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wants to be an actor RAW novel - Chapter 38
38화
“방금 설명했듯이,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는 신하들이 임금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할 때 쓰는 거야.”
“네. 마쟈요. 왕이 신하들한테 상 줄 때 쓰더라구요.”
비록 뜻풀이를 정확하게 해내지는 못했지만, 내가 이 문장의 뜻을 쉽게 유추할 수 있던 이유였다.
“그런데, 과연 감사한 마음을 전할 때만 쓰일까?”
“녜?”
“자. 내가 하는 말을 듣고 어떤 뜻이 담겨있을지 한번 맞혀보렴.”
내가 고개를 모로 꼬는 사이, 문희성은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눈을 한번 감았다 뜬 그는 금세 가라앉은 눈빛을 하고서 나를 무섭게 쳐다보았다.
순식간에 돌변한 그의 날선 눈빛.
갑자기 쏘아진 그의 눈빛에 나는 소름이 오소소 돋아나는 것 같았다.
역시 화면으로 볼 때보다, 이렇게 그의 연기를 직접적으로 볼 때 실감이 난다.
문희성, 그가 엄청난 연기력을 가진 배우라는 걸.
잠시동안 그 눈빛으로 나를 보던 문희성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평소 말을 할 때보다 한결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그리고 전하, 라는 말로 맺은 후 그의 입술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가 전하는 문장의 뜻은 분명, 감사의 말이었다.
하지만, 그 밑에 옅게 깔려있는 모멸감과 패배감.
높고 높은 지존의 자리에 위치한 임금에게 품은 원한.
결코 표면으로는 나타낼 수 없지만 그렇다고 마냥 참아낼 수는 없는 복잡한 심정이 그대로 느껴지는 한마디였다.
“어땠니, 방금 내가 뱉은 말에도 감사한 마음이 담겨있는 것 같았니?”
그리고 바로 평소대로 돌아와 싱긋 웃는 문희성은 아까와 같은 얼굴이었다.
······무서웠다.
문희성이 뱉은 대사보다 이런 식으로 휙휙 변하는 문희성의 모습이.
아무튼, 문희성이 어떤 걸 의도하고 내게 이 ‘재미난 것’을 제안했는지는 알겠다.
어떠냐고 묻는 문희성을 잠시 가만히 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열 마디 말보다 내가 어떻게 느꼈는지 보여주는 것이 훨씬 빠를 테니까.
“내가 그대에게 밉보였나 보오.”
“······!”
감히 하늘과 같은 임금에게 그런 목소리를 내는 신하에게 건네는 질책.
표면상 드러난 물음과는 달리 서늘한 시선과 어조에는 분명한 질책이 담겨 있었다.
서늘한 시선으로 놀란 문희성을 쳐다보았다.
놀란 신하에게 향하는 임금의 가느다랗게 뜨인 눈.
시선이 향하자 순간 섬뜩함을 느낀 듯 문희성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모습을 확인한 나는 이어서 입을 열었다.
“헌데··· 내 그대에게 충고 하나 하지. 그런 눈을 하는 건 좋지 않을 걸세. 앞으로.”
그렇게 던지고 난 후, 나는 턱을 살짝 올린 상태로 문희성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눈에서 힘을 풀었다.
“후아, 이렇게 하는 거 마자요?”
“허어······.”
내가 연기에서 빠져나온 걸 깨달은 문희성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하하, 내가 하면서도 시우 네가 제대로 이해할까 싶었는데 말이야.”
문희성은 괜한 걱정이었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조씨 별로 안 감사했어요. 화나 보였는걸요.”
“그래, 맞다. 임금에게 곧이곧대로 말할 수 없는 신하의 입장에서 표출할 수 있는 감정 표현은 딱 거기까지였을 테니까.”
“흐움.”
쓰는 말도 그렇고, 예전 동양 왕조는 영국의 왕가랑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해보면서 들으면 더욱 재미있었다.
“방금처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라는 대사 하나에 각양각색의 감정을 담을 수 있단다. 배우마다, 또 상황마다 다르게 쓰이니까 사극을 볼 때면 그걸 주의 깊게 봐도 도움이 될 거야.”
“녜! 재미써요.”
“그래? 다행이구나. 나야말로 역시 시우에게는 못 당하겠던걸. 그걸 그렇게 받아칠 줄이야.”
“희희.”
예전에 지체 높은 귀족 가문 출신의 배역을 맡을 때 터득한 중후한 목소리.
아직 변성기도 지나지 않은 어린아이의 목소리라 실리는 위엄은 적었지만 그래도 충분히 무게감 있는 발성이 나와주었다.
그걸 문희성이 좋게 봐준 모양이다.
