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405)
#403
존댓말 금지
시간을 거슬러서 작년 여름.
린과의 하룻밤이 막 끝난 직후.
나는 아리스의 초대를 받았다.
“왔군요! 김덕성 군!”
번화가에서 벤츠 S클래스에 기댄 은발의 늘씬한 미녀가 보였다.
아리스였다.
그녀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오늘의 아리스가 입은 복장은 하얀 유카타.
“아, 네. 선배.”
“······선배라고 부르지 말라 하지 않았습니까?”
내 말에 볼을 살짝 부풀리는 아리스.
졸업 이후, 학생회장이라는 짐을 벗어 던진 아리스는 과거보다 한결 부드러워졌다.
물론 성인이 된 이후 현장 임무를 하다 EX랭크로 각성하면서 뉴 크라운즈의 일원이 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과거보다는 훨씬 홀가분해진 태도였다.
“알겠습니다. 아리스 씨.”
“······아, 아리스라고 부르세요. 조, 존댓말도 금지입니다······.”
내 말에 다시 말을 더듬으면서 얼굴을 붉히는 아리스.
그녀가 은빛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저런 모습이 쓸데없이 귀엽다.
“알았어. 아리스.”
“읏······.”
내 반말을 듣자 안 그래도 붉어진 얼굴이 더 빨개진 아리스.
그녀가 입술을 깨물면서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다, 다른 사람들 다 보는데 뭐 하는 짓입니까? 김덕성 군!”
그녀가 내 팔을 살짝 꼬집으면서 볼을 부풀렸다.
이런 데는 면역이 없는 그녀가 쓸데없이 귀엽다.
“오우! 청춘이구만!”
“좋을 때지!”
“잠깐, 저거 구세주 님 아닌가?”
“그러고 보니 옆에는 실버 퀸 사이온지 아리스 님?”
“두분이서 데이트라도 하는 건가?!”
그녀와 내가 옥신각신하는 사이 주변 엑스트라들이 모여들어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명해지면 이게 문제다.
“아, 아무튼! 어, 얼른 차에 타세요!”
얼굴이 더 심하게 빨개진 아리스가 나를 차 안으로 밀어 넣는다.
탁.
차 문이 닫히고 그녀가 운전하는 벤츠가 출발했다.
휙휙.
차창 밖으로 도쿄의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나는 안전벨트를 매면서 바로 옆, 운전석에 앉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오늘 목적지는 어디지?”
“······지금이 여름 축제 기간인 건 아시죠?”
내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아리스.
계절이 여름이니, 지금이 여름 축제 기간인 건 맞았다.
1학년 이맘때쯤 도쿄에서 여름 축제를 즐겼던 때가 떠올랐다.
마지막 불꽃놀이와 함께 있었던 올리비아의 고백, 그리고 윌리엄과의 결투까지.
다이나믹한 여름 축제였다.
나는 아리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오늘은······. 제 고향의 여름 축제에 김덕성 군을 초대하려고 합니다.”
아리스가 말을 더듬으면서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래서 유카타를 입은 건가.
축제 복장이라.
“혹시 여름 축제는 별로입니까?”
“아니.”
나는 아리스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녀와 함께라면 거기가 어디건 나는 상관 없었다.
“다행입니다.”
내 말에 안심한 표정을 짓는 아리스.
그렇게 그녀의 차를 얻어타고 달리고 또 달려서 도착한 곳은 1학년 때도 온 적 있는 그녀의 고향, 와카야마현이었다.
논과 밭, 그리고 감귤 과수원이 뒤섞여 펼쳐진 평야와 소박한 시골 마을이 보였다.
더불어 마을 근처에 서 있는 아리스의 동상과 그 옆에 서 있는 내 동상.
잠깐.
“내 동상은 왜 세워져 있는 거야?”
전에 갔을 때는 분명 아리스 동상만 있었는데.
대체 뭐야?내가 당황하자 아리스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 그건······. 마, 마을 사람들이 아내 동상 옆에는 나, 남편 동상이 있어야 한다고 만들었다고 들었습니다. 저, 절대 제가 시킨 건 아닙니다! 김덕성 군!”
내 말에 빨개진 얼굴을 도리도리 흔들면서 결사적으로 부정하는 아리스.
일본 도쿄 한복판에 내 동상이 세워진 기념 공원이 들어선 이후, 빌어먹을 동상에 그럭저럭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데서 쓸데없이 뒤통수를 맞을 줄이야.
머리가 얼얼하다.
“이, 일단 내리십시오. 부모님께서 기다리십니다.”
아리스가 내 손목을 잡고 차에서 끌어냈다.
