도 맵지 않고 좋네요. 뉴욕에서 먹은 것들은 저한테 좀 매웠는데.”
또다시 말을 전하자 윤태환이 갑자기 어깨를 들썩였다. 무슨 문제가 있나 싶어서 봤더니 뭔가 생각난 듯 웃고 있었다.
맵다는 말이 웃긴 건 아닐 테고.
괜스레 마음이 훈훈해진다. 알버트와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저렇게 좋을까.
“흠흠. 아내한테 맵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했거든요. 맛있으시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윤태환이 가져온 도시락과 배달 음식을 일찍 온 연주자들과 나눠 먹었다. 그리고 밥을 다 먹고 정리할 때쯤엔 연주자들 숫자가 배는 늘어 있었다.
······곧바로 연습이 시작됐다.
악기는 3분의 1 정도뿐이었지만 그렇기에 알버트가 더욱 세세하게 봐줄 수 있었다. 급기야 지휘대에서 내려와 주변을 돌며 바로바로 교정한다.
그는 음악 전반에 대한 시야가 넓은 것은 물론이고, 악기가 가진 특성에 대한 깊이도 깊어서 바이올린부터 팀파니까지 모든 악기를 지도하는 데 모자람이 없었다.
한편, 지도를 받는 연주자들 또한 토씨 하나라도 놓칠까 통역가의 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알버트의 지도는 그들에게도 미증유의 사건일 터.
바짝 긴장했던 연주자들이 점차 그의 스텝에 맞춰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 공간에서.
보름 뒤면 펼쳐질 공연을 위해.
오케스트라가 조율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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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쉬었다가 합시다.”
알버트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지휘대를 내려왔다. 그의 시그니처인 목재 지휘봉을 케이스에 넣고, 휘적휘적— 대기실 대신 피아노 앞으로 다가갔다.
그곳엔 한서호가 자리에 딱 붙어 뭔가를 끄적이고 있다.
오선지 위에 음표. 악보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곡을 만드는 건가?”
“네.”
“악상이라도 떠오른 건가?”
“‘좋은 악상’이 떠올라서요.”
한서호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알버트는 의아했다. 굳이 고쳐 말했다. 자신감일까? 아니면······.
이어지던 생각이 헛헛한 웃음을 유발했다.
괴이한 생각이었다. 판타지 같은.
악상은 으레 항상 떠오르는 거라, 저렇게 말한 건 아닐까···뭐, 그런 생각이 튀어나와서였다.
“지켜봐도 되겠나?”
“물론이죠.”
한서호는 자신을 전혀 개의치 않고 피아노를 책상 삼아 음표를 그려나갔다.
알버트는 팔짱을 낀 채로 그 광경을 내려다보았고.
“······.”
건반은 누르지도 않고서, 머릿속에 찰랑이는 선율을 쏟아내듯 거침없이 그려나간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알버트는 마침내 가벼운 스케치일 거라 생각했던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그가 그리고 있는 건 지휘용 악보. 즉, 총보(總譜).
이 자리에서 악기 구성이 정해지고 각 악기의 방향이 정해지고 있다.
하나의 선율이 아닌, 여러 악기의 선율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일말의 고민도 없이 움직이는 손은 지금 순간에도 수많은 음표를 그리며 나아간다.
그저 있는 곡을 암보해서 그린다고 해야 끄덕일 법한 놀라운 속도였다.
하지만 더 경악스러운 건 그 결과물이었다.
수직적으로 악보를 파악하며 스코어 리딩을 하는 알버트. 그 역시 베테랑 지휘자였기에 한서호가 그리는 악보가 어떤 소리로 완성될지, 대강의 그림은 그릴 수 있었다.
한서호는 그렇게 휴식 시간을 꽉 채워 악보를 그렸다. 다음 휴식 시간에도, 그리고 또 다음 휴식 시간에도.
······내가 대체, 뭘 보고 있는 거지?
마지막엔 총보를 거의 완성한 것처럼 보였다.
그동안.
한서호는 단 한 번도 건반을 누르지 않았다.
······.
호텔 방에 들어간 알버트가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핸드폰이 드르륵 떨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휴가를 떠난 악장의 전화였다.
-잘 지내고 계십니까?
여군이라 해도 믿을 법한 각 잡힌 목소리.
얼핏 평소와 다름없게 들리지만, 알버트의 귀를 피해갈 순 없었다.
“목소리가 좋군. 자넨··· 유럽으로 간다고 했었지?”
-네. 지금 독일입니다. 오전에 베토벤의 생가를 방문했고, 거기서 그 옛날 토마스 브로드우드가 베토벤에게 선물했던 피아노를 봤습니다.
“베토벤이 마지막으로 사용했던 피아노 아닌가?”
-맞습니다. 완전히 소리가 들리지 않는 상황에서 쳤던 피아노였다고 하네요. 그리고 작곡한 곡들의 초판도 보았습니다. 저희가 그토록 연주했던 곡들이 이 오선지 위에서 탄생했다는 생각을 해보니 감격스럽더라고요. 비록 베토벤이 어렸을 적에 살았던 곳이었지만, 말년의 베토벤이 작곡하는 모습을 상상해봤습니다.
“나도 클래식을 시작한 이후로 그런 상상을 많이 했었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데, 음색의 기억만으로 오선지를 채워나가던 베토벤과 그걸 지켜보는 나를.”
아마 베토벤을 사랑하는 음악가라면 누구라도 그랬을 거다.
상상하고, 경이로워하며, 존경하고, 그렇게 연주하겠지. 지금도 어디선가.
