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Sword Sense RAW novel - Chapter 183
63화 혈마 (4) >
“훗.”
천천히 경공을 펼치고 있는 콧수염의 중년의 사내가 평야를 가득 매우고 있는 관의 군 행렬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자그마치 사천여 명에 이르는 군사들이었다.
보병 삼천에 기마대가 천이다.
“좀 더 군사를 보내리라 여겼는데, 아쉽게 되었군요.”
중년의 사내 옆에 있는 남색 경장의 사내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이에 중년의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네.”
“하긴 저희 쪽과 합치면 어느 정도 구색은 맞춰집니다.”
두 사람의 뒤를 따라 오열을 갖춰서 달리고 있는 푸른 경장의 무림인들.
그들은 무림 연맹 광서성 지부의 무사들이었다.
이들만 하더라도 자그마치 이천여 명에 육박하는 대규모의 전력이었다.
다만 저 령산을 등지고 있는 만여 명에 달하는 혈교의 무리들과 비교한다면 여전히 전력 면에서 손색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도 각 문파와 방파에서 이 정도로 지원해준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지. 아직 정의는 살아있네.”
이천여 명은 광서성의 무림 연맹에 속해있는 각 문파, 방파의 무사들이었다.
무림 연맹의 본단 전력에 비하면 떨어질 지언정 정의감과 협의심만큼은 어디에도 떨어지지 않는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곽 부지부장. 과연 저들이 어찌 나올까요?”
곽 부지부장이라 불린 중년의 사내는 무림 연맹 광서성 지부의 이인자인 곽철이었다.
그리고 그의 옆을 나란히 달리는 사내는 주검해방의 방주 우직수였다.
“싸우거나 퇴각 둘 중 하나겠지.”
“여기까지 와서 이런 말을 하긴 그렇지만 내심 퇴각했으면 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우직수의 말에 곽철이 씨익하고 웃었다.
“사람인데 어찌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지 않은가. 나 역시 마찬가지일세. 하나 이 일은 현 무림의 판세가 걸려있는 일이네.”
“그렇죠. 저들이 다시 부활하게 되면 전 무림이 혼란스러워질 겁니다.”
현 중원 무림은 정도 무림의 세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 만약 혈교가 부활한다면 다시 무림은 이십여 년 전의 정사 대전의 혼란스러운 시기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곽철이 점점 커져가는 령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때랑은 다를 걸세. 아무리 혈교의 잔당들이 힘을 모은다고 한들 예전과 같진 않지. 본 맹도 정파 무림도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으니 말일세.”
“맞습니다.”
그들의 말대로 정파 무림 연맹은 이십여 년 전보다 더 세력이 팽창했다.
무림 연맹의 본단을 제외하고도 각 성의 지부들만 합쳐도 족히 오만에 이른다.
무공을 모르는 평 맹원 즉, 개방의 방도들이나 도가 문파의 사람들까지 합친다면 그 수는 더욱 커진다.
령산에 집결한 혈교의 전력을 한참 상회한다.
“하나 지금 뿌리를 뽑아야 하네. 그렇지 않으면 저들은 사파를 규합하여 더욱 팽창해나갈 걸세.”
그들이 우려하는 바는 그것이었다.
혈교를 중심으로 사파가 결집하는 사태.
그렇게 된다면 당장은 우위를 점해도 형세 면에서 장담을 할 수 없게 된다.
무림 연맹으로서는 혈교가 제대로 일어나기 전에 속도 전을 감행하는 수밖에 없었다.
주검해방의 방주 우직수가 관의 군사들이 있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나마 본 맹에 다른 두 군사 분들이 건재하여 다행입니다. 이번 계책이 통한다면 혈교는 절대로 집결할 수 없을 겁니다.”
“이번 일로 관과 척을 진다면 그리 될 걸세.”
관을 움직이는 것은 무림 연맹의 삼 군사에게서 나온 수였다.
혈교가 결집하는 것을 막기 위한 계책이다.
관과 무림은 과거 금상제의 무림 박해 당시 이후로 몇 가지 규약을 맺었다.
혈교가 자신들의 명예를 위하여 이를 어기게 된다면 관에서도 적극적으로 그들을 제지하려 들 것이다.
“오 지주가 저희 뜻대로 움직여줘서 다행입니다.”
“갖다 바친 재물이 얼만데 이 정도는 해줘야지.”
