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iger follows the wild flowers on the cliff RAW novel - Chapter 42
42. 은원의 굴레
‘호야……. 흐윽, 윽. 가지 마…….’
흥건하게 젖은 베갯잇에 얼굴을 묻은 창의 귓가로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쩝. 쩝쩝. 쩝.
“호야?”
침상 옆에는 호야 대신 낯선 계집아이가 서 있었다. 입에 문 월병을 잽싸게 숨기며 배시시 웃는다.
“넌 뭐야.”
“해동 대신이라고, 주무시기 전에 인사드렸잖아요.”
‘기억난다. 총……. 열두 살이랬나.’
몸을 일으킨 창이 등불이 드리운 방 안을 둘러보았다.
“너는 여기 왜 있는데?”
“나리께서 꼭 붙어 있으라 하셨어요. 하루 종일 주무셨는데, 배 안 고프세요?”
양 갈래 머리를 만두처럼 말아 올린 총총이 소매 춤에서 한 입 베어 문 월병을 내밀었다.
“제가 먹고 싶어서 먹은 게 아니고, 나리께서 먹어 보고 건네야 드신다고 해서 그랬어요.”
“오라……. 낭군님은?”
“오라, 낭군요?”
말똥말똥 쳐다보는 총총의 모습에 창이 얼굴을 붉혔다.
“서, 방님?”
“아! 나리. 후원에 계세요.”
기다렸다는 듯 신발을 대령한 총총이 일어서는 창의 어깨에 두루마기를 둘러 주었다. 살뜰하게 살피는 모습에 아기씨 시절 그녀를 따르던 곱단이 생각이 났다.
“오, 서방님과 시간 보내려 하니 따라나설 필요 없다.”
“나리께서 오씨인가 봐요.”
입에 붙은 오라버니를 어찌하면 좋을까.
“너는 여기서 먹던 거나 먹으면서, 딱 기다려.”
창은 문을 열고 선 총총에게 손사래 치며 방을 나섰다.
후원으로 향한 그녀는 커다란 은행나무 아래 우두커니 서 있는 장호에게로 다가섰다.
“화로까지 피워 놓고, 밖에서 뭐…….”
화로 끝에 걸린 피 묻은 동아줄로 향하는 창의 손을 움켜쥔 장호가 그녀를 품에 안았다.
“호야를…… 데려왔다.”
불길로 손을 뻗는 창을 부둥켜안은 장호의 숨결이 그녀의 목덜미를 뜨겁게 달궜다.
“왜! 왜 말을 안 했어! 왜!”
벗겨진 가죽과 처참하게 잘린 머리뿐인 호야를 말할 수도 보여 줄 수도 없었다. 미친 듯이 요동치는 그녀를 꼭 품어 안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조선으로 데려가려면…….”
말을 잇지 못하는 그의 품에서 벗어난 창이 화로로 다가섰다. 걸음걸음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호야, 할매 집에 데려다줄게. 낮잠 자던 매화나무 아래로 꼭 데려다줄게.”
끊어져 내린 동아줄을 집어 화로에 넣으려니,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다.
‘나중에…… 보자, 호야. 나중에 다시 만나.’
소중한 것은 늘 가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창은 다시 한번 뼈저리게 깨달아야 했다.
‘개 한 마리 때문에 송가대원을 뒤집어 놓았던가.’
청풍각 소식을 전해 들은 청림은 황당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함께 전장을 누비던 애마도 아니고.”
관운장이 적토마를 위해 지전을 태웠다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다. 장호를 관운장의 현신이라 칭송하던 숭왕의 말이 허풍이 아니라면…….
“꽤나 감상적인 괴물이란 말인데.”
지그시 눈을 감은 청림의 손가락이 책상을 두드렸다.
‘처음이라, 처음이 병아리였나 개였나?’
병아리는 나는 법을 가르치다 그리되었고, 개는 발발이라 이름까지 지어 주며 꽤나 귀애했었는데.
율은 피투성이 발발이를 연못으로 던져 버렸다.
어린 율의 잔혹함은 노비들의 매타작으로 이어지고, 어머니 윤씨의 선에서 덮을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쑥덕이던 시종들, 눈물짓던 어머니, 그를 매질하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친다.
