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 I the only one in the apocalypse who thinks the genre is weird? RAW novel - chapter 3
응? 저건 어디선가 들은 것처럼 익숙한 내용이긴 하다. 뇌를 간지럽히는 것처럼 기억이 날 듯 말 듯 아련한.
“내가 분명히 기억해달라고 했잖아요. 저를요.”
“어?! 너!”
그 꼬맹이다. 내가 강제로 식물인간이 된 후, 쉘터의 보호막을 유지하기 위한 인간 토템으로 누워서 숨만 쉬던 시절, 처음부터 끝까지 내게서 떨어지지 않고 10년을 넘게 지켜 준 아이.
얼굴도 모르고, 나이도 모르지만,
“유다연?!”
이름과 목소리만은 잊을 수 없는, 잊어서도 안 되는 고마운 아이이며,
“촌장 오빠. 다시 만나서 정말 기뻐요.”
“…미친!!”
무엇보다 내가 회귀할 거라고 단언했으며, 이제는 자신 역시도 돌아왔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신비한 아이가 내 앞에서 해맑은 웃음을 보이며 서 있었다.
“어, 어! 그래! 일단 들어와!”
자살하려던 사람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지만, 유다연을 집으로 데리고 들어와 냉장고를 뒤져 이제는 헤어진 여자친구가 좋아하던 비싸기만 하고 맛은 별반 차이도 없는 스타벅스에서 나온 병 커피를 꺼내서 내놨다.
“어쩐 일……. 아니. 아니지. 일단 반갑다?”
“저도요. 다시 보니까 너무 좋아요. 오빠.”
낑낑거리며 열심히 커피의 뚜껑을 열려고 노력하다가 간신히 성공하고 해맑게 웃으며 대답하는 모습에서 한치의 걱정이나 근심도 보이지 않다. 염세적이지도 않고.
“그럼 다시 만나서 이런 말을 꺼내서 미안한데. 무슨 일이야?”
“안 돼요. 오빠.”
“뭐?”
“안 돼요.”
해맑게 웃던 아이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다. 주어도 목적어도 없는 말이지만, 난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알아들었다. 동시에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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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흑당라떼 아시는구나.
“안 돼요.”
잠이 덜 깬 것처럼,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몽롱하던 뇌에 시린 얼음을 쏟은 것처럼 저 한 마디에 정신이 돌아왔다. 유다연의 눈동자가 명징하게 보이며 그 눈에 담긴 의지가 읽힌다.
“후우. 좋아. 여기서 무슨 소리냐는 눈치 없는 소릴 하진 않을게.”
끄덕.
순순히 인정하자 단발머리가 찰랑일 정도로 기분 좋게 끄덕이는 고개가 보인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종말이 멈췄나? 그 빌어먹을 것들이 침략하는 게 취소되기라도 했어?”
“아뇨.”
“그럼 혹시 연기? 종말이 미뤄지나?”
“아뇨.”
“…그런데 안 된다고?”
빌어먹을! 그럼 그렇지! 괜히 사람을 기대하게 만들고 말이야! 하마터면 억울해서 눈물이 나올 뻔했다. 억울하고 화가 난다. 회귀? 염병! 이 세상이 평범한 세상이라면 나도 좋지! 감사하다고 108배라도 할 수 있다. 그런데!
“나보고 다시 그 빌어먹을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라고?! 그것도 자원해서?!!”
“오빠.”
“왜!!”
“미안해요.”
와. 돌아버리겠다. 진짜. 저 말은 곧 어떻게 해서도 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다. 한숨이 저절로 나오는 상황에서,
“하지만.”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면서 당차게 하지만이라는 말을 내뱉는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 거예요. 아니, 달라요!”
“달라? 뭐가? 종말이 조금 약하게 온대?”
“…그건 아니에요.”
“그럼 뭐가 달라? 회귀하기 전과 다르게 내가 아무것도 안 하고 숨만 꼬박꼬박 쉬고 있어도 되는 건가? 아니지. 난 회귀 전에도 숨만 쉬고 있었지. 척추에 칼이 박혀서. 눈동자만 움직이는 채로.”
“…….”
유다연이 마치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게 그때서야 눈에 들어왔다. 따지고 보면 이 아이 잘못은 아닌데.
“에휴……. 다 좋아. 좋다고. 그런데 왜 하필 나야? 다른 놈들 많잖아! 그 누구야. 미국의 그놈. 플레이어? 게이머? 그 새끼는?”
“걔는 진짜 그냥 개씹덕이에요. 완전 병신이라고요. 그 새끼 회귀시켰으면 사람 살릴 생각 안 하고 게임할 생각부터 했을 걸요?”