각 부(府)의 수장인 지주(知府)들에게 여태껏 수많은 재물을 바친 광서성 지부였다.
그 덕분에 관을 수월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물론 명분이 있기에 관 역시도 이에 호응해준 것이지만 말이다.
“저 불쌍한 군사들에게는 미안하게 되었군요.”
“어차피 혈교가 창궐하게 되면 우리들의 일만이 아닐세. 무림인이라고 할지언정 백성이네. 혹세무민(惑世誣民)을 하려는 역도들은 엄벌로 다스리는 게 이 나라니까.”
“그 말씀도 맞지만 혈교의 잔당들이 관과 싸우는 것도 불사한다면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죽게 되겠지요.”
우직수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튀어나왔다.
그들은 이기기 위해서 출병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우리도 함께 죽으려는 것이 아닌가. 관과 우리의 희생을 통해 혈교의 잔당 놈들을 중원에서 박멸할 수 있다면 이 한 몸 얼마든지 불지를 수 있네.”
이것이 그들의 목적이었다.
군사들이 죽게 된다면 관은 필시 나설 수밖에 없다.
그런 곽철의 말에 우직수도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지부장!”
“만약 싸우게 된다면 동지들을 위해서라도 최대한 많은 혈교의 무리들을 죽이고 함께 가세나.”
“바라는 바입니다. 하하하하핫.”
* * *
-다그닥! 다그닥!
군사들의 선두 행렬에서 말을 몰고 있는 자들이 있다.
전부 갑주를 입고 있었지만 한 사람만은 파란 비단 관복을 입고 있었다.
수염을 곱게 기른 이 중년의 관인은 부(府)의 실무 담당을 하고 있는 통판(通判) 이석이라는 자였고, 그 옆에 호랑이를 그려놓은 갑주를 입은 자는 부 산하의 오천장(五千將) 자맹광이었다.
“통판께서 직접 오시지 않아도 되었는데 괜찮겠습니까?”
오천장 자맹광의 물음에 통판 이석이 무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어쩌겠소이까. 지부 대인의 명인데 따라야지요. 실무자 한 명은 같이 가라고 하지 않소.”
사실 이석 역시도 이게 얼마나 위험한 임무인지 알고 있다.
여차하면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문관(文官)인 자신이 올만한 장소가 아니었다.
“여차하면 부장들에게 퇴각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두었으니, 언제든지 물러나시면 됩니다.”
“고맙소.”
오천장 자맹광의 말에 이석이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배려는 고마웠지만 그의 임무는 살아남는 것이 아니었다.
이곳으로 오기 전에 조 지부 대인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조 지부 대인은 예전부터 조정으로 진출하고 싶어 했다.
연줄을 가지고 있어도 특별한 공로가 없으면 조정에는 들어가기 힘들다.
하지만 이번 일로 인해 관에서 점점 커져가는 무림을 통제할 수 있는 명분이 생겨난다면 그 공로를 높이 쳐줄 것이다.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구나.’
솔직히 희생을 자처하고 싶지 않았다.
하나 지부 대인이 자신을 직접 호명했다.
거절하면 어차피 자신의 앞날은 그대로 막힌다.
벌써 서른을 넘긴 아들 놈이 마음에 밟혔다.
평생 서책이나 읽던 놈이 장사를 할 수 있을 리는 만무했고, 날이 갈수록 주색을 밝혀서 재산을 탕진하지 않을까 노심초사였다.
‘……그래. 이 늙은 몸만 죽으면 된다.’
자신이 죽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못난 자식의 앞길도 열리고 일가도 대대손손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지부 대인도 조정에 진출하여 자신의 뜻을 펼치게 될 것이다.
‘죽자. 죽어.’
* * *
-쿵! 쿵! 쿵!
북이 울릴 때마다 오열을 맞춰서 진군하는 혈교의 교인들.
그들이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대지가 울리는 듯 했다.
만 명이라는 수많은 교인들이 내 뒤를 따르고 있으니, 왠지 모르게 가슴이 고동을 쳤다.
-새가슴이군.
그런 의미가 아니거든.
혈마검 녀석 은근히 한 소리 많이 하네.
가끔 소담검 보다도 더 하다.
-적응해라. 운휘. 이제부터는 이 많은 인원을 네가 이끌어야 한다.
남천철검 녀석만 위로가 되는구나.
