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iger follows the wild flowers on the cliff RAW novel - Chapter 36
36. 소당주
‘딱 두 마리만 잡을까.’
닭처럼 살이 오른 비둘기에게 정신이 팔려 있던 창은 문으로 들이치는 무사들의 모습에 욕설을 내뱉었다.
“옘병!”
계단을 뛰어내리는 장호의 뒤로 접견실 뒷문을 통해 무사들이 밀려들자 호야가 이를 드러냈다.
컹! 컹컹컹! 컹컹!
손도끼를 왼손으로 옮겨 쥐는 장호의 의도를 눈치챈 창이 몸을 틀었지만, 여지없이 붙들렸다.
‘안 돼, 그러지 마. 오라버니!’
버둥거리는 그녀의 허리춤을 움켜쥔 장호가 낙선당을 향해 던져 올렸다. 2층 난간을 박차 오른 창은 본능적으로 몸을 회전하여 담벼락에 내려섰다.
“오라버니!”
‘가거라.’
달싹이는 그의 입술을 읽어 낸 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마당의 무사들은 물론 담벼락 너머에도 몽둥이를 든 식솔들이 낙선당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오라버니…….’
밀물처럼 밀려드는 무사들을 향해 돌아서는 장호를 바라보는 창은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컹! 컹컹! 컹!
등을 맞대야 할 그녀의 자리에 호야가 장호의 뒤를 지키며 사납게 짖어 대고 있었다.
무사들을 돌파할 수 없으리란 상황을 아는 듯 손도끼 날을 거꾸로 쥔 그의 의도가 너무나도 분명했다.
‘내가 가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싸우겠지.’
도주 시간을 벌기 위해 피투성이가 되어 갈 장호였다.
그녀가 사라져야만 도끼를 놓고 투항하리란 생각에 창은 눈물을 머금고 돌아서야 했다.
‘살아 있어, 오라버니, 호야! 꼭…… 구하러 올게.’
이를 악물고 담장 위를 달리는 그녀의 눈물이 눈부신 햇살 아래 부서져 내렸다.
‘짐승인가?’
이랑대 무사들에게 둘러싸인 청림은 담벼락 위를 내달리는 물체를 응시했다.
순식간에 그의 머리 위를 뛰어넘는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시간이 멈춘 듯, 커다란 담갈색 눈동자에 가득 찬 눈물이 비처럼 쏟아질 것 같다.
‘계집아이 같은데…….’
털가죽을 두른 아이는 반대편 담벼락을 내달려 경리원 지붕으로 사라졌다.
또렷한 이목구비에도 선이 가늘어 중성적인 매력을 가진 청림이 긴 속눈썹을 깜박였다. 멍하니 바라보는 그의 뒤로 우르르 달려온 송가의 식솔들이 머리를 조아렸다.
「태화당 소당주님 아니십니까.」
「도둑이 들어 찾고 있사온데, 이쪽으로 지나가지 않았습니까.」
「나는 보지 못하였구나.」
시치미를 뚝 떼는 청림의 대꾸에 굽실굽실 인사를 한 식솔들이 담벼락을 따라 달려갔다.
‘천하의 송가대원에서 백주 대낮에 도둑이라. 무사들만 백이 넘는 대원에서 식솔들까지 동원하다니…….’
생각에 잠겨 걷던 청림은 마중 나온 소담화를 만났다.
반짝이는 능라주단에 값비싼 초피(담비 가죽) 조끼를 두른 그녀의 모습은 송가의 비단을 관리하는 비단장답다.
「어서 오십시오, 소당주님.」
「오늘따라 송가대원이 어수선한 듯합니다.」
「낙선당 쪽에 일이 생겼다 합니다. 사람을 보내 두었으니 곧 소식 전해 올 겁니다.」
소담화가 손을 들어 올리자 뒤에 선 시종들이 좌우로 물러서며 길을 열었다.
「구월당으로 모시겠습니다.」
화려한 정방으로 들어선 소담화가 시종들 물리고, 상석에 앉은 청림에게 손수 차를 따라 내밀었다.
「정오에 방문객이 있었사온데, 친왕부의 물건을 가지고 있었답니다.」
선대 황제의 적자들 중 황제가 된 성화제를 제외한 네 명의 친왕이 북경 친왕부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소녀 친왕부의 물건을 접하지 못하여 알 수 없으나. 낙선당에 심어 두었던 아이의 말에 의하면, 사내가 팔려던 도끼의 자루에 연꽃이 새겨져 있었다 합니다.」
“연꽃은 숭왕부의 문장이다.”