-······엄청난 행운일 것 같네요. 타임머신이 발명되지 않는 이상 저희에겐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여운에 젖은 듯한 악장의 말에 알버트가 낮게 웃었다.
그는 호텔 안락의자에 걸터앉아 서울의 야경을 내려다보았다.
화려하게 빛나는 도시를 바라보던 그가 불과 몇 시간 전의 기억들을 떠올렸다.
“······근데, 누군가 200년 뒤에 자네처럼 말하지 않을까? 그 곡을 만드는 순간에, 옆에 있었으면 행운이었겠다고.”
-네? 무슨 말씀이신지···.
악장의 물음에 알버트가 어느새 말라버린 입술을 적신다.
“어쩌면.”
그리고 등허리를 타고 올라오는 전율을 느끼며 말했다.
“내가 그런 순간을 이미 본 걸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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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호 왔니?”
엄마가 나를 반겼다.
그리고 웬일로 아버지가 일찍 와서 엄마와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휴, 연습이 많이 늦어졌네? 고생했어. 얼른 손 씻고 와서 귤 먹어.”
···벌써 12시가 넘었네.
내가 늦게 온 거구나.
손을 씻고 나와 소파 바로 앞에 주저앉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쌩쌩했는데.
오히려 오늘 연습도 많이 하고, 그만큼 연주자들의 호흡도 눈에 띄게 좋아지고, 게다가 영감이 떠올라 곡 하날 완성해서 엄청 알찼다고 생각하며 뿌듯해했는데.
“으어—.”
“피곤하지?”
“조금요.”
괜스레 앙탈이 부리고 싶어지네.
바구니에 담긴 귤 하나를 꺼내 까먹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피식 웃던 아버지가 다시 TV 화면을 보더니 갸웃거렸다.
“저 여자 왜 우는 건데?”
“왜 우냐니. 남자가 불치병이라잖아.”
“아아, 그 의사?”
“아니, 재벌집 아들내미 있잖아. 아버지 돌아가셔서 젊은 나이에 대표 된. 드라마를 어떻게 본 거야? 서호야, 이분 영화 음악은 대체 어떻게 하시는 거니?”
“그러게요. 잘 모르겠어요. 지금 잠깐 본 저도 알겠는데.”
빙글빙글 웃으며 엄마를 거들자 아버지가 돌연 턱을 매만지며 진지하게 말했다.
“사실 나도 그게 의문이긴 해. 내가 어쩌다 음악을 하게 된 건지. 딱히 어렸을 때 음악을 좋아하지도 않았거든. 근데 어느 날 갑자기 꼭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신기하단 말이지.”
“내가 속았어. 음악을 엄청 열심히 하길래, 이 사람은 정말 음악을 좋아하는구나 싶었는데. 자기 일을 사랑하는 사람 멋지다. 이러고 반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던 거야.”
“대신 난 가족을 사랑하지.”
“허이구.”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던 엄마가 내 쪽을 힐끔 보더니 별안간 묻는다.
“서호는 여자친구 없어?”
마침 드라마 여주가 학창시절을 추억하며 남주를 떠올리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얘가 있겠어? 음악만 저렇게 하는데. 난 그냥 친구가 있다는 것만으로 놀랍다니까.”
“그래도 모르는 거라니까. 좋아하는 사람은 있을 수도 있잖아.”
···왜 대화가 여기로 흐르는 거지?
마지막 남은 귤 조각을 털어 넣고 우물거리다가 슬그머니 자리를 일어났다.
“없습니다—. 저 오늘 작업한 것들 정리 좀 할게요.”
“그냥 가는 게 수상한데?”
“거 봐, 모르는 거라니까.”
“······.”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턱—.
“······.”
내가 생각해도 수상하다. 왜 피했을까?
그런 의문이 나 스스로도 들었지만. 밀려오는 브리너의 기억, 그중에서도 특유의 향기가 코끝에 아른거려 얼른 고갤 저었다.
휴. 짧게 한숨을 내쉬며 책상 앞에 앉는다.
한쪽에 잔뜩 쌓여있는 노트 쪽으로 시선을 돌려 그중 하나를 끌어와 펼쳤다.
[인천-런던-파리-제노바······]여행 갈 곳들을 정리 중이다.
이제 1년 남짓 남았을 뿐이니까.
그래도 좀 이르다는 생각이 들 수 있겠지만, 나에겐 달랐다.
내가 그곳에 가서 보고 싶은 건, 훑고 싶은 건.
전생의 내가 살았던 시간이기에.
‘그러기 위해서 한 가지 더 쓰고 있는 게 있지.’
노트를 덮고, 또 다른 노트를 끌어왔다.
독어로 적어 내려간 일기다. 과거 일기. 단편적이거나 흐릿한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적고 있다.
오늘도 떠오르는 기억이 몇 가지 있었기에 이번엔 덮어버리지 않고 연필을 들었다.
가방에서 오늘 쓴 악보를 꺼내어 펼쳤다. 그렇게 한참 동안 악보를 보다가 연필을 고쳐 쥐며 일기를 적어 내려간다.
[아버지의 뒤늦은 초상을 준비하며 상심한 나에게, 하이든이 찾아왔다.]한 줄 적어놓고 잠시 고민했다.
뻔한 선율이 싫은 음악가라서일까. 무슨 소설가라도 되는 것마냥 뻔한 표현이 마땅찮다.
과거. 하이든 뒤로 이어지던 행렬을 떠올리며, 다시 연필을 꾹꾹 눌러쓴다.
[그의 가장 거대한 악기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