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175)
백색 여제와 검귀.
정상급 강자인 두 괴물이 힘을 합쳐 펼쳐낸 마력 폭발이 이반을 무자비하게 덮쳤다.
쿠-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
무자비한 폭음이 울리고, 마력파가 주변을 휩쓴다.
얼어붙은 바다가 부서지고, 고요했던 바다에 집채만한 해일이 몰아친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이반의 절망 섞인 끔찍한 비명이 피어오른다.
“······나는, 네놈 따위한테 장렬한 최후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치로가 차갑게 읊조리며 오오카네히라를 든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꼴사납게, 바닥을 기며 벌레처럼 최후를 맞이해라. 패배한 개답게.”
번쩍.
녹색 섬광과 백색 서광이 뒤섞여 바다와 하늘을 갈라냈다.
*
무인도의 계절이 다시 겨울에서 여름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풍경은 돌아오지 않았다.
EX랭크 강자들의 싸움으로 지형이 바뀌어 폐허가 되어버린 무인도.
아름다운 섬 대신 모래와 바위뿐인 황량한 섬으로 돌변한 그곳의 해변으로.
세이라는 돌아왔다.
그녀의 시야에 그의 모습이 보인다.
린의 무릎을 베고, 편안한 표정으로 잠든 김덕성의 모습이.
린의 옆에서 그를 간호하는 회색 머리 미녀, 한서진의 모습도 보인다.
“꼬마야.”
사뿐.
세이라가 그에게 다가간다.
세이라의 아름다운 손이 김덕성의 뺨을 쓸어내린다.
차가웠던 그때와는 달리 체온이 돌아왔는지 따스한 뺨.
“······다행이구나.”
세이라의 고개가 떨어진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이 몸이······. 너무 늦지 않아서, 그래서 너를 구해낼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이번에는 지켜냈다.
반한 남자를.
그 순간.
세이라의 정신이 희미해지기 시작한다.
무리해서 전성기 모드를 사용한 반작용이었다.
“시노자키 양, 한서진 양, 그를 잘 부탁······.”
풀썩.
세이라가 그대로 고꾸라진다.
묘령의 미녀였던 그녀의 모습이, 원래보다 더 어려진 모습의 미소녀로 순식간에 줄어든다.
쓰러진 세이라의 입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진짜 미치겠네
꿈을 꿨다.
교토 교류전.
메이진 영웅 학원 지하 비밀 실험실에서 카스미 선배가 나 대신 공격을 맞다 피를 토하는 장면이 눈앞에 스쳐 지나간다.
[후배 군, 도망가. 여기는 내가 어떻게든 막아볼 테니까, 죽으면 안 돼. 후배 군은 나쁜 남자에 검은 귀축이지만 나는 후배 군을······.] [후배 군······. 살아야 해······. 후배 군······.]그녀의 피맺힌 절규가 귓가에 맴돈다.
장면이 바뀐다.
무인도.
전력을 다해 이반의 광역기를 막아낸 에반젤린이 피투성이로 쓰러진다.
[기, 김덕성님······.] [반드시 사셔야 해요······.]그녀의 차갑게 식은 체온이 손에 느껴진다.
프로즌 블래스트에 당하기 직전.
눈물을 뿌리며 나를 부르던 린의 모습이 눈앞에 스쳐 지나간다.
역시 이런 장면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 때문에 누군가가 피 흘리는 장면은.
그걸 막기 위해서는······.
머리가 깨질 듯 아프다.
온몸이 쑤신다.
[파트너. 파트너.]머릿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울린다.
[파트너, 정신이 좀 들어? 눈을 좀 떠봐.]익숙한 목소리의 지시를 따라 천천히 눈을 뜬다.
낯선 천장이다.
가물가물해진 시야 속, 드문드문 기억들이 떠오른다.
난데없이 난입한 이반 안토노프와 힘겹게 싸웠던 기억.
놈의 프로즌 블래스트를 린 대신 희생해서 막아낸 기억까지.
“으으으으······.”
그 기억을 떠올리니까 쪽팔린다.
손발이 오그라진다.
내가 그때 미쳤던 게 틀림없다. 다시 하라면 죽어도 안 할 거다.
희생이라니.
염병.
무슨 라노벨 주인공도 아니고.
역시 독식과 사이다가 최고다.
흑태자가 내가 쓰러진 사이 있었던 일을 간략히 설명한다.
‘그 정도는 나도 짐작했어.’
내가 병원에서 깨어났다는 사실부터가 이반이 패배했다는 걸 증명한다.
