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31)
‘그런데 그런 사람을 유, 유혹해서 내 남자로 만들라니······. 대체······.’
그녀의 머릿속에 상호 모순되는 당주의 명령과 감정이 충돌한다.
시노자키 린은 김덕성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싫어한다.
하지만 당주의 명령은 반드시 수행해야 한다.
따라서 싫어하는 상대를 유혹해서 본인의 남자로 만들어야 한다.
“크읏······.”
모든 명제를 완성한 시노자키 린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나온다.
그녀의 두뇌가 에러를 뱉어낸다.
문득 머릿속에 시노자키 이치로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당주님께서는 싸우면서 친해진다고 했지만, 대체 어떻게······.”
싸우면서 친해진다.
나도 아내와 그렇게 친해졌다.
하지만 시노자키 린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유혹도 마음이 내켜야 할 게 아닌가.
그렇다고 마냥 손을 놓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무리 싫어하는 상대라도······. 실력 말고 다른 장점 몇 가지 정도는 있겠지.’
상대가 싫다면, 좋아지게 만들면 된다.
본인의 마음이 내키게 하면 된다.
억지로 결론을 도출해낸 시노자키 린이 다시 고민에 빠진다.
그렇다면 어떻게?
아직 김덕성에 대해 아는 것도 별로 없는데.
그녀의 미간이 좁혀진다.
“역시 그 방법뿐인가······.”
내키지 않지만.
김덕성 본인을 제외하고 그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생도.
백금의 기사공주, 올리비아를 찾아가 자문을 구하는 수밖에 없다.
본인 또는 그의 룸메이트인 쿠로사와 유지에게 직접 물어볼 수는 없다.
거기까지는 아직 시노자키 린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으니까.
“큿······.”
시노자키 린의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그녀가 노리던 수석 입학 자리를 가져간 백금의 기사공주는 김덕성과는 다른 의미로 시노자키 린에게 악몽이자 지기 싫은 라이벌 같은 상대.
치욕적이다.
그녀의 얼굴이 수치로 붉게 물든다.
“명령, 전부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다.”
시노자키 린은 자신에게 최면을 걸 듯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올리비아가 머무르는 특별실은 그녀와 같은 층, 바로 맞은 편에 있다.
원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발길이 도저히 떨어지지 않는다.
‘가야 한다. 시노자키 린.’
그녀가 눈을 질끈 감고 발걸음을 옮긴다.
끼익.
방문을 연다.
맞은 편. 프랑스의 황녀답게 화려하게 장식된 방문이 보인다.
두근, 두근.
시노자키 린의 심장이 뛴다.
그녀가 초인종을 누른다.
[누구십니까?]차분한 목소리.
올리비아의 수행원이자 전속 메이드. 벨라의 음성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온다.
시노자키 린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한다.
“시노자키 린이다. 보나파르트 양을 만나러 왔다. 할 얘기가 있다.”
초인종이 꺼진다.
시간이 얼마간 흐른 뒤, 문이 열린다.
“아가씨께서 만남을 허락하셨습니다. 영광으로 아시길. 시노자키 양.”
자존심을 쿡쿡 찌르는 벨라의 멘트가 들린다.
시노자키 린이 입술을 깨물며 방 안으로 들어선다.
일본식으로 꾸며진 자신의 방과는 정 반대로, 전형적인 유럽 귀족식 인테리어로 꾸며진 내부.
달빛이 비치는 테라스.
백금발의 미소녀가 손에 하얀 본차이나 도자기 찻잔을 든 채 그녀를 똑바로 노려보고 있다.
올리비아의 싸늘한 목소리가 비수처럼 시노자키 린의 귓가를 난도질한다.
“그래서. 대체 무슨 급한 일 때문에 감히 이 저를 부르신 건가요? 이 한밤중에.”
너 미쳤냐?(삽화 有)
올리비아가 입술을 삐죽인다.
‘마음에 안 들어요.’
