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wants to be an actor RAW novel - Chapter 101
101화
“후우.”
여기는 몇 번을 와도 긴장된다고, 장진홍은 생각했다.
그는 지금 평창동의 한 커다란 주택 앞에 서 있었다.
한 손에는 묵직한 과일 바구니를 들고서.
오늘 장진홍이 만나러 온 위인은 특히나 멜론을 아주 좋아한다.
먹음직스러운 멜론 두 개가 떡하니 가운데에 차지하고 있는 과일 바구니를 한번 내려다본 장진홍은 비장한 얼굴로 초인종을 눌렀다.
삐로로로-
잠시 시간이 지나고 철컹, 대문이 열렸다.
누구냐고 묻지도 않는다.
어제 미리 연락을 드려서 그런지 일하시는 분이 얼굴을 확인하고 바로 문을 여신 모양이다.
장진홍은 대문을 밀어젖히고 주택 안으로 들어갔다.
바로 보이는 정원에는 아담 크기의 연못과 그 옆에 가지런히 조성된 화단이 보였다.
이제 봄이라서 그런지 화단에는 작은 꽃봉오리의 꽃들이 가득 피어있었다.
천천히 정리된 정원을 둘러보며 현관으로 향했다.
때에 맞춰 일하시는 분이 나와 장진홍을 맞이했다.
“오셨어요, 장 감독님.”
“네, 잘 지내셨어요?”
오래도록 이 집에서 일한 터라 장진홍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곧 장진홍은 서재로 안내되었다.
“저 왔습니다. 건강해 보이시네요?”
문가에서 깍듯하게 인사를 한 장진홍이 서재로 들어갔다.
“오, 왔느냐.”
희끗희끗한 머리에 깔끔하게 다듬어진 흰 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남성.
노백찬 감독이었다.
대한민국 영화사를 통틀어 모든 후배에게 존경을 받고 있을 유일무이한 인물.
다부진 인상에 좋은 풍채가 척 봐도 만만치 않은 인물임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내가 뭐 휠체어라도 타고 있을 줄 알았냐? 저기 앉자.”
노백찬이 가리키는 자리에 앉으며 장진홍이 인상을 썼다.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 제 심장이 철렁했습니다.”
“정색하지 마라. 네 얼굴에 안 어울린다.”
껄껄 웃은 노백찬은 미리 우려둔 차를 두 잔에 나눠 따랐다.
“들어라. 내가 요즘 다도에 흥미를 가지고 있거든.”
“이번 취미는 또 얼마나 가실지 궁금하네요.”
관심사도 다양한 노백찬은 올 때마다 취미가 바뀌었다.
취미를 잘 바꾸지만, 한번 취미로 삼으면 제대로 하는 양반이기에 척 봐도 고급스러운 다기에 차가 담겨 있었다.
찻잎도 고급인지 풍겨오는 냄새도 아주 좋았다.
저번에 방문했을 때는 서재 가득히 분재가 있는 걸 보고 어찌나 놀랐던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노백찬이 분재를 다듬느라 얼굴을 마주하기도 힘들었다.
그나마 이번 취미는 가만히 앉아서 얼굴을 볼 수 있는 취미라 다행이었다.
골프 같은 운동이었으면 오늘 아마 필드로 찾아갔어야 했을 것이다.
“그건 또 뭐냐.”
“아, 멜론 좋아하시잖아요. 사 와봤습니다.”
“이런 거 가져오지 말래도. 큰돈 썼겠네.”
노백찬에게 장진홍은 아직도 20대에 멈춰 있었다.
20년 전, 영화가 하고 싶다고 다짜고짜 찾아왔던 그 청년의 기운이 여지껏 남아있는 것만 같았다.
이번에 영화 으로 극찬을 받으며 확실하게 이름을 날렸건만, 노백찬 앞에서는 어림도 없었다.
한평생 그가 탄생시킨 명작이 열 손가락을 넘으니 말이다.
한국 영화사에서는 앞으로도 노백찬의 이름을 제외하고는 거론하기 힘들 거라고 할 정도였다.
그리고 노백찬은 영화 촬영하는 것만큼이나 제자 양성에도 아주 공을 들인 사람이었다.
“앞으로 올 때는 빈손으로 오거라. 이러면 내가 널 어떻게 부르냐. 바빠서 얼굴도 안 보여주는 놈이.”
“저 이제 돈 잘 법니다. 걱정 마세요.”
“네 놈이 벌어봤자 푼돈이지.”
코웃음을 치는 노백찬의 말에 장진홍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이름 높은 국제 영화제에서 상도 받아 본 노백찬 앞에서 할 소리는 아니긴 했다.
