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iger follows the wild flowers on the cliff RAW novel - Chapter 41
41. 거래
“해서 술까지 마셨더냐.”
“처음 먹는데, 술인 줄 어떻게 아냐고.”
“내가 너를 몰라 묻는 것이냐.”
비단 금침을 덮고 누운 창이 침상에 기대어 앉은 장호의 뒤통수를 노려봤다.
“당연히 토이모가 먹는 거 확인하고 먹었지.”
“사내가 계집에게 술을 권한 것부터가 흑심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아니라니까. 토이모도 많이 먹으면 취한다고 했거든?”
엿가락을 두고 다투는 예닐곱 아이들처럼 토이모를 두고 장호와 티격태격하던 창이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하고 오라버니답지 않게 왜 그래? 엄마가 고려인이라 도와준 거라고 몇 번을 말해.”
“상황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단순해. 내가 고려인이라서 반가웠던 거야.”
순진한 대꾸에 장호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 반가움이, 그 친숙함이, 사내의 본능적인 선택이란 사실을 어째서 알지 못할까.’
여진 족장의 여러 아내들 틈에서 치열하게 살아남았을 고려의 여인, 객잔 한 층을 내어 줄 만큼 귀빈 대접을 받도록 아들을 키워 냈을 그녀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제 어미처럼 강하고 아름다운 여인을 얻고자 하는 토이모의 눈에 창은 조선의 범처럼 보였을 것이 분명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신경을 건드리더니…….’
창을 바라보던 토이모의 눈빛이 떠오른 장호의 목덜미로 핏줄이 곤두섰다.
“사내는 마음에 둔 여인이 아닌 이상 그 무엇도 선물하지 않는다. 단이가 마음에 들지 않는 암놈에게 먹이 물어다 주는 것 보았느냐?”
‘그런가? 자꾸 듣다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침상에 누워 두 눈을 깜박이던 창은 끈질기게 토이모를 물고 늘어지는 장호가 이상하다.
“그럼, 오라버니는 왜 멱신도 만들고, 목도리랑 토시도 사 줬는데?”
“너에 대한 나의 마음은…….”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차곡차곡 쌓여 온 마음을 설명할 길 없는 장호는 입술을 달싹였다.
연모한다는 말 한 마디가 이다지도 어렵던가.
“왜 대답이 없어?”
“내가 사내로서 널…….”
“입맞춤하기 전이거든요?”
“내가 해태 눈이어서 그랬다.”
“뭐?”
연모하는 줄도 몰랐다는 말을 삼키는 그의 얼굴이 달아오르고 손에서 땀이 배어 나온다.
“내 말은, 세상의 모든 사내는 늑대라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내는 필요 없고 오라버니는? 오라버니도 늑대야?”
창이 비단 이불을 박차고 앉았다.
“그래서 나를 아내라고 한 거였어?”
‘내가 내 눈을 찔렀구나.’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에 장호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누이로 남으라 말하고 다른 사내들의 접근을 막아 버리는 행태가 얼마나 이기적인가.
장호가 벌떡 일어서자 창이 그의 손을 붙잡았다.
“누이라고 하면 달라 할까 봐 그랬다며.”
토이모의 말이 떠오른 창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며 가슴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거야?’
「운장 내외분 기침하셨습니까.」
문밖에서 들려온 인기척이 어찌나 반가운지!
보석처럼 반짝이는 담갈색 눈동자를 내려다보던 장호가 창을 눕히곤 머리까지 이불을 덮어 버렸다.
“길 떠나려면 자 두는 것이 좋겠다.”
‘날 샜는데 무슨 잠을 자래.’
이불 속에 갇힌 창은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가 아른거렸다. 화난 것도 같고 당황한 것도 같고…….
소춘풍의 조언에도 창은 이불을 밀어내고 앉았다.
“나도 그랬어. 내가 부르는데 호야가 오라버니 따라갈 때 기분 별로였어.”
말하지 않으면 심장이 터질 것 같아 문으로 향하는 장호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쳤다.
“어차피 다시 볼 것도 아닌데, 마음 쓰지 마.”
가슴에 휘몰아치는 감정들을 여지없이 쏟아 냈다.
