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72)
기절한 기사들을 옮긴 후, 아르센은 후란의 천막에 초대를 받아 들어왔다. 바즈칼과 카릭이 따라 들어왔고, 기사가 아닌 리노는 천막 밖에서 대기해야 했다.
천막 안에는 후란과 오트, 그리고 조금 더 나이 많은 중견 기사들이 있었다.
아르센과 다른 기사들이 의자에 앉자, 후란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정식으로 사과하겠소. 젊은 놈들이 혈기에 취해 무례를 범했소. 차라리 경이 이겨서 다행이지, 졌으면 얼굴을 들 수가 없었겠군. 이 무슨 파렴치한 짓인지.”
그렇게 말한 후란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오트를 돌아보며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
“바즈라의 체면을 땅에 처박은 소감이 어떠냐? 심지어 다른 영지 친구들까지 데려와서, 일곱 명이 한 명에게 덤벼들다 깨져? 참으로 대단하기도 하지!”
“면목이 없습니다.”
“앞으로 이십 년 정도는 온 세상의 놀림거리가 될 거다. 그것도 너희들이 감수해야 할 몫이겠지만.”
오트는 수치스러운 듯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하기야 이겼으면 몰라도, 비참하게 두들겨 맞은 끝에 마침내 바닥을 구르며 항복하는 꼴을 그대로 보였으니 기분 좋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 모습이 꼴미워 보였는지, 후란이 다시 한번 재촉했다.
“멀뚱히 서 있지 말고 뭐라고 좀 말해 봐라, 오트. 내가 사과까지 대신해줘야 하느냐?”
“죄, 죄송합니다. 아르센 경. 부디 용서를.”
매서운 질책, 그리고 이에 맞서지 않고 비굴하게 보일 정도로 굽히는 모습에서 아르센은 어색함을 느꼈다.
둘 다 기사인데도 불구하고, 후란의 태도는 어린아이나 일반 병사를 질책할 때나 보일법한 태도였으며, 이에 순순히 따르는 오트의 태도도 기묘했기에.
“어째 사과가 성의가 없구나, 오트. 네 어머니가 그렇게 가르쳤더냐?”
“······정말 죄송합니다!”
이제는 어머니까지 들먹이다니, 당사자인 아르센조차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주위에 있는 기사들은 이를 불편하게 여기기는커녕 귀엽다는 듯이 피식 웃을 뿐이었다.
동부의 문화 차이인가 싶었지만, 이어지는 후란의 말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정말 조카라고 하나 있는 놈이 이래서야. 한숨이 나는군. 미리나가 아들 교육을 어떻게 한 건지.”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던 후란이 고개를 저었다.
“내 이에 대해서는 섭섭지 않게 보답하겠소.”
아르센은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과연, 후란은 자신의 말을 어기지 않았다.
인류의 보편적인 화폐인 금으로 보상을 받은 아르센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금화가 든 궤짝은 바즈칼과 리노가 나누어 들었다.
돌아오는 길,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아르센을 경외하듯 바라보며 길을 열었다. 그 누구도 함부로 말을 걸지 못했다.
“분위기가 묘한데요.”
“형님에게 겁먹었나보지.”
“조용히 해, 바즈칼.”
“넵.”
아르센의 질책에 바즈칼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작게 말해서 망정이지, 큰 소리로 주변 사람들이 겁먹었느니 뭐니 하면서 주변 사람들을 기분 나쁘게 만들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그 모습을 보며 카릭이 나직이 웃더니 말했다.
“어쨌든, 큰 문제 없이 해결되어 다행이오.”
카릭의 말에 아르센 역시 웃으며 대꾸했다.
“카릭 경이 옆에 계셔주신 덕분이죠. 그나저나 그 친구가 후란 경의 조카인 줄은 몰랐습니다.”
“나도 몰랐소. 뭐, 어차피 자기 조카라고 특별 대우할 위인이 아니니 상관없었겠지만.”
“아까도 그렇고, 친한 사이이신가 봅니다.”
아르센의 말에 카릭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젊어서부터 좋은 호적수이자 친구였소. 비록 서로 다른 영지 소속이라 자주 만나는 사이는 아니지만, 영지끼리 교류하거나 엑세키아와 거래할 때 만나면 실력을 겨루곤 했지.”
야영지에 돌아오자, 엘로이즈가 귀걸이로 질문을 던졌다.
[다친 곳은 없어?] [응. 한 대도 안 맞았어. 내가 없는 동안 특별한 일은 없었고?] [없었어. 아눈 경이 나가보겠다고 했는데 막으라고 해서 못 가게 막았고.] [잘했어.]아무래도 호전적인 성품에 다혈질인 아눈이 나갔다가는 사고를 칠까 싶어, 미리 야영지에서 대기하게 조치한 보람이 있었다.
금화를 짐에 잘 갈무리한 후, 아르센은 회의를 열었다.
