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wise Chef Life RAW novel - Chapter 160
159화. 왕을 위한 요리(1)
***
다음날.
아침 일찍 짐을 챙겨 출발한 해준은 점심쯤이 다 돼서야 할베르의 성문에 다다를 수 있었다.
“휴··· 보기보다 머네.”
해준은 커다란 성문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 앞에 서서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는 경비병.
대기 줄 끝에 선 해준은 고개를 앞으로 기웃거리며 자신의 순서를 기다렸다.
“다음.”
드디어 해준의 차례.
경비병이 지극히 사무적이고, 무뚝뚝한 목소리로 물었다.
“혼자뿐인가?”
“저와 고양이 한 마리요.”
“소환수라면 명단을 작성해야 하네. 성안에서는 행동을 주의시키고. 방문 목적은?”
전설의 약초를 찾으러 왔다고 한다면 정신 나간 마법사 소리를 들을 게 뻔했기에, 해준은 일전에 아메스 왕자가 직접 써 준 추천서를 보여줬다.
“왕국 요리 대회에 참가하려고요.”
“요리 대회?”
눈썹을 치켜올리며 해준을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내려다보는 경비병.
아메스 왕자의 직인과 해준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충격적인 대답을 했다.
“뭐. 추천서 자체는 진짜인 거 같으니 통과는 시켜주겠다만 안타깝게도 요리 대회는 취소됐다.”
“취소? 왜요?”
“그건 나도 모르지. 난 그냥 경비병이라고. 암튼 올해 대회는 취소됐어. 추천장이 있으니 출입은 허가하겠다. 다음.”
경비병은 추천서를 돌려주며 해준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궁금한 게 많았지만, 그의 뒤로 대기 줄이 길었기에 어쩔 수 없이 성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할베르는 국경 외곽의 토튼성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규모가 엄청났다.
인구도 많고, 거리 규모도 몇 배는 되는 것 같았다.
해준은 클로에 아버지를 먼저 찾았다.
그는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뒷골목에서 빵을 굽고 있었다.
다양한 종류의 디저트와 케이크를 만들어 파는 빵집.
갓 구워낸 빵의 매혹적인 향기가 일품이었다.
사정을 전해 들은 타일러는 잃어버린 딸을 찾아준 해준의 손을 감격적으로 붙잡으며 고마움을 표했다.
“그나저나 요리 대회는 왜 취소된 거죠?”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무슨 이유에서인지 말도 안 하고, 그냥 이번 요리 대회는 취소라는 공고만 붙었더군. 소문에는 앞으로 쭉 열리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도 있고.”
돌연 취소된 요리 대회.
왕을 만나 비밀 서고에 들어갈 기회 자체가 박탈된 셈이다.
‘계획을 수정해야겠네.’
마을을 돌며 약초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바로 설산에 오르기로 했다.
“그보다 정말 괜찮겠나? 우리 집에서 얼마든지 지내도 괜찮은데.”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어쩔 수 없지. 도움이 필요하다면 또 찾아오게.”
“네. 그럼 이만.”
타일러의 빵집을 돌아 나왔다.
그는 한사코 자신에 집에 묵으라고 했지만, 해준은 여관을 선택했다.
뭉치와 함께이기도 했고, 전설의 약초를 찾기에도 그쪽이 더 수월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일단 여독을 좀 풀자.”
“냐아앙~.”
해준이 눕자 뭉치도 햇볕이 잘 드는 창가로 기어가 식빵 굽는 자세로 몸을 말았다.
‘어디서부터 찾아야지?’
침대에 누워서도 해준은 약초에 관한 생각뿐이었다.
당장 만년 설산에 올라간다 한들 약초를 찾을 수 있을 리는 없다.
일단 여기 머물며 정보를 수집하고, 그때 올라가도 늦지 않다.
잠시 휴식을 취한 해준은 홀로 정보 수집에 나섰다.
마을의 중앙 광장에서 상점가들이 밀집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약초상과 잡화상을 돌아다니며 전설의 약초 혹은 그와 관련된 정보를 캐고 다녔지만, 특별한 소득은 없었다.
“한참 돌아다녔더니 다리가 아프네. 배도 고프고.”
잠시 주변을 둘러본 해준은 식당가를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토튼성 총주방장인 이든에게 전해 듣기로 요리 대회 기간에는 수도 전체가 축제 분위기라고 했다. 대회 구경을 위해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여들고, 야시장이 형성돼 밤낮으로 먹고 마시는 분위기.
예정대로 요리 대회가 열렸다면 배도 채우고, 전설의 약초에 관한 정보도 더 수월하게 얻었을 터.
‘이래저래 낭패네.’
아쉬움에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한눈에도 귀족의 것처럼 보이는 휘황찬란한 장식의 마차가 해준의 앞에서 멈춰 섰다.
뭐야?··· 라며 중얼거리는데, 문이 열리고 낯익은 얼굴이 마차에서 내렸다.
