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68)
서적판에서는 흑백 삽화로 묘사된 장면.
애니메이션에서는 수준 높은 작화로 재현되기도 했다.
“이거 불안한데······.”
갑자기 등골이 서늘하다.
“주군. 뭐가 불안해? 내가 처리할까?”
마코토가 손을 잡는다.
얘는 왜 이렇게 스킨십을 좋아해?
“처리하긴 뭘 처리해. 안 되겠다. 이제 나가야겠어.”
지금 시간에는 사람이 없을 테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다.
마코토가 여자라는 사실이 들키기 전에 욕탕을 나가야 한다고 결심한 그때.
“오쓰! 밤늦게 하는 목욕이 언제나 최고지!”
락커룸 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울린다.
이시하라다.
“염병.”
빌어먹을 미친 라노벨 세상 같으니.
누가 짠 것도 아니고, 왜 이 타이밍에 들어오지?
“히익! 김 군. 나 어떡해······?”
마코토가 놀란다.
그 와중에도 빠지지 않는 보쿠 1인칭.
게다가 아까는 주군이라더니 이번에는 김 군이다.
할 거면 하나만 할 것이지.
한숨이 나온다.
빌어먹을 라노벨 상황설정을 내가 직접 겪게 되다니.
어이가 없다.
손가락으로 욕탕 한쪽에 있는 사우나 시설을 가리킨다.
“사우나실로 들어가. 어차피 쟤네 사우나 안 하니까.”
“알았어. 맡겨줘!”
촤르륵.
주먹을 불끈 쥐며 일어나는 마코토.
그녀가 사우나실로 들어가자마자 간발의 차이로 이시하라와 쿠로사와가 입장한다.
“오쓰. 형님도 계셨음까?”
“김. 전학생이랑은 잘 지내고 있어? 나는 이시하라 군이랑 잘 지내고 있어.”
기숙사 재배치의 결과, 이시하라와 쿠로사와는 같은 방이 되었다.
나만 마코토라는 폭탄을 떠안아서 문제지.
쿠로사와 저놈이 마코토와 룸메이트가 되었어야 했는데.
이게 무슨 미친 짓인지.
다시 생각해도 한숨이 나온다.
“웬일로 이렇게 늦게 왔냐?”
“쿠로사와랑 늦게까지 연습실에서 연습해서 말임다. 몸이나 담글까 하고 이렇게 왔슴다.”
이시하라가 답하며 풍덩하고 욕탕에 뛰어든다.
곧이어 쿠로사와도 물에 들어간다.
두 사람의 모습이 자욱한 수증기 사이로 보인다.
“빨리하고 나가라. 혼자 목욕하고 싶으니까.”
마코토가 사우나 안에 있기는 하지만, 욕탕 폐장 시간까지 놈들이 있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그러니 빨리 내보내는 게 좋다.
“형님, 무슨 고민 있음까?”
“혹시 카미야 군이랑 나갈 멘토 외출 코스 때문에 그래?”
첨벙, 첨벙.
이시하라와 쿠로사와가 물살을 가르며 내 곁에 다가와 묻는다.
멘토 외출.
거창한 이름이지만, 실제로는 전학생이 온 지 2주차 토요일 날, 멘토 역할을 맡은 룸메이트가 전학생과 함께 학교 밖으로 외출을 나가 도쿄 여기저기를 둘러보는 그런 행사 아닌 행사다.
원작에서 남장여자 히로인인 마코토와 유지의 데이트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만들어진 편의주의적 설정.
자신이 이미 여자라고 고백하고, 사오리에게 억제제를 받아 구원받은 마코토는 유지와 함께 데이트에 가까운 외출을 즐긴다.
‘거기서 그냥 끝나면 라노벨이 아니지.’
일상의 마지막이 비일상으로 이어지는 라노벨 클리셰는 멘토 외출에도 예외가 없다.
암살 성공 소식이 들리지 않자, 참다못한 카미야 일문의 수장 카미야 리츠코가 직접 유지를 처리하기 위해 나타난 거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뻔하다.
공포에 떠는 마코토를 지키려는 유지와 리츠코의 대결, 하지만 S랭크 빌런에게 밀리는 유지, 그 모습을 본 마코토의 각성, 각성한 마코토와 유지가 협공해서 리츠코를 제압하는 장면에서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마코토 구원.
