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isor Jihoon Kim RAW novel - Chapter 105
104. 염치
2013년 10월,
어느덧 모두를 괴롭히던 한여름 더위가 물러갔고, 국회는 국정감사와 동시에 열리는 재보궐 선거라는 이벤트로 분주했다.
신임 정부의 첫 국정감사답게 협치 파트너인 보수당을 비롯한 사민당, 그리고 원내교섭단체 지위를 박탈당한 대안당까지 강도 높은 국정감사가 될 것을 시사하며 강력하게 정부를 압박하고 있었다.
[국정감사가 시작된 가운데 공기업들의 방만 운영이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특히 한수원은······.]“대박, 정부가 바뀌어도 똑같네.”
“심상치 않기는 무슨 저게 다 전 정권에서 싸질러 놓은 똥이라니까? 보수당은 뭐라고 해야 하지? 부패랑 무능이란 단어에 저작권을 가지고 있다니까?”
“푸…푸훕.”
정현석은 자신의 뒷자리에서 들려오는 시민들의 목소리에 식사 중이던 우동을 다시 그릇에 뱉어버렸다.
지훈은 그 모습을 보고는 얼른 휴지를 뜯어 정현석에게 물과 함께 건넸다.
“괜찮으십니까?”
“들었냐? 저작권이래. 부패와 무능의 저작권을 가진 정당이라잖아.”
정현석은 뭐가 그리도 웃긴지 작은 목소리로 지훈을 향해 낄낄거리며 말해왔다.
“심각하다. 심각해. 나름 노력을 해도 거부감이 엄청나네.”
“당내 사람은 그대로인데 행동이 바뀌었다고 해서 믿기는 쉽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우리 당명이 주는 거부감도 있을 테고요.”
“그래. 집에서 와이프랑 얘기를 나눠봤는데 보수란 단어가 주는 거부감이 대단하더라고, 세상은 바뀌는데 언제까지 지키기만 할 거냐고 하는데 말문이 턱 막히더라니까.”
지훈은 정현석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공감을 표시했다.
“일단 안에 있는 사람들부터 바꾸고 당명을 바꾸든지 해야 효과가 있겠지. 에이 밥맛 떨어졌다. 더 먹을 거냐?”
“아뇨. 저도 다 먹었습니다.”
“그래. 그럼 일어나자.”
최준호를 포함한 세 사람은 분식집에서 나와 미니밴에 올라탔다.
“자 그럼 지원 유세 가볼까.”
재보궐 선거를 맞아 정현석은 여기저기서 지원 유세를 와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특히 보수당의 재보궐 공천은 혁신이라고 할 만큼 젊은 후보들을 대거 공천했다.
정현석은 국정감사와 재보궐 선거 지원 유세를 병행하며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일정을 소화 중이었다.
“오늘 가실 동대문을의 후보님은 김진우 후보님이시고, 동대문 구의원 출신이십니다. 36살의 나이로 젊은 분이시고요. 직접 제게 전화하셔서 제일 먼저 유세를 요청하셨습니다.”
“그래? 우리 당 최연소 공천이라고 기사 엄청나게 나오더라. 어때 보여?”
“구의회에서는 꽤 날카롭기로 소문이 나신 분이더라고요. 구청장이 우리 당 사람인데도 쥐잡듯이 감사한다고 소문이 났었습니다. 최근 보도된 인터뷰를 보면 꽤 젠틀해 보이시고요.”
“그래? 뭐 나도 가서 만나보면 알겠지. 눈 좀 붙일 테니까 도착하면 깨우고.”
“네. 알겠습니다.”
**
몇 시간 후, 동대문구에 도착한 정현석은 바로 지역의 한 대학으로 지원 유세를 나갔다.
“정 의원님 바쁘실 텐데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보좌관님도 연락드렸을 때 선뜻 제일 먼저 도와주시겠다고 하셔서 감사했습니다.”
“아이고, 김 후보님 반갑습니다. 생각보다 더 젊어 보이시는데요?”
“하하, 젊은 게 무기라 이번에 당의 공천도 받지 않았나 싶습니다.”
동대문을의 보수당 국회의원 후보인 김진우는 정현석과 지훈을 향해 인사를 건네왔다.
“그렇게 자신을 낮추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번에 재보궐 공관위에서는 김 후보님의 구의원 활동 기록까지 전부 찾아봤고, 또 지역 여론조사를 통해 최후로 공천받으셨습니다.”
지훈은 자신을 낮춰 말하는 김진우를 향해 만류하는 듯한 말을 건넸고, 김진우는 미소로 지훈의 말에 답했다.
“정 의원님께서 제일 먼저 저를 찾아주신다고 하셔서 조금 색다른 방식의 유세를 준비해봤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색다른 방식이요?”
