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63)
“······새삼스럽지만 그동안 이 아비가 미안했다. 린.”
이치로가 뺨을 긁는다.
린이 고개를 숙인다.
그녀의 뺨에서 눈물이 한줄기 흘러내린다.
머릿속에 시노자키 가문에서 지냈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의 얼굴도 떠오른다.
자신 있게, 협회장의 일을 해결해주겠다고 말한 김덕성의 말이 귓가에 울린다.
그 말대로, 그는 정말로 일을 해결한 것이다.
린이 소매로 눈물을 닦아낸다.
“······괜찮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기분 좋은 울림이다.
린은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까지 쌓였던 응어리가 눈 녹듯 사라지는 기분이다.
어쩌면 그녀는 지금까지 이치로에게 도구가 아니라 나의 딸이라는 한 마디를 듣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이치로가 옅게 웃는다.
린에게는 처음 듣는 말이지만, 나쁘지 않았다.
“그래. 나의 딸아.”
두 부녀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친다.
“지금까지 내가 너한테 내렸던 모든 명령은······. 현 시간 부로 전부 폐지다. 너는 가문의 도구가 아니다. 린. 네 인생을 살아라. 남들처럼 학원에서 연인를 사귀는 편도 괜찮겠지. 물론 내 마음에 드는 녀석이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이치로가 웃는다.
연인.
그 말에 린의 얼굴이 확 붉어진다.
린의 가슴이 두근거린다.
연모하는 남자, 김덕성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녀가 입술을 우물거린다.
린의 심상치 않은 모습을 본 이치로가 묻는다.
“혹 마음에 둔 녀석이라도 있는 것이냐?”
“그게······.”
린이 찻잔을 만진다.
김덕성의 곁에는 자신보다 요리도 잘하고 훨씬 미녀인 니시자와 에리, 가슴 사이즈도 대등하고 신분도 밀리지 않으며 전속 시녀라는 명분까지 쥐고 있는 올리비아가 있다.
그 두 여자를 제치고 앞서 나가려면, 아버지의 힘을 빌리는 편도 나쁘지 않다.
“······김덕성을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냥 평범한 부녀 간의 대화를 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작은 목소리로 연심을 고백했다.
“뭐? 김덕성? 흐, 흐하하하하, 하하하하! 그래. 내 딸이 사람 보는 눈은 있구나. 어중이떠중이를 데려다가 그이랍시고 내세운다면 혼쭐을 내주려고 했더니.”
시노자키 이치로가 웃는다.
김덕성은 자신을 구원해준 상대이자, 동시에 탐나는 인재.
딸의 결혼 상대를 강요할 생각은 없었지만, 딸이 마음에 둔 남자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렇게 된 이상, 그를 반드시 잡아야 한다.
린이 붉어진 얼굴로 더듬거리며 말한다.
“······저, 저는 김덕성의 그녀가 되고 싶습니다. 여자력도, 요리 실력도 기르고 싶습니다······.”
요리를 못한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계속 여자력이 없는 여자로 남는 건 싫었다.
니시자와와 올리비아, 두 여자에게 뒤처지는 것도 죽기보다 싫다.
언젠가는 당당하게 그에게 제대로 된 김치찌개를 만들어 주고 싶다.
린은 그렇게 생각했다.
“좋아. 네가 하고 싶다면 내 전폭적으로 지원해주지.”
이치로의 말을 들은 린은 옅게 웃으면서 화과자를 베어 물었다.
오늘따라 왠지 과자가 더 단 기분이었다.
*
흑광검식 스킬 전수가 드디어 끝났다.
혼자 연습하겠다는 올리비아를 내버려 두고 연습동에서 나왔다.
어느새 노을이 내려앉은 교정을 가로지른다.
오늘은 정말 별일 없는, 평화로운 하루였다.
매일 이렇게 평화로우면 얼마나 좋아.
아마 당분간은 계속 이런 평화가 지속될 거다.
린도 이제는 더 이상 내 곁에서 염병 떨지 않을 거고.
이치로가 보낸 은인이라는 말이 조금 불길하기는 하지만, 차차 알아보면 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걷고 있던 그때.
