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138)
벨라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는 올리비아.
벨라가 옅게 웃는다.
“여기 있는 주인님의 주인님께서는 매일 아가씨를 병문안했습니다. 저기 있는 과일 바구니와 음료수도 주인님의 주인님께서 사놓은 물건입니다.”
벨라가 시키지도 않은 말을 멋대로 내뱉는다.
서랍장 위에 놓인 과일 바구니와 음료수 박스를 본 올리비아가 나를 바라본다.
그녀의 입술이 떨린다.
츤데레 급발진에 시동이 걸린 모양.
그녀의 츤츤 멘트를 들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바로 그때.
“······벨라의 말, 정말인가요? 당신?”
올리비아의 입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녀의 새하얀 뺨에 분홍색 홍조가 어린다.
쟤가 갑자기 왜 저래?
뭐 잘못 먹었나?
괜히 뻘쭘해진다.
“······뭐 혹시 잘못되지는 않았나 싶어서 들여다보러 온 거야. 그 자리에서 괜히 나 감싸면서 나섰던 네가 잘못되면 내 처지만 곤란해지잖아. 국제 외교 문제로 비화될 수도 있다고. 그거 말고 다른 이유는 없어.”
진심이다.
그리고 선물은 내가 산 게 아니라, 한서진이 준비해준 거다.
대체 프랑스에서 어떻게 한국 병원에서나 볼법한 과일 바구니와 오렌지 주스 박스 세트를 구한 건지 모르겠다.
[파트너. 대체 언제쯤 솔직해질래.]흑태자가 또 헛소리한다.
“바보, 멍청이······.”
올리비아가 볼을 부풀리며 시선을 돌린다.
“흥.”
그래.
이래야 츤데레 올리비아지.
이제 좀 익숙한 편안함이 느껴진다.
상자에서 오렌지 주스를 꺼내 뚜껑을 따서 건넨다.
“자, 마셔라. 놔두면 상한다.”
휙.
올리비아가 내 손에서 오렌지 주스를 낚아채서 마신다.
그녀가 새침한 표정으로 빈 병을 만지작대며 중얼댄다.
“뭐, 나쁘지는 않네요.”
좋다는 뜻이다.
나도 박스에서 오렌지 주스를 꺼낸 뒤 뚜껑을 따고 한 모금 머금는다.
새콤달콤한 맛이 혀로 느껴진다.
그냥 오렌지 주스 맛이다.
“······.”
병실에 묘한 침묵이 내려앉는다.
갑자기 어색해진 분위기.
올리비아가 이쪽을 힐끔힐끔 바라본다.
그녀가 입술을 우물거린다.
머릿속에서 흑태자가 쓸데없는 조언을 한다.
먼저 말을 걸라고?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지?
고민에 빠진 끝에 할 말을 떠올리고는 말하려고 한 그때.
“이봐요, 당신!”
올리비아가 나를 부른다.
“하, 한 번만 말할 테니까 잘 들어요!”
그녀가 얼굴을 붉히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고, 고마웠어요······. 저 구, 구해주러 온 거······.”
항상 츤츤거리기만 했던 올리비아에게 처음으로 들어보는 제대로 된 감사 인사.
문득 피식하고 웃음이 터진다.
내 모습을 본 올리비아의 얼굴이 더 빨개진다.
그녀가 눈을 질끈 감은 채, 나를 바라보며 소리친다.
“뭐, 뭐예요?! 모, 모모모모처럼 이 올리비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당신 같은 서민한테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하는데, 우, 우우웃기만 하고!! 얄미워······.”
“고맙긴.”
그녀의 말허리를 자른다.
올리비아를 위해 한 일이 아니다.
히로인 인기 투표 2위에 빛나는, 원작에서도 비중이 상당한 올리비아가 빠지면 메사이어 공략에 큰 지장이 생기니까.
나를 위해 한 일이다.
그렇게 생각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나는 아직 모두를 전부 책임질 방법을 찾지 못했으니까.
참고로 올리비아와 아리스는 원작 인기 투탑 히로인.