1학년 때 왔던, 낯익은 골목길을 지나 도착한 장소는 아리스의 고향 집.
한국 시골집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정취를 지닌 주택의 문을 열자 익숙한 얼굴들이 나를 반겼다.
“아리스 왔나? 허어, 김 서방도 어서 온나.”
“후후후. 축제 참가하려고 온거제? 잘 놀다 가래이. 아들은 이미 축제 놀러 가고 없다.”
아리스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를 반긴다.
작은 체구의 어머니와 근육이 우락부락한 아버지의 조합은 언제 봐도 조금 그렇다.
“······네, 부모님. 다녀왔심더.”
사투리로 얼굴을 붉히며 인사하는 아리스.
“이건 선물입니더.”
아리스가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을 부모님에게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어머님, 아버님.”
나 역시 아리스의 부모님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하이고. 우리 김 서방은 참말로 인사성도 밝데이. 역시 우리 아리스가 남편감 하나는 기똥차게 물어왔데이.”
“후후후. 인사 끝났으니까 우리는 신경 쓰지 말고 이제 축제에서 놀다 가래이.”
우리의 인사를 받은 아리스의 부모님이 웃는 얼굴로 손짓했다.
여기서 굳이 정말로 신경 안 써도 되는 건가? 할 필요는 없겠지.
여기는 지나치게 상냥한 라노벨 세상.
남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알겠습니다. 가자, 아리스.”
나는 아리스의 손목을 덥석 잡고 이끌었다.
“자, 잠깐. 김덕서이. 그, 그······.”
아리스가 얼굴을 붉혔지만, 나는 그녀를 끌고 나가면서 그녀의 부모님에게 인사했다.
“그럼 아리스랑 같이 축제 잘 즐기겠습니다. 어머님, 아버님.”
“호호호호! 청춘이데이.”
“잘 다녀온나!”
아리스 부모님의 배웅을 받으면서, 나는 아리스를 끌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탁.
대문이 닫혔다.
“······으으으······.”
내게 손목을 잡힌 아리스가 얼굴을 붉히면서 낮게 신음을 흘렸다.
“이, 이제 놓으십시오. 김덕성 군.”
그녀의 말에 나는 손목을 놓았다.
“······정말이지, 김덕성 군은 거리낌이 없군요. 뭐 그런 점이 매력이지만······.”
그녀가 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런 점이 매력이지만이라는 말은 다른 사람이라면 못 들었을 정도로 작게 말했지만, 내 귀에는 전부 들렸다.
라노벨 주인공이라면 못 들었겠지만, 아쉽게도 내 청각은 정상이다.
“그런 점이 매력이라니 칭찬 고마워.”
“······그, 그걸 왜 듣는 건데?! 니는?! 으읏······!”
내 말에 얼굴을 붉히며 사투리로 항변하는 아리스.
평소의 아리스도 좋지만, 역시 평정심을 잃고 사투리가 터질 때가 제일 귀엽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아리스에게 말했다.
“뭐해? 축제 참여한다며? 앞장서.”
“······알겠습니다. 김덕성 군.”
내 말에 얼굴을 붉히면서 옷맵시를 다듬고 앞장서는 아리스.
나는 그녀의 뒤를 따라 걸었다.
여름이라 그런지 푸르게 펼쳐진 논과 밭 사이로 난 길을 그녀와 함께 걷는다.
고향 여름 축제.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나는 그녀에게 있어 이 축제가 단순한 축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고향의 신사에서 열리던 여름 축제는 어린 시절 아리스의 몇 안 되는 즐거움.
그녀에게 있어 몇 안 되는 소중한 추억인 것이다.
그런 추억의 장소에 나를 초대해줬다는 사실은, 뭐 더 말 할 필요도 없다.
“고마워. 아리스.”
“······가, 갑자기······.”
내가 감사 인사를 말하자 아리스가 말을 더듬었다.
“······실없군요. 김덕성 군. 이제 다 왔습니다.”
그녀가 헛기침했다.
그렇게 도착한 신사 앞에는 전형적인 일본 여름 축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먹거리, 군것질거리를 파는 불을 환히 밝힌 노점과 전구 조명, 유카타를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들.
시간은 어느새 밤이 되어 있었다.
“여기가 제 고향의 여름 축제입니다. 김덕성 군이 가봤던 도쿄의 축제와는 비교할 수 없이 규모가 작지만 그래도······.”
“좋네.”
“······마음에 든다니 다행입니다.”
아리스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빈말이 아니라 마음에 들기는 했다.
뭐 축제 싫어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나.
“그럼 축제부터 즐기지.”
