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32)
그날의 노예빵 이후 줄곧 이런 상태다.
말을 말지.
그녀를 무시하며 가방에서 교과서를 꺼내던 그때.
“김덕성.”
익숙한 목소리가 근처에서 들린다.
고개를 든다.
거기에는 남색 포니테일 미소녀, 시노자키 린이 있다.
“뭔데?”
도게자고 뭐고 이미 다 끝난 일 아냐?
갑자기 왜 저래?
시노자키 린이 고개를 숙인다.
그녀가 양 주먹을 꽉 말아쥔다.
“너······.”
그녀가 번쩍 고개를 쳐든다.
시노자키 린의 새하얀 뺨이 붉게 물든다.
그녀가 나를 삿대질하며 외친다.
“내 남자가 돼라!”
“뭐?”
얘가 지금 뭐라고 말한 거야?
내 남자?
인상이 구겨진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온다.
“야, 린.”
그녀를 바라보며 말한다.
“너 미쳤냐?”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다고
“뭐, 뭐라고······?”
린의 얼굴이 굳는다.
그녀의 남색 눈동자가 떨린다.
린이 주먹을 꽉 말아쥔다.
“지금 내 고, 고백을 거절한 건가? 김덕성······?”
방금 그게 고백이었다고?
씨발. 돌겠네 진짜.
어떻게 빙의한 이후 하루도 평화롭게 넘어가는 날이 없지?
관자놀이를 짓누른다.
벌써 두통이 올라오려고 한다.
내 두통을 책임지는 건 츤데레 하나로 족하다.
그런데 이제는 일본도 아가씨까지.
미치겠네.
아침부터 이게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야.
“그래. 거절한 거야.”
굳이 그걸 말해야 아냐?
대답을 들은 린이 입술을 깨문다.
충격받은 표정.
아니 네가 대체 왜 충격받는데?
빡쳐야 하는 건 나 아닌가?
어이가 없네. 어이가.
지금 설마 내가 그딴 고백을 받아줄 거라고 생각한 건가?
적반하장이 따로 없다.
‘공개 고백이 왜 엿 같은 건지 이제야 알겠군.’
대학생 시절, 경제학개론 조별과제 PPT 마지막에 공개 고백 슬라이드를 넣고 조원 후배한테 고백한 조장 복학생 선배가 생각난다.
공개 고백을 받은 조원 후배는 곧바로 울며 강의실을 뛰쳐나갔고, 강의실은 웃음바다로 변했었지.
그때는 웃겼는데, 당사자가 되니 그 후배가 왜 강의실을 나갔는지 알 것 같다.
미안하다. 그때 네 심정도 모르고 웃어서.
‘미치겠군.’
이게 그 고백해서 혼내주기인가 뭔가 그거냐?
쾅.
시노자키 린이 내 책상을 양손으로 내리친다.
아이 깜짝이야.
린이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대체 내 어디가 부족해서 거절한 거지? 당장 말해라. 김덕성. 나는 일본 최고 명문가 시노자키 가문의 영애다. 돈도 권력도 사회적 지위도 충분. 외모도 이만하면 미, 미인이고······. 가, 가슴 사이즈도 기사공주에게 밀리지 않는다고 자신한다.”
린이 본인의 가슴 위에 손을 올린다.
하얀 와이셔츠 위로 자기주장을 당당하게 하는 커다란 흉부가 흔들린다.
아니 그런데 대사가 왜 이래.
본인 입으로 자기가 미인? 가슴 사이즈는 왜 들먹여? 진짜 환장하겠네.
“거기에 처녀고, 연애 경험도 없다. 네가 처, 첫 상대란 말이다! 혹시 여자력이 부족해서인가? 그런 건가?”
뭐? 처녀? 여자력?
내 청각을 의심하게 하는 대사들이 머리를 울린다.
두통을 넘어 현기증이 도질 것 같다.
분노가 임계점을 넘으면 오히려 머리가 차가워진다는 말처럼, 온몸이 차갑게 식는 기분이다.
대체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다고 상쾌한 아침부터 이따위 청각 고문을 당해야 하지?
아, 그래.
불효의 죄를 지었구나.
어머니, 아버지. 라노벨 씹덕질이나 해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방금 김 군이 시노자키 양의 고백을 거절한 거야?”
“그 삭풍의 사무라이가 한 고백을 단칼에 거절하다니 세상에······!”
“시노자키 양이 불쌍해······.”
“김 군, 귀축이라며? 밤마다 기사공주님한테 메이드 복장을 입히고 목줄을 채운 모습으로 교정을 산책한다던데?”