“역시 자네였군. 오랜만일세. 해준.”
국왕의 사촌인 아메스 왕자였다.
해준에게 요리 대회 본선 출전 추천장을 써 준 장본인.
그리고 어쩌면 요리 대회 취소 이유와 약초에 대해 정보를 알고 있을지 모를 인물.
“잘 지내셨죠?”
“나야 아주 잘 지냈지. 자넨 이곳에 어쩐 일인가?”
아메스의 물음에 해준은 말없이 품에서 요리 대회 추천장을 꺼내 보여줬다.
“음. 안타깝게 됐어. 대회가 열렸다면 자네 요리를 또 먹어볼 수 있었을 텐데.”
“요리 대회는 왜 취소 된 건가요?”
“그게 말이지··· 여기서 말하기는 그렇고 이리 안으로.”
주변을 살피던 아메스는 해준을 마차 안으로 이끌었다.
“그게 말이야··· 형님. 그러니까 국왕의 후각에 문제가 생겼어.”
“이런, 어쩌다가. 혹시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없어. 그냥 자고 일어났더니 후각이 마비되었다는군. 처음엔 그냥 코감기라도 걸렸나 하고 지나갔는데, 그날 이후 어떤 냄새도 못 맡는다는군.”
음식의 맛은 단순히 혀로만 느끼는 게 아니다.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등 신체의 다양한 감각기관이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해 신경계를 자극하고, 모든 정보가 융합돼 ‘맛’이라는 결과를 도출해낼 수 있는 것이다.
코를 막으면 양파와 사과를 구분할 수 없는 실험이 바로 그 증거.
중요 기관 중 하나인 후각을 잃었으니 음식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는 국왕의 말이 충분히 이해됐다.
어쨌든, 후각이 마비된 미식가 국왕은 음식에 대한 흥미를 잃었고, 그 이유로 개최 예정이었던 요리 대회가 무산되어버린 것이다.
“대회도 대회지만, 형님이 큰일이야.”
후각을 잃은 후, 음식에 흥미를 잃은 국왕이 식사를 자주 거르게 됐고, 건강 악화 나아가 왕국의 국정 운영과 외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국왕의 후각을 고쳐야만 했다.
“아무도 못 고쳤나요?”
“실력 있다는 의사들을 초빙해 처방을 받았지만 모두 소용없었어. 어떤 약을 써도 형님의 병을 고치지 못했지.”
뿐만 아니다. 의사에 이어 유명한 마법사들까지 동원되었으나, 국왕의 후각은 고칠 수 없었다.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있지만, 차도가 없어 큰일이야.”
아메스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해준은 어쩌면 자신이 국왕의 병을 낫게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요리 대회 우승-소원권-왕의 비밀서고 입장 테크트리는 폐기된 계획이 되어버렸지만, 만약 왕의 병을 고친다면?
‘비밀 서고에 입장할 수 있겠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해준의 목적은 애초 요리 대회 우승이 아니라 비밀 서고 출입이었으니까.
어쩌면 대로에서 우연히 아메스를 만난 게 인연일지도.
“혹시 제가 도와드려도 될까요?”
“자네가? 무슨 수로?”
“요리사니까 요리로 고쳐야죠.”
해준의 말에 아메스는 과거 그가 끓여줬던 숙취 해소 내장탕이 떠올랐다.
황홀한 맛에 체면까지 던지고, 땀 뻘뻘 흘리며 허겁지겁 한 그릇 뚝딱했던 그 날의 일.
후에 알았지만, 그건 버프가 붙은 마법 요리였다.
“자네라면 믿을만하지. 마침 잘됐군. 기왕 이렇게 된 거 자네가 우리 형님의 병을 좀 고쳐주게나!”
아메스가 해준의 손을 꽉 움켜쥐며 부탁했다.
뜻하지 않게 왕을 알현할 기회가 생겼다.
“도와드리죠. 기꺼이!”
***
아메스는 마차의 목적지를 궁전으로 돌렸다.
찬란한 황금빛 궁전.
그 앞을 수십 명의 경비병이 삼엄하게 감시하고 있었다.
해준은 허리가 꺾일 정도로 높이 올려다봐야 할 궁전의 위용에 감탄했다.
‘장난 아니네.’
“들어가세.”
촌놈처럼 두리번거리던 해준의 어깨를 치며 아메스가 말했다.
왕의 사촌과 함께했으니, 당연히 프리패스. 그렇지만, 입구부터 길게 늘어선 경비병이 날카로운 경계의 눈빛은 풀리지 않았다.
보석과 비싼 장식으로 치장된 통로를 지나 마침내 국왕이 있는 곳에 다다랐다.
“국왕 폐하를 알현합니다.”
아메스는 격식을 갖춰 인사했고.
“아메스로군.”
“소개해드릴 사람이 있어서요. 이쪽은 토튼성에서 알게 된 요리사 해준입니다. 해준 베르티오 국왕 폐하일세.”