그녀는 시노자키 린을 결코 좋아할 수 없었다.
‘감히 이 저를 이긴 상대의 실력을 인정할 수 없다니. 오만함도 정도가 있죠!’
김덕성.
그가 아무리 우주에서 제일 멍청한 남자고, 예의도 법도도 모르는 무뢰한이라 하더라도.
프랑스의 황녀인 자신이 실력과 자격을 보증하는 남자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 이를테면 시노자키 린 따위가 그를 폄훼하는 걸 올리비아는 용납할 수 없었다.
‘이 학원에서 그를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저밖에 없어요.’
그건 김덕성을 인정한 프랑스의 황녀라는 그녀의 직위가, 나아가 보나파르트 황실의 권위가 무시당하는 일이다.
거기다가 시노자키 린과 김덕성이 도게자를 걸고 결투를 벌인 것도 결국 자신의 보증을 제3자가 인정하지 못해 일어난 일이 아닌가.
감히.
영웅의 책임감에 대해서는 1%도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몽매한 자들 때문에.
올리비아의 차가운 시선이 시노자키 린에게 내려꽂힌다.
“당신이 시노자키 가문의 아가씨만 아니었다면, 우리가 이렇게 마주 앉을 일도 없었을 거예요. 그러니까.”
올리비아가 손에 든 찻잔을 홀짝인다.
아무리 개인적인 감정이 안 좋다 하더라도, 그녀는 영웅 강국 일본을 대표하는 명문가의 아가씨.
프랑스의 황녀인 자신이 멋대로 문전박대한다면 국제적인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이 있다.
그녀가 늦은 시간인데도 시노자키 린을 만난 이유는 그것뿐.
“빨리 용건만 간단히 말해주시죠.”
달카닥.
그녀가 찻잔을 내려놓는다.
‘큿.’
시노자키 린이 입술을 깨문다.
예상은 했지만, 굴욕적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숙여야 한다.
시노자키 린이 올리비아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한다.
“······김덕성에 관한 얘기다.”
그의 이름을 들은 순간.
올리비아의 얼굴이 붉게 물든다.
“가가가갑자기 그 바보 얘기가 왜 나오는 거죠? 패배자인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요!!”
올리비아가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친다.
본차이나 찻잔을 잡은 그녀의 손이 파르르 떨린다.
아까의 여유로운 분위기는 완전히 사라진 모습.
시노자키 린의 눈동자가 가늘어진다.
“백금의 기사공주가 이렇게 동요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군.”
프랑스의 황녀답게 언제나 우아하고 고귀한 자태를 유지하던, 절벽 위의 꽃과 같은 올리비아다.
‘그 유명한 흑태자의 후계자, 백금의 기사공주를 이름만으로 동요하게 만드는 사내라.’
김덕성과 올리비아.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소문이라면 시노자키 린도 들어서 알고 있다.
사실 올리비아가 그의 전속 시녀를 자처한 거라느니, 둘이서 매일 밤 뜨거운 밀회를 즐긴다느니 하는 이야기들.
그러나 시노자키 린은 그런 시답잖은 풍문 따위는 믿지 않았다.
그녀가 아는 올리비아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저 모습을 보면······. 어쩌면 풍문이 사실일지도 모르겠어.’
누가 봐도 지금의 올리비아는 김덕성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진 모습처럼 보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온다는 평으로 유명한 냉혹한 황녀가 저렇게 과민 반응을 보인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시노자키 린의 눈동자가 가늘어진다.
“시, 시끄러워요!”
올리비아가 붉어진 표정으로 소리친다.
시노자키 린의 머릿속에 과거의 일이 떠오른다.
입학시험 전부터 세간에서는 올리비아와 시노자키 린을 세기의 라이벌로 묶었다.
일본 최고 명문가의 아가씨와 프랑스 황실의 공주.
일본 최고의 기재와 프랑스 최고의 천재.
극동의 사무라이와 서양의 공주기사.