“돈 천 원도 없다고 해서 불러다가 김밥 사 먹인 게 엊그제 같은데……. 언제 이렇게 시간이 지났나 몰라.”
노백찬은 아끼던 제자가 이렇게 큰소리칠 수 있게 된 것이 기쁘면서도 지난 세월을 세어보자면 씁쓸하기만 했다.
그만큼 20대의 새파란 놈이 나이를 먹을 동안 자신도 함께 노쇠해졌으니 말이다.
“아직 정정하시면서 그런다.”
“됐다, 됐어. 그런 입바른 말 하러 온 건 아닐 테고. 멜론 배달하러 온 것도 아닐 텐데. 어쩐 일이냐? 본론부터 꺼내봐.”
손을 내저으며 하는 노백찬의 말에 장진홍은 또 입을 합 다물었다.
아무리 세월이 지났어도 자신의 스승을 이길 수는 없나 보다.
“실은…….”
지난 며칠 동안 장진홍을 괴롭혔던 고민거리가 오래된 스승 앞에서 술술 풀리기 시작했다.
***
“…해서 이런 내용이고 캐스팅도 다 괜찮게 되어가고 있는데… 정작 제일 중요한 주인공을 구하기가 영 힘들어서요.”
“나 원 참. 언제는 쉬웠더냐?”
노백찬은 닳고 닳은 고민거리에 맥이 탁 풀렸는지 못마땅한 소리를 내었다.
그 모습에 장진홍은 웃으며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금부터 늘어놓는 이야기는 분명 스승님도 집중해서 들을 것이라 확신하면서.
“실은…… 이미 오디션도 봤어요. 그리고 추가 오디션도 계속 보고 있습니다.”
“너무 욕심 부리지 말고. 이거다, 싶은 놈 있으면 그냥 낚아채서 촬영해.”
이 저택에 찾아와 울상을 짓는 후배 감독들이 으레 하는 소리였다.
마음에 차는 주연 배우가 없다.
내가 쓴 시나리오는 이렇게 훌륭한데, 이걸 그대로 표현할 사람이 없다.
이걸 어떻게 하면 좋으냐.
하도 들었더니 귀에 딱지가 앉을 만한 고민이었다.
노백찬은 딱 잘라서 항상 하는 충고를 던졌다.
그런데 오늘따라 눈앞에 앉은 제자 놈의 표정이 묘하다.
“으음…… 그러기에는 걸리는 부분이 있는 친구라서요.”
“뭐야, 이미 마음에 둔 놈이 있는 모양이구나?”
노백찬의 눈빛이 변했다.
흥미가 서린 눈으로 장진홍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은 형형하게 빛났다.
현장에서 배우들의 오금을 저리게 한다는 바로 그 눈빛이었다.
“한참 어린 한 배우가 오디션에 다녀갔는데요. 그 뒤로 다른 오디션을 계속 보는데도 생각이 나더란 말입니다. 다른 응시자가 연기를 해도 ‘여기서 그 아이였다면 이렇게 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만 들고 눈에 차는 배우가 없어요.”
‘이미 홀딱 넘어갔구만.’
속으로 그렇게 생각한 노백찬은 겉으로 티는 안 내면서 짐짓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네놈의 진짜 속내가 뭐냐고.
어디 한번 풀어내 보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 배우가 극 중 캐릭터랑 나이 차이도 너무 나고, 영화 주연을 맡기기에 너무 어린 나이가 아닌가 싶어서 말이에요. 정말 고민입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계속 투자자들은 언제 크랭크인 들어가냐고 계속 쪼아대고. 아주 죽겠습니다.”
매일 밤 잠도 제대로 못 잔다고 한숨을 푹푹 내쉬는 장진홍.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던 노백찬이 운을 떼었다.
“드라마는 작가 놀음, 영화는 감독 놀음이라는 말이 있지.”
장진홍도 알고 있는 유명한 문구였기에 차근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노백찬의 말에 담긴 내용은 차근하지 않았다.
“하지만 논다는 게 뭐냐. 말 그대로 하면서 즐거워야 하는 법. 현실성 따져가며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면 즐거울 리가 없지 않냐.”
“예에, 그렇죠….”
도통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없는 스승의 알쏭달쏭한 화법에 장진홍은 말을 길게 끌었다.
“그런데 너희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게 하나 있어. 배우가 감독에게 맞춘다고 그게 감독 놀음인 줄 아니냐? 아니다. 상황이 어찌 됐든, 누가 누구에게 맞추든 감독이 진정 하고 싶은 걸 하는 것. 그게 진짜 감독 놀음이다.”
“네에…….”
고민 상담을 하러 와서 괜히 혼나는 기분이 드는 건 기분 탓일까.