녀석의 말대로 이제 나는 혼자의 몸이 아니었다.
이 많은 교인들의 명줄을 쥐고 있는 셈이었다.
내가 어떤 말을 하고 어떻게 하냐에 따라서 이 많은 인원의 운명이 결정되겠지.
-저기도 많네.
소담검의 말처럼 눈앞에 수많은 인파가 보였다.
훈련을 받아 혈교 이상으로 군기가 잡혀 있는 무림 연맹의 무사들, 관의 군사들까지 족히 육칠천은 되는 것 같다.
“와! 진짜 많네요. 무림 연맹에 갔을 때 이후로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건 처음 보는 것 같아요.”
탄성을 흘리는 사마영의 말에 동의했다.
이 정도 규모가 부딪치게 된다면 얼마나 많은 사상자가 나오게 될까?
령산 인근 평야가 피로 얼룩지게 될 것이다.
‘흠.’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반응은 반반이었다.
젊은 교인들은 상대적으로 긴장된 기색이 역력했고, 연배가 있는 경험 많은 교인들은 과거의 수치와 굴욕 때문인지 전의가 바짝 올라 있었다.
과연 무림 연맹이나 관의 군사들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나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요긴하게 쓰네.
그렇네.
사마영이 길거리에서 재미있는 가면이라고 해서 샀었는데,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다.
야차 혹은 악귀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가면이었다.
현재 무림 연맹이나 정파 사람들에게 나는 정도 무림의 이신성 중 하나로 각인되어 있다.
훗날을 위해서라도 굳이 정체를 드러낼 이유는 없었다.
-이제 보내야 하지 않을까? 많이 가까운데.
무림 연맹과 관의 군사들과 거리는 백오십여 장 정도에 불과했다.
관의 군사들은 시위를 당기고 있었고, 무림 연맹의 무사들도 무기를 빼들고 당장이라도 진격해올 기세였다.
“노 대주, 기 부대주.”
“충!”
나의 부름에 교주 호위대주 노성구와 부대주 기조양이 동시에 답하고서 앞으로 나섰다.
그들이 좌우로 갈라져 혈(血)자가 적힌 수기를 들고 각각 광서성 무림 연맹 지부와 군사들을 이끄는 수뇌부들에게 향했다.
-과연 대화를 하려 할까?
‘할 거야.’
저들이 수작을 부린다고 해도 우위인 것은 본교다.
전력 면에서도 훨씬 우위였고, 훈련받은 군사들이라고 해봐야 무림인들에 비하면 평범한 사람들이나 다름없었다.
겨룬다면 십중팔구로 기적이 생기지 않는 한 저들이 불리하다.
어차피 이쪽의 심중도 궁금할 터이니, 접촉을 시도하면 받아들일 것이다.
-웅성웅성!
양측이 술렁이는 것이 보였다.
이쪽에서 대화를 하자고 청하니 당혹스럽기는 한가보다.
얼마 있지 않아 노성구 대주와 기조양 부대주가 노란색 수기를 들었다.
“받아들였네요.”
저들이 수락했다는 신호였다.
기조양 부대주는 다시 복귀했고 노성구 대주가 양대 전력이 한 가운데에 자리를 잡았다.
저곳이 딱 중간이었다.
관측에서 파란 관복을 입은 관인과 호랑이가 새겨진 갑주를 입은 장수가 말을 타고 왔고, 무림 연맹 지부 측에서도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들 두 명이 그곳으로 다가왔다.
나 역시 가운데 접선지로 향했다.
-탁!
풍영보를 펼치니 금방 도달했다.
그런 나의 모습에 무림 연맹 지부 측의 수뇌부들의 눈빛이 경계심으로 가득해졌다.
일부러 경공 실력을 드러낸 게 효과가 있었다.
-가면도 효과가 있는 것 같은데?
그런 것 같다.
두 사람 모두 내 악귀 가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이들의 수장으로 보이는 콧수염을 기른 중년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부드럽게 인사할 처지는 아니니 그건 생략하겠소. 본인은 광서성 무림 연맹 지부의 부지부장을 맡고 있는 곽철이오.”
“주검해방의 방주 우직수요.”
그래도 정도 무림이 아니랄까봐 적대심을 보여도 신분 정도는 밝힌다.
파란 관복을 입은 곱게 수염을 기른 오십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관인이 말에서 내리며 입을 열었다.
“부에서 통판을 맡고 있는 이석이다.”