“시노자키 양도 김 군한테 당한 거야? 도게자부터 사실 이상했었는데······.”
주변 생도들의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라노벨에서 흔히 나오는 엑스트라들 사이의 만담.
그런데 그게 현실이 되고, 지칭하는 대상이 내가 되니 미쳐버릴 것 같다.
‘이딴 걸 재밌다고 봤다니 내가 미쳤지.’
뭐? 목줄? 산책?
이것들이 돌았나.
매일매일 질리지도 않고 새로운 좆같음을 선사하는 좆토피아 같으니.
“이런 씨······.”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이성의 끈이 끊어지기 직전이다.
입에서 조건반사적으로 한국어 욕이 튀어나오려던 그 순간.
“추하네요. 시노자키 양.”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시선을 돌린다.
거기에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린을 응시하는 백금발의 미소녀, 올리비아가 있다.
“이미 거절당했는데도 집착하는 모습. 품위라고는 정말이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추태군요. 극동의 명문가인 시노자키 가문의 이름, 삭풍의 사무라이라는 당신의 이명이 울겠어요. 시노자키 양.”
올리비아의 싸늘한 목소리가 교실을 울린다.
찬물을 끼얹은 듯 정적이 흐르는 교실.
시노자키 린의 얼굴이 차갑게 굳는다.
캐릭터 설정에 따르면 올리비아와 린은 서로 라이벌이자 견원지간에 가까운 앙숙.
둘 모두 서로의 존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올리비아가 나선 건 그거 때문이겠지.
이제 속이 좀 풀리는 느낌이다.
그래, 이거지.
장하다! 츤데레!
오늘만큼 올리비아가 예뻐 보인 적은 없었다.
이런 게 이독제독이지.
“그 입, 다물어라. 보나파르트. 제3자인 네가 참견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린이 올리비아를 바라보며 으르렁댄다.
시노자키 가문의 성씨는 그녀에게 있어서 애증의 존재.
그걸 타인인 올리비아가 들먹거렸으니, 스위치가 눌린 거다.
“어머, 제3자라뇨. 시노자키 양. 어제도 말씀드린 거 같은데요?”
착.
올리비아가 가슴 위에 손을 올린다.
이거 좀 불안한데?
“저는 그의 전속 시녀. 당연히 당신 같은 어중이떠중이들의 접근을 차단할 의무가 있답니다.”
그래.
이럴 줄 알았다.
말 한마디 한마디를 들을 때마다 피를 토하고 싶어진다.
잠시나마 올리비아를 얕봤던 내가 미친놈이지.
대체 이 미친 세상에 왜 기대 따위를 했을까.
기대를 안 했다면 배신도 없었을 텐데.
빌어먹을.
“나왔다! 전속 시녀 선언!”
“소문이 사실이었던 거야?”
“그럼 밤마다 메이드복을 입힌다는 소문도?”
“기사공주님······. 조금 쇼크······.”
“김 군. 완전 귀축!”
“저질! 색마! 쓰레기!”
옆자리에 앉은 니시자와 에리의 매도까지 섞여 난장판이다.
속이 울렁거린다.
그라운드 제로에서 전속 시녀 운운했을 때는 아무도 없기라도 했지.
생도들이 득시글거리는 교실 한복판에서 전속 시녀 선언?
진짜 미친 건가?
츤데레의 사고방식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쪽팔려 죽겠네.’
돌아가고 싶다.
평소에도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많이 하지만, 오늘만큼 귀환이 간절한 적은 없었다.
진짜 역대급 역겨움이다.
수치로 얼굴이 화끈거린다.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참을 수가 없다.
“둘 다, 아니 여기 있는 놈들 전부 아가리 좀 닥쳐. 머리 아프고 존나 쪽팔리니까.”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교실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진다.
시노자키 린도, 올리비아도, 니시자와 에리도, 다른 생도들도 전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닫는다.
모든 생도의 시선이 내게 쏠린다.
그래, 좀 낫네.
고개를 든다.
아직 내 앞에 서 있는 시노자키 린이 보인다.
“야, 린.”
“불렀나?”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날 좋아할 이유 같은 건 하나도 없거든? 나도 너 같이 싸가지가 바가지인 여자는 줘도 안 해.”
빈말이 아니고 진심으로 마음에 안 든다.
옆자리에서 매번 매도 퍼레이드를 펼치는 니시자와 에리 정도는 아니지만, 그녀가 나에게 한 일을 생각하면 도저히 좋아할 수가 없다.
린의 표정이 굳는다.
그녀가 입술을 깨문다.