“그, 그래. 씹덕인 건 인정. 어휴. 등신 새끼. 그러면……. 그, 그래! 그 여자는? 그 엑스칼리버의 주인이라고 소문이 무성했던 백인 여자! 그 여자 엄청 세더만!”
“아. 걔는 그냥 힘만 세요. 전형적인 돌격형 무장이라고요. 걔가 돌아왔으면 오자마자 사람부터 썰고 다녔을 걸요? 마이너스 카르마 포인트 모은다고?”
“젠장! 반박을 못 하는 게 더 열받아. 좋아! 이 남자는 너도 이해할 걸? 프랑스의 ‘왕’? 그 남자는?”
“…오빠. 그 남자는 오빠보다 먼저 죽었잖아요. 멍청하게 퍼주기만 하다가.”
“나는! 나는 뭐 달라? 난 애초에 몸 쓰는 데 재능이 없어! 그렇다고 지능캐냐? 아니야! 나 완전 빡대가리라고! 그리고 나도 어디 가서 꿀리지 않을 개호구야!”
“아니에요! 오빠는! 대단해요!”
아오! 진짜. 저렇게 해맑게 진심으로 칭찬을 해주는데 한 대 쥐어 박을 수도 없고!
“대단하긴 뭐가 대단해! 내가 대단했으면! 그랬으면 병신처럼 식물인간으로 10년을 살진 않았겠지!”
“그건 그 사람들이 나쁜 거잖아요!”
지구가 멸망으로 치달을 때, 생존을 위해 태어난 초능력자 혹은 능력자가 생겨난다. 이들을 각성자라고 부르고. 애초에 내가 회귀를 했음에도 죽겠다고 결심한 이유도 이 각성에 있다. 내 각성 능력이 전투 계열이 아니라는 것. 난 쉘터 계열 각성자다.
“그래. 그 새끼들이 나쁜 아니, 개새끼들이지. 그런데 뭐? 회귀하면 그 개새끼가 착한 새끼가 되나?”
“그건 아니지만.”
“아니지만?”
주저하며 입술을 달싹거린다. 말하기를 주저하는 건가?
‘아니.’
그건 아니다. 뭔가 비밀을 말할까 말까 망설이는 게 아니라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걸 내가 알아차린 순간,
“흐응~.”
유다연의 분위기가 돌변한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아니, 사람이 아닌 것처럼. 그녀를 중심으로 공기가 몇 배는 무거워진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착각? 이게 착각이 맞아? 이건 마치…….’
“역시 각성을 했던 흔적이 영혼에 남아 있는 걸까? 전투 계열도 아니었는데, 생각보다 기감(氣感)이 좋구나~.”
같은 사람에게서 같은 목소리가 나왔는데 무언가 엄청 다르다. 톤이나 대화 내용을 말하는 게 아니다. 어깨를 공기 대신 덤벨을 잔뜩 얹은 역기가 얹힌 것처럼 주변 공기의 질이 달라졌다.
“너……?”
“너라니. 말을 조심하는 게 좋지 않겠니? 네 본능이 속삭이는 대로?”
확실히. 저거 아니, 이 여자 아니, 이분은 인간이 아니다. 절대 아니다.
“그래. 존댓말을 잊지 마. 내가 지금은 기분이 별로거든. 사기 당한 걸 알게 돼서.”
사기? 무슨 사기? 분위기만 봐도 인간이 아닌, 고차원적인 존재 같은 사람도 사기를 당해?
“일단 배달 어플? 그것 좀 해봐. 난 그거. 흑설탕 들어가서 달달하고 또 달달한 그거. 거기에 시럽 7번 펌핑. 화가 나니까 단 게 너무 당기네.”
아, 흑당라떼 아시는구나. 난 그거 별로던데. 너무 달고 흑설탕 냄새 나서.
“알아. 넌 얼죽아아지? 얼어 죽어봐야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쓴 물을 안 찾을 텐데. 그것도 심지어 샷 추가해서 먹지? 어디의 약골 작가랑 식성이 똑같네. 그러니 몸이 아프지.”
네? 작가요? 저는 작가가 아닌데요?
“됐고.”
되긴 뭐가 돼. 무슨 대화가 이렇게 일방적이야. 난 지금까지 한 마디도 안 했는데!
“내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아?”
궁금해. 안 그래도 물어보려고 했다고.
“어라? 말이 점점 짧아지네?”
말이 짧아지기는……, 요. 엄밀히 따지면 아직 입도 뻥끗 안 했는데.
“생각도 존중과 존경을 담아서 하라고.”
아, 예. 제가 제 머릿속에서 하는 생각조차 마음대로 못하는 거군요. 대단하신 분이시구나~. 그래서 누구신지?