만일 이반이 이겼다면 병원에 누워있는 게 아니라 이미 저승에 가 있었겠지.
이 염병할 라노벨 세상에 사후세계가 실존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다행이지? 파트너.]흑태자가 묻는다.
‘그런 건 쓸데없이 왜 물어봐, 지금 엄청 쪽팔리거든?’
뭐? 주인공이 히로인 대신 희생?
나 때문에 피 흘리는 호구들이 싫다?
내가 그런 미친 생각을 한때 했었다니.
쥐구멍이 있으면 숨고 있다.
[에잉 쯧쯧. 파트너. 솔직하지 못하긴.]흑태자가 혀를 찬다.
그래, 뭐 솔직하게 말하자면.
다행이다.
라노벨처럼 모두가 다치지 않고 해피 엔딩을 맞이할 수 있어서.
뭘 해도 해피 엔딩으로 연결되는 건, 이 엿 같은 세상의 유일한 좋은 점이 아닐까 싶다.
하여간 이 빌어먹을 상냥한 세상은 죄다 감정 과잉에 무지성 신뢰라서 문제다.
어떻게 제정신으로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지.
목숨이 아깝지도 않나?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어라, 김덕성 님. 정신이 드시는 것이와요?”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고개를 돌린다.
거기에는, 나와 같은 환자복을 입은 핑크 트윈테일 미소녀가 손뼉을 짝하고 치면서 눈빛을 반짝이고 있다.
에반젤린 스튜어트다.
“어? 어······.”
그녀의 질문에 말끝을 흐린다.
내가 기억하는 에반젤린의 마지막은 우리 대신 방어막을 펼치다 피를 토하며 날아가 정신을 잃고 빈사 상태에 빠진 모습.
저러다가 진짜 잘못되면 어쩌나 솔직히 조금 걱정했었는데.
많이는 아니고 조금.
그래도 살아 있기는 했네.
다행이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쉰다.
이제 조금 실감이 난다.
내가 지금 라노벨 권말 에필로그에 도달했다는 사실이.
“정말 다행이어요!”
와락.
에반젤린 스튜어트가 내게 다가와 껴안는다.
얇은 환자복 너머 풍만한 가슴이 내 품에 뭉개진다.
아니 이러지 말라니까.
당황스럽다.
원래라면 험하게 뭐라 해야 할 상황이지만, 마음이 약해진다.
눈앞의 이 국뽕 불닭 애기븝미 영국 공주는 생면부지의 인물인 나를 위해서 본인의 목숨을 걸었던 것이다.
고작 팬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금사빠라는 캐릭터 설정 때문에.
역시 나는 이 세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후후후후후후후.”
에반젤린이 아가씨 웃음을 지으면서 행복한 표정으로 분홍색으로 물든 뺨을 품에 부빈다.
무슨 강아지도 아니고.
어이가 없다.
“······살아있어서, 정신을 차려서······. 소녀가 김덕성 님한테 도움이 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어요.”
에반젤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그녀의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난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빌어먹을 설정 때문에 원작과는 달리 나에게 빠진 영국 공주님이라.
이걸 그냥 내버려 둘 수는 당연히 없고.
머리가 복잡해진다.
아무튼 일단 얘부터 떼어내고 봐야겠다.
“······스튜어트 회장님.”
“어머. 우리끼리 딱딱하게 그렇게 부를 필요 없사와요. 이름을 불러도 괜찮사와요. 말도 놓아주시어요. 안 그러면 계속 이렇게 붙어 있을 것이와요! 에잇! 에잇!”
에반젤린이 볼을 부풀린다.
[파트너. 그냥 하라는 대로 해 줘.]흑태자가 머릿속에서 말한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다.
“알았어. 에반젤린. 같은 환자니까 좀 떨어져. 너도 몸 덜 나았을 거 아냐.”
“알겠사와요! 후후.”
에반젤린이 웃으면서 품에서 떨어지던 그때.
덜컥.
병실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온다.
“계약자, 김덕성! 여가 왔도다!”
“덕성! 내가 왔······.”
베아트리체와 린이다.
손에 과일바구니를 든 린이 환하게 웃다가 나와 에반젤린이 붙은 꼴을 보고 얼굴을 굳힌다.
린이 고개를 떨군다.
그녀가 서랍장 위에 과일바구니를 올리며 말한다.
“······내, 내가 방해한 건 아니겠지······.”
“아니 뭔가 오해가 있는데 이거 그냥 에반젤린이 멋대로 달라붙은 거라니까.”
진심으로 억울하다.
“맞사와요. 시노자키 공. 오해는 금물이어요. 소녀가 김덕성 님한테 멋대로 달라붙은 것뿐이랍니다?”