그 빌어먹을 검의 정령 쿠사나기는 올리비아와 아리스의 단일화 실패 때문에 어부지리로 1등을 먹은 것에 불과하다.
2등인 올리비아와는 단 두 표 차이.
2등과 3등의 득표수를 합치면 1등을 아득하게 초월하는 수준.
게다가 외관이 쓸데없이 어려 보이는 미소녀였기에, 그쪽을 선호하는 특정 취향 팬덤의 압도적인 몰표를 받은 것도 있고.
그게 대체 뭐가 좋지?
솔직히 거유에 연상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아니 이해하기도 싫은 취향이다.
그래서 나는 인기투표 결과를 인정할 수 없었다.
하여간, 음습한 놈들 같으니.
“그럴 필요 없어. 원래부터 널 구할 생각이었으니까, 당연한 일에 감사할 필요 없어. 그리고······.”
올리비아의 푸른 눈동자가 크게 떠진다.
그녀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괜히 뻘쭘해서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말한다.
“그때 윌리엄한테 나 감싸줘서 고맙다.”
전속 시녀 선언이 좀 많이 쪽팔리긴 했다.
뭐 그래도 어쨌건 날 생각해서 해준 말이니까.
감사 인사를 전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괴인으로 변한 윌리엄을 상대로 날 지키겠다고 나선 일도.
[말 잘하네. 파트너. 이번만큼은 칭찬해주지.]흑태자의 목소리가 울린다.
당신 칭찬 같은 거 받으려고 한 말 아니거든?
내 말을 들은 올리비아가 웃는다.
평소의 과장된 아가씨 웃음이 아닌, 또래 소녀다운 풋풋한 웃음.
“당신은 정말이지······. 우주 제일 바보로군요.”
예쁘게 웃는 모습으로 바보라고 자연스럽게 매도하는 올리비아.
기대도 안 했다.
츤데레가 다 그렇지 뭐.
오렌지 주스를 한 병 더 따서 마시던 그때.
“아가씨, 주인님의 주인님.”
망부석처럼 조용히 서 있던 벨라가 휴대폰을 확인하더니 우리를 부른다.
“황제 폐하께서 오신다고 합니다.”
황제?
그 양반이 대체 여긴 왜 오는 거야?
“아버님이요?”
“그렇습니다. 아가씨께서 깨어나셨다는 소식을 들은 모양입니다. 황후 마마도 함께 오신다고 합니다.”
벨라가 평소처럼 차분한 목소리로 말한다.
갑자기 올리비아 부모님 등판이라니.
안 그래도 지금 미묘하게 어색한데, 올리비아 부모님이 오면 더 어색할지도 모른다.
‘빨리 내빼야겠군.’
[파트너? 지금 도망가는 거야? 맞서 싸워야지. 숙부와 숙모한테 점수를 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맞서 싸우긴 뭘 맞서 싸워.
어이가 없다.
흑태자의 말을 무시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럼 난 이만 가 봐야겠군.”
올리비아가 무사한 걸 확인도 했으니, 나가서 놀아야겠다.
모처럼 받은 장기 휴가, 아니 출타다.
프랑스에 온 목적은 이미 달성했으니, 지긋지긋한 학원 수업을 다시 듣기 전에 프랑스에서 힐링 좀 해야겠다.
빙의 전에도 못 해본 유럽 여행이나 즐겨야지.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병실을 나가려던 순간.
“황제 폐하께서 주인님의 주인님도 뵙고자 하십니다.”
벨라의 말 한마디가 내 발목을 붙잡았다.
얼굴이 굳는다.
아니 갑자기 나는 왜 보자고 그러는 거야?
황제가 대체 왜 저러는지 짐작조차 안 간다.
[파트너, 그러니까 아까 그냥 가만히 있자고 내가 말했잖아.]부담스러운데.
“피할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주인님의 주인님.”
벨라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한다.
[피하지 못하면 즐기라고, 파트너.]옆에서 흑태자가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한다.
황제가 나를 콕 집어 지정했으니, 피할 수가 없다.
어쩔 수 없지.
“알았어. 만나면 되잖아.”
자리에 다시 앉는다.