아르센, 엘로이즈, 바즈칼, 마룬, 리노, 그리고 일단 길을 함께 하는 손님인 카릭과 아눈까지 참여했다.
천막에 모두가 들어온 것을 확인한 아르센은, 우선 정보를 수집해올 것을 명령했던 리노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뭐 좀 알아봤나?”
아르센의 질문에 리노가 큼큼, 하고 헛기침을 한 번 했다.
“최근 주변 상황이 꽤 혼란스럽다고 합니다. 이번에 산맥을 넘어가는 길이 끊긴 사건도 그렇고, 어느 영지는 전염병이 돌고 있고, 영지 두 개가 꽤 큰 충돌을 벌이기도 하는 모양이라서요. 전체적으로 상황이 좋지 않은 모양입니다.”
“충돌? 어떤 영지지?”
“베른과 마나르라고 합니다. 마나르는 카릭 경의 고향인 그곳인 거 같습니다.”
두 영지 모두 지도에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들이 있는 평야에서 서쪽과 서남쪽에 위치한 영지들로, 그중에서 마나르는 카릭의 고향이기도 했다.
마법사를 죽이는 야만의 땅, 절대 지나가서는 안 될 지역.
아르센이 카릭을 돌아보자, 카릭이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원래 좀 사이가 안 좋긴 했소. 예전에 결혼 동맹을 했다가 안 좋게 끝났던 사이라서.”
그들이 가야 하는 방향은 서쪽이었고 마나르는 평야의 서쪽에, 베른은 평야의 서남쪽에 있었다.
당연히 마나르를 지나며 마법사를 죽이겠다고 날뛰는 기사들과 싸울 마음은 없었기에, 아르센은 베른 영지를 지나갈 예정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되기 전까지만 해도.
“혹시 여기 온 기사 중에 베른에서 온 기사도 있었습니까?”
“없었소.”
“전쟁 때문에 기사를 파견 안 했나 보군요.”
“그러게 말이오.”
왜 카릭이 없어졌는데도 이곳에 마나르에서 온 지원군이 없는지 알 수 있었다.
지금 당장 전쟁 중인데 실종된 기사를 찾으러 추가 병력을 투입할 수는 없었을 테니 말이다.
“정말 세상일이 뜻대로 되는 게 없군······카릭 경, 혹시 베른 사람들은 이방인에게 친절한 편입니까?”
“평상시라면 모르겠소만, 전쟁 중이라면 절대 그렇지 않을 거요. 위협적인 군대가 옆을 지나는데 가만히 있을 놈들은 아니지. 예의 바른 대접을 기대했다간 실망할 거요.”
“후란 경에게 보증을 부탁하면?”
“후란도 그들과는 별로 안 친할 거요.”
그 말에 아르센은 한숨을 쉬며 베른 영지를 선택지에서 지웠다. 보증해줄 아는 사람도 없으며 전쟁 중이라 예민한 곳을 지나가는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
“마나르 출신이시니 잘 아실 것 같은데, 혹시 마나르를 몰래 지나갈 만한 길은 없습니까?”
“그런 곳은 없소. 이쪽도 대부분 평야라 눈 좋은 순찰자에게서 벗어나기 힘들거든. 한 번이라도 걸리는 순간 영지를 무사히 빠져나가기 힘들 거요······어쩌면 남쪽과 전쟁 중이니 북쪽은 비어있을 수도 있겠군.”
이런 대화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가만히 서서 대화를 듣던 마룬이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지나가겠다고 말하면 안 됩니까?”
“안 됩니다.”
단호한 대답에 마룬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뿐, 왜 가면 안 되는지까지 물어보지는 않았다. 자기가 몰라서 그렇지 뭔가 이유가 있으려니 납득하는 모양이었다. 차라리 옆에 있는 바즈칼처럼 이해하지 못하면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있는 편이 나으련만.
“어디, 그 두 영지를 지나치지 않으려면······.”
평야의 남쪽에는 엘다린 강이 흘렀다. 강 건너편이 보이지 않을 정도라는 이 거대한 강은, 안에 사는 강력한 마수들 때문에 그 누구도 건널 수 없었다.
배 따위는 순식간에 부숴버릴 정도로 강하고 흉폭한 탓에, 강을 끼고 있는 영지에 배라는 개념이 없을 정도였다.
따라서 남쪽과 서남쪽, 서쪽을 배제하면 남는 곳은 북서쪽뿐. 옆에서 지도를 보던 엘로이즈가 말했다.
“여긴 아무 것도 없다고 나와 있는데?”
“그러네.”
평야 북서쪽에는 아무것도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그냥 싯누런 수피지 그대로일 뿐인 공간.
지도에는 그런 공간이 꽤 많았다. 이 지도 자체가 별부르미에서 과거 지나간 적이 있는 장소만을 표시한 것이기에.
“여기에 뭐가 있는지 아십니까, 카릭 경?”
