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380)
#378
어이없는 이야기
머리가 아프다.
이제는 익숙한 두통과 함께 의식이 천천히 돌아왔다.
자연스럽게 기억도 돌아왔다.
메사이어를 죽이고 쓰러졌었지.
하지만 이쯤 되면 파트너하고 부르며 들려왔어야 할 흑태자의 목소리는 이제 없다.
괜히 마음이 울적해졌다.
염병.
그래도 이대로 계속 누워만 있을 수는 없다.
눈을 떴다.
삑, 삑.
의료기기 소리와 함께 하얀 병실의 천장이 보였다.
하얀 병실용 이불이 덮인 다리에는 올리비아가 기대서 잠든 모습이 보였다.
또 밤새 간호한 건가.
창밖 저 멀리에는 재건 중인 도쿄의 모습이 보였다.
전부 끝났다.
살아남았다.
그런 안도감이 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서랍장에 곱게 기대진 마검 듀랜달이 보였다.
“흑태자······.”
그의 이름을 나직하게 불렀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정말 사라진 건가?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괜히 울컥했다.
“당신······. 일어났어요?”
내 움직임을 감지한 모양인지, 올리비아가 부스스한 얼굴로 일어나서 내게 말했다.
그녀의 말에 나는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어······.”
목이 잠겼는지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올리비아의 하얀 얼굴이 새빨개졌다.
“흐앗?! 보, 보지 마세요! 이 바보! 멍청이! 해삼! 멍게! 말미잘!”
올리비아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면서 눈을 질끈 감으면서 소리쳤다.
아무래도 자고 막 일어난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모양.
나는 고개를 돌리면서 한숨을 쉬었다.
“뭘 보지 말라는 건지······.”
“레, 레이디의 맨얼굴을 보다니! 정말 당신은 무드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우주 제일 바보가 틀림없······.”
“맨얼굴도 예쁜데.”
내 말을 들은 올리비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뱅글뱅글 돌아갔다.
푸쉬식.
올리비아의 머리 위로 김이 피어올랐다.
누가 라노벨 세상 아니랄까 봐 연출 봐라, 진짜.
“······그, 그런 말은 지금 하면 반칙이잖아요! 이 바보! 아, 아무튼! 고개 돌리라고요!”
퍽.
올리비아가 품에 안고 있던 쿠션을 내게 던졌다.
나는 그녀가 던진 쿠션을 받아서 안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좀 그냥 넘어가면 어디 덧나나.
그렇게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돼, 됐어요. 이제 봐도 괜찮아요.”
올리비아의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이미 완전 무장을 마친 올리비아의 모습이 있었다.
뽀송뽀송하면서 하얀 피부, 파란 눈동자를 지닌 백금발의 미녀가 얼굴을 붉힌 채로 한쪽 손을 들어 머리를 빙빙 꼬고 있었다.
“내가 얼마 만에 일어났지?”
“일주일이요······. 그동안 한 명씩 교대로 당신의 간호를 하고 있었어요.”
하루에 한 명씩.
올리비아가 덧붙였다.
그 이후 그녀가 내가 쓰러진 직후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말해주기 시작했다.
나와 메사이어가 도쿄만 상공의 유적에서 벌인 결전, 이른바 최후의 전쟁(Armageddon)의 사후 수습 때문에 히로인들은 바쁘다고 했다.
메사이어에게 지배당하던 소련에서는 쿠데타가 일어나 지도부가 바뀌었고, 리그와 그의 부역자들은 전범죄로 기소되어 국제 형사 재판소에서 재판받는 중이라고 했다.
메사이어의 테러에 가담한 소련은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나와 대한민국, 그리고 일본에게 뱉어내야 했다.
그렇게 소련이 휘청이는 사이 중국이 제2세계 공산진영의 지도자 자리를 노리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최강의 영웅 후보생을 가리는 토너먼트 대회인 그레이트 게임의 개최가 취소됐다.
그건 최강의 영웅 후보생이 이미 탄생했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는데.
“그리고 당신의 뉴 크라운즈 등극이 확정됐어요.”
그 최강의 영웅 후보생이 나였다.
뉴 크라운즈.
파이브 크라운즈를 대신해 세계를 지키는 영웅에게 부여되는 직위.
세계 영웅 협회에서 만장일치로 뉴 크라운즈의 지위를 부여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내가 얻은 새로운 이명 이야기도 있었다.
구세주.
세간에서는 나를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씨발, 쪽팔리게 구세주가 뭐냐.
차라리 검은 귀축이 낫다.
게다가 올리비아의 말에 따르면 최후의 전쟁에서 메사이어를 쓰러뜨린 날은 이미 전 세계 공통 공휴일 겸 기념일로 지정됐고, 전 세계에 태극기가 게양됐다고 한다.
태극기 게양?
미친 거 아니야?
“그렇게 됐어요.”
“······.”
올리비아의 말을 전부 들은 나는 할 말을 잊었다.
빌어먹을 라노벨 세상 같으니.
엔딩 이후에도 이렇게 엿을 먹일 줄은 몰랐다.
