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163)
쏴아아아.
쏟아지는 폭우를 맞으며 계속해서 길을 걷는다.
“짐이 돼서 미안하다······. 김덕성······. 정말 미안하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인다.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나는 걸 보면 울고 있는 모양.
괜히 신경 쓰인다.
“좀 그만 좀 울고, 주변에 동굴 같은 거 없냐? 비 좀 피해야겠는데.”
먹구름 잔뜩 낀 하늘도 그렇고.
한두 시간 안에 그칠 만한 폭우는 아니다.
비가 그칠 때까지 피할 장소가 필요하다.
“그, 그런 거라면 알고 있다. 내, 내가 가르쳐주겠다! 김덕성!”
린의 목소리에 화색이 돈다.
“여기서 왼쪽으로 돌아야 한다.”
“여기서 쭉 직진이다.”
“개울을 건너 오른쪽이다.”
그녀의 지시를 따라 폭우가 쏟아지는 정글을 한참 걸은 뒤에야, 나는 동굴에 도착했다.
중간에 물이 불어난 개울을 건넌 덕분에 온몸이 다 젖은 상황.
업고 있던 린을 살포시 내려놓는다.
뚝, 뚝.
온몸에서 물이 떨어진다.
몸이 으슬으슬하고 머리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다.
잠깐? 열이라고?
동굴 안에서 부는 바람을 맞으니 갑자기 오한이 밀려든다.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파트너! 파트너······.]“김덕성! 김덕······.”
저 멀리서 흑태자와 린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온다.
휘청.
시야가 가물가물해지면서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으로 고꾸라진다.
린이 아닌 내가 감기에 걸리게 될 줄이야.
염병.
*
무인도. 베이스캠프.
쏴아아아아.
쏟아지는 폭우.
김덕성이 배수로를 파둔 덕분에 침수되지 않은 텐트 앞.
천막 아래에 핑크 트윈테일 거유 미소녀, 에반젤린이 테이블에 앉아 있다.
“계약자여, 여의 허기를 채워줄 양식은 아직이더냐?”
맞은편에는 금발 미소녀, 성녀 베아트리체가 있다.
그녀가 주린 배를 움켜쥐며 입술을 삐죽인다.
“조금만 기다려보는 것이와요. 트릭시 양. 이제 거의 다 되어가고 있사와요.”
우르르르릉!
천둥 번개와 비바람이 몰아치는 와중에도 에반젤린은 콧노래를 부르면서 고체 연료 버너 위의 코펠에 불닭볶은면을 비비고 있었다.
식탁 위에는 맛김치 1팩이 있다.
불닭볶은면 특유의 매캐한 냄새가 비 냄새를 뚫고 번진다.
“배가 고픈 트릭시 양을 위해 특별히 제 비상식량으로 챙겨온 불닭볶은면과 김치를 내놓은 거니 감사하시는 것이와요.”
에반젤린이 말한다.
베아트리체가 우물쭈물하며 에반젤린에게 말을 건다.
“계약자여, 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데 그 남자를 안 찾으러 가도 되는 것이냐?”
세상을 끝낼 작정으로 쏟아지는 장대비.
난생처음 겪어보는 폭우에 베아트리체는 살짝 떨고 있었다.
하지만 김덕성을 이 폭우에서 내버려 둘 수는 없다.
대장로, 나아가 그 뒤에 있는 메사이어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그가 필요하다.
조금 무섭지만.
베아트리체는 이미 그렇게 결론을 내린 상황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의 신병에 이상이 생기면 안 된다.
‘그래, 이, 이건 그 남자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 아니야······.’
베아트리체의 얼굴이 살짝 붉어진다.
“김덕성 님 말씀이신가요? 괜찮사와요.”
휘적휘적.
에반젤린이 포크로 불닭볶은면을 소스와 함께 비비면서 말한다.
“하지만······.”
“그분의 곁에는 시노자키 공이 있사와요. 그러니 괜찮사와요.”
에반젤린이 살짝 어두운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코펠을 응시한다.
그녀의 머릿속에 식량 채집 출발 전 했던 린의 부탁이 떠오른다.
[스튜어트 양. 초면에 이런 부탁은 실례라는 걸 알고 있지만, 부디 이번 탐색에서는 나를 그와 단둘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도와주면 안 되겠나?]절실한 표정으로 말하던 린의 부탁을 에반젤린은 거절할 수 없었다.
그래서였다.
에반젤린이 베이스캠프를 지키고 있는 건.
[진짜 위급한 상황이라면 헌터 워치를 통해 신호를 보내주겠다. 혹시 24시간이 지나도 우리가 복귀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우리 탐색에 나서다오.]그렇게 말한 린이었지만, 아직 연락은 없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다.
그렇게 생각하고는 싶었지만, 날씨가 워낙 우중충한 탓에 계속해서 걱정되는 건 사실이었다.
두근.
그의 얼굴을 떠올리자 에반젤린의 가슴이 뛰었다.
영국 세인트 조지 학원.
윌리엄이 지배했던 그곳에서 에반젤린은 새장 속의 새, 아니 감옥 안의 죄수 같은 생활을 보냈다.