‘그런 원작의 흐름에 비춰 본다면, 이번 멘토 외출 때 리츠코가 나타날 확률이 9할 이상이라고 볼 수 있겠지.’
예외는 아마 없을 거다.
그때를 대비해서 믿을 만한 지원군을 불러야 하는데······.
멘토 외출은 둘만 나가야 한다는 규정이 문제다.
‘역시 그 할망구뿐인가.’
협회장 이치로도 생각해볼 수 있겠지만, 그 아저씨를 불렀다가는 데릴사위니 뭐니 헛소리를 해댈 것 같아서 싫다.
이사장과는 다르게 협회장은 평소에 업무도 꽤 많아서 부른다고 바로 달려올 수 있는 인물도 아니고.
S랭크 빌런을 제압하는 데는 이사장 정도면 충분하다.
어차피 이사장 할멈은 하는 업무가 월급 루팡 수준이라, 메시지를 날리면 10분 안으로 올 거다.
‘리츠코 상대로 10분 정도 버티는 거야.’
해볼 만하다.
“내가 좋은 코스를 알고 있는데 말이야······.”
유지가 옆에서 뭐라 말한다.
그의 말을 대충 듣는다.
“······그래서 여기까지 가면 카미야 군도 좋아할 거야.”
“어, 그래 조언 고맙다. 근데 쿠로사와. 나 혼자 있고 싶다고 아까 말한 거 같은데.”
시간이 슬슬 위험하다.
얘네 둘 다 내보내야 한다.
“알았어. 미안해. 김!”
착.
물속에서 합장하는 유지.
이마를 짚는다.
룸메이트 안 된 지 얼마나 됐다고, 하지 말라는 걸 또 하고 있다.
손을 내젓는다.
“됐으니까 이시하라 데리고 나가.”
“응. 알았어.”
“가보겠슴다. 형님!”
첨벙.
이시하라와 유지가 손을 흔들며 욕실을 나간다.
투닥투닥.
락커룸에서 옷을 갈아입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대욕탕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난다.
어휴.
진작 빨리 나갈 것이지.
“야, 마코토. 나와.”
끼익.
나무로 된 사우나실 문이 열린다.
“으으으으······. 주군······. 사우나는 처음인데······. 원래 이런 곳이야······?”
새하얀 피부가 분홍색으로 상기된 마코토가 욕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헐떡댄다.
땀에 흠뻑 젖은 그녀의 피부가 수영복에 착 달라붙어 안 그래도 커다란 흉부가 더 강조되어 보인다.
빨갛게 익은 목덜미에 달라붙은 초록빛 숏컷도 보인다.
“정신 차렸으면 이만 나가자. 다른 놈들 또 오기 전에.”
“알았어······. 김 군, 나 힘이 없어서······. 손 좀······. 잡아줄 수 있어······? 미안해······.”
마코토가 고개를 숙이면서 손을 물끄러미 내민다.
또 호칭 헷갈리네.
에휴.
칠칠치 못한 인간 같으니.
한숨을 쉬며 마코토의 손을 잡아 일으킨다.
“흐엑?”
마코토가 이상한 비명을 낸다.
라노벨 특유의 비명 리액션은 익숙해질 수가 없다.
“가자.”
그녀를 데리고 욕탕을 나간다.
다행히 락커룸에서 옷을 갈아입고, 마코토가 다시 남장을 하고, 대욕탕을 나설 때까지 마주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십 년 감수했네.
*
[학생회관 소강당으로 와. 젖소.] [올 때 음료수 사오는 거 잊지 말고.]니시자와 에리의 메시지가 시노자키 린의 휴대폰을 울린다.
린의 미간이 일그러진다.
필요에 의한 동맹이라고는 하지만, 역시 빨래판의 태도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난 네 심부름꾼이 아니다 빨래판.] [과자 파티하려고 했는데, 아쉽네. 음료수 없이 퍽퍽한 과자만 먹고 싶으면 그래보던가. 젖소.]“큿.”
린이 입술을 깨문다.
기분이 나쁘지만 어쩔 수 없이 사 와야만 한다.
니시자와 에리의 메시지를 읽씹한 린은 학원 상가에서 콜라를 산 뒤에 학생회관 소강당으로 향했다.
끼익.
