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136
136화. 떠나는 이, 찾아오는 이
못해도 스무 장의 거리에 떨어진 고보의 흙벽이 박살 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내지른 권력과 더불어서 소명의 발 구름이 땅을 크게 뒤흔들었다. 먼지가 무섭게 솟았고, 그 뒤로 어느 인영이 나가떨어졌다.
붉은 달빛이 다하여서 새벽녘이 밝아올 무렵이라 검푸른 하늘 아래로 그의 모습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검은 천을 뒤집어쓴 나무 인형과 달리 그것은 하얀 천으로 온몸을 휘감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이라는 것이 큰 차이였다. 