“까불다가 나중에 후회할 텐데. 아, 이러면 알아차리려나?”
“흐업?!!”
내가 죽기 직전, 뇌리에 꽂히던 그 목소리다!
종말 이후, 인간이 악독한 악의 속에서 버틸 수 있게 된 원동력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종말이 지구를 찾아오게 만든 존재들!
“그래. 내가 바로 그 지구의 여러 의지 중 하나란다.”
유다연의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엄청난 말을 해댄다. 평소와 달리 주문한 지 5분도 되지 않아 도착한 시럽을 7번이나 펌핑해서 저 음료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뇌가 시릴 정도로 단 흑당 라떼를 쪽쪽 빨면서!
회귀 전, 생존자들에게는 신으로 추앙 받던 존재가 지구의 의지다. 그런데 그런 존재가 고등학생 여자 아이의 몸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점심 먹었냐고 물어보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그녀의 얼굴은 여러 의미로 나를 소름 돋게 했다.
“일단 오늘은 준비가 덜 되었단다. 갑작스럽게 나온 거라서. 아직 이쪽이 알아봐야 할 정보와 처리해야 할 것도 많고. 간단하고 명료하게 정리하자. 아이야.”
예? 준비요? 무슨 준비요? 아니, 그것보다 무슨 대화가 이렇게 일방적이야?!
“일단 들으렴. 우리는 네가 아무런 대책 없이 다시 멸망의 시간으로 걸어가라는, 무책임하고 무작정 희생을 강요하진 않는단다.”
오! 역시! 배우신 분! 그럼 이제 저 죽으러 가도?
“그건 아니고!”
쳇.
“일단 네가 해야 했을 일부터 하렴. 다음 주 월요일. 그때 다시 만나서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마. 하지만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네가 알아둬야 할 건.”
해야 했을 일? 다음 주 월요일? 아아. 로또 말하시는 건가?
“그래. 그거. 무엇보다 네가 명심해야 할 건 이번에는 다를 거라는 거다. 우리가, 지구의 의지가 그 빌어먹을 것들을 명백하게 ‘적’으로 규정했으니까.”
그녀의 단호한 목소리는 마치 수십 만 대군의 출병을 알리는 군주의 선전포고를 떠오르게 했다.
“어떠니? 해볼 만 하지 않지 않겠니?”
“글쎄요. 일단 준비 정도는……. 해보죠. 어차피 지금 죽으나 시작하고 나서 죽으나 죽는 건 언제든 선택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 잘 생각했어. 아, 그리고 하나 더. 이 아이 좀 잘 챙겨줘. 살뜰하게.”
“네?”
툭―.
거기까지만 말하고 그대로 유다연의 목이 꺾인다. 그리고 졸다가 들킨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드는 유다연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어 있다.
“너 괜찮아?”
“아, 오, 오빠! 그, 그러니까……! 이건!”
“챙겨주라고 하시던데. 그것도 살뜰하게? 너 무슨 문제 있어? 집에는 말 하고 왔어?”
“아. 저 은빛 보육원 출신이라고 몇 번이나 얘기했었는데. 오빠 기절해 있을 때. 그래서 오빠가 나온 신문 기사도 봤다고.”
“…아아.”
은빛 보육원.
세상이 망해가던 순간 내가 전투 계열 각성자가 아니라, [지주(地主)]로 각성할 수 있게 된 원동력이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또 다시 잊고 있던 기억이 토독토독 피어오른다.
조금 전, 전 여자친구의 개지랄에 떠올린 흑역사와 달리 따뜻하고 뿌듯한 기억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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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안녕하세요.
심행입니다.
오늘도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편이 있습니다.
좋은 밤 되세요 🙂
이거 왜 이렇게 많이 줘?
〈 회상 〉
“진짜 빡세게 개욜로다!”
시한부 인생에 갑자기 찾아온 로또 당첨. 욜로를 외치고 보름 정도를 돈 쓰는 재미와 노는 재미로 보내던 어느 날. 그날은 노는 게 아니라,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지루해졌냐고? 그럴 리가!
놀아봤냐? 그것도 근 스무 살 이후 8년을 아등바등하며 아끼며 살다가 로또를 맞아서 돈이 넘쳐난 상태에서?
절대 지루할 수 없다. 특히나 하루하루 점점 심해지는 통증을 진통제로 참으면서 내 삶이 얼마 안 남았다는 걸 실감하고 있는데, 지루할 리가 없지.
내가 갑자기 노는 걸 멈춘 이유는 별것이 아니다. 오랜만에 널브러져서 TV를 보고 있는데 메신저가 왔다. 봉사활동을 하는 단체 채팅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