“폐하의 동복형제이신 사왕야 말씀이십니까.”
청림의 입에서 흘러나온 조선말에 자연스레 답하던 소담화가 때마침 들려온 인기척에 문으로 향했다.
‘사왕야의 물건을 팔려던 자와 일행이었던가.’
머리 위로 날아오른 계집을 떠올리는 청림의 고운 손가락이 탁, 탁, 타닥, 탁자를 두드렸다.
친왕부의 물건은 하사품이든 장물이든, 매매와 관련된 자들은 모두 죽는다. 물건의 가치를 모르니 팔려 했을 텐데, 하필이면 황실에 물건을 대는 송가대원을?
‘그것도 단박에 문장을 알아볼 차장에게 내밀었으니, 잡히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겠구나.’
조용히 다가서는 소담화의 움직임에 탁자를 두드리던 소리가 뚝 끊어졌다.
“잡혔다더냐.”
“사내는 잡고, 함께 온 아이는 놓쳤다 합니다.”
“어찌 될 것 같으냐.”
“조용히 덮으려 하지 않겠습니까.”
‘사내는 죽고 도끼는 사라진다. 계집은 어찌 되려나.’
청림의 침묵에 소담화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허 차장이었기에 망정이지, 소녀가 맞이했다면 어쩔 뻔했습니까. 두꺼비 같은 얼굴이 사색이 되었더이다.”
차기 단주 자리를 놓고 허 차장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소담화는 그의 불행이 즐거워 만면에 미소가 어린다.
“잡혔다는 그 사내가 대문지기에게 고려삼을 내밀었답니다. 고려삼 수급에 난항을 겪던 차장이 밀거래를 하러 온 줄 알고 들였는데, 숭왕의 물건이 나온 거지요.”
‘지나치게 희다 했더니, 조선 계집이었던가.’
생각에 잠긴 그의 손가락이 찻잔을 쓰다듬었다.
“잡힌 사내와 도끼에 대해 더 알아보거라.”
“무, 슨 말씀이십니까.”
벌떡 일어선 소담화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송가대원이 뿌리째 잘려 나갈지 모를 일입니다.”
“내 것이 되지 못할 바엔 부숴 버리는 것이 낫다.”
“제가 단주가 되지 못하리라 생각하십니까.”
“나 없이도 가능하겠느냐?”
조선에서 팔려 온 열두 살 소녀가 거상의 첩이 되어, 비단장에 오르기까지, 그녀의 뒤에는 청림이 있었다.
“우선 그 도끼부터 봐야겠다.”
“허 차장도 발을 빼려 숨도 못 쉬고 버둥거리는 상황에 친왕부의 물건을 빼 오라니요.”
“숨도 못 쉬고 버둥거릴 때 목을 졸라야지.”
“하오나 자칫하면 소녀는 화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 정도 배짱도 없이 송가상단을 삼키려 했더냐.”
송장처럼 누워 있는 송 대인은 후사가 없고, 상단의 뼈대를 이루는 품목의 관리자 중에 차기 단주가 나온다.
“그 도끼가 차장의 숨통을 끊을 마지막 패가 될 게다.”
‘벼룩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꼴 아닌가.’
초조함에 방 안을 서성이던 소담화가 느긋이 차향을 음미하는 청림을 바라보았다.
‘도대체가 속내를 알 수가 없구나.’
조선의 역관 출신으로 명나라 전역에 객잔을 운영하는 태화당의 실세가 된 청림이다. 사내들마저 얼굴을 붉힐 정도로 치명적인 미색의 소년을 양자로 삼은 태화당 당주가 남색을 즐긴다는 소문까지 돌았었다.
하지만 청림의 사업 수완은 소문을 불식시키기에 충분했다. 사람을 다루는 재주가 뛰어난 그는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숨은 인맥이 더 많았고, 층층이 계단처럼 쌓인 권력은 명나라 황실까지 닿아 있을 만큼 견고했다.
“오늘 밤 안에 사내를 처리하려 할 텐데, 어찌해야 하는 건지 방법까지 일일이 알려 주랴?”
“아닙니다. 소녀, 알아서 잘 처신하겠습니다.”
