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wise Chef Life RAW novel - Chapter 6
5화. 버려진 농장(3)
***
“뭐, 별일은 없겠지. 조용히 벽화만 그린다고 했으니까.”
민주가 사라진 방향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해준은 서둘러 대문을 걸어 잠그고, 마당을 가로질러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지금 그는 농장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으로 가득 찬 상태.
배낭을 둘러맨 해준은 옷장을 옆으로 밀어 문 앞에 섰다.
“빠진 게 없나?”
다시 한번 방을 둘러보던 해준의 시야에 아버지의 낡은 노트가 들어왔다.
“아, 노트. 챙겨가자.”
노트 첫 페이지에는 거름주기, 고랑 파기와 같은 밭을 일구는 법과 밀, 옥수수, 당근 등을 키우는 방법이 상세히 적혀있었다.
아마도 농사를 시작하며 연구한 데이터 같았다.
‘저쪽 농장은 아버지가 일구던 것이 확실해.’
노트를 주머니에 넣고 막 통로로 발을 디디려는 순간,
띵-
<다른 차원의 물품은 반입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소지품을 내려놓은 후, 다시 진입을 시도하세요.>
생각지 못한 홀로그램 창이 생성되었다.
“이런···.”
해준은 저도 모르게 작은 신음을 흘렸다.
탐험(?)을 위해 수중의 돈 거의 대부분을 투자했는데, 가져갈 수는 없다니.
‘저쪽 차원으로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는 건가?’
해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조금 더 구체적인 메시지가 생성되었다.
<차원 간 물품 이동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다만, 정상적인 방법을 통하면 다른 차원의 물품을 현실로 옮겨오는 것은 가능합니다.>
배낭을 내려놓은 해준은 홀로그램의 마지막 문장을 응시했다.
자세히 읽어보니 농장으로 뭔가는 가져가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밖으로 가져오는 것은 어떤 루트를 통하면 가능하다고 쓰여 있었다.
‘그 방법이 뭘까?···’
생각하던 해준은 이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쳇, 저쪽에서 가져 나올 게 뭐가 있다고.”
차원 너머의 농장에는 기껏해야 다 쓰러져가는 창고와 공구들이 전부였다. 가지고 나와봐야 아무짝에 쓸모없는 물건들 뿐.
“어쩔 수 없지. 돈 주고 산 것들이라 아깝지만, 여기 두고 가는 수밖에.”
배낭을 내려놓은 해준은 어두운 통로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
.
.
“그래도 날씨는 좋네.”
이곳 날씨는 오늘도 맑았다.
어제처럼 구름 한 점 없고, 시원한 바람과 새들의 지저귐이 해준의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오솔길을 걷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농장에 도착한 해준은 창고 정리부터 시작했다.
조사를 위해선 거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먼지가 가득 쌓인 테이블과 선반, 창문을 깨끗이 쓸고 닦았다. 다리가 부러진 의자는 임시로 수리해 제 기능을 하도록 했고, 농기들은 종류별로 깔끔하게 정리했다.
“삽과 모종삽은 이쪽에 놓고, 갈퀴랑 호미, 낫은 저쪽에. 곡괭이랑 도끼는 녹을 제거해야겠는데.”
창고 안에는 관리에 필요한 웬만한 물품은 모두 갖춰져 있었다.
곡괭이와 도끼에 묻은 흙먼지와 녹을 털어내고, 기름을 적당히 칠해주니 제법 쓸만하게 탈바꿈되었다.
정리를 마친 해준은 밖으로 나왔다. 창고 옆에 정신없이 쌓여있는 상자와 비료 포대를 차곡차곡 정리하고, 고장 나 있던 우물의 도르래를 고쳤다.
군대에서 배운 잡다한 기술들이 꽤 유용하게 사용됐다.
끼리릭- 끼리릭-
우물 안으로 두레박을 내려 물을 퍼 올렸다.
두레박 가득 깨끗한 물이 담겨있었다.
“깨끗한 물이네. 마실 수도 있겠어.”
조심스럽게 퍼 올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입안이 상쾌해지는 기분.
“그런데, 그 새싹은 어디 갔지?”
심자마자 싹의 틔운 씨앗이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네. 저쯤 어디에 심어놓은 것 같은데···.”
바로 그때,
[처해준 님, 어서 오세요! 농장에 돌아오신 걸 환영합니다.]어디선가 들리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저번에는 아무 말씀도 없이 돌아가 슬펐는데.]“누, 누구야?!”
의문의 소리는 발아래에서 들렸다.
해준이 고개를 내리자 동글동글한 감자 형태의 무언가가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너 정체가 뭐야?”
어른 주먹만 한 크기의 감자. 둥글둥글한 눈과 입이 달려 있고, 머리 위에는 잎이 풍성한 나무가 펼친 손바닥 크기만 하게 자라있었다.