문희성의 짧은 평을 듣고 나서 방금 내뱉은 대사에 대해 스스로 점수를 매겨보았다.
흠, 나쁘지 않군.
“아, 그런데 시우야. 사극에서는 ‘그대’라는 표현 대신 ‘경’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단다. 임금이 신하를 지칭할 때 쓰는 말이지.”
“우웅, 경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억했다.
이렇게 또 하나 아는 것이 늘었다.
“그런데··· 방금 그 대사는 무슨 사극을 보고 참고한 거니? 엄청 자연스럽게 대사가 나오던데.”
“우움······. 쪼금 옛날에 본 거라 까먹었어요.”
나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둘러댔다.
“그래? 정말 임금이 말하는 듯해서 순간 오싹했는데. 무슨 작품인지 생각나면 말해주렴.”
“녜.”
아마 말해줄 수 없을 겁니다, 희성 아저씨.
이건 제가 즉석에서 지어낸 거니까요.
내가 탑에 갇혀 있을 시절, 머릿속에 맴도는 대사를 그냥 흘려보낼 수가 없었다.
허공에 대고 혼자 대사를 외치는 것에도 지쳤을 무렵, 나는 펜을 들었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많은 인물들이 뒤섞여 말하는 모든 대사를 받아 적었다.
그렇게 10년.
10년 동안 상상 속의 인물들이 뱉은 대사를 받아 적고, 또 받아 적었다.
오스카 극단에 들어가기 전부터 써왔던 극작의 경력과 합치면 거의 20년에 가까운 세월이다.
방금 튀어나온 대사는 그 20년의 경력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다.
시대와 나라는 다르지만, 대충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한 대사를 지금까지 본 사극의 말투로 살짝 바꾼 것뿐이었다.
“아조씨, 이제 조용.”
“아, 그래. 이거 다 보고 다시 얘기할까?”
“네.”
나는 보고 있던 사극을 가리키며 문희성을 졸랐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문희성은 얼른 일시 정지해 놓았던 영상을 도로 재생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영상에 집중했다.
이 영화를 보고서 문희성에게 물어볼 거리를 찾느라 평소보다 더 눈을 부릅떴다.
요즘 이렇게 진지하게 연기에 대해 문희성과 이야기를 나누는 게 너무 즐거웠다.
연기를 하면서도 성에 무사히 들어갈 수 있을지 없을지 하는 고민을 안 해도 된다.
휴고 바텐베르크 공작 각하에게 들키지는 않을까 마음을 졸이지 않아도 되고.
내가 연기를 하겠다고 나서는 데도 아무도 다치지 않는 세상이라니.
조급해하지 않고도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원하는 작품을 관람할 수도 있다.
전생에 그 많은 아픔을 겪었기 때문일까, 이렇게 달콤한 현생을 누리고 있다니.
이것이 고진감래(苦盡甘來)!
역시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구나.
글로만 익히는 것이 아니라 몸소 사자성어의 뜻을 체득한 기분이었다.
챙- 채챙.
“우아.”
나는 문희성네 집의 커다란 TV에서 펼쳐지는 액션씬을 즐거운 마음으로 관람했다.
***
“에이씨, 이게 과연 맞는 거야?”
차일남은 투덜거리면서 광화문 문화센터 대극장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공연 RUN은 한 달째 성황리에 공연 중이었다.
하도 한유주가 매일매일 전화를 해서 꼭 봐야 한다고 성화라서 표를 잡긴 잡았는데, 생각보다 좋은 자리를 잡을 수가 없었다.
‘한시우, 한시우 그 아이가 나오는 공연으로 보셔야 해요. 선배도 알죠? 요즘 말 많은 그 한시우요!’
한유주는 수화기 너머로 한시우라는 이름을 열심히 강조했다.
현재 연극판에서는 물론, 방송계에서도 이미 알음알음 한시우에 대해 파악을 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 KMB 드라마국 간판 PD인 자신이 그에 대해 모를 리가 없었다.
요즘은 심지어 구내식당에 밥만 먹으러 가도 그의 이름이 이따금 들려올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래봤자, 여섯 살이지. 여섯 살이 뭐야. 한 달 전에는 고작 다섯 살이었잖아? 어휴.”
레인보우 픽처스의 제시카 브라운이 선택한 다섯 살 천재 소년, 한시우.
어쩌다 미디어가 환장할 만한 요소를 운 좋게 다 갖춘 것 아니겠는가?
직접 보고 온 한유주가 아무리 호들갑을 떨어도 차일남은 소문이 과장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정말 그 아이의 연기력이 엄청나다고 치자.
그렇다고 해도 한유주 대사 속의 그 심오한 심리 묘사를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냐.