통판?
꽤나 높은 자가 왔다.
적어도 이 정도 규모의 군사들을 운집해올 자라면 주(州) 단위에서 움직일 거라고 여기기는 했지만 부(府)를 움직이다니.
‘어지간히 찔러 넣었나 보네.’
그러지 않고서야 통판씩이나 되는 정6품 관인이 움직이겠는가.
이 정도 인사가 움직였으니 회귀 전에 관에서 난리가 나서 혈교를 압박했겠지.
딱 좋은 명분거리였다.
나는 공손히 포권을 취하며 그들에게 인사를 했다.
“당대 혈마님을 대신해서 대리로 나온 진 단주입니다.”
“뭐라?”
“혈마?”
혈마라는 말에 부지부장이라 밝혔던 곽철과 주검해방의 방주 우직수의 표정이 한층 더 심각해졌다.
정사 대전 이후 혈마의 피를 이은 자는 전부 죽였다고 여겼는데, 혈마를 거론하니 의아하겠지? 그러나 이내 내색을 하지 않고 곽철이 말했다.
“저주 받은 그 일족이 살아있다면 왜 그 자가 나오지 않은 거지?”
일부러 정체를 숨기고 단주 급이라고 하니 말을 자연스럽게 놓네.
그런 그들의 말에 나는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그렇게 따지면 적어도 귀 맹의 지부장께서 직접 나와야 격이 맞겠지요.”
정중하게 말하면서도 허를 찌르자 곽철의 미간에 주름이 갔다.
곽철이 다소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말했다
“네놈이 우리를 우습게 아는구나. 혈마 그 자의 일족이라면 누구나가 그 피처럼 붉은 머리카락과 두 눈을 잊지 않고 있다. 저 많은 자들 중에 누가 그러한 자가 있단 말이더냐?”
나는 이를 개의치 않고 말했다.
“믿는 것이야 여러분들의 자유죠. 그보다 혈마께서는 어째서 통판 나으리께서 무림 연맹과 함께 군사들을 이끌고 나타난 건지 궁금해 하십니다.”
그런 나의 물음에 주검해방의 방주 우직수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사악한 혈교가 다시 운집하려 하는데, 그것을 내버려둘 것 같나.”
“사악한 혈교?”
“당장 그대들의 우두머리에게 전해라. 당장 무장을 해제하고 항복하라고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관과 본 맹을 상대로 반목하려는 것으로 간주하겠다.”
강하게 나왔다.
기세에서 밀리지 않으려는 모양이었다.
굳이 앞에 관을 붙인 것은 고의적으로 도발하는 것 같다.
-관을 건드려봐라. 후회할 거다. 뭐 이런 거야?
그래.
암묵적으로 그걸 얘기한 것이겠지.
그런 의도를 알아들었는지 이석이라 밝힌 통판도 입을 열었다.
“그대가 저 집단의 우두머리라고 하니 지부 대인의 명을 전하겠다. 그대들은 이십여 년 전 혹세무민을 행했던 혈교가 맞는가?”
혹세무민(惑世誣民).
말 그대로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인다는 말이다.
관에서 사이한 종교 집단을 일컬어서 통칭하는 말이었는데, 역시 이를 명분으로 삼고 있었다.
곽철이 이를 거들었다.
“통판 나으리. 어찌 이런 혹세무민의 역도들을 내버려둘 수 있겠습니까? 당장 지엄한 나라의 법을 어긴 자들에게 벌을….”
“누가 혹세무민의 역도들이라는 거죠?”
내가 말을 끊자 주검해방의 방주 우직수라는 자가 언성을 높였다.
“혈교가 혹세무민의 집단이 아니라면 무엇이 혹세무민이라는 것이느냐!”
이에 나는 피식 웃었다.
그런 나의 웃음소리에 부지부장 곽철이 화가 났는지 도병에 손을 갖다 댔다.
이에 호위대주 노성구 역시 도병을 잡고서 경고했다.
“당장 그 손을 도병에서 떼지 않으면 가만히 있지 않겠소.”
“바라는 바다.”
곽철이 도를 뽑으려 하기에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통판 나으리께서 묻는 말에 아무런 답변도 하지 못했는데, 무림 연맹을 대표하는 자들은 싸우지 못해서 안달이 났군요. 이게 정도의 방식입니까?”
그런 나의 말에 곽철의 인상이 구겨졌다.