원작 소설이야 그냥 쿠로사와 유지가 세계를 구원했고, 학원 졸업 이후 쿠사나기랑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하는 해피 엔딩으로 끝났지만 여기는 현실.
메사이어를 잡는다고 해서 끝나는 건 없었다.
앞으로 계속 살아가야 했다.
이 염병할 라노벨 세상에서.
전 세계 태극기 게양이라니, 내가 기절한 덕분에 그 꼴을 안 봐서 얼마나 다행일지 몰랐다.
“······다행이에요. 일어나서.”
올리비아가 내 손을 잡았다.
그녀의 따스한 손길이 느껴졌다.
괜히 멋쩍은 기분.
나는 올리비아의 얼굴을 보면서 그녀와 손깍지를 꼈다.
올리비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의 얼굴을 보자 흑태자가 남긴 말이 떠올랐다.
올리비아를 잘 부탁한다고 한 그 말이.
“가, 갑자기, 이, 이렇게 다가오는 게 어디 있어요?! 반칙이에요! 반칙!”
올리비아가 뺨을 부풀리면서 내게 소리쳤다.
나는 그녀의 손 깍지를 풀면서 고개를 돌렸다.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그렇게 얼마간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올리비아가 빨개진 얼굴로 나를 힐끗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예요? 당신이 일어나면 해야 할 밀린 행사가 많은데······. 개선 퍼레이드랑 뉴 크라운즈 대관식이랑······.”
올리비아가 손가락을 꼽으면서 말했다.
행사?
뭔 그렇게 쓸데없는 행사가 많은지.
나는 링겔을 뽑아낸 뒤에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 당신!”
올리비아가 다급한 목소리로 내 곁에 붙으면서 나를 부축했다.
“갑자기 일어나면 어떡해요?! 으으으으으으으으! 이 우주 제일 바보 같으니!”
올리비아가 볼을 부풀리면서 소리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서랍장에 기댄 듀랜달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듀랜달이 맑은 소리와 함께 뽑혀 나왔다.
흑태자의 목소리는 여전히 들리지 않았다.
“애들 소집해. 행사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어.”
듀랜달의 칼날을 보면서 내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자, 올리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듀랜달을 다시 검집에 꽂았다.
이제는······.
보내줘야 할 때였다.
괜히 눈물만 나오네.
엿 같게.
*
프랑스 파리.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
프랑스의 이름을 빛낸 위인들과 프랑스를 위해 싸우다 죽어간 영웅들이 묻히는 프랑스 파리 최대의 공동묘지.
내가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내 전용기를 타고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이었다.
바로 여기에 흑태자의 무덤이 있었다.
공식적으로 흑태자는 10년 전 프랑스를 넘어 전 유럽을 멸망의 위기로 몰아넣은 오메가 랭크 이계종 파프니르 토벌전에서 전사했다.
따라서 공식 기록에서 흑태자는 이미 사망한 인물이었다.
황족이자 파이브 크라운즈의 일원이었기에 그의 묘비는 제법 컸고, 앞에는 동상까지 있었다.
나는 검은 양복을 입은 채로 그의 묘지 앞에 섰다.
내 뒤로는 나와 함께 프랑스로 온 히로인들과 지인들이 있었다.
올리비아, 린, 에리, 아리스, 카스미 선배, 마코토, 하루, 세이라, 마유즈미 선생, 빌헬미나, 한서진, 유세라, 벨라, 에반젤린, 베아트리체.
그리고 쿠로사와 유지, 시노자키 이치로, 이시하라 사오리, 이시하라 다이키에 올리비아의 부모님인 프랑스 황제 내외까지.
나와 인연을 맺은 모두가 상복을 입고 모였다.
대표로 나선 나는 한숨을 쉬면서 한국어로 중얼거리면서 듀랜달을 뽑아들었다.
“염병할. 그러길래 왜 괜히 나서서 두 번 뒤지고 지랄이야. 지랄은······.”
듀랜달의 칼날이 햇빛을 받아 빛났다.
최후의 결전 때.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었는데.”
아니, 해야만 했다.
나는 이제 내가 품고 있던 욕망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누구도 다치지 않는 것.
누구도 죽게 하지 않는 것.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부족했고 결국 흑태자가 희생됐다.
그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복수할 수만 있다면 상관없다고 했었나.
“복수는 성공했어. 당신과 당신 동료들의 원수였던 메사이어 그놈은 몸이 두 동강이 나서 지옥으로 떨어졌다고. 당신이 한 마지막 부탁도 확실히 들어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당신이 저승에서 그걸 기뻐하고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듀랜달을 다시 검집에 꽂은 뒤에 묘비 옆에 검을 기댔다.
이제 흑태자는 없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니 괜히 눈물이 났다.
문득 그동안 흑태자와 함께 했던 날들이 떠올랐다.
진명해방을 각성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흑태자의 목소리는 내 머릿속에 떠나갈 일이 없었기에, 더더욱 지금 상황이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언제나 쓸데없이 라노벨처럼 내 행동에 사사건건 태클을 걸던 그가, 올리비아를 보면 항상 팔불출 오빠 캐릭터 대사를 치던 그가, 가끔은 진지해서 쓸 만한 조언을 내뱉던 그가, 툭하면 젠틀맨 타령하면서 히로인들을 레이디로 잘 대해줘야 한다고 하던 그가, 세이라만 보면 탄식을 내뱉으면서도 누님에게 잘해주라고 말하던 그가.