“김덕성.”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든다.
노을로 물든 하늘 아래, 그녀가 있다.
바람에 흩날리는 남색 포니테일, 남색 눈동자를 지닌 미녀.
시노자키 린이다.
“왜?”
“······고맙다.”
노을 때문인지 붉게 물든 얼굴로 린이 말한다.
뭐야, 갑자기 뜬금없이 왜 저래.
“뭐가?”
린이 옅게 웃는다.
그녀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한다.
“······아버지한테서 들었다. 쿠로사와를 움직여 우리 부녀를 구원해준 사람이 너라고.”
그녀의 말을 들은 순간.
머릿속에서 퍼즐 조각이 전부 맞춰진다.
이치로가 내게 은인이라고 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네.
이거 100% 주인공, 그 입 싼 호구 놈이 이치로에게 다 불어버린 게 틀림없다.
“돌겠네, 진짜. 쿠로사와 이 개 같은 놈이······.”
욕이 절로 나온다.
기껏 구원하라고 밥상 다 차리고, 숟가락까지 쥐여줬더니 그걸 팽개쳐?
사람이 정도껏 호구여야지.
미치고 환장하겠다.
린과의 악연을 겨우 끊어낸 줄 알았는데, 이건 오히려 혹 떼려다가 혹을 더 붙여버린 격이 아닌가?
올리비아 하나 감당하는 것도 지금 벅찬데.
눈앞이 깜깜하다.
“너는 언제나 그런 식이군. 김덕성. 하지만 나는······. 아니다.”
척.
린이 가슴 위에 손을 올린다.
안 돼. 하지 마.
“지금이라면 맹세할 수 있다. 김덕성. 네가 원한다면 내 몸도 마음도 처녀도 전부 너한테 바치겠다. 평생토록 너를 혀, 현모양처처럼 섬기겠다! 모, 목줄 산책도, 메, 메이드 코스프레도, 노부나가의 짚신을 데웠던 히데요시처럼 네 이불을 알몸으로 덥히는 일도 어, 얼마든지 해줄 수 있다. 부디 내 서방님이 되어다오!”
린이 붉어진 얼굴로 소리친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게 다행이다.
“야, 린. 너 진짜 나한테는 아무 쓸모 없으니까 하지 말라고. 제발······. 부탁할게.”
뭐? 서방님? 현모양처?
내가 미치지 않은 이상 시노자키 가문의 데릴사위가 될 일은 없다.
게다가 나 지금 속 울렁거려 죽을 거 같아.
“······나를 신경 써 주는 건가? 기쁘군.”
여전히 들어먹을 생각이 없는 린.
아니 방금 말을 어떻게 해석하면 신경 써 준다고 생각할 수가 있지?
이해가 안 된다.
그래, 라노벨 히로인이 다 그렇지 뭐.
“신경 써 준 거 아니니까 착각하지 말고, 내가 너 구해준 거 아니라 쿠로사와가 한 거니까 걔한테나 감사해. 나 이만 간다. 따라오지 마라. 진짜.”
손을 내저으며 자리를 뜬다.
앞으로 세상이 얼마나 더 미치려고 이러는지.
라노벨 세상의 미래가 진심으로 걱정된다.
*
도쿄도.
슈오우 영웅 학원 앞 전철역.
평소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전철역 광장에, 초록 숏컷의 중성적인 미모가 인상적인 남장 미소녀, 카미야 마코토가 내렸다.
드르륵.
캐리어를 끌고 내린 마코토의 시야에 저 멀리 인공섬 위에 있는 슈오우 영웅 학원이 비친다.
“여기가 슈오우 영웅 학원······.”
일본 최고, 세계 최고의 영웅 아카데미.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카미야 일문의 노예로 자라서 학원 따위는 전혀 다녀본 적 없는 그녀에게 있어서 어쩌면 동경의 장소일지도 모른다.
“학원 생활이라······.”
저도 모르게 속마음을 내뱉은 마코토가 황급히 입을 가리고는 주변을 둘러본다.