“네. 여기는 제 모교입니다. 대학교 잔디밭에 앉아 대학생 친구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는 형식의······.”
“좋습니다. 트럭에 올라타고 돌아다니는 것보다 훨씬 좋은데요.”
정현석은 김진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쁘다는 듯 승낙을 했고, 김진우는 그런 정현석을 자리가 준비되어있는 잔디밭으로 안내했다.
“의원님, 요즘 대학생들은 위로가 필요한 세대입니다.”
지훈은 길을 걸으며 정현석에게 붙어 오늘 만남에서 있을 대화의 방향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위로가 필요한 세대?”
“네. 노력이 어쩌고 이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본인들이 더 잘 알고 있을 테니. 그냥 너는 잘하고 있다고 위로만 해주시면 됩니다.”
“그래, 나도 잘 알고 있어. 어쨌든 충고 좋았어. 실수하면 안 되는 자리 아냐.”
“네. 첫 유세부터 발언을 잘못했다가는 재보선 내내 물어뜯길 수 있으니까요. 최대한 침착하게 대응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두 분 다 재킷은 제게 맡기시고, 타이 또한 풀어서 제게 주십시오.”
“왜?”
“아무래도 재킷을 입고 넥타이까지 하고 있으면 분위기가 진중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편하게 얘기하자고 모으신 자리라고 했으니 그냥 셔츠만 입고 있는 게 좋아 보입니다.”
지훈의 충고에 정현석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재킷과 넥타이를 넘기며 지훈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하하, 정 의원님. 부럽습니다.”
“뭐가 말입니까?”
“자리의 성격을 파악하고 충고해오는 유능한 보좌관을 두신 게 말입니다.”
“하하, 김 후보 탐내지 마십시오. 안 그래도 요즘 내가 이 녀석 꼭꼭 숨기느라 힘이 듭니다.”
잔디밭에 다가가자 대학생들은 옹기종기 앉아서 김진우와 정현석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이거 우리만 의자에 앉습니까? 의자 치우고 우리도 잔디밭에 둘러앉아서 얘기하죠.”
정현석이 그렇게 말하자 대화에 참여한 대학생들도 기쁘다는 듯 손뼉을 쳤고, 지훈과 김진우의 수행비서가 의자를 치웠고 두 사람 또한 잔디밭에 주저앉아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되었다.
“먼저 시험 기간이 곧 다가오는데도 이 자리에 참석해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여기 제 옆에 계신 분은 보수당의 국회의원이신 정현석 의원님이십니다.”
김진우가 자신을 소개하자 정현석은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오늘 제가 여기에 오면서 분식집에서 우동을 먹었습니다. 거기서 들은 얘기가 있는데요. 보수당은 부패와 무능의 저작권을 가진 정당이라는 소리를 하시는 분이 계셨습니다.”
정현석이 웃으며 말을 꺼내자 참석한 대학생들도 크게 웃지는 못하더라도 피식 웃으며 정현석의 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당을 여러분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기 위해 용기를 내준 여러분께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정현석은 진심을 담아 대학생들을 바라보았다.
“오늘 여러분들과 진솔한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이 자리를 준비했습니다. 저와 정현석 의원님께 묻고 싶은 게 있다면 가감 없이 물어봐 주시기를 바랍니다.”
김진우가 그렇게 운을 떼며 둘러앉아 있는 참여자들의 면면을 바라보자 참여자들은 선뜻 먼저 나설 용기가 없는 건지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때, 정현석의 정면에 앉아 있던 한 학생이 손을 들었고, 김진우가 지목하자 입을 열기 시작했다.
“보수당의 저번 대표님께서는 대학생들이 여전히 노력은 안 하면서 성공하기만을 바란다는 발언을 하셨습니다. 여기 계신 김 후보님이나 정현석 의원님도 같은 생각이신지 궁금합니다.”
첫 질문부터 보수당의 아픈 곳을 찔러오는 대학생의 질문에 정현석은 뜨끔했다.
“제가 김 후보님을 대신해 답을 해도 되겠습니까?”
정현석이 질문을 한 학생을 향해 묻자 학생은 고개를 끄덕였고, 정현석은 주변에 앉아 있는 참여자를 둘러보며 입을 떼기 시작했다.
“그분은 현재 우리 당에 계시진 않지만, 어찌 되었든 우리 당 대표로 계실 때 하신 말씀입니다. 대신해서 사과드리겠습니다.”
정현석은 그렇게 말하며 질문을 한 학생을 바라보았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 당은 지금까지 청년에게 공감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해놓고 여러분의 시선이 아닌 우리 어른들의 시선으로 여러분을 바라보려고 했다는 것을요.”