온천여행 때 소멸을 각오하고 본인의 심상전개를 보여주면서 자신을 뛰어넘을 수 있다고 독려했던 그가, 원작이 비틀린 여파 때문에 예상치 못한 전개가 나올 때마다 날 독려하면서 멘탈을 잡아주던 그가 떠올랐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나와 함께 울고 웃었다.
마지막에는 꼭 복수해달라며, 올리비아를 부탁한다고 내게 말했다.
흑태자, 라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그는 내 스승이자 친구이며 파트너였다.
나를 언제나 옆에서 받쳐주던 그가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흑태자가 없었다면 어쩌면 비틀린 원작의 전개에 휩쓸려서 메사이어를 상대하지 못하고 벌써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가 한 일 전부, 당신과 함께라서 할 수 있었어.”
내가 남자의 죽음 따위에 울게 될 줄이야.
씨발, 게이도 아니고.
“······그냥 그렇다고. 당신은······.”
나는 눈물을 애써 닦아내면서 품에서 소주를 꺼내 종이컵에 따랐다.
졸졸졸.
알코올 냄새가 코 끝에 스쳤다.
나는 종이컵에 담긴 소주를 듀랜달과 흑태자의 무덤에 뿌렸다.
“내 최고의 파트너였어.”
소주를 뿌린 나는 눈물을 닦아냈다.
“······오라버니······.”
등 뒤에서 올리비아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 흑태자를 불렀다.
이제는 모두가 알았다.
흑태자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승리도 없었다는 사실을.
그렇게 엄숙한 분위기에서 묵념을 하고 있던 그때.
“······어······. 뭐야. 이 진지한 분위기?”
등 뒤에서 익숙한, 하지만 지금 들려서는 안 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목소리는······.
“흑태자?”
내가 고개를 돌렸다.
모두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린 쪽을 향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그가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 검은 눈동자를 지닌 트렌치코트를 입은 미남자.
흑태자, 라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그가 멀쩡히 살아 움직이는 사람의 모습으로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흑태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지금 누구 장례식 중이야? 파트너? 올리비아? 숙모님? 숙부님? 모두······?”
나는 실없는 소리를 내뱉는 흑태자를 향해 다가가 그의 뺨을 쭈욱 꼬집었다.
“아, 아파! 파트너. 뭐야. 오랜만에 만났더니 꼬집고······.”
“살아있네?”
살아 있었다.
내 말을 들은 흑태자가 어색하게 웃었다.
“아, 그게······. 사실 살아있었달까, 그런데 멋있게 다시 등장할 타이밍을 조금 놓쳤다고 해야 할까.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흑태자의 말에 쓸데없이 눈물이 흘렀다.
난 게이가 아닌데.
나는 눈물을 닦아내면서 한숨을 쉬면서 기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씨발, 쪽팔리게.”
“······아무튼. 파트너. 올리비아. 숙부, 숙모님. 모두들······.”
흑태자가 나를, 올리비아를, 프랑스 황제 내외를, 모두를 바라보면서 웃었다.
“이 흑태자 님이 다시 살아 돌아왔다고! 다들 이 흑태자 님을 찬양해라! 하하하하하하하하!”
흑태자가 두 다리를 어깨 넓이만큼 벌리고, 하늘을 향해 오른팔과 검지를 뻗으면서 멋있는 포즈를 취했다.
펄럭.
그의 코트자락이 바람을 맞아 휘날렸다.
진심 보는 내가 다 쪽팔리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무덤 옆에 놨던 듀랜달을 꺼내들었다.
“파트너. 네 영혼의 파트너인 이 흑태자 님이 살아 돌아왔는데, 뭐 할 말 없어?”
흑태자가 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할 말이 없냐니.
나는 그의 질문에 살짝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아무리 희생자는 사실 안 죽었고, 마지막에 살아 돌아와서 주인공과 재회하는 게 라노벨 클리셰라지만, 진짜 살아 돌아올 줄은 몰랐다.
그것도 정령이 아닌 인간의 몸으로.
하긴 라노벨 세계니까 오히려 이건 당연한 일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흑태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 잘 돌아왔어. 그런데 어떻게 살아난 거냐? 너 정령이었잖아? 왜 인간의 몸으로······.”
내 말에 흑태자가 씨익 웃었다.
“아, 그거 말이야? 그건······.”
그가 말끝을 흐리면서 장난스럽게 웃었다.
“지금부터 이 흑태자 님이 개쩌는 이야기를 해주지. 파트너, 올리비아, 숙부, 숙모. 모두. 귀 열고 똑똑히 들으라고! 이 흑태자 님의 무용담을!”
흑태자의 말에 모두가 그의 입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나는 흑태자의 말을 듣고 웃었다.
그건 정말이지.
이 빌어먹을 라노벨 세상에 걸맞는, 어이없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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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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