빙결의 기프트와 염화의 기프트.
둘 다 미소녀에 타인에게 쌀쌀맞다는 점까지.
일본 언론은 시노자키 린과 올리비아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하는 기사를 연일 대서특필했다.
대중들은 양국을 대표하는 천재 미소녀들의 대결에 열광했다.
덕분에 올리비아와 시노자키 린의 대결은 프랑스와 일본, 양국의 자존심 싸움으로 번졌다.
시노자키 린은 아직도 입학시험 전날 내려온 이치로의 명령을 기억했다.
‘프랑스의 황녀한테 일본 최고 명문가의 힘을 보여줘라. 린.’
그렇게 세간의 이목이 쏠린 올리비아와의 대결.
하지만 결과는 올리비아의 압승, 그녀의 참패.
어린 시절 이후 처음 겪는 치욕적인 패배였다.
그때부터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올리비아에게만큼은 절대로 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시노자키 린의 시선이 올리비아를 향한다.
“네가 김덕성을 좋아한다는 세간의 소문이 사실이 아니란 말이지?”
“누누누누가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을! 제가 왜 그런 우주에서 제일가는 바보를 좋아한다는 거죠? 저는 고귀한 프랑스의 황녀라고요! 프랑스의 황녀가 서민과 사귀다니 마, 말도 안 되는 헛소리예요!!”
올리비아가 말을 더듬으며 소리친다.
그래,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이다.
프랑스의 황녀가 서민과 사귈 수는 없다.
그건 전속 시녀 약속과는 완전히 별개의 이야기다.
올리비아가 손부채로 뜨거워진 뺨을 식히면서 말한다.
“그래서, 한밤중에 갑자기 찾아와서 할 말이 고작 헛소문의 진위를 파악하는 거였나요? 시시하네요. 시노자키 양. 당신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그 정도야 이미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죠.”
말을 끝낸 올리비아가 시선을 돌리며 시노자키 린을 힐끔힐끔 바라본다.
그 모습을 본 시노자키 린은 확신했다.
“헛소문이라서 다행이군.”
시노자키 린의 입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당주님께서 내게 김덕성을 내 남자로 만들라는 명령을 내리셔서 말이야. 혹시나 그 헛소문대로 너와 김덕성이 연인 관계라면 곤란해질 뻔했는데, 아니라니까 다행이야.”
시노자키 린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진다.
김덕성이 좋냐, 싫냐고 물으면 아직은 싫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시노자키 린은 올리비아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설령 이성관계라 하더라도.
올리비아가 좋아하는 남자를 빼앗는다.
그것이야말로 당주의 명령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그녀가 올리비아에게 받은 치욕을 되돌려줄 기회다.
시노자키 린은 그렇게 생각했다.
“잠깐만요. 지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죠? 내 남자라뇨?!”
쾅!
올리비아가 테이블을 양손으로 내려친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파르르 떨린다.
새하얀 뺨이 파르르 떨린다.
올리비아의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인정할 수 없다.
‘가, 감히 고귀한 프랑스의 황녀를 전속 시녀로 삼은 주제에······! 보나파르트 가문의 비전까지 전수받은 주제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여자를 또 곁에 들인다는 사실을, 올리비아는 인정할 수 없다.
올리비아의 모습을 본 시노자키 린의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린의 가슴속에 묘한 쾌감이 솟아오른다.
고아 출신 양녀인 자신과는 다른, 태생적인 고귀함과 우아함을 유지하던 프랑스의 황녀가 짝사랑 상대를 빼앗긴 사춘기 소녀처럼 흔들리고 있다.
방금의 반응으로 시노자키 린은 확신했다.
만약 김덕성을 자신의 남자로 만든다면.
올리비아는 입학시험 때의 자신보다 더한 치욕을 느낄 거라고.
“잘 못 들었나? 보나파르트. 시노자키 당주님께서는 그가 마음에 든다고 하셨다. 데릴사위로 삼고 싶으시다고. 따라서 내게 김덕성을 내 남자로 만들 것을 지시하셨지.”