그것도 고작 여섯 살짜리가?
차일남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한순간에 주변 환경이 급변한 어린아이의 복잡한 심리는 어른이 들여다보려고 해도 골치가 아팠다.
그런데 그걸 정말 여섯 살인 아이가 다 이해하고 그대로 연기를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한숨을 한 번 푹 쉰 차일남은 일단은 한번 보자, 라는 마음으로 극이 시작되길 기다렸다.
이번에 한유주가 찾았다는 이 배우도 아니라면 진지하게 그녀를 다시 설득한 생각으로.
······!
그리고 시작된 RUN.
극을 지켜보는 내내 차일남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이미 여러 번 실패를 겪은 한유주이기에 까다로운 눈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었다.
출중한 외모는 바라지도 않는다고, 그냥 연기를 좀, 아니 많이 잘했으면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그녀였으니까.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차일남은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공연이 끝나고 온 얼굴이 눈물 범벅이 된 차일남은 다급하게 휴대폰을 꺼냈다.
“어, 한 작가? 나 차일남인데. 그 뭐냐, 그! 기획안이랑 지금까지 나온 대본이랑 싹 다 챙겨서 얼른 회의실로 튀어와!”
-아, 뭐야. 피디님. 공연 방금 끝나셨구나?
“그래! 그러니까 얼른 튀어와. 작전회의 들어간다.”
다급한 차일남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로 한유주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짧게만 느껴진 RUN의 두 달에 가까운 공연 일정이 거의 끝으로 향하고 있었다.
“휴.”
오늘 치의 연습을 끝내고 이제 아역 배우들은 집에 갈 시간이었다.
어머니가 아침에 정성스럽게 입혀준 가디건과 두꺼운 외투, 목도리와 귀마개를 빠짐없이 챙겨서 두르고 있는데 누군가 어깨를 툭툭 쳤다.
“웅? 제시카.”
“시우, 소개 시켜줄 사람이 있는데 오늘 저녁에 시간 괜찮아?”
“우움, 네. 괜찮아요.”
“그래. 그럼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녜. 저 엄마한테 연락하고 올게요.”
“알았어. 나도 오늘 일정은 이제 얼추 마무리됐으니까 같이 나갈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귀마개를 한쪽 팔에 걸치고 연습실 문밖으로 나갔다.
이제는 목에 걸린 핸드폰으로 익숙하게 1번을 꾸욱 길게 눌렀다.
이렇게 하면 바로 어머니에게 전화가 연결되지.
매번 11자리의 숫자를 일일이 누르고 있는 나를 보고 아버지가 알려주신 방법이었다.
알려주시면서 이러다가 엄마 아빠 번호를 잊어버리지 말라고 하셔서, 나는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안심시켜드렸다.
400년 전 일도 또렷이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
그런 걱정은 넣어두시죠.
-응. 시우야. 끝났어?
“웅, 엄마. 나 오늘 연출가님이랑 저녁 먹기로 해써. 같이 가요.”
-아, 그래? 알았어. 지금 올라가면 되지?
“웅!”
나는 어머니하고의 전화를 끝내고 다시 연습실로 들어갔다.
복도는 아직 너무 춥다.
들어가서 기다려야지.
“야, 한시우.”
“웅?”
오늘따라 왜 이렇게 부르는 사람들이 많지.
고개를 돌려보니 성지훈이었다.
언제나처럼 삐딱하게 서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선물 효과로 가끔 나한테 말을 시키긴 했지만, 연습이 끝나고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맨날 학원 간다고 바쁜 애가 웬일이지?
“왜?”
“너, 오늘 우리랑 같이 가자. 우리 엄마가 저녁 사준대.”
그 말에 성지훈 뒤를 보니 아역 배우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흐음, 내가 치킨 회동했듯이 뭔가를 하려는 모양이다.
“우움, 근데 나 오늘 제시카랑 저녁 약속이 있어.”
“제시카랑······?”
성지훈은 약간 절망스러운 표정이 되더니 어깨를 추욱 내리뜨렸다.
왜 저래.
“응. 제시카랑 먼저 약속해써.”
“그래, 알았어······.”
성지훈은 터덜터덜 아이들에게로 돌아갔다.
요즘 내 근처에서 괜히 쭈뼛쭈뼛거리던데. 연극도 곧 끝나겠다 정식으로 다시 사과라도 하고 싶은 건가.
기대에 차서 이쪽을 힐끔거리는 아이들을 보고서 조금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성지훈을 불렀다.
“지훈이 형아.”
“어, 어?”
“우리 막공 끝나고 한번 모이자. 그때는 시간 내볼게.”
“아, 어!”
내 말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환해진 얼굴로 성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인기인의 삶이란 고달픈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