나는 자연스럽게 아리스와 팔짱을 꼈다.
“······읏?! 김덕성 군. 그렇게 스스럼없이 스킨십을 하면······.”
“이제 결혼할 사이인데 뭐 어때?”
“······그건······. 그렇지만······.”
할 말을 잃어버린 아리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스킨십에 묘하게 내성이 없는 아리스가 귀엽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아리스와 함께 축제 현장을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사과 사탕, 타코야끼, 야키소바, 라무네 같은 간식을 사먹기도 하고.
경품 사격, 금붕어 낚시 같은 경품 게임을 즐기기도 했다.
그렇게 축제를 즐기고 있던 그때.
“김덕성 군. 이제 곧 불꽃놀이 시간입니다.”
아리스가 내게 말했다.
불꽃놀이?
하긴 일본 여름 축제의 하이라이트가 불꽃놀이기는 하지.
오히려 왜 안 나오나 했다.
“······따라오십시오. 불꽃놀이가 잘 보이는 곳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그녀가 내 손목을 덥석 잡았다.
불꽃놀이가 잘 보이는 곳?
이것만큼은 아리스 관련 설정이라면 전부 다 알고 있는 나였지만, 짐작가는 부분이 없었다.
내가 읽은 원작에서도, 설정집에서도 아리스의 과거는 단편적으로만 등장했고 고향 축제 같은 경우는 그냥 몇 안되는 소중한 추억이었다는 식으로만 언급했었으니까.
스르륵.
아리스가 내 손목을 잡아 이끈 곳은 신사도, 축제 현장도 아닌 산의 수풀 속이었다.
풀벌레 우는 소리가 인상적인 밤의 산, 유카타를 입은 아리스가 나를 데리고 계속해서 산을 오르고 있었다.
이거 등산이잖아?
“아리스. 지금 우리 어디 가는 거야?”
“이제 다 왔습니다.”
내가 그런 의문을 표하고 있던 그때.
아리스가 그렇게 말하면서 나뭇가지와 수풀을 걷어냈다.
그 너머로 보이는 것은 천막이었다.
꽤 오래 세워진 듯 빛바랜 천으로 지어진 천막은 제법 규모가 컸다.
천막 내부에는 돗자리, 요, 이불, 랜턴 등이 갖춰져 있었다.
이거 그러니까······.
“······여기입니다. 불꽃놀이가 잘 보이는······. 장소가. 이곳이······.”
“비밀기지죠?”
만화 같은 데서나 나오던 그거 맞지?
어린애들이 뒷산에다 만드는 그거.
내 말을 들은 아리스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 맞습니다. 제가 어릴 때 만들었던······. 저만의 비밀기지입니다. 어린 시절의 저는 축제가 끝날 때쯤 여기서 불꽃놀이를 감상하고는 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설정집에서도, 원작에서도 나오지 않던 아리스의 진짜 과거.
내가 모르던 설정, 아니 아리스의 추억이었다.
“······여기에 누군가를 초대해본 건 김덕성 군이 처음이군요.”
아리스가 그렇게 말하면서 옅게 웃었다.
그녀의 말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뭐라 말해줘야 할지 모르겠다.
“일단 들어가죠. 곧 불꽃놀이가 시작될 테니까요.”
나는 아리스와 함께 비밀기지 안으로 들어갔다.
탁.
아리스가 랜턴을 켰다.
비밀기지 안은 생각보다 좁으면서도 아늑했다.
그녀의 말대로 비밀기지 입구에서는 불이 환하게 켜진 축제 현장과 신사가 훤히 내려다 보였다.
이 구도라면 불꽃놀이도 잘 보이겠지.
그녀와 내가 나란히 앉은 그때.
펑, 퍼벙!
폭죽 소리와 함께 검푸른 밤하늘에 형형색색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불꽃놀이가 시작된 것이다.
초록, 빨강, 파랑.
아리스의 말처럼 비밀기지에서 보는 불꽃놀이는 환상적이었다.
여기가 제일 잘 보였다.
불꽃놀이를 보던 나와 아리스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아리스가 살짝 눈물을 흘렸다.
그녀가 머릿결을 귀 뒤로 넘기면서 무언가 말했다.
“······.”
펑! 퍼벙!
폭죽 소리에 묻혀 그녀의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지금 내가 뭘 해야 하는지.
나는 손으로 아리스의 잘록한 허리를 끌어 안아 품 안으로 당긴 뒤에, 그대로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움찔.
그녀의 은빛 눈동자가 흔들리면서 몸이 파르르 떨렸다.
퍼버벙!
귓가에 폭죽 소리가 굉음처럼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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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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