그 모습을 본 올리비아가 웃는다.
쟤는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모르겠다.
오렌지 주스를 마시며 타는 속을 달랜다.
[파트너, 그걸 네가 다 먹으면 어떡해? 내 동생 줄 것도 남겨 놔야지.]‘시끄러워.’
흑태자의 잔소리를 들으며 비운 오렌지 주스가 세 병이 되어갈 때쯤.
“황제 폐하께서 오십니다.”
벨라의 목소리와 함께 문이 활짝 열리며 황제 내외가 들어왔다.
명품 정장을 입은 백금발의 장년인, 프랑스 황제 알베르와 그 부인인 롤빵머리 귀부인, 지젤.
그리고 황제 내외를 뒤따르는 수많은 수행원이 보인다.
웬만한 호텔 스위트룸보다 넓은 VIP 병실을 꽉 메울 정도의 대단위 인원의 등장이다.
“오오, 올리비아! 드디어 일어났구나! 이 아비가 널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느냐? 한 번만 안아 보자꾸나. 우리 공주님.”
올리비아를 보자마자 눈물을 흘리며 돌격하는 프랑스 황제.
전형적인 체통 없는 딸바보 라노벨 아버지 캐릭터를 보니 한숨이 나온다.
“저리 가요. 흥. 바보 아버지. 징그러워! 싫어!”
올리비아가 가슴을 양팔로 감싸며 황제를 노려본다.
그 모습에 충격받은 표정을 짓는 황제.
그가 자리에 주저앉아 양손으로 이마를 감싸며 고개를 숙인다.
“이럴 수가······. 나의 올리비아가······. 나의 올리비아가······. 흑흑······. 부인······.”
“이 멍청이가, 체통 없게 이게 무슨 짓이에요!?”
찰싹.
황후의 등짝 스매싱을 맞고 비명을 지르는 황제.
이딴 게 프랑스인의 황제?
[숙모한테 잡혀 사는 모습이랑 올리비아를 끔찍이 아끼는 모습도 여전하구만. 달라진 게 없어.]흑태자의 흐뭇한 목소리가 들린다.
“흠흠.”
황제가 헛기침하면서 눈물을 닦으며 일어난다.
언제 울었냐는 듯,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지은 황제가 올리비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 뜻대로 영국과의 국혼은 파기하기로 결정했다. 국제 합동 수사단의 조사 결과 윌리엄의 혐의가 대부분 진실로 밝혀졌으니, 우리 제국의 위신을 위해서라도 당연한 결정이라 할 수 있지.”
“흥. 당연한 결과 따위, 들어봤자 별 감흥도 없어요.”
올리비아가 입술을 삐죽인다.
“그한테 사과는 하셨나요?”
“사과라니?”
황제가 머리를 긁적이며 되묻는다.
그 모습을 본 올리비아가 볼을 부풀린다.
“사과 안 하면 평생 아버지랑 말도 안 할 거예요!”
말도 안 한다.
그 말을 들은 황제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답한다.
“아, 알았다. 하면 되지 않느냐······.”
“지금 당장 해요!”
“흠흠. 김덕성 군.”
황제가 나를 부른다.
그가 나를 가리키는 말이었어?
“부르셨습니까?”
“그······. 내가 자네의 행적을 왜곡되게 전해 듣고 너무 오해를 많이 했던 것 같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사과를 하지······. 자네는 내가 들은 소문 속 사람과는 전혀 다른 사내였네. 그리고······.”
“고맙다고도 해야죠! 오라버니의 후계자로 인정도!”
옆에서 올리비아가 추임새를 넣는다.
무섭다. 츤데레.
“······고맙네. 내 사랑스러운 딸, 올리비아를 그런 최악의 남자의 마수에서 구해줘서. 프랑스와 영국을 적으로 돌릴 각오를 하면서 내 딸을 구하기 위해 저 멀리 극동에서부터 달려온 자네의 용단에 나는 진심으로 감탄했네.”
황제가 머뭇거리며 말을 이어간다.