공주라는 신분 때문에 대놓고 따돌리지는 못했지만, 음습한 따돌림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윌리엄의 끈적한 욕망이 깃든 노골적인 시선을 받으면서도 에반젤린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동화책에서나 나올 법한 탑 위에 갇힌 공주 신세였던 자신.
그래서 동화책에서 나올 법한 백마 탄 왕자를 절실하게 기다렸던 걸지도 모른다.
김덕성은, 그녀에게 있어 윌리엄을 물리치고 탑에서 자신을 구원해준 백마 탄 왕자였다.
‘김덕성 님······. 당신께서 부디 무사히 귀환할 수 있기를 소녀가 기도하겠사와요.’
그러니 자신이 그를 사모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를 떠올리는 에반젤린의 얼굴이 분홍빛으로 물든다.
그녀가 짧은 기도를 끝낸 뒤, 완성된 불닭볶은면을 포크로 둘둘 감아 김치와 함께 베아트리체의 입안에 집어넣었다.
“트릭시 양. 불닭에 김치를 싸서 드셔 보아요.”
“이, 이게 뭐냐? 불길한 느낌이 드는데, 계약자······. 읍! 으읍! 읍읍!”
쏘옥.
순식간에 입안에 들어간 불닭의 화끈한 매운맛에 베아트리체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입안에서 폭죽이 터지는 듯한 매운맛에 베아트리체가 얼굴을 도리도리 젓는다.
“무, 물! 물을 다오! 계약자여! 이, 이런 너무한 짓은 다, 당장 그만두는 것이다······!”
베아트리체가 눈물을 찔끔 흘리면서 소리친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에반젤린은 웃으며 포크로 불닭볶은면을 말아 김치와 함께 입안에 넣었다.
뇌리를 강타하는 알싸한 매운맛.
하지만 매일 1일 1불닭을 해서 그런지, 이제는 조금 견딜 만했다.
‘조금만 기다려주시어요. 김덕성님. 소녀, 매운맛도 김치도 완벽히 소화하는 레이디가 될 테니까요······!’
에반젤린이 붉어진 이마에서 흐르는 땀방울을 닦아낸다.
우르르릉.
천둥소리가 베이스캠프를 강타한다.
*
무인도.
동굴.
비바람, 천둥 번개 소리를 들으면서, 린은 바닥으로 고꾸라지는 김덕성을 품에 안았다.
“김덕성! 김덕성!”
눈을 감은 그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정신을 잃은 거다.
“괜찮나, 김덕성······.”
린이 말끝을 흐리며 그의 머리를 허벅지에 눕힌다.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무릎베개로 눕힌 김덕성의 이마를 짚는다.
후끈.
불덩이 같은 열기가 손바닥에 전해진다.
명백한 감기 증상.
“큿······.”
린이 입술을 깨문다.
우르르릉.
천둥소리가 그녀의 귓전을 울린다.
린이 축축하게 젖은 비치 후드 집업을 만지작대며 중얼댄다.
“나 때문에······.”
김덕성이 감기에 걸려 앓다 기절한 이유는 명백했다.
린.
자신 때문이었다.
그녀가 이계종에게 붙잡혔기 때문에.
별것도 아닌 승부 수영복을 지키려다 발목을 삐었기 때문에.
그의 등에 업히는 게 무심코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지경까지 온 거다.
“나는 정말 바보에 멍청이다······.”
린이 고개를 숙인다.
그녀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린이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황급히 닦아낸다.
“이럴 때가 아니다. 어서 헌터 워치로 스튜어트 양한테 연락해야······.”
린이 손목에 찬 헌터 워치를 클릭해서 메시지를 보내려던 순간.
[메시지를 전달할 수 없습니다.] [통신 연결이 불안정합니다.]헌터 워치가 오류를 뱉어낸다.
“이, 이러면 안 되는데······.”
당황한 린이 몇 번이고 통신을 시도했지만, 결과는 전부 실패.
그렇다고 아픈 그를 놔두고 바깥에 나갈 수도 없는 상황.
진퇴양난에 빠진 린이 입술을 깨문다.
이대로라면 구조가 올 때까지 최대 24시간을 버티거나, 그의 감기가 호전되길 바라는 수밖에 없는 상황.
“큿······. 전부 나 때문에······.”
린의 목소리가 동굴 안에 작게 울린다.
그녀의 멈췄던 눈물이 다시 흘러나온다.
“나, 나는······. 역시 나쁜 여자다. 나는······. 네 곁에 있을 자격이 없다······.”
린의 눈에서 회한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문득 그녀의 머릿속에 임간학교 시절의 추억이 떠올랐다.
주간 탐색 도중 갑자기 쏟아진 폭우.
부르마 체육복 밑에 승부 속옷을 입고, 비에 젖은 채로 아이를 만들자는 부담스러운 육탄 공세를 하던 자신을 질타하던 그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그때도······. 너는 내게 비옷을 주고 동굴에서 몸을 녹일 수 있게 해줬었지······.”
거친 말투 이면에 숨겨진 상냥함에 그녀가 반했던 순간이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이번에도 또······. 잘못하고야 말았다······.”