서부 현지인인, 거기다 바로 옆에서 살아온 카릭이 이 자리에 있는데 물어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아르센이 가리킨 곳을 본 카릭은 짧게 신음을 흘렸다.
“아, 이곳은······.”
“아십니까?”
“알다마다. 그곳은 어둔숲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오.”
그렇게 말하는 카릭의 얼굴은 뜻밖에도 어두웠다.
“온갖 소문이 무성하지. 밤에는 달이 두 개 뜨고, 나무들이 움직여 심장을 파먹고, 폭포가 거꾸로 흐르고······.”
그 말에 아르센과 엘로이즈는 서로를 돌아보았다.
둘 다, 먼 옛날 루덴이 해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서쪽의 명물 중 하나.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폭포.
[그거 얘기하는 거 맞지?] [맞는 거 같은데.]루덴조차 전해 들은 이야기라고 했건만, 이렇게 다시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이야.
그런 그들에게 카릭이 찬물을 끼얹었다.
“이렇게 잘 안다는 듯이 떠들었지만, 사실 그 안쪽에 뭐가 있는지는 정확히 모른다오. 다 뜬소문일 뿐이지.”
“어째서입니까?”
“마법의 힘이 살아있는 공간이니까. 알다시피 마나르에서 마법은 저주받을 것이고 접촉해선 안 될 금기잖소. 따라서 아무도 그곳에 발을 들이지 않소. 바즈라와 거래할 게 있으면 반드시 숲이 아니라 평야 지대를 거쳐서 가지.”
그렇게 말한 뒤, 한 마디 덧붙였다.
“바즈라에서도 숲에 함부로 들어가지 않는다고 들었소. 들어가면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많다더군.”
잠시 고민한 후, 아르센은 다시 질문했다.
“그러면, 바즈라를 통해서 북쪽으로 숲을 돌아가려면 얼마나 걸리는지 아십니까?”
“모르겠소만, 숲이 꽤 넓다는 것은 알고 있소. 적어도 영지 두어 개를 건널 정도는 더 가야 할 거요.”
지도를 한참 내려다보길 잠시, 아르센은 결정을 내렸다.
마나르와 어둔숲의 사이, 미묘한 경계를 타고 서쪽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카릭에게 들었던, 전쟁 중이라 북쪽은 경계가 허술할 수도 있겠다는 말 때문이었다.
“만약 발각된다면 마나르에서 추격대를 보내는 것을 막아 주실 수 있으십니까?”
“어렵소. 약간 방해 정도는 할 수 있겠지만, 마법사를 사냥하는 것은 마나르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율법 중 하나이니. 심지어 영주조차 이를 거스를 수는 없소.”
아르센은 고개를 끄덕인 후 지도를 짚으며 질문했다.
“혹시 숲으로 도망가도 추격대가 쫓아올까요?”
“그렇지는 않을 거요. 그 안에서 죽었다가 영원히 영혼까지 붙들리고 싶지는 않을 테니.”
카릭의 답변에 아르센의 얼굴에 옅은 웃음이 걸렸다.
“조언 감사합니다. 그러면 카릭 경은 경계에 닿을 때쯤 마나르 영지로 가시면 되겠군요.”
“나야 좋소만, 괜찮겠소?”
“괜찮을 거로 생각합니다. 저희 일행에는 마법사가 많으니까요. 적어도 분쟁지역 한가운데로 달려들거나 북쪽으로 멀리 돌아가는 것보다는 나은 선택일 거 같습니다.”
* * *
다음날, 아르센의 군대는 행군을 준비하고 야영지를 나섰다.
후란과 바즈라의 기사들이 이를 배웅했다.
“이렇게 벌써 헤어지게 되어 아쉽소, 아르센 경. 좀 더 긴 시간 만날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저 또한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조금 더 교류를 하고 싶지만, 아쉽게도 시간이 촉박한 처지인지라.”
이미 벨루안을 떠난 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치유 주문으로도 회복할 수 없는 손상을 입은 영주를 고치기 위해, 아르센은 도서관을 얻거나 혹은 그에 준하는 강력한 회복 유물이라도 얻어야 했다.
영주가 죽기 전까지, 혹은 영지가 두 아들의 손에 들어가거나 박살 나기 전까지. 일종의 타임 어택인 셈이었다.
물론 벨루안의 소식을 알 방법이 없는 지금, 시간제한이 얼마나 남았는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별부르미에서 조만간 소식을 알아봐 주기로 하긴 했지만.
“다음에 또 만날 수 있기를. 그리고 카릭.”
“음?”
“소문이 흉흉하니 이미 들었으리라 믿네만, 조심하게.”
전쟁에 대해 말하는 것이 분명한바, 카릭은 씩 웃으며 후란의 어깨를 툭 두드렸다.
“건강하게 다시 보도록 하지.”
야영지를 뒤로 하고, 그들은 서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쇠 비린내 올라오는 구릿빛 잡초를 밟으며, 갓 떠오른 새하얀 해를 등진 채.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그들이 갈 길을 인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