“그리고 내키지는 않지만, 듀랜달을 들고 백염검식과 흑광검식을 다루는 모습까지 봤으니 이만 인정하겠네. 자네를 듀랜달의 적법한 소유자이자, 라울의 후계자로.”
황제가 내게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인다.
사족이 좀 많고, 올리비아가 옆에서 재촉하기는 했지만 뭐 그럭저럭 나쁘진는 않은 멘트다.
[하하, 파트너. 축하해. 우리 사랑스러운 동생 덕분에 황실 점수는 무난히 따가는 그림인걸?]흑태자가 머릿속에서 촐싹댄다.
이 상황에서 이걸 안 받으면 내가 더 이상한 사람이 된다.
“알겠습니다. 사과, 감사, 인정 전부 받아들이죠.”
그러니 받기로 했다.
그편이 나에게 이득이기도 하고.
올리비아가 날 생각해서 차려준 밥상을 걷어찰 정도로 나는 멍청하지 않다.
“고맙네. 아, 그렇다고 아직 자네를 보나파르트 황실의 부마로 인정한 건 아닐세! 올리비아. 다시 생각해봐라. 저놈은 아무리 봐도 아니야. 주변에 여자가 대체 몇 명인데 대체 왜 저런······.”
갑자기 웬 부마야?
시노자키 이치로도 그렇고, 라노벨 팔불출 아빠 캐릭터들은 급발진이 종특인가?
왜 이렇게 사위 삼는 걸 좋아해?
성을 시노자키로 가는 것도 싫지만, 보나파르트로 갈기도 싫다.
빙의 전에도, 이후에도 내 성은 영원불멸 김씨니까.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김칫국 마시는 꼬락서니하고는.
혀를 찬다.
“시, 시시시끄러워요!! 아, 아버지가 뭘 안다고 그래요!!”
올리비아가 붉어진 얼굴로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친다.
“하지만······.”
당황하며 식은땀을 흘리는 황제.
척.
올리비아가 가슴 위에 손을 올리며 말한다.
“잘 들어요. 아버지. 저는 경쟁에서 무조건 이길 자신이 있어요. 그러니까, 그런 쓸데없는 소리 다시는 하지 마세요. 아시겠나요? 저는 어디까지나 그의 1등, 아니 0등 전속 시녀니까요!”
올리비아가 쓸데없이 당당한 태도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한다.
그 모습을 본 황제가 자포자기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알았다. 올리비아.”
황제의 시선이 내게 향한다.
“······우리 딸, 울리면 죽여버린다. 김덕성. 알겠느냐?”
목소리 살벌한 거 봐라.
[나도 죽여 버릴 거야. 파트너.]흑태자의 추가 협박까지.
이거 무서워서 어디 살겠나?
속으로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인다.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믿을 수 없군. 올리비아한테 남자는 나 이외에 다 늑대니까. 자네를 지켜보도록 하지.”
황제가 나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한다.
히로인 아빠는 무조건 팔불출인 빌어먹을 라노벨 세상 같으니.
“······으으으으으으으······. 바보······. 멍청이······.”
옆에서는 올리비아가 앓는 소리를 내고 있다.
아까는 말 잘하다가 갑자기 왜 저래?
황제는 말이 끝난 모양인지 입을 다물고, 대신 황후가 나서서 나와 올리비아에게 금박으로 장식된 편지를 한 통씩 건넸다.
“이건 황실 무도회 초대장이에요. 두 사람 모두 반드시 참석하도록 하세요.”
무도회?
판타지 소설에 자주 나오던 춤추는 뭐 그런 무도회인가?
“그럼 저는 이이를 데리고 이만 나가보겠어요. 원래 올리비아의 상태가 안정되면 보러 오려고 했는데 이이가 고집을 부려서 그만. 실례가 아니었는지 모르겠네요. 올리비아도, 김덕성 군도 편히 쉬세요.”
“싫어! 나는 안 갈 거야! 싫어! 올리비아! 이 아빠가 더 보고 싶지 않느냐?”
“따라오세요! 이 멍청이!”
황후가 우아한 목소리로 애처럼 투정을 부리는 황제를 질질 끌고 수행원들과 함께 퇴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