린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다고 계속 자책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그날.
임간학교 때 동굴 안에서 그가 자신에게 뽀송뽀송한 새 옷과 핫팩, 담요를 제공해줬던 것처럼.
이번에는 자신이 그에게 해줄 차례다.
“김덕성······. 조금만 기다려다오.”
린이 본인의 배낭을 꺼낸다.
아버지인 이치로의 조언에 따라, 그녀의 배낭에는 생존 용품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린은 고체 연료를 꺼내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고체 연료에 불이 붙으면서 차가운 동굴 안에 온기가 조금씩 돌았다.
하지만 무릎베개를 하고 있는 김덕성의 상태는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린이 입술을 깨문다.
그녀의 얼굴이 붉게 물든다.
“이, 이건······. 어, 어디까지나 환자의 체온 보존을 위해······.”
그녀가 변명하듯 중얼거리면서, 젖은 비치 후드 집업을 벗어던진 뒤에 배낭에서 담요를 꺼내고는 그대로 김덕성을 밀착해서 꼬옥 끌어안으며 담요를 두른다.
번데기처럼 한 담요 안에서 그와 밀착하게 된 린의 얼굴이 새빨개진다.
두근, 두근.
그녀의 심장이 뛴다.
가슴이 조일 듯 아파온다.
매번 처녀를 바치느니, 아이를 만들자니 수위 높은 이야기를 해대는 린이었다.
하지만 막상 그와 유사한, 서로 살결을 맞대야 하는 상황이 다가오자 린의 머릿속은 새하얗게 물들었다.
린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진 그때.
“······엄마······.”
끙끙 앓고 있던 그가 잠꼬대하듯 중얼거렸다.
김덕성이 무의식적으로 린의 풍만한 가슴팍 안으로 파고든다.
화들짝 놀란 린이 정신을 차리며 품 안으로 아기처럼 파고드는 김덕성의 모습을 본다.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는 린의 입에 쓴웃음이 걸린다.
린은 알고 있었다. 김덕성이 고아 출신이라는 사실을.
그렇기에 어머니를 찾는 그의 잠꼬대가 그녀의 귓가에는 더없이 슬프게 들렸다.
린 역시 고아원 출신이었기에.
시노자키 가문에서 자라면서, 가족 간의 사랑을 갈구했던 기억이 있기에.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는 진짜 아버지를 찾았지만, 김덕성은 여전히 혼자였다.
모순적이게도, 그녀의 아버지를 찾아준 상대가 그였음에도.
그녀가 그의 양어깨를 포근하게 끌어안는다.
“아프지 마라. 김덕성······. 이번만큼은······. 아니, 필요하다면 언제건 내가 네 엄마가 되어줄 테니······.”
그렇게라도 잘못을 조금이라도 만회하고 싶다.
그에게 받은 은혜를 조금이나가 갚고 싶다.
토닥토닥.
린은 그의 등을 토닥이면서 가슴으로 그를 끌어안았다.
마치 고향에 온 듯한 평온한 표정을 지은 그가 얼굴을 그녀의 가슴에 묻는다.
타닥, 타닥.
고체 연료 타는 소리가 동굴 안을 조용히 울렸다.
너도 사실 좋았잖아?
중학교 2학년 시절. 겨울방학 직전.
학교에서 돌아올 때 예기치 못하게 겨울비를 맞았던 적이 있었다.
원래 감기 기운이 조금 있었는데, 추운 겨울날에 비까지 맞아서 그런지 몸살에 걸렸고, 나는 학교를 하루 쉬게 되었다.
그날 밤.
어머니가 고열로 펄펄 끓는 이마에 찬 수건을 얹어주던 모습을 나는 아직 기억한다.
아픈 나를 걱정하면서 죽을 끓여왔던 어머니의 모습을 기억한다.
밤새도록 옆에서 내 머리를 쓰다듬어줬던 어머니의 모습을 기억한다.
‘따뜻해······.’
어머니께서 아픈 나를 돌봐줬던 그 날의 추억처럼.
포근하고 푹신한 느낌이 전신에 느껴진다.
벗어나기 싫다.
이대로 영원히 잠들고 싶다.
근심도 걱정도 없이 엄마의 품처럼 따뜻한 여기서.
[파트너, 파트너······.]저 멀리서 흑태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파트너, 정신이 들어? 그럼 일어나야지. 파트너.]‘······싫은데······.’
이 엿 같은 세상에서 모처럼 느끼는 포근함과 편안함이다.
잃고 싶지 않다.
오 분만 더.
아니 십 분만.
아니 한 시간만 더.
계속 이대로······.
뭐? 레이디의 가슴?
흑태자의 말에 정신이 확 깨인다.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린다.
눈앞에 비키니로 감싸인 커다란 가슴이 보인다.
그리고 얼굴이 빨개진 린의 모습도.
“······아, 일어났나. 김덕성.”
흑태자의 말대로, 그녀와 나는 서로 밀착한 상태.
나와 린을 둘러싼 담요와 근처에 타고 있는 고체 연료 램프가 보인다.
“이, 이게 무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