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33)
그녀의 말허리를 자르며 말한다.
“대신 이시하라랑 쿠로사와도 부를 테니까 알아서 해.”
어차피 부르려던 놈들이다.
린이야 어차피 내가 안 불러도 스토킹할 인간이고.
이왕 이렇게 된 거, 린이랑 연관 있는 두 놈에게 폭탄 처리반을 맡겨야겠다.
노예 어셈블이다.
“······좋다.”
린이 비장한 목소리로 답하며 올리비아를 노려본다.
그녀의 시선을 받은 올리비아가 팔짱을 낀 채 쏘아붙인다.
“당신 같은 우주 제일의 멍청이가 내린 아둔한 결정 따위, 절대 단 1%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죠. 좋아요. 저는 관대하니까 자비롭게 당신의 멍청한 결단을 받아들이죠. 영광으로 아시라구요!”
아 진짜.
얘는 끝까지 말을 곱게 하는 법이 없네.
“둘 다 알았으면 각자 자리로 꺼져. 해산해. 내 머리 그만 좀 괴롭히고.”
손을 휘저으며 축객령을 내린다.
린과 올리비아가 본인의 자리로 돌아가던 그때.
드르륵.
교실 앞쪽 미닫이 문이 열리며 마유즈미 선생이 등장한다.
생도들의 웅성거림이 순식간에 사그라든다.
마유즈미 선생이 양쪽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친다.
“생도 여러분! 안녕하세요! 선생님이에요! 오늘도 HR 시작할게요!”
진짜 빨리도 온다.
지금 읽씹한 거야?
도쿄도.
시노자키 저택 최심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고요한 정적이 감도는 다다미방.
자리에 앉은 시노자키 이치로의 우울한 눈동자가 정좌한 채 고개를 숙인 시노자키 린을 훑는다.
“성과는?”
이치로의 차가운 목소리가 린의 귓가를 찌른다.
‘큿.’
린이 입술을 깨문다.
오늘 있던 일이 그녀의 머릿속에 재생된다.
용기 내서 고백한 자리에서 돌아온 건 차가운 거절.
본인의 고백이 거절당할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은 린이었기에 받은 충격은 곱절이었다.
먼저 고백부터 하고 보는 게 최선이라던 인터넷 연애 팁글을 박살 내고 싶은 심정.
‘대체 내 어디가 어때서······!’
고백 거절을 이해할 수 없다.
그의 차가운 태도도 이해할 수 없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빠지지 않는 신붓감이라 자신하는 린이다.
‘역시 그 도둑고양이가······!’
린의 머릿속에 올리비아의 모습이 떠오른다.
죽어도 다시는 지기 싫은, 프랑스의 황녀 올리비아.
그녀의 곁에 서 있는 김덕성의 모습도 떠오른다.
처음에는 그저 막연하게 올리비아가 좋아하는 남자를 빼앗아서 입학시험의 치욕을 복수하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오늘, 교실에서 또 다른 치욕을 겪은 순간, 그녀의 마음속에 오기의 씨앗이 발아했다.
반드시 갖고 말겠다는 오기가.
언제나 2인자, 만년 2등으로 있을 수는 없다.
교복 치마를 붙잡은 린의 손이 파르르 떨린다.
“교제에는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린이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든다.
“이노카시라 공원 벚꽃 축제 동행은 허락받았습니다.”
이치로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걸린다.
“그럭저럭 납득할 만한 성과로군.”
“감사합니다. 당주님.”
린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인다.
슈오우 영웅 학원에 입학한 이후 처음으로 듣는 당주의 칭찬.
묘하게 들뜨는 기분을 느끼던 린의 표정이 굳는다.
벚꽃 축제에 같이 가는 것까지는 좋다.
“하지만······. 저는 도시락을 만들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서······.”
그러나 어려서부터 인형 대신 일본도가 더 익숙했던 린에게 있어 요리는 생소한 영역.
당연히 도시락을 만들 수 있을 리 없다.