정현석은 다시 여러 사람을 둘러보며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공감하지 못하면 적어도 입이라도 꾹 다물고 있어야 했는데 그런 점에 대해선 굉장히 건방진 행태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좀 더 여러분들의 세대를 주제로 공부해서 공감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정현석이 노력하겠다는 말에 참여자들은 믿지는 못하는 눈치였지만 작게나마 박수를 보냈다.
“다음 질문하실 분? 네. 거기 파란 셔츠 입으신 분.”
“이 지역의 전 국회의원은 보수당에서 공천을 준 인물인데 이번 재보선에는 후보를 내지 말아야 했던 게 아닐까요?”
동대문을은 보수당의 현역 국회의원의 비리로 의원직 상실형이 확정되어 재보궐 선거가 진행되고 있었다.
정곡을 찔러오는 질문에 정현석은 놀란듯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공천 과정에서 꼼꼼하게 걸러내지 못한 우리 당의 책임이 맞습니다. 마땅한 인물이 없었다면 후보를 내지도 않았을 테고요.”
정현석은 옆에 앉은 김진우의 등에 손을 얹고는 질문자를 바라보았다.
“여기 김진우 후보님이 없었더라면 말입니다. 동대문 출신이고 여러분과 같은 대학 출신의 젊은 정치인입니다. 또 이 지역의 전 국회의원과는 다르게 일을 잘하는 분이고요. 여러분들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실 분입니다.”
정현석의 말에 질문자는 일정 부분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런 말씀 드리기 굉장히 염치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만, 여러분들의 미래를 위해 우리 김진우 후보님께 귀중한 한 표를 행사해주셨으면 합니다.”
김진우는 정현석을 바라보며 고맙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고 그 이후로도 참가자들과 여러 대화를 나누며 정현석은 대학생 세대를 이해하려 누구보다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
“진보당 3석 그리고 우리 당은 3석을 가져왔습니다. 사민당과 대안당은 당선인이 없고요.”
지훈은 밤늦게 오늘 있었던 재보선의 결과를 정현석에게 보고하고 있었다. 정현석과 의원실 보좌진들은 재보선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야근을 하고 있었다.
“광역 의회와 기초 의회 재보선도 우리 당이 두 당보다 많은 당선자를 배출했습니다.”
지훈의 보고에 정현석은 만족스럽다는 듯 주먹을 꽉 쥐고는 흔들어댔다.
“예상외의 결과네.”
“네. 언론에서도 우리 당은 영남에서만 승리할 것으로 봤지만, 빼앗겼던 기존의 우리 당 강세지역 한 곳을 다시 찾아왔습니다.”
“좋아. 김무길 비대위원장님 곧 임기가 마무리되는데 아주 좋은 결과를 남기고 가실 수 있어서 정말 정말 다행이야.”
정현석은 다음 달 종료되는 김무길의 비상대책위원장 임기를 내심 마음에 두고 있었다.
이번 재보선이 성공적으로 끝이 나야 김무길은 당 개혁이라는 아주 큰 정치적 자산을 남기고는 정계 은퇴를 할 수 있었다.
김무길 본인 또한, 재보선 결과야말로 자신이 당을 제구실할 수 있게 만들었는가에 대한 지표라고 늘 말해왔기 때문이다.
“이제 의원님께서 그 자산을 넘겨받으셔야 합니다.”
“그래. 나는 이제 뒤로 안 물러날 거야. 같이 갈 거지?”
“당연합니다. 설마 저를 두고 가시려고 했습니까?”
정현석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지훈을 향해 피식 웃었다.
“새끼, 아닌 거 알면서 실없는 소리 하지 말고 따라와. 인마.”
정현석은 사무실 밖으로 나가 의원실 보좌진들을 향해 손뼉을 한 번 크게 치고는 결연에 찬 눈빛으로 모두를 바라보았다.
“이제 저는 당 대표직에 도전할까 합니다. 그다음은 더 높은 곳까지 향할 거고요.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저를 위해 열심히 일 해주었습니다.”
정현석이 말을 하다 말고 90도로 고개를 숙이자 보좌진들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제 더 힘들지도 모르겠습니다. 염치 불고하고 말하겠습니다. 조금만 더 저를 위해 함께 해주십시오.”
정현석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들고는 보좌진들을 바라보았다.
박주미와 막내는 붉어진 두 눈을 훔치며 정현석을 바라보았고, 김용일은 오히려 정현석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부족합니다만, 원하시는 자리까지 올라가실 수 있도록 열심히 돕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내가 너무 분위기를 이상하게 만들었네. 다들 퇴근합시다. 수고 많았습니다.”
정현석의 말에 보좌진들은 하나둘 짐을 챙겨 의원실을 나서기 시작했고, 정현석은 문 앞에 서서 보좌진 한 명 한 명의 손을 맞잡으며 교감을 나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