시노자키 린이 쐐기를 박는다.
올리비아가 씩씩대며 시노자키 린에게 삿대질한다.
“다, 당신 같은 여자 따위, 인정할 수 없어요!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
특히나 그 상대가 시노자키 린이라면 더욱.
그를 무시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내 남자라니?
말장난도 정도껏 해야 한다고 올리비아는 생각했다.
시노자키 린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는다.
“무슨 자격으로? 네가 김덕성의 연인이라도 되나?”
“그건······.”
올리비아의 말문이 막힌다.
연인 관계는 아니다.
하지만 시노자키 린이 그를 채가는 건 절대로 싫다.
모순된 감정의 격류에 올리비아의 뺨이 파르르 떨린다.
“아무 사이도 아니라면, 나와 그의 사이를 방해하지 말도록.”
“자격 있어요! 저는 그의 전속 시녀라고요! 전속 시녀로서, 모시는 분의 연인이 어떤 사람인지 검증할 의무가 있어요. 그래요! 전속 시녀의 당연한 의무예요!”
올리비아가 가슴 위에 손을 얹으며 소리친다.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다.
“호오? 그래? 나는 그럼 왜 안 되는 거지? 김덕성의 전속 시녀?”
시노자키 린의 눈썹이 꿈틀한다.
올리비아가 심호흡을 한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시노자키 린의 남색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한다.
“시노자키 양. 영웅의 책임감을 절대로 알지 못하는 당신 따위는······. 감히 이 제가 인정한 그의 실력과 자격을 인정하지 못한 당신 따위는, 그저 저에 대한 열등감으로만 똘똘 뭉쳐서 상관도 없는 그에게 시정잡배처럼 싸움을 거는 당신 따위는······.”
올리비아가 사형 선고를 내리듯 차갑게 단정한다.
“그의 곁에 함께할 자격이 없어요.”
“······여전히 멋대로군. 보나파르트.”
시노자키 린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는다.
역시 이 프랑스의 황녀는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태생적인 고귀함부터 오만한 성격까지 전부.
“당신 같은 최악의 여자는······. 그가 아니더라도 아무도 눈길 따위 주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이쯤에서 얌전히 포기하시죠. 시노자키 양.”
“싫다면?”
“전력으로 방해해드리죠. 그의 전속 시녀로서.”
올리비아와 린.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교차한다.
드르륵.
시노자키 린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이야기는 끝났다. 이만 가보지.”
“마음대로 하시죠.”
덜커덕.
시노자키 린이 나가고 문이 닫힌다.
테라스에 홀로 남은 올리비아가 입술을 깨문다.
“믿을 수 없어요······. 감히······. 도둑고양이 따위가······.”
그녀의 손이 파르르 떨린다.
창밖에서 불어온 차가운 봄바람이 올리비아의 몸을 감싼다.
*
어제 일찍 잔 덕분인가.
아침에 일어나니 컨디션이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와 있다.
이 세상에 온 뒤로 정말 오랜만에 맞는 상쾌한 아침.
가벼운 발걸음으로 주인공 놈과 함께 교실로 향한다.
아직 HR이 시작하기 전.
담임 교관이 없는 교실에는 생도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떠들고 있다.
“김, 오늘 수업도 잘 들어.”
쿠로사와 유지가 웃으며 인사를 건네고는 본인 자리인 창가 옆 맨 뒷자리로 돌아간다.
수업이라니.
오늘도 그 어지러운 이론 강의를 들을 생각만 하면 머리가 쪼개질 것 같다.
좋다가도 말았네.
역시 공부가 세상에서 제일 싫다.
속으로 한숨을 쉬며 내 자리로 향한다.
“저질, 최저, 최악, 쓰레기, 귀축.”
익숙한 매도와 함께 오늘도 한 칸 띄워지는 책상.
니시자와 에리가 이쪽을 노려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