직접 만든 도시락이야말로 여자력의 핵심이라는 걸 생각해볼 때, 이는 심각한 문제.
자칫하다가는 만능 메이드가 전속으로 붙은 프랑스의 황녀에게 뒤처질지 모른다.
생각만 해도 아찔한 상황에 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가문 전속 요리사를 네게 붙여주겠다.”
그녀의 귓가에 이치로의 목소리가 울린다.
“일본 최고의 도시락을 만들 수 있도록 해주지. 그리고.”
린이 고개를 든다.
“모형 게이트 실습 뒤에 예정된 임간학교에서 너와 김덕성이 페어로 맺어질 수 있도록 조치하겠다.”
임간학교.
일 년에 한 번, 슈오우 영웅 학원 1학년을 대상으로 홋카이도의 침식지, 수해(樹海)에서 일주일 동안 치러지는 야외 합숙.
원래 목적은 이계종이 야생 상태로 돌아다니는 침식지에서 일주일 동안 생존하라는 서바이벌 훈련이지만, 실상은 그냥 생도들의 캠핑이나 다름없는 이벤트다.
임간학교의 조편성은 2인 1조.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최대한 남자 생도는 남자 생도끼리, 여자 생도는 여자 생도끼리 조를 짜는 게 원칙이다.
그런데 지금 이치로는 대놓고 원칙을 어기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정말······. 입니까?”
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되묻는다.
“그래. 아무리 학원이 협회와 상관없는 기관이라 하더라도, 협회의 힘으로 압박한다면 이 정도 지원이야 못할 것도 없지.”
일본 영웅 협회는 영웅 강국 일본을 지탱하는 핵심 권력 단체.
일본의 최고 권력자인 총리조차 협회장 이치로를 함부로 대할 수 없다.
막강한 권력을 사용한다면 조 편성 변경 정도는 어떻게든 가능하다.
물론 일본의 다른 영웅 학원과는 다르게 슈오우 학원의 이사장이 백색 여제 세이라인 이상 한 번은 몰라도, 두 번 같은 압력을 넣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상관없다.
“일주일. 무려 일주일의 시간을 그와 단둘이서 보내게 되는 것이다. 임간학교에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를 함락시켜라.”
일주일 동안 피 끓는 십 대 청춘 소년 소녀가 같은 공간에 있으면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터.
그 절호의 기회를 위해서라면, 단 한 번의 찬스를 사용하기에는 충분하다.
“일본을 대표하는 시노자키의 딸이 프랑스의 황녀에게 두 번 지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 반드시 이겨서 승리를 쟁취해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치로의 명령이 비수처럼 린에게 꽂힌다.
“······알겠습니다. 당주님.”
린이 이를 악물며 답한다.
당주의 명령을 좋아한 적은 없다.
언제나 무리한 목표를 강요하는 형식의 명령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만큼은, 당주의 명령에 기꺼운 마음으로 복종할 수 있다.
올리비아에게 지기 싫다는 마음만큼은 같으니까.
“반드시 승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결연한 목소리로 답하는 린의 모습에 이치로가 옅게 웃는다.
린이 이렇게 열정적으로 지시에 임하는 모습은 오랜만이다.
이치로가 탁상 위에 놓인 우롱차를 홀짝댄다.
“······당주님. 여쭤볼 게 하나 있습니다.”
“뭐지?”
달카닥.
이치로가 우롱차 잔을 내려놓는다.
평소에 질문을 거의 하지 않던 린이 던진 질문이다.
궁금증이 도질 수밖에 없다.
린이 머뭇거리면서 고개를 숙이며 천천히 말한다.
“호, 혹시······. 김칫국이 어떤 음식인지 아십니까?”
“김칫국?”
이치로의 눈썹이 꿈틀한다.
“처음 들어보는 음식이다만······.”
김치라면 이치로도 알고 있다.
이웃나라 한국의 유명한 음식.