“갑자기 찾아와서 실력 인정 못 하겠답시고 싸움 걸고, 실습 훈련에서 도발이나 날려놓고, 그마저도 패배해서 도게자 해놓고는 이제 와서 사실 날 좋아했다? 네가 생각해도 앞뒤가 좀 안 맞는 거 같지 않냐?”
“그건······.”
린의 말문이 막힌다.
하긴 본인이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상황이겠지.
그런데도 그녀가 내게 집착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그런다고 내가 시노자키 가문에 데릴사위로 들어가서 성 갈아버릴 일은 절대 없으니까. 김칫국 좀 그만 마셔라. 체하기 전에. 너랑 결혼이라니, 상상만 해도 끔찍하니까.”
시노자키 이치로.
그 음흉한 아저씨의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겠지.
그때 그 자리에서 거절했다고 그 아저씨가 순순히 물러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구원받은 뒤, 상냥함을 깨달은 이치로라면 모를까 지금의 이치로는 악역에 가까운 인물이니까.
그런데 이따위 역겨운 수단을 동원해서 내 뒤통수를 칠 줄이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좆같네.’
딱 봐도 라노벨스럽게 ‘김덕성을 유혹해서 포섭해라.’ 같은 역겨운 명령이나 내렸겠지.
빌어먹을 애비 같으니.
역시 나중에 언젠가는 한번 손봐줄 필요가 있다.
린이건 그 애비건.
“큿······.”
린이 일본 애니메이션에나 나올 법한 역한 추임새를 넣는다.
끝까지 빡치게 하네.
“알았으면 자리로 돌아가.”
원래 이런 상황은 선생이 등판해서 정리하는 게 국룰인데.
마유즈미 이 빌어먹을 선생은 오늘따라 왜 이렇게 늦어.
그때.
“······보나파르트와 벚꽃 축제에 간다고 들었다.”
린의 목소리가 들린다.
벚꽃 축제?
린의 귓가에까지 소문이 들어간 걸 보면, 한서진이 아주 유능하게 일처리를 잘 했나 보다.
이 미친 세상에서 가장 유능한 정상인은 역시 우리 자랑스러운 조국의 국정원 요원, 한서진뿐이다.
자랑스럽다, 대한민국!
“그래서?”
“나, 나도 같이 가겠다!”
린이 가슴 위에 손을 올리며 말한다.
같이 간다고?
방금 그렇게 염병했는데도 얘는 질리지도 않나?
참 대단하다.
머리를 좀 식힌다.
그녀에 대한 감정과는 별개로, 벚꽃 축제 참전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노예가 많으면 많아질수록, 내가 할 일은 줄어드니까.
문제가 있다면.
“자, 잠깐만요! 지금 무슨 파렴치한 소리를!!”
“주인님의 일이다. 전속 시녀는 좀 빠져줬으면 좋겠다만?”
올리비아와 린의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는 것.
기름과 물 같은 두 인물을 통제하는 건 엿같이 피곤한 일이다.
지금도 저렇게 엿 같은 말을 내뱉으며 내 앞에서 파멸적인 말싸움을 벌이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놈의 전속 시녀 헛소리는 좀 그만하면 안 되나?
“시끄러우니까 둘 다 입 닫아.”
귀신처럼 입을 닫는 린과 올리비아.
꼭 이럴 때만 말을 잘 들어요.
“야, 린. 너, 내가 오지 말라고 해도 올 거지?”
“그건······. 아, 아니다.”
말을 더듬으며 시선을 피하는 린.
딱 봐도 구라다.
당주의 명령은 그녀에게 있어서 지상과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달성해야 할 목표기에, 내가 오지 말라고 해도 올 게 분명하다.
머리가 아프다.
대체 왜 이런 좆같은 일만 자꾸 벌어지는 건지.
역시 주인공 놈이 모든 일의 원흉이다.
그때 얌전히 올리비아의 알몸만 봤으면 나도 좋고 본인도 좋고 올리비아도 좋고 린도 좋고 다 좋은 행복한 세상이 도래했을 텐데.
개 같은 놈.
“하루도 안 가서 들킬 구라는 치지 마라. 린. 씨발. 진짜 뒤지기 싫으면.”
말을 곱게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린이 입술을 깨문다.
“큿······.”
“그 지랄도 하지 말고.”
그녀가 주먹을 말아쥔다.
아무튼,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지금 당장 협회장인 이치로를 손봐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왕 이렇게 된 거 린을 노예처럼 굴려야 한다.
“그럴 거면 그냥 와라. 어차피 그냥 오나 날 스토킹하나 똑같잖아.”
“잠깐만요! 당신, 지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이번에는 올리비아가 반발한다.
예상했던 반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