손수 문을 여는 소담화를 지나던 청림은 까맣게 잊고 있던 방문 목적이 떠올랐다.
“태화당에 보낸 항라에 결이 고르지 못한 것들이 섞여 왔다.”
“소녀가 확인해 보겠습니다.”
“확인은 무슨, 전량 소각했다.”
서른 필이나 되는 최상품 항라를 모두 소각했다는 말에 소담화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소, 송구합니다.”
“누가 골라 보내었을까.”
흠칫 놀라 주저앉은 소담화를 다정하게 일으켜 세운 청림이 그녀의 차가운 손가락을 어루만졌다.
“손가락을 자르러 왔다가 하도 어수선하여 깜박 잊었구나.”
흑요석 같은 눈동자를 응시하던 소담화는 향기마저 아름다운 청림의 미소에 가슴이 조여들었다.
‘천년의 독을 품은 이무기였어.’
“날이 차니 배웅은 되었다.”
계단에 선 소담화를 뒤로한 채 마당을 가로지른 청림은 대원을 나서 이랑대와 말에 올랐다.
‘그간 송가대원의 비단장과 차장의 싸움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판을 정리할 때가 된 건가?’
말 위에 앉은 청림은 따각따각 골목길을 걸었다.
“일이 묘하게 돌아가는구나.”
그의 손짓에 이랑대장 무진이 말머리를 나란히 했다.
「사왕야를 맞이할 준비는 어찌 되었느냐?」
「범 두 마리와 사슴 스무 마리 준비했습니다. 사왕야께 선물할 말은 동타의모첩목아가 가져온 칠십 마리 중, 준마 여섯 필, 사냥터로 미리 보냈습니다.」
여진 부족들과 말을 거래하고 있던 청림은 지난봄에 오도리 족장이 데려왔던 사내아이를 떠올렸다.
「동만호가 데려왔던 그 막내아들인가?」
「올해 열여섯 살 되었답니다. 앞으로 태화당과의 거래를 맡을 듯합니다.」
「같이 왔던 애첩이 낳은 아들이라 애지중지한다지?」
「선물이라며 초피를 궤짝으로 들려 보냈습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거래구나.」
조선에서는 착용을 규제할 정도로 고가인 초피는 폐사군*에서나 구할 수 있는 여진족의 주요 거래품이었다.
「선물을 받으면 응당 답례를 해야지. 원 거래가에 쌀 백 석 더 얹어 주고, 잘 대접하라 이르거라.」
「친모가 고려 출신이라 하여 태화루주에게 접대하라 일러두었습니다.」
「고려인이라……. 계집 취향도 대물림이던가.」
고려 미인을 황후로 삼았던 원나라 때부터 고관대작들은 고려의 여인을 얻어야 명가 대접을 받을 지경이라.
그녀들이 전파한 고려의 풍습, 고려양은 원나라를 장악하고 조선으로 대체되어 명나라로 이어졌다. 명을 건국한 주원장 역시 고려인 애첩이 여럿이었고, 3대 영락제의 여비 한씨와 5대 선덕제의 부인 한씨는 자매 되시겠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자매를 후궁으로 들인 꼴이니, 조선의 금상을 낳은 인수 대비의 고모들이었다.
‘어쩌면 그리도 취향들이 한결같은지.’
혀를 차던 청림이 여진 출신인 무진을 응시했다.
「너도 조선의 여인이 좋으냐?」
「아름답고 강한 존재는 사내들의 선망 아니겠습니까.」
「조선의 여인들이 강하다 생각하느냐.」
「도자기처럼 곱고 단아해 보이지만, 독하고 고집이 세서 마음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
「태화루주 홍연 이야기로군.」
얼굴을 붉히는 무진의 모습에 청림이 미소 지었다.
‘송사 중에 제일은 베갯머리송사라.’
장차 여진족의 준마들을 확보하려면, 동타의모첩목아의 마음을 사로잡을 도자기 하나 박아 두어도 좋을 듯하다.
「무진아……. 계집을 하나 찾아야겠다.」
곰 가죽을 두른 조선 계집, 하얀 피부에 담갈색 눈동자를 가졌으며, 민첩하기가 날다람쥐 같다.
「이랑대를 풀어 샅샅이 뒤지거라.」
*폐사군: 세종이 여진을 방비하고자 서북에 설치한 4군을 폐지한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