육중한 문을 열자마자 린의 시야에 들어온 건, 소강당 벽에 걸린 라고 크레파스로 삐뚤삐뚤 적힌 현수막.
그 아래, 책상 여러 개를 맞붙여 만든 테이블에 백금발의 미소녀, 올리비아와 주황 트윈테일 미소녀, 니시자와 에리가 앉아 있다.
“젖소. 가슴이 큰 만큼 쓸데없이 굼뜨네. 늦어.”
“시끄럽다.”
쿵.
문을 닫고 들어온 린이 책상 위에 봉투를 내려놓는다.
“오, 콜라 사 왔어? 의외로 센스 있는데.”
“너한테 그런 말을 듣고 싶지는 않군. 빨래판.”
“지금 뭐라 그랬어? 이 가슴에 지방만 가득 차오른 젖소가······! 기껏 칭찬해줬더니 죽을래?”
“못 들었다면 다시 한번 똑똑히 말해주지. 빨래판이라고 했다.”
“이이이이이익!!”
자리에 앉자마자 으르렁대는 린과 니시자와 에리.
그 모습을 본 올리비아가 책상을 내려치며 말한다.
“시끄러워요! 두 사람 다 조용히 좀 해요!”
알 수 없는 박력에 입을 다무는 린과 에리.
올리비아가 한숨을 내쉬면서 싸늘한 표정과 차가운 목소리로 말한다.
“이 고귀한 프랑스의 황녀, 올리비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모처럼 귀중한 시간을 쪼개서 일개 서민에 불과한 그쪽 따위에게 할애하는 중이라고요. 아시겠나요? 니시자와 양. 또 쓸데없는 말싸움으로 시간 낭비하면 그때는 각오하세요.”
“이번만큼은 나도 보나파르트와 같은 의견이다. 니시자와.”
린과 올리비아의 날카로운 시선을 받은 니시자와가 양 팔꿈치를 책상 위에 올린 채로, 양손을 깍지껴 얼굴 앞에 모으면서 천천히 말한다.
결성! 히로인 동맹!
“······전학생. 아무리 봐도 수상해.”
니시자와 에리의 눈빛이 진지해진다.
“그 정도는 이 저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에요. 고작 그런 얘기를 하려고 그렇게 뜸을 들인 건가요? 이해할 수가 없군요.”
올리비아가 입술을 삐죽대며 니시자와 에리를 쏘아붙인다.
부욱, 북.
린이 책상 위에 놓인 과자 봉투를 찢는다.
와작.
그녀가 감자칩을 깨문다.
고요한 소강당에 감자칩 깨무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니시자와 에리의 눈동자가 가늘어진다.
“젖소. 너는 눈치도 없어?”
“과자 파티를 제안한 건 빨래판, 그쪽이 아닌가?”
린과 니시자와 에리가 다시 으르렁거리려던 그때.
“둘 다 아까 입 다물라고 제가 말씀드렸을 텐데요.”
올리비아의 싸늘한 목소리가 두 사람의 귓전에 꽂힌다.
린과 에리의 입이 닫힌다.
“그래서, 하려던 말이 뭐죠? 니시자와 양. 시시한 얘기라면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귀중한 제 시간을 낭비한 대가를 치러야 할 거예요.”
올리비아의 경멸이 깃든 차가운 푸른 눈동자가 니시자와 에리를 향한다.
‘그 사람 일만 아니었더라도 이런 멍청한 모임에 오는 일도 없었을 거라고요. 흥.’
올리비아가 입술을 삐죽댄다.
싸가지 없이 굴다가 갑자기 반한 듯 구는 시노자키 린도, 주인님이라고 자청하며 쓸데없이 달라붙는 니시자와 에리도 전부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는 여자들이다.
김덕성의 전속 시녀로서 그의 곁을 절대 허락할 수 없다.
단지 지금은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생겼을 뿐이다.
머릿속에 그의 얼굴이 떠오르자 올리비아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한다.
‘바보, 멍청이, 은하에서 제일 둔감한 남자 같으니······.’
올리비아의 얼굴이 붉어진다.
괜히 심통이 난다.
자신의 고생을 몰라주는 그가 야속하고 얄밉다.
와그작.
시노자키 린이 도토리를 먹는 다람쥐처럼 감자칩을 깨문다.
그 모습을 본 니시자와 에리가 한숨을 쉬면서 말한다.