장진홍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노백찬 앞에서 고개를 수그렸다.
이분은 항상 몇 수 앞을 내다보시고 이런 말씀을 해주신다.
더없이 존경스럽고, 경탄할 따름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겠냐. 자존심 세우며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그 배우를 얻고 싶으면 맞춰줘라. 그게 진정한 놀음이니까. 안 그러냐?”
“아…….”
배우에게 맞춰줘라.
장진홍은 그 말을 듣고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 이곳저곳의 눈치를 보느라 옴짝달싹 못 하고 있던 것은 도리어 자신이었다.
감독 놀음인 영화 촬영을 하면서 스스로가 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생각에 잠긴 자신의 제자를 건너보던 노백찬은 찻잔을 들어 후루룩 차를 들이켰다.
그리고 탁, 찻잔을 내려놓으며 끌끌 혀를 찼다.
“이것저것 재기 시작한 것을 보니, 너도 잃을 게 두려운 모양인가 보다. 조금 성공해봤다 이거지?”
다 컸네, 다 컸어.
그렇게 말하며 웃어젖히는 노백찬.
그의 말을 듣고 장진홍은 뜨끔하고 말았다.
자신을 20년 동안 가르친 스승에게 숨길 수 있나.
노백찬의 말마따나 천원도 없어 밥을 못 먹던 것이 엊그제 같다.
그러나 결국 인정받아 천만 영화까지 만들어 이름을 알렸다.
‘그런가, 다른 사람 눈치를 보느라 안 해도 될 고민을 하고 있던 건가…….’
가진 게 많으면 두렵다는 말이 진짜 자신의 이야기가 된 것이다.
살짝 충격을 받아 고개를 수그리고 있는데 노백찬이 유쾌하게 말을 건넸다.
“너도 이제 늙은 거다. 진홍아. 세월 앞에 장사 있냐.”
“아이참. 그만 놀리십쇼.”
“젊은이의 패기는 어디 갔냐. 영화 한다던 놈이 이제 감독이 아니라 장사꾼이 다 됐다. 어디 가서 노백찬이한테 배웠다고 하지 말거라.”
농담으로 하는 말이지만 속에 뼈가 박혀있다.
장진홍은 그런 노백찬의 말에 발끈한다.
그러나 부정할 수는 없었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지금 노백찬이 말하는 게 하나부터 열까지 맞았다.
장진홍은 마음을 다잡았다.
그만 고민하고 한시우를 영입하노라고.
“제 고민이 되게 보잘것없어진 것 같습니다.”
“이놈아, 늙은 것도 서러운데 이런 재미라도 있어야지. 연륜이 괜히 쌓이는 줄 아는 게냐?”
노백찬은 고민이 해결됐다는 제자의 말에 호탕하게 웃었다.
그래도 제자의 고민이 해결됐다는 말이 기쁜 스승이다.
가만히 꼿꼿하게 앉아 차향을 음미하는 노백찬을 바라보는 장진홍의 눈빛이 복잡해졌다.
자신도 나이가 들면 저렇게 노련해질 수 있을까.
며칠을 밤새워 고민하던 것이 30분도 안 되어 해결되다니.
‘역시 스승님을 찾아오길 잘했어.’
“그보다 진홍아.”
“예, 스승님.”
장진홍이 노백찬을 보고 마음을 다잡는 사이, 차를 한 차례 더 음미한 노백찬이 은근한 어조로 그를 불렀다.
“장사꾼도 고민할 만큼 네 마음을 흔든 이가 도대체 누구냐? 응? 얘기만 들어도 보통내기가 아닌 듯헌데.”
“……하하.”
끝까지 자신을 장사꾼이라 부르는 스승의 놀림에 끙 앓는 소리를 낸 장진홍이 입을 열었다.
저 놀림이 꽤나 오래 갈 것 같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스승님을 어찌 이길쏘냐.
“‘선인장 꽃이 피었습니다’ 아시죠? 그거랑 최근 ‘소년, 영국을 걷다’에 나온 한시우입니다.”
“흐음……. 이름은 들어봐서 안다. 어린 나이에 타지에 나가 연극 무대에도 섰다던 그 애 말하는 거지?”
“네, 맞습니다. 영국에 가서 공연을 했다네요.”
장진홍은 대단하다며 고개를 주억였다.
그리고 열한 살 이상이라는 제한을 걸어뒀던 오디션장에서 막무가내로 찾아와 연기를 보여줬다는 일화까지 풀어냈다.
자신의 스승은 웬일로 찻잔에도 손을 대지 않고 장진홍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었다.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노백찬이 수염을 슬슬 쓰다듬다가 툭 내뱉듯 물었다.
“그 아이…… 나도 만나볼 수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