일본은 한식이 은근히 인기 있는 나라이니만큼, 이치로도 호떡, 비빔밥, 갈비 같은 기본적인 한국 요리 몇 가지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김칫국은 처음 들어보는 요리.
이치로의 눈동자가 가늘어진다.
“혹시 김덕성과 관련된 질문이냐?”
“예, 그렇습니다.”
린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는 아직도 김덕성이 본인에게 왜 ‘김칫국 좀 그만 마셔라’라는 말을 했는지 알지 못했다.
린의 대답에 이치로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김덕성.
그를 시노자키 가문의 데릴사위로 삼기 위해서는 사소한 정보도 놓칠 수 없다.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후루룩.
이치로가 우롱차를 한 모금 더 마신다.
그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생각이 문득 떠오른다.
“······혹시 김칫국이라는 표현이 김치찌개를 뜻하는 건 아니더냐? 김덕성이 김치찌개라는 한국 음식을 좋아하는 걸지도 모르지.”
“김치찌개······. 알겠습니다.”
린이 고개를 끄덕인다.
“다른 질문은 없나?”
“없습니다.”
“벚꽃 축제. 좋은 성과가 있길 기대하지.”
“진심전력을 다하겠습니다.”
공손하게 고개를 숙인 린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난다.
*
슈오우 영웅 학원.
가정실습실.
호텔 주방 뺨칠 정도로 다양한 요리기구와 재료가 비치되어있는 넓은 실내에서, 하얀 앞치마를 두른 백금발의 미소녀, 올리비아가 손에 부엌칼을 든 채 씩씩대고 있다.
“으으, 정말······. 최악! 최저! 은하에서 제일 멍청한 남자!”
탁.
도마 위에 놓인 노란 단무지가 잘린다.
올리비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다.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멍청이!”
탁.
단무지가 또 토막 난다.
“다, 다른 사람이랑 같이 가다니, 정말 말도 안 돼요! 야, 약속해놓고는! 손가락까지 걸고 도장도 복사도 사인도 해놓고는······!! 감히······. 감히······.”
올리비아의 손이 파르르 떨린다.
오늘 있던 일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재생된다.
모처럼 기대했던 벚꽃 나들이다.
꼭 둘이서 가자고 손가락도 걸고, 사인에 복사까지 했다.
그런데 하필 그 자리에 다른 사람도 아닌 시노자키 린이 함께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용서할 수 없어요······!!”
타타닥.
올리비아의 분노 서린 칼놀림에 단무지가 엉망진창으로 조각난다.
“황녀님. 그렇게 자르시면 단무지를 김밥에 사용할 수 없습니다.”
올리비아 옆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린다.
단정한 메이드복을 입은 벨라가 위생 장갑을 낀 채 시금치를 무치고 있다.
“그건, 그렇지만······.”
올리비아가 입술을 삐죽이며 엉망이 된 단무지를 버리고 새로운 단무지 토막을 꺼낸다.
그녀 옆의 음식물 쓰레기통에는 이미 조각난 단무지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단무지에 화풀이한 결과다.
“혹시 주인님의 주인님과 단둘이 놀러 나갈 계획이 무산돼서 화가 나신 겁니까?”
“아, 아니에요! 절대로! 누, 누가 그런 멍청이와 단둘이 있고 싶어한다구요!? 시노자키, 그 도둑고양이가 갑자기 끼어든 게 마음에 안 들 뿐이에요!”
시노자키 린.
원래 올리비아는 그녀에게 그렇게 큰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다.
세간에서는 세기의 라이벌처럼 자신과 시노자키 린을 엮어댔지만, 올리비아는 그런 뜬소문을 신경 쓰는 성격이 아니었다.
입학시험에서 그녀의 상당한 역량에 감탄한 적은 있었지만, 그뿐.
그녀가 만약 김덕성에게 시비를 걸지 않았더라면, 그날 밤에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올리비아는 시노자키 린에게 앞으로도 계속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올리비아에게 있어 이 학원의 모든 생도, 아니 이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영웅은 책임감을 잊은 멍청이에 불과하니까.