반면 이석이라는 통판이 나를 바라보는 눈에는 이채가 보였다.
혈교라고 한다면 피를 좋아하는 사파의 야인들처럼 생각했을 텐데, 내가 계속 격식을 갖추니 그런 걸지도 모른다.
이석이 작게 미소를 짓더니 내게 말했다.
“귀하의 말이 맞네. 아직 본 통판은 귀하에게서 아무 말을 듣지 못했네.”
그대에서 귀하로 격상되었다.
“통판 나으리!”
곽철이 뭔가를 말하려고 하자 통판 이석이 손을 내밀며 끼어들지 말라는 시늉을 했다.
이에 나는 공손히 포권을 취하며 그에게 말했다.
“그러하면서 아니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하면서 아니다? 그게 무슨 궤변인가?”
“혹세무민이라고 한다면 사이한 종교를 뜻하는데,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저희들은 도가나 불가와 달리 무(武)를 지향하는 무인들의 집단입니다.”
“무인들의 집단?”
의아해하는 그에게 말했다.
“관과 무림이 정한 규약 두 번째 혹세무민으로 백성들을 현혹하는 자가 있다면 역도로서 엄벌을 행할 것이다. 라고 되어 있는데, 저희가 어떤 연유에서 혹세무민이 되는지 알 수 없군요.”
그 말에 주검해방의 방주 우직수가 화가 나서 언성을 높였다.
“피로 세상을 씻는다는 교리를 내세운 것들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
“아! 그걸 말하는 건가요?”
“그게 혹세무민이 아니라면 무엇이….”
“목표를 명확하게 하지 않아서 오인을 산 듯 하군요.”
“뭐?”
“저희가 피로 씻는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정파 무림뿐입니다. 사기를 돋우기 위한 과장된 표현이 지금껏 오해를 사서 이제 확실히 하고자 합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무를 익힌 자가 어찌 선량한 백성들을 상대로 함부로 칼을 휘두를 수 있습니까? 그건 정사의 이념을 떠나서 상식 아닙니까?”
머리를 툭툭 손가락으로 짚으며 비아냥거리자 우직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당장에라도 내게 주먹이라도 날릴 기세다.
나는 이를 개의치 않고 통판 이석에게 정중하면서 힘 있게 말했다.
“본교도 금상제 시절의 관과 무림의 약조를 잊지 않았습니다. 당대 혈마께서 본교에 집권하신 이상 무림 간에 일에 연의 백성들을 휘말리게 할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그런 나의 말에 통판 이석의 눈빛이 묘하게 흔들렸다.
먹물 꽤나 먹은 자라면 여기서 혹세무민을 명분삼기는 어렵다는 걸 인지했을 거다.
그때 광서성 무림 연맹의 부지부장 곽철이 끼어들었다.
“관과 무림의 네 번째 규약을 잊었나 보군.”
“네 번째 규약?”
“관을 위협할 만큼의 세력을 규합할 경우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곽철의 입 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마치 이것은 어떻게 대응할 거냐는 듯 하다.
사실 이 규약은 다섯 가지 중에서 가장 유명무실하다고 할 수 있다.
벽을 넘은 고수 한 명만으로도 위협이 될 수 있는데, 관이 위협을 받을 수 있는 그 선상을 어찌 정할 수 있단 말인가.
“통판 나으리. 자그마치 만 명이 넘은 사악한 무림인들이 모였습니다. 저 자들이 하찮은 말장난으로 혹세무민을 하지 않겠다고 하는데, 이를 어찌 믿으십니까? 만약 그런 것이라면 저들의 우두머리와 수뇌부들에게 항복하게 하여 취조에 응하게 하고 무리를 해체시키라 명을 내리시죠.”
‘……역시인가.’
어떻게든 관과 본교를 부딪치게 하려하고 있었다.
일부러 자극적인 말을 계속하는 것도 그런 목적일 것이다.
한데 너희들이 모르는 게 있지.
-슥!
내가 손을 내밀자 호위대주 노성구가 등에 매고 있던 무언가를 꺼냈다.
붉은 비단으로 감싸놓은 그것을 펴자 공문 같은 것이 드러났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를 어쩌죠? 그게 문제될 것 같아서 이미 허가 공문을 받았습니다만.”
“뭐?”
곽철이 말도 안 된다며 공문을 바라보았다.