다행히 그녀에게 관심을 주는 사람은 없다.
암살자에게는 쓸모없이 커다랗기만 한 가슴을 묶은 압박붕대 속에 감춰진 심장이 두근두근 뛴다.
‘안 돼. 나는 행복할 수 없는 아이니까······.’
분수에 맞지 않는 꿈을 꾸면 안 된다.
마코토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잡으면서 캐리어를 끌고 학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저게 남자로 보이나?
철컥, 철컥.
거대한 톱니바퀴가 맞춰 돌아가는 기계장치의 방.
거기에 차가운 강철로 만들어진 금속 제단이 있다.
제단 앞.
부푼 가슴을 감싼 검은 드레스 차림, 황금을 녹여 만든 듯한 진한 금발의 미소녀, 성녀가 머리에 베일을 쓴 채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다.
성녀의 왼쪽 눈을 가리고 있는 검은 안대에 피어오른 빨간 장미꽃이 빛난다.
지잉.
자동문이 열린다.
하얀 사제복을 입은 인자한 인상의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나타난다.
“성녀 전하.”
허니 블론드 미녀, 교단의 성녀 베아트리체가 안대로 가려지지 않은 오른쪽 빨간 눈동자를 뜨고 고개를 돌린다.
그녀의 오만한 한쪽 눈동자가 대장로를 오시한다.
“충견이여, 어떤 일로 여(余)를 찾았느냐.”
“프리스트가······. 임무에 실패했습니다.”
대장로, 디에고 모랄레스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한다.
“여의 번견이 임무에 실패하였다? 말도 안 되는 일이로군.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지?”
그녀의 황금빛 눈썹이 꿈틀거린다.
성녀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뜻.
“자세한 경위는 파악 중입니다.”
대장로 디에고가 정중한 목소리로 답한다.
성녀 베아트리체가 오만한 눈길로 디에고를 응시한다.
프리스트는 그녀의 호위 기사단원.
호위 기사단은 전원 성녀의 충복으로 이루어진 만큼, 성녀 역시 그들을 아꼈다.
“인간 놈들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어리석고 몰염치하고 불경하구나. 여와 계약을 원한다길래 관대한 여가 특별히 자비를 베풀어 여의 충성스러운 번견를 내어주었거늘······.”
“제가 리그에 엄중히 항의하겠습니다. 성녀 전하.”
“흥. 추악한 인간 따위를 신뢰한 것이 여의 불찰이었도다. 여가 하등하고 불경한 인간 따위와 굳이 계약해야 하는지 의문이도다. 추후 불경한 인간 놈들과의 계약은 없다.”
반론 따위는 용납치 않겠다는 고압적인 태도와 세상 모든 걸 내려다보는 오만한 목소리.
디에고가 속으로 이를 악문다.
‘제멋대로인 상사의 비위를 맞춰주는 것도 못 해먹을 짓이군.’
교단은 그가 이세계 문명의 유산을 독식하기 위해서 만든 조직.
선택받은 자라는 선민사상을 내세운 것도, 유산을 선점하려는 프로파간다에 불과하다.
베아트리체는 역시 그저 교단의 상징에 불과할 뿐이다.
‘유적’의 냉동 포트에서 발견된 멸망한 이세계 문명의 유일한 후손이자 유일하게 전 세계 모든 유적을 통제할 수 있는 열쇠.
신성마술의 원천인 유물 ‘코덱스’의 유일한 주인.
베아트리체의 쓸모는 거기까지다.
그녀가 유적에서 발견된 인간이기는 하지만, 성녀에게는 이세계 문명의 기억도 정보도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도구면 도구답게 행동할 것이지.’
하지만 최근 베아트리체는 계속해서 디에고의 통제를 벗어나려 시도했다.
리그와의 협력을 못마땅해하는 건 물론, 교단 내에서도 서서히 본인 세력을 확충하기 시작한 거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멸망한 이세계 문명의 유일한 생존자라는 상징과 코덱스의 존재 때문에 베아트리체를 함부로 내치지도 못하는 상황.