“잘 알다시피 나는 도내 최고 랭크 미소녀야.”
니시자와 에리가 진지한 표정과 목소리로 말한다.
“······자의식 과잉이 수준급이군. 빨래판.”
시노자키 린이 그녀에게 딴지를 건다.
같은 여자가 봐도 도내 최고 랭크 미소녀를 자칭해도 될 정도로 니시자와 에리가 예쁜 건 사실이긴 하다.
하지만 그 사실을 굳이 자신의 입으로 인정하기는 싫다.
시노자키 린은 그렇게 생각했다.
“젖소. 닥치고 말부터 들어. 나는 지금까지 남자들의 끔찍하고 역겨운 시선을 수없이 견뎌왔어. 남자들은 주인님 빼고 다 똑같아. 도내 최고 랭크 미소녀인 내 얼굴과 몸을 역겹고 끈적끈적한 욕망이 담긴 눈빛으로 훑어왔지.”
니시자와 에리가 몸을 파르르 떤다.
“오직 주인님만 에리링을 에리링으로만 봐줬어. 주인님······. 히히히히······.”
니시자와 에리의 얼굴에 미소가 걸린다.
그녀의 얼굴이 붉어진다.
가슴이 두근댄다.
그날.
자신을 경멸의 시선으로 바라본 김덕성의 눈빛을 니시자와 에리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한 점 욕망도 없는 김덕성의 눈빛에 니시자와 에리는 구원받았다.
그렇다고 남자가 좋아진 건 아니다.
주인님 이외의 다른 남자는 싫다.
그들의 시선이 닿는 것조차 불쾌하다.
‘내 몸과 마음은 전부 주인님만의 것인걸.’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숨결 한 조각까지 오롯이 그의 것이니까.
오직 그만이, 모두가 바라는 은하 랭크 미소녀 니시자와 에리를 가질 자격이 있으니까.
니시자와 에리가 개목걸이를 만지작댄다.
‘이 목걸이야말로 내가 주인님의 소유물이라는 상징이야.’
황녀님도, 젖소도 없는.
오직 에리링만 가지고 있는 주인님과의 인연의 증표.
니시자와 에리의 얼굴에 웃음이 깃든다.
말하다 말고 얼굴을 붉히는 니시자와 에리의 모습에 올리비아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츤츤댈 때와는 온도가 다른, 진심으로 못 볼 걸 봤다는 표정.
“불쾌하군요.”
“동감이다. 보나파르트. 언제까지 그런 기분 나쁜 표정을 지을 거지. 빨래판?”
과자를 먹던 시노자키 린이 말한다.
“쳇.”
니시자와 에리가 혀를 찬다.
“자꾸 딴지 걸지 마. 아무튼, 우주 랭크인 내 미모에 반응하지 않는 걸 보면 전학생은 남자를 좋아하는 취향인 게 틀림없어.”
“내가 듣던 이야기 중에서 제일 말도 안 되는 소리군. 빨래판.”
시노자키 린이 코웃음을 친다.
린의 말에 니시자와가 발끈하려던 순간.
“아뇨, 시노자키 양. 도내 최고 랭크 미소녀라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그녀의 말에도 일리가 있어요.”
올리비아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마코토의 행동은 그녀가 봐도 이상했다.
특히 등굣날 가방을 빼앗겼을 때, 그 눈빛을 올리비아는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그날만 생각하면 소름이 돋는다.
그건 친구로서가 아닌, 연적으로서의 질투가 깃든 시선이었다.
하지만 전학생이 정말 그런 취향이라면, 모든 상황이 말끔하게 설명된다.
“그게 무슨 멍청한 소리지? 보나파르트. 머리에 갈 영양이 가슴으로 전부 몰리기라도 한 건가?”
시노자키 린이 차가운 말투로 올리비아를 쏘아붙인다.
“시, 시끄러워요! 어떻게 그런 천박한 말을 내뱉을 수가 있죠? 일본 최고 명문가 아가씨의 발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수준 낮은 언행이군요!”
올리비아가 척하고 시노자키 린을 삿대질하며 소리친다.
“게다가 전학생은 누가 봐도 취향이 의심될 정도로 수상하잖아요. 여자한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오직 그한테만 붙어 다닌다고요! 지나칠 정도로!”
누가 봐도 수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