“오라버니가 제일 좋으니까 샘 부리지 않아도 돼.”
부서질 듯 닫힌 방문을 쳐다보던 창은 키득거리며 비단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덩치는 산만 해 가지고.’
태화당 소속 관상가의 말을 떠올린 청림은 이른 아침 반월당을 찾아든 장호를 유심히 살폈다.
‘밤새워 이야기를 하더라는 시종의 말이 사실이었던가.’
비단옷으로 갈아입은 장호는 헌헌장부였으나, 갇혀 있을 때보다 더 피곤해 보였다.
“감사 인사 전하러 왔습니다.”
“감사는 제가 아닌 사왕야께 하셔야지요.”
사내답지 않게 묘한 색기를 흘리는 청림을 응시하던 장호가 조용히 찻잔을 들었다.
여인의 몸으로 내 나라도 아닌 타국 상단의 비단장까지 오른 소담화를 벌벌 떨게 했던 사내였다.
“어떻게 사흘 만에 북경의 친왕부에까지 소식이 닿았는지 묻지 않으십니까.”
“손도끼에 대해서는 할 말 없습니다.”
손도끼를 팔려 했던 것에 대해 입단속하려던 청림의 눈동자가 흑요석처럼 반짝였다.
‘사내나 계집이나 탐나는 종자들이로다.’
청림이 우직한 장호의 성품을 확인하는 사이, 그의 시선이 소당주에게 흐르는 묘한 기운을 관통했다.
숭왕을 손에 쥐려 하는 소당주.
천하의 숭왕을 기다리게 한 장호.
아름다운 구미호와 사나운 백호처럼 서로를 탐색하는 두 사내의 신경전은 소리 없는 전쟁과도 같았다.
달그락.
숨죽여 들어선 시녀가 다과 접시를 내려놓는 소리에 침묵이 깨져 버렸다.
“사왕야께 인사를 드리는 대로 떠날까 합니다.”
“천천히 하시지요. 겨울이 매서운 북방은 술도 조선보다 독하답니다. 사왕야께선 더 쉬셔야 할 겁니다.”
연회상의 술들을 독주로 교체했던 청림이 탁자 끝에 놓인 궤짝의 뚜껑을 열었다.
“물건은 주인을 찾아가고, 나머지는 작은 성의입니다.”
상자를 가득 채운 백금 위에는 손도끼가 놓여 있었다.
“부인께 필요한 물품들을 구비하는 데 요긴하게 쓰일 겁니다. 사왕야께서 기침하시면 따로 기별 드리지요.”
‘내가 여우 굴에 들어앉았구나.’
조용히 일어선 장호가 손도끼를 허리춤에 끼워 넣었다.
“나머지는 사양하겠습니다.”
“도총부 소속 착호장이라 들었습니다.”
“과거의 일입니다.”
“사왕야를 위한 범 사냥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함께하시렵니까.”
‘기껏 구해 놓았더니, 아직도 범을 쫓는단 말인가?’
어이없어하는 장호에게 청림이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안전하게 울타리를 두른 사냥터에 범을 준비해 놓았으니 조선에서보다는 수월하실 겁니다.”
투견, 투양 등이 성행하는 북방의 싸움판으로 팔려 가리라 예상했는데 귀족들의 노리개로 죽어 가고 있을 줄이야.
“산 채로 포획하기가 쉽지 않았을 터인데…….”
“목표가 새끼들이라 어려울 것도 없었습니다.”
“…….”
“귀족들의 놀이터에 팔다리를 뜯어 먹을 맹수들을 풀어놓으리라 생각하신 건 아니겠지요.”
“하여 새끼들을 잡아 길들이셨소.”
밤바다처럼 고요하던 장호의 눈동자를 응시하던 청림이 살포시 미소 지었다.
“어미는 죽이고, 새끼만 사육합니다. 먹이 받아먹으며 사람 손에 길들여지고, 믿었던 사람 손에 죽는 거지요.”
웃음 짓는 그에게서 장호는 백정처럼 살아온 지난날을 마주했다. 영원사의 노승을 비웃던 자신의 모습을.