“처음 뵙겠습니다.”
“아, 그래.”
돌아오는 반응은 시큰둥했다.
베르티오 국왕은 마치 취업에 백번쯤 실패한 무기력한 백수 취준생의 표정 그것이었다.
먹는 즐거움을 빼앗겼으니, 무기력해 보이는 건 당연했다.
그런 국왕에게 사정을 설명하는 아메스와 미덥지 못하다는 반응의 국왕. 얘기가 숙취 해소와 마법 요리로 넘어갈 즈음에 왕의 눈빛은 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럼 언제쯤 요리를 먹을 수 있는 거지?”
“원하신다면 지금 당장에도 가능합니다.”
“필요한 건? 요리를 하려면 재료가 있어야 할 게 아닌가.”
국왕의 질문에 해준은 배낭을 가리키며 조리할 공간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답했다.
해준은 곧장 궁전의 주방으로 안내됐다.
“허···.”
왕의 주방은 실로 대단했다.
영주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규모.
주방을 책임지는 요리사의 숫자만 해도 30명은 넘어 보였다.
‘미식가라더니 음식 재료도 죄다 A등급이군.’
해준은 화구와 조리대가 마련된 공간에 짐을 풀었다.
그러자 이곳의 책임자인 총주방장과 몇몇 요리사들이 그에게 다가왔다.
“주방에 있는 재료는 뭐든 써도 된다네.”
총주방장 오르두라고 자신을 소개한 콧수염의 남자가 말했다.
“괜찮습니다. 그보다 국왕님이 못 드시는 요리가 있나요?”
“전혀. 형님께서는 소문난 미식가인데, 못 먹는 요리가 있을 리 없지. 오히려 처음 보는 식재료나 요리라면 더 환장할걸.”
오르두 대신 아메스가 말했다.
아메스는 혼자 다녀오겠다는 해준을 굳이 따라나섰다.
해준의 옆에 있으면 혹시 진귀한 걸 먹어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였다.
“흠, 그럼 제 마음대로 만들면 되겠군요.”
“뭘 만들 생각인가?”
“주재료는 이겁니다.”
해준이 배낭에서 곡물을 한가지 꺼냈다.
“오! 그건 뭐지?”
해준이 꺼낸 백색 알갱이를 본 오르두와 요리사들이 호기심에 허리를 숙이며 물었다.
“생긴 건 분명 곡물인데 밀은 아니고.”
“아마란스 아닐까요?”
“틀려. 그건 더 노랗고 동그랗지.”
“그럼 뭐지?”
신이 내린 곡물이라는 아마란스나 카무트, 퀴노아 같은 곡물과 비슷하게 생겼다.
다른 점이라면 속이 비칠 것처럼 반투명한 순백의 알갱이라는 것.
해준은 희미하게 웃으며 정답을 말해줬다.
“쌀입니다.”
“쌀?”
“네. 밀처럼 주식으로 먹는 곡물입니다.”
“그렇다면 밀처럼 가루를 내서 빵이나 면을 만드는 곡물인가?”
“아뇨. 통째로 물에 넣고 끓이면 밥이라는 게 됩니다. 찰기가 생겨 먹기 좋고, 은은한 단맛도 있어 맛이 훌륭합니다.”
“호오!···”
생경한 조리법에 요리사들의 호기심은 더욱 커졌다.
이곳에서의 주식은 빵과 면. 밀을 가루로 빻아 물과 적당량 섞어 발효시켜 모양을 잡아 굽거나, 물에 삶아내는 방식이다.
가루로 만들지 않고 만드는 조리법이 있다니, 결과물이 어떨지 자못 궁금했다.
“빨리 만들어보게. 어서.”
“그래. 현기증 난다고!”
“알겠습니다.”
쌀을 씻어 뚜껑이 무거운 무쇠솥에 넣어 불을 붙였다.
압력솥이 없으니 두께가 두꺼운 무쇠솥으로 밥을 지으면 적당한 내부 압력과 고온으로 밥이 가장 맛있게 지어진다.
“다됐습니다.”
몇 분간 뜸을 들인 후, 뚜껑을 열자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갓 지은 백미 밥의 뽀얀 자태와 고소한 향기. 스팸이라도 한 조각 있었다면 염치 따위는 집어치우고 숟가락을 들고 달려들 만한 완벽한 비주얼이었다.
“자기들끼리 서로 엉겨 붙어 찰기를 유지하는군.”
“빵과는 전혀 다른 모양이야. 이건 도대체 어느 지역에서 먹는 요리지?”
“제 고향이요. 이곳에서 아주 먼 곳에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쌀로 지은 밥과 반찬을 함께 곁들여 먹죠.”
백 마디 말보다 직접 보여주는 게 낫다.
해준은 밥과 어울릴만한 반찬을 즉석에서 만들어 요리사들에게 내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