공문에는 정식으로 혈교라는 무가 단체를 승인한다는 문구와 관의 것으로 보이는 붉은 직인이 찍혀 있었다.
우직수가 공문을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거짓입니다. 가짜로 만들어서 상황을 피해가려는 수작….”
그때 통판 이석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가짜 공문이 아니네.”
“그게 무슨?”
“……도지휘첨사의 직인이 찍혀 있네.”
“도지휘첨사!”
곽철과 우직수가 화들짝 놀라했다.
그들이 놀라는 이유는 간단하다.
도지휘첨사는 사천, 운남, 귀주, 광서, 섬서남부를 통괄하는 우군도독부 소속이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정3품 관인으로 그들이 끌어들인 지부 대인보다도 높은 직품을 가졌다.
“이, 이 공문을 어떻게?”
뭘 어떻게 하긴 어떻게 해.
네놈들이 지부 대인에게 뇌물을 먹였다면 나는 우군도독부에 들러 도지휘첨사에게 눈이 휘둥그레 질만한 재물을 먹였지.
이런 용도로 무쌍성 지부에서 돈을 타낸 게 미안했지만 혹시나 회귀 전처럼 이런 일이 벌어질 것 같아, 미리 허가 공문을 받아낸 게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때 통판 이석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하하하하핫.”
그런 그의 모습에 모두가 영문을 몰라 했다.
한참을 웃어대던 통판 이석이 나를 쳐다보며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귀하에게 빚을 졌군.”
‘빚?’
“통판 나으리.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적어도 저 공문이 위조인지 아닌지….”
당황해하는 곽철에게 통판 이석이 말했다.
“우군도독부에서 내린 허가 공문을 부(府)에서 어찌 함부로 어긴단 말인가. 이 일은 우리의 소관을 넘어섰네. 자 장군. 돌아가세나.”
“그러시죠.”
자 장군이라 불렸던 군관이 말을 끌고 왔다.
통판 이석이 내게 웃으며 말했다.
“혈교라 하여 소문대로 사악하고 무뢰배들로 모였다고 여겼는데, 본인이 오해를 한 것 같네. 언제 기회가 된다면 볼 수 있으면 좋겠군.”
호의적인 그 말을 끝으로 통판 이석이 말에 올랐다.
그러더니 자 장군이라 불렸던 군관과 함께 병사들에게로 돌아갔다.
이를 광서성 무림 연맹의 부지부장 곽철과 주검해방의 방주 우직수가 어처구니가 없어하며 망연자실하게 쳐다보았다.
관의 군사들이 철수하는 속도는 굉장히 빨랐다.
통판이 합류하고 곧바로 회군했다.
나는 무림 연맹 지부의 수뇌부들에게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관이랑 어떻게 해보려 했는데 실패해서 이를 어쩌나?”
-으득!
주검해방의 방주 우직수가 이를 갈더니, 검을 뽑아들려 했다.
그 순간 나는 상단전을 개방하며 혈천대라공의 7성을 운기했다.
-고오오오오!
전신에서 붉은 아지랑이가 흘러나오며 기운이 드러났다.
그러자 곽철을 비롯한 우직수가 놀랐는지 인상이 굳어져버렸다.
“그, 그 머리카락…..”
“눈이?”
악귀 가면 속에서 보이는 붉은 안광에 그들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왜? 그렇게나 본 혈마를 보고 싶어하지 않았나? 무림 연맹 부지부장.”
-슥!
-쿵! 쿵! 쿵!
손을 들어 올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혈교의 교인들이 북을 치며 앞으로 진군했다.
만여 명이나 되는 교인들이 다시 움직이자, 그렇지 않아도 관인들이 철수하면서 숫적으로 확연하게 적어보이는 무림 연맹의 무사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곽철이 입술을 질끈 깨물며 말했다.
“이게 본 지부의 전력이라 착각하지 마라.”
그런 그에게 나는 입 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이쪽도 전력 같나?”
“뭐?”
* * *
령산에서 20리 정도 떨어진 광서성 무림 연맹의 지부 본단.
본단의 대문 전각에 열 명의 범상치 않은 자들이 나타났다.
피처럼 붉은 머리카락의 여인이 혀를 날름거리며 뒤에 있는 아홉 명에게 말했다.
“피의 개파식이다. 존성들.”
세 존자와 여섯 혈성.
그들은 혈교의 최고 전력들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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