장호를 죽이는 대신 주변을 맴돌던 단이의 울음소리가 그녀를 향한 사모곡임을 창은 알고 있었으리라.
‘새끼를 쫓아온 건가.’
짝귀의 기이한 행적이 사무치는 모정의 흔적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장호의 눈동자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대도 처음부터 모진 아이는 아니었겠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청림이 얼굴을 붉히며 창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착호갑사였던 운장께서 그리 말씀하시다니 의외로군요. 범 사냥은 조선의 국책 사업 아니더이까.”
“적어도 즐거움을 위한 사냥은 아니었소.”
대화가 예상에서 벗어나자 청림이 고개를 저었다.
“아시다시피 사왕야께선 진짜 야생의 범을 겪으셨던지라, 제가 기른 놈들에겐 흥미가 없으십니다.”
“…….”
“이번에는 성체를 포획했습니다. 이랑대를 두 배로 늘렸지만, 사왕야께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까 걱정입니다.”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약삭빠른 이들만 상대하던 청림은 우직하다 못해 바위 같은 장호의 심사를 파악할 수 없어 한없이 조심스럽다.
“내일 사냥에 함께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
“사냥이 내키지 않으시면, 사왕야의 곁에 동행만 하셔도 됩니다. 금전을 원치 않으시니 호피를 드리지요.”
“호피는 필요 없소.”
“달리 원하시는 것이 있으십니까.”
“잡아들인 범 중에 왼쪽 귀가 없는 범도 있소?”
“귀빈들의 상품으로 하자 있는 범을 내놓을 수는 없지요. 작은 흠집이라면 모를까 귀가 없는 범은…….”
말꼬리를 늘이던 청림이 장호에게 미소 지었다.
“어찌하여 찾으십니까?”
“대답에 따라 사왕야와의 동행 여부가 결정될 거요.”
“하자 있는 범들은 성 밖에 투기판으로 보내집니다. 범과 곰, 범과 늑대들의 싸움에 집 한 채가 오가지요.”
예상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달은 장호의 침묵에 청림은 거래의 주도권이 그에게로 넘어갔음을 실감했다.
‘사왕야를 기다리게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명예도 권력도 관심 없고, 돈도 마다하니……. 환심을 사기보단 약점을 잡아야 할 듯하다.
‘품고 있던 계집을 흔들어야 하려나.’
장호와 눈이 마주친 청림이 습관처럼 미소 지었다.
“사냥은 사흘이고 준비된 범이 두 마리입니다.”
“이틀 안에 잡을 테니, 마지막 날 귀 없는 범을 데려다주시오. 가능하오?”
“찾아보겠습니다.”
주도권을 되찾으려던 청림이 두 눈을 반짝였다.
“내게는 감격에 겨운 혼례 선물이 될 텐데, 사왕야께서 그대의 공을 치하하지 않으시겠소.”
“혼례 선물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대가 감사히 받겠다 전하는 것 같던데.”
“무슨 말씀이신지 알 수가 없군요.”
“내가 무엇이 갖고 싶은지, 사왕야께서 묻지 않던가?”
순간, 아름다운 청림의 입가에 미소가 사라지며 흑요석 같은 눈동자가 싸늘한 기운을 뿜어냈다.
“한어를…… 아십니까.”
“명에서는 선물을 거절하면 커다란 결례라 들었소.”
선물을 거절당한 숭왕이 그렇게 웃어 댈 리 없으니, 상황만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으리라.
‘말이 아니라 사왕야의 표정을 읽었구나!’
실수를 깨달은 청림이 신음을 삼켰다.
“일부러 저를 시험하신 겁니까.”
“성품이나 습관은 쉬이 바뀌지 않으니, 칠 년 전 실수를 반복했을 뿐이오.”
“실수?”
“사왕야의 첫 선물은 검이었소.”
휘황찬란한 연화 검은 옥구슬까지 주렁주렁 달려 노리개인지 검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장호의 거절에 숭왕은 불같이 노여워했고, 사신들도 대명을 무시한다 길길이 날뛰며 열변을 토했다.
원하는 것을 묻는 숭왕의 고집에 장호는 그나마 수수해 보이는 도끼를 청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