예외가 있다면 그 남자 정도.
“으으으으! 아무튼, 마음에 안 들어요. 전부.”
“시노자키 양이 신경 쓰이는 거군요.”
“그래요! 그 도둑고양이는 정말 행동거지가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안 들어요. 최악, 최저!”
“시노자키 양의 콧대를 누르기 위해서는 완벽한 도시락이 필요합니다.”
벨라의 말에 올리비아가 부엌칼을 멈춘다.
“어, 어떤 도시락이요?”
“정보 조사에 의하면 김밥 다음으로 한국의 도시락에서 인기 있는 메뉴는 유부초밥. 후식은 방울토마토와 파인애플, 키위, 딸기라고 합니다.”
“이미 전부 산 거 아니었어요?”
올리비아의 시선이 탁자 위에 놓인 유부초밥 재료와 각종 과일에 닿는다.
“맞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절차가 빠져 있습니다.”
벨라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한다.
“김밥에 오이 첨가 여부입니다.”
“오이요?”
“정보에 따르면, 김밥의 오이는 호불호가 강하게 갈리는 식재료라고 합니다. 주인님의 주인님께서 오이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여부를 알 수 없기에 구매하였으나, 결전의 때인 지금. 주인님의 주인님의 기호를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호······. 그, 그럼 제가 직접 그 바보한테 물어봐야 하나요?”
“그렇습니다.”
벨라가 옅게 웃으며 올리비아에게 무언의 재촉을 보낸다.
올리비아가 얼굴을 붉히며 부엌칼을 내려놓고 휴대폰을 든다.
“어, 어쩔 수 없죠. 이, 이번만이니까요······!! 다음부터는 절대 먼저 연락 안 할 거예요!”
*
독서부실에서 카스미 선배와 함께하는 복습이 끝난 후.
선배가 사준 카레빵을 입에 물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
우웅.
휴대폰이 울린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낸다.
[이봐요 당신]올리비아가 보낸 메시지다.
무슨 일이지?
[왜?] [오이 김밥 좋아하세요?]정말 뜬금없는 질문.
갑자기 프랑스인이 오이 김밥은 왜 물어봐?
의문도 잠시.
질문이 이상한 건 사실이지만, 못 해줄 대답은 아니다.
무엇보다.
[아니 싫어]나는 김밥에 오이를 넣는 걸 제일 싫어한다.
민트 초코와 오이 김밥, 파인애플 피자는 미각을 혼란시키는 악마의 음식이다.
메시지의 1이 사라진다.
답장이 없다.
지금 읽씹한 거야?
“그래, 네 맘대로 해라.”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남은 카레빵도 입에 욱여넣는다.
교정의 흩날리는 벚꽃잎이 시야에 들어온다.
벚꽃 축제.
얼마 안 남았다.
누가 더 낫냐고?
토요일.
수업 없는 휴일이기에, 원래라면 기숙사에 틀어박혀 종일 잠만 자도 모자란 날.
하지만 벚꽃 축제, 아니 흑막 조직 뉴 월드 리그 때문에 나는 불가피하게 휴일에도 쉬지 못하고 무거운 몸을 움직여야 했다.
슈오우 영웅 학원 주차장.
교문 바로 옆에 있는 넓은 공터에는 교직원들의 번쩍거리는 고급 세단부터 생도들이 타는 스쿠터까지 수많은 탈것이 주차되어 있다.
그 가운데, 중형버스가 한 대 있다.
군인 시절, 외부 종교활동을 나갈 때 자주 탔던 익숙한 외형의 중형버스 앞.
검은 정장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잿빛 단발 머리의 미녀, 한서진이 서 있다.
“오셨습니까? 김덕성 님.”
나를 발견한 그녀가 공손하게 허리를 90도로 숙인다.
원래라면 몰래 따라오게 하려고 했지만, 시노자키 린까지 끼어들며 판이 커진 이상 어쩔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