[아, 몰라보는 것도 당연하군요. 전 어제 해준 님이 심어준 씨앗입니다.]“씨앗? 니가?”
어제 이곳을 빠져나갈 때 놀란 일이 한둘이 아니었던 터라 심자마자 싹의 틔웠던 씨앗의 존재를 잠시 잊고 있었다. 그나저나 감자가 말을 하다니!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전 농장의 수호 정령인 포테입니다.]“포테? 수호 정령?”
몸통 옆으로 난 두 개의 싹이 마치 팔이라도 되는 것처럼 꼰 채 고개를 끄덕였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농장과 홀로그램 메시지. 거기에 감자 크기의 말하는 수호 정령이 추가됐다. 해준은 이제 더는 놀랄 일이 없길 바랐다.
[찰스 님이 떠난 후, 농장 방치되어 생명력이 떨어져 가던 중 마침 해준 님이 나타나 도와준 덕분에 되살아났죠.]말을 마친 녀석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해준은 어제 이곳에서 본 ‘찰스 농장’ 팻말을 떠올렸다.
“찰스라는 사람이 농장의 주인인가 보지?”
[네. 사정상 지금은 농장을 떠나셨지만···.]포테가 이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찰스 님이 떠나버린 후 농장은 생명력을 잃고, 소멸할 위기에 처해있답니다. 저길 보세요, 지금도 농장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잖아요.]울타리를 감싸고 있는 정체불명의 안개를 보며 말했다. 포테의 말을 듣고 보니, 어제는 울타리 밖에 있던 안개가 담장을 살짝 넘어온 상태였다.
[이대로라면 저흰 모두 소멸할 겁니다. 농장도, 저도···.]“소멸하지 않는 방법은 없어?”
실종된 아버지와의 유일한 끈은 이 농장. 농장이 없어지는 것만큼은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했다.
[있죠. 대지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면 됩니다.]“생명력? 어떻게?”
[농사를 지으면 됩니다. 햇빛, 공기, 물··· 자연의 에너지를 듬뿍 받은 농작물이 자라나며 말라버린 대지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준다면, 저흰 소멸하지 않을 것입니다.]“농사?”
[네! 혹시 농사는 지어보셨나요?]포테가 간절한 눈빛으로 해준을 바라보자, 해준이 난감해했다.
언뜻 간단한 일인 것 같지만, 농사라는 것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해준에게는 농사 경험이 전혀,
‘아!··· 있구나.’
도시에서 나고 자랐지만, 1년 6개월간의 군대 생활 동안 삽질을 꾸준히 해왔다. 또 농번기 때마다 부대 근처로 대민지원을 나가 모내기, 제초작업, 수확을 도왔으니 경험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튜토리얼 정도는 끝낸 농사꾼이라고나 할까.
그래도 그런 실력으로 선뜻 농사를 짓는다고 나설 수는 없었다.
“이래저래 경험이 조금 있지만, 농사는 지을 줄 모르는ㄷ···”
[앗, 그건? 찰스 님의 일지?]순간, 포테의 눈이 반짝였다. 이내 슈웅하고 해준의 곁으로 날아왔다.
“무, 무슨 짓이야.”
[이거. 이거 찰스 님이 쓰신 일지 아닌가요?]포테의 줄기가 해준의 허벅지를 쿡쿡 찔렀다.
자세히 보니 건빵 주머니 위로 노트가 삐죽 나와 있었다.
‘이게 어떻게 여기에?’
그제야 해준은 노트를 배낭이 아닌 바지 주머니에 넣었던 게 떠올랐다.
‘그런데 어떻게 가져온 거지? 애초에 다른 차원. 즉, 현실 세계의 물건은 차원을 넘어 이쪽 농장으로 가져올 수 없다···는 설정 아니었나?’
그렇다는 건 이 노트는 애초에 이쪽 차원의 종이로 작성됐다는 의미. 그러고 보니 종이의 재질이 현대의 기술로 만들었다고 하기엔 어쩐지 투박해 보였다. 흡사, 중세 시대의 기술력으로 만든 느낌.
그 사이에도 여전히 포테는 보물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해준의 허벅지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일지를 관찰했다.
[확실해. 이건 찰스 님이 직접 쓰신 일지야. 이런 게 남아있었다니! 어디서 얻으셨나요?]‘찰스 님의 일지?’
해준은 처음부터 찰스라는 사람이 궁금했었다.
이 농장은 아버지 소유의 가게와 연결된 비밀 통로를 통해서만 올 수 있는 곳이다.
당연히 아버지의 농장이라 생각했을 때, 발견한 ‘찰스 농장’이라는 팻말. 아버지의 이름과 달랐으나, 정령 포테의 말에 따르면 이곳은 과거 찰스의 농장이었고, 찰스가 어떤 이유로 농장을 떠나면서 폐허가 되었다고 했다.