후후후후.
에반젤린이 웃는다.
그 모습을 본 린이 주먹을 불끈 쥔다.
“아, 알겠다. 내가 좀 더 노력하겠다. 오, 오늘은······. 너, 너한테 주려고 특별히 한국에서 직수입한 밀양 얼음골 사과를 준비했다.”
밀양 얼음골 사과?
그런 건 또 어디서 구해온 거야?
그나저나 또 사과라니.
사과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입원할 때마다 사과를 먹으니 약간 물리려고 한다.
요즘 인기 많은 샤인머스캣 같은 거 좀 사 오면 안 될까.
부스럭.
린이 과일바구니에서 사과와 과도를 꺼낸다.
그녀의 남색 눈동자에 비장미가 감돈다.
“내가 깎아주마······! 시노자키류 비전의 토끼 사과 깎기를 보여주겠다!”
빌어먹을 시노자키 류는 대체 어디까지 가르치는 거지?
사각사각.
린이 식은땀을 흘리며 사과 깎기에 집중한다.
옆에 앉은 베아트리체가 한쪽 눈을 반짝이며 그 광경을 구경한다.
“자, 여기. 내가 직접 깎은 사과다. 덕성.”
린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병실 침대 환자용 침상 테이블 위에 사과가 담긴 접시가 놓인다.
시노자키류 비전은 잘 모르겠지만, 애니메이션에서나 볼 법한 토끼 사과가 한가득 놓여 있다.
“우와아아, 흠흠. 그래도 봐줄 만하구나. 여의 눈을 즐겁게 할 재주는 있구나.”
베아트리체가 무심코 눈을 반짝이다가 헛기침하며 진지한 모습으로 돌아온다.
아직도 저렇게 허세를 부리다니.
헛웃음이 나온다.
“따, 딱히 먹고 싶다고 생각한 건 아니니 여를 그런 눈으로 보지 말도록. 인간.”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홱 돌리는 베아트리체.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사과에 꽂혀 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 하는 것처럼, 단 걸 좋아하는 베아트리체가 사과를 그냥 내버려둘 리 없다.
“너희 것도 있다. 스미스. 스튜어트.”
사각사각.
린이 베아트리체와 에반젤린에게 사과를 건넨다.
토끼 모양은 아니지만, 반듯하게 잘 깎인 사과였다.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먹어라.”
린이 정말 엄마 같은 멘트를 치며 엄마처럼 웃는다.
무인도에 다녀오더니 갑자기 사람이 바뀐 기분.
나쁘지는 않지만, 마음 한쪽 구석이 자꾸 쿡쿡 쑤시는 것 같아 싱숭생숭하다.
“음웃?! 맛있도다. 후후. 여한테 일용할 양식을 공양하다니, 무인도에서 여한테 김치찌개라는 진미를 대접해준 것도 그렇고, 그대는 역시 착한 인간이구나.”
“맛있사와요! 시노자키 공! 시노자키 공은 역시 요리에 소질이 있는 분이어요. 그분의 반려다워요!”
사과를 먹은 베아트리체와 에반젤린이 호들갑을 떤다.
린의 얼굴이 붉어진다.
“고, 고맙다······.”
솔직히 사과를 깎는 게 요리의 범주에 들어갈 만큼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뭐, 린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굳이 태클을 걸어서 산통을 깨고 싶지는 않다.
린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예쁜 미소.
매번 우는 모습만 보다가, 저렇게 웃는 모습을 보니 좀 낫다.
사람이 좀 웃고 살아야지.
‘나도 그 정도 눈치는 있으니까.’
[오, 파트너. 꽤 성장했는데?]흑태자가 이제는 없으면 섭섭한 헛소리를 한다.
성장은 무슨.
고개가 절로 저어지려던 그때.
“······덕성.”
린이 내게 말을 건다.
그녀가 붉어진 얼굴로 포크를 들어 깔끔하게 깎은 귀여운 토끼 사과를 내 입술 앞에 들이댄다.
“아, 아 해다오······!”
눈을 질끈 감은 린.
나 손발 멀쩡한데.
올리비아 때도 그렇고 왜 저렇게들 먹여주려고 하는지 모를 일이다.
[파트너, 얌전히 받아 먹는 게 어때?]이런 상황마다 이제는 익숙해진 재촉.
린에게 토끼 사과를 받아먹는다.
아삭.
사과의 새콤달콤한 과즙이 입안에 잔뜩 퍼진다.
“어, 어떤가? 덕성. 마, 맛있나?”
고개를 끄덕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