교단의 설립자인 디에고는 성녀 따위를 추종하는 광신도가 아니었지만, 교단의 신자들은 광신도들이 대다수였기에 조직 운영에 있어 그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는 없다.
‘언젠가는 토사구팽해야겠지만, 지금은 아니야.’
디에고가 시커먼 속내를 숨기면서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다.
“······알겠습니다.”
아직은 베아트리체의 비위를 맞춰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베아트리체의 말을 어느 정도 수용할 수밖에 없다.
“그들한테 다음번 협력은 없다고 전하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리그와의 협력을 잠시 중단해야 한다.
한 번 정도는 메사이어도 이해해줄 터.
“여의 번견 구출에 성심성의를 다하거라. 이건 여의 명령이니 충견인 너의 지상과제이니라.”
“알겠습니다. 성녀 전하.”
“물러가라.”
베아트리체가 입을 다물고 등을 돌린다.
째깍, 째깍.
톱니바퀴 돌아가는 소리가 대장로의 귓가에 울린다.
대장로와 성녀,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작은 균열이 조금씩,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
임간학교가 끝나고 시간이 꽤 흘렀다.
니시자와의 교내 봉사도 이제 곧 마무리 단계라고 한다.
본인은 기쁜 듯 내게 얘기했지만, 나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마왕의 봉인이 헐거워졌다는 이야기를 듣는 용사의 심정이었다.
린은 그날 이후 계속해서 내 곁에 맴돌고 있다.
이제는 대놓고 남편 어쩌고저쩌고 난리를 치는데, 상대해주는 것도 지친다.
데릴사위가 될 생각은 전혀 없다고 해도 계속해서 들이대니까 빡친다.
올리비아는 평소와 비슷하다.
가슴에 손 올리며 전속 시녀 운운하는 거나, 투덜대다가 린이 나타나면 티격태격하고, 가끔 츤츤대며 급발진하는 모습.
솔직히 셋 중에서는 제일 낫다.
라노벨 세상에서 올리비아 정도면 괜찮은 사람이다.
‘이대로 당분간 계속 쉬면 될 줄······. 알았는데 중간고사가 있었군.’
3권 에피소드 중에는 시험도 있다.
그라운드 제로 실습도 엄밀히 말하면 실기 평가 중 하나로 실시된 거니까.
시험이라니.
대학교 졸업하고 한동안 볼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학교 시험을 다시 본다니 눈앞이 막막해진다.
‘염병.’
욕이 절로 나온다.
필기는 전혀 자신이 없다.
실기에서 잘해야 만회할 수 있다.
온 나라가 나로 인한 국뽕을 치사량으로 들이키고 있는 상황에서 내 시험 성적이 좋지 않다?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다.
끔찍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적어도 중간은 가야 한다.
‘공부······.’
나와라 만능 상태창으로 공부는 날먹하는 게 국룰인 아카데미물에서 이런 현실적인 걱정을 하게 될 줄이야.
아무리 불러도 대답 없는 상태창이 야속하다.
미친 라노벨 세상 같으니.
아무래도 당분간은 카스미 선배와 독서실에서 지옥의 공부 시간을 가져야 할 것 같다.
“안녕하세요! 생도 여러분! 마유즈미 선생님이에요!”
HR시간.
평소처럼 마유즈미 선생이 출석부와 지시봉을 들고 교실로 들어온다.
생도들의 웅성거림이 빠르게 가라앉는다.
“흠흠. 오늘은 특별한 전달사항이 있어요.”
탁탁.
마유즈미 선생이 지시봉으로 교탁을 탁탁 두드린다.
저 모습을 볼때마다 소름이 돋는다.
저런 사람이 마법소녀 복장을 하고 그런······.
그날 밤의 끔찍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뇌리에서 삭제하고 싶었던, 역겨운 스킬명과 전투 장면.
황급히 떠오르는 끔찍한 영상을 머릿속에 봉인한다.
그런데 특별한 전달사항이라고?
“······바로 전학생이에요!”
마유즈미 선생이 말한 순간, 정신이 번쩍 깨인다.
‘전학생?’
지금 시점은 원작 3권.
전학생이 올 타이밍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