쫓겨나듯 떠난 유학길이지만, 음모와 계략이 능력과 성공의 척도인 명나라는 열세 살 율에게 기회의 땅이었다.
타다닥!
경쾌하게 책상을 두드린 청림이 창가로 향했다.
창문을 열자 시원한 겨울바람이 답답한 폐부로 들어차며 지난 기억들을 밀어냈다.
「소신, 무진입니다.」
창밖을 응시하던 청림이 책상으로 향하자 방으로 들어선 무진이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범들은 아직도 먹이를 먹지 않고 있습니다.」
「예민한 놈들이니 환경이 바뀐 탓이겠지.」
「배불리 먹어야 흉포함이 덜할 텐데, 저리 굶고 있으니 쇠뇌를 더 늘려야겠습니다.」
「마지막 일격은 사왕야를 위한 것이니, 섣불리 나서지 말라 이르고……. 찾으라던 물건은 어찌 되었느냐?」
「확보했습니다. 확인해 보니 우리 쪽에서도 찾던 물건이었습니다. 매해 이랑대를 습격하던 그놈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청림에게 무진의 보고가 이어졌다.
「오늘 예정이었던 동타의모첩목아의 송별회가 연기되었습니다. 태화루주에게 더 머물고 싶다 청하였답니다.」
「마음에 드는 기녀를 찾았나 보군. 대속을 청하던가?」
「홍연의 말로는 밖에서 거지를 주워 왔다 합니다.」
「거지?」
숭왕을 위해 명기들을 태화당으로 차출했다지만, 아무리 눈에 차는 계집이 없어도 그렇지. 거지는 좀…….
「개도 안 다니는 엄동설한에 어디서 만났다더냐.」
「확인해 보겠습니다.」
「두어라. 괜히 들쑤셔 좋을 것 없다.」
여진 족장이 귀애하는 아들에게 거지가 웬 말인가.
‘내일 범 사냥이 끝나면 연회가 열릴 테니, 동만호의 아들은 그쪽으로 불러들이면 되지 않을까?’
비단잉어 가득한 연못에 낚싯대 하나 더 걸친들 무슨 상관이랴. 알아서 마음에 드는 계집을 고르겠지.
타닥. 탁. 탁.
책상을 두드리던 청림이 무진에게로 고개를 들었다.
「너는 의주에 좀 다녀와야겠다.」
「예.」
「정조사* 일행이 조선으로 귀환 중이다. 의흥위 소속 착호장에 대해 들은 것이 있는지 알아보거라.」
그날 밤, 의주로 출발한다는 무진의 보고에도 청림은 잠이 오지 않았다. 모든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음에도 마음은 심란하고 머리는 복잡하다.
‘길어야 삼사 년……. 머지않아 명의 하늘이 바뀐다.’
궁 밖에서 자라던 태자가 태후의 보호하에 들어간 후로는 황제의 씨를 말리던 만 귀비도 포기했는지 황자들이 줄줄이 태어나고 있었다.
‘황제는 도에 심취했고, 늙은 만 귀비는 죽을 날이 머지않았으니 슬슬 태자 쪽으로 갈아타야 하려나.’
뒤척이던 청림은 침상에서 일어나 반월당을 나섰다.
호위들을 물리고 홀로 걷던 청림은 청풍각 후원으로 뚫린 원형의 문 앞에 이르렀다.
“살어리랏다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단이랑 호야랑 할매~ 청산에 살어리랏다.”
‘어디서 많이 듣던 곡조인데.’
문에 선 청림이 후원을 향해 고개를 틀자, 은행나무 주변을 거니는 자그마한 여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얄리얄리 얄라성 얄라리 얄라”
독특한 후렴구에 청림은 노래의 출처가 떠올랐다.
‘별당 여인이 부르던 노래다.’
적삼 위로 속저고리를 입은 여인의 걸음걸음, 층층이 단을 달리한 무지기 치마 아래로 속바지가 드러났다.
운장의 아내가 분명한데, 혼인한 여인답지 않게 땋아 내린 귀밑머리 끝에 댕기가 달려 있다.