“혹시 찰스라는 사람이 5년 전에 떠났어?”
[그걸 해준 님이 어떻게?···]“역시.”
농장의 주인은 아버지였다.
“이건 우리 아버지가 쓴 거야.”
[진짜요? 어쩐지. 생김새가 찰스 님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우리 아버지에 대해 알고 있는 대로 얘기해 줄ㄹ···”
쿠르릉-
포테에게 아버지에 관해 물어보려는 찰나, 지면의 작은 떨림과 함께 울타리 안으로 안개가 스멀스멀 넘어왔다.
[으악, 큰일입니다. 시간이 없어요. 얼마 안 있어, 농장의 생명 에너지가 모두 고갈될 거예요. 해준 님, 저희 농장부터 살려주세요!]해준은 팔을 걷어붙였다.
포테의 말처럼 농장이 소멸한다면, 아버지의 흔적도 끊기게 된다.
간신히 이어진 실마리를 놓칠 수는 없다.
“뭐부터 해야 할까?”
[일단 밭을 정리해주세요. 썩은 작물을 몽땅 걷어내고, 밭을 갈아준 다음 거름을 준다면 흙이 되살아날지도 몰라요.]농장에서 밭이라고 부를 공간은 창고 앞의 여덟 평 남짓한 공간.
해준은 지저분하게 널려있는 썩은 작물을 걷어냈다. 땅을 덮고 있던 것들을 모조리 치우자, 직사각형의 밭뙈기 3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뙈기가 내 키의 두 배쯤 되니까 대략 2평쯤 되는 건가?’
눈대중으로 밭을 크기를 가늠한 해준이 창고에서 삽을 가져와 밭을 갈았다.
흙을 갈아엎어 잘게 부수고, 고른 후. 골을 타서 두둑하게 흙을 쌓아 이랑을 만들었다.
[이랑 사이에 고랑을 만들어주세요! 고랑을 파야 빗물이 흘러듭니다.]“비? 여기에 비도 내려?”
두 번의 방문 모두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만 경험한 해준이 땀을 뻘뻘 흘리며 물었다.
[당연하죠. 비가 내리지 않으면 농작물이 어떻게 크겠어요.]“그렇구나. 아그그, 허리야.”
열심히 노동을 하던 해준이 신음을 토해내며 허리를 폈다.
밭농사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조금만 힘내세요, 파이팅~!]일은 돕지 않고, 시키기만 하는 포테가 조금 얄미워지려는 시점이었다.
보통 판타지 소설에선 정령이 능력을 써서 단순 노동을 도와주지 않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근데, 넌 능력 같은 거 없어?”
[능력이요?]“어. 농장 수호 정령이니까 마법 같은 것도 부릴 수 있을 거 아냐. 이런 고된 노동은 마법을 써서 샤사삭- 끝낼 수 있는 거 아니야?”
[능력이 없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쓸 수 없어요.]“뭐? 왜?”
포테는 농장이 내뿜는 생명력이 힘의 원천인데, 지금은 농장에 폐허가 되어 능력 대부분이 봉인됐고 그래서 도움을 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럼 당분간 생 노가다는 내가 다 해야 하는 건가?’
라는 생각도 잠시.
땀을 흘려 육체노동에 집중하니, 정신도 맑아지고 머릿속의 잡생각도 사라졌다.
묵묵히 호미를 움직여 이랑을 만드는 작업을 계속했고,
“휴, 겨우 끝났다.”
창고 옆에 쌓여있던 포대의 거름을 뿌리는 것으로 작업을 끝마쳤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해준은 우물에서 물을 한 바가지 퍼 꿀꺽꿀꺽 마시고는 아름답게 지는 저녁노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경치 좋다.”
공해도 소음도 없는 공간.
석양을 보고 있으니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졌다.
[완성하셨군요, 해준 님! 고생하셨습니다.]언제 나타났는지 포테가 손뼉을 치며 해준을 칭찬했다.
“이제 뭘 하면 되지?”
[밭이 비옥해지면 농작물을 심어주시면 됩니다. 정성 들여 관리하고, 키워주시면 그것만으로도 농장에 새로운 생명력이 움트죠.]‘그렇군. 단순히 농사를 지으면 된다는 건가?’
[그럼 농장은 다시 활력을 찾을 것입니다.]날이 늦었으니 이만 돌아가기로 했다.
“이만 돌아간다.”
포테가 조금은 근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잠시 고민하던 해준은 “음··· 어.”라고 대답했고, 그러자 포테가 미소를 지었다.
[기다리겠습니다.]농장을 뒤로하고, 오솔길을 따라 가게로 돌아온 해준은 더는 놀라지 않겠다는 다짐이 무참히 깨져버렸다.
“허! 뭐지? 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분명 농장은 밤이 되었는데, 현실은 아직 해가 중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