“호야…… 얌전히 있어. 아침에 고기 가져다줄게.”
돌아선 여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청림은 새어 나오는 신음을 삼키며 벽에 기대어 섰다.
두근. 두근두근. 두근.
방문이 닫히는 소리에 청림은 반월당을 향해 내달렸다.
거친 숨을 토해 내며 서재 문을 열어젖힌 그는 서랍장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두루마리들을 풀어 던지며 서책들 사이에 묻혀 있던 족자를 집어 들었다.
촤르륵 펼쳐 든 족자 속에는 노란 저고리에 진달래색 치마를 입은 아리따운 여인이 그려져 있었다.
개암나무 열매처럼 고운 담갈색 눈동자.
“빌어먹게 낯이 익다 했더니!”
역모에 휘말린 정혼녀의 집안이 풍비박산 났다는 소식에 일곱 살의 율은 한걸음에 달려갔다.
두 달 전, 정혼녀를 보기 위해 월담을 감행했었던 율은 쑥대밭이 된 백암당의 모습에 거품을 물고 기절했다.
웃음 짓던 효옥이 눈에 아른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해를 넘기도록 가슴앓이하던 율이 병석에서 일어날 즈음 별당에서 구슬픈 노래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몇몇을 제외한 시종들의 출입이 통제되고, 밤마다 별당으로 향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투는 날들이 많아졌다.
늘 닫혀 있던 별당 창문이 열리던 날, 율은 처음으로 노랫소리의 주인을 볼 수 있었다. 흉측하게 얼굴이 녹아내린 여인은 반짝이는 담갈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불룩 솟은 배를 쓰다듬으며 미소 짓던 여인은 이내 창문을 닫고 사라졌다.
얼마 있지 않아 ‘쿵!’ 소리와 함께 스르륵 열린 창문 틈으로 공중에 펄럭이는 치맛자락이 보였다.
조용히 창문을 닫은 율은 내당으로 향했다.
율이 전하는 소식에 어머니는 버선발로 달려 나갔다.
식경도 안 되어 별당은 불길에 휩싸였다.
희번덕 눈이 뒤집힌 어머니의 광기 어린 웃음소리에 주춤거리며 물러선 율은 사랑방으로 달려갔다.
‘아버지가 가지고 싶은 것이 벗의 아내였어?’
병풍을 밀어낸 율은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버렸다.
족자 속에는 여덟 살에 죽은 그의 정혼녀가 아닌 열여섯은 되어 보이는 여인이 그려져 있었다.
아래쪽 이름 역시 효옥이 아닌 연희라 적혀 있는데.
‘왜…… 몰랐을까.’
화재 소식을 듣고 돌아온 아버지는 전소되어 버린 별장에 주저앉아 절규했고 율의 분노는 화염처럼 치솟았다.
‘남의 계집을 얻으려 내 계집을 죽였다.’
태어나 한 번도 무언가를 빼앗겨 본 적 없던 그는 폭주하기 시작했고 반년 만에 유학이 결정됐다.
열세 살의 율은 아버지의 병풍 뒤에서 뜯어낸 족자를 칼처럼 품어 안고, 봉화 본가에 들러 조부가 아끼는 용문석 벼루까지 훔쳐서 길을 나섰다.
“분명히 죽었다고 했는데…….”
청림은 족자와 함께 넣어 두었던 상자를 열었다.
화려한 노리개를 보고 있노라니, 소복을 입은 채 화사하게 미소 짓던 어머니가 눈에 아른거린다.
왕가의 예물로 쓰이는 대삼작노리개는 내세울 것 없이 돈만 많은 유씨 집안 며느리들이 대물림하는 패물이었다.
산호수, 옥쌍엽, 밀화불수, 각각의 단작노리개를 한 벌로 역은 삼작노리개는 붉은색, 노란색, 푸른색 견사로 색감마저 달랐지만, 같은 매듭과 끈목 기술을 통일하여 세 개의 노리개가 한 쌍임을 나타냈다.
청림은 노란 매듭의 옥쌍엽 단작노리개를 떼어 냈다.
“나비가 돌아오면 내 계집도 와야지.”
*정조사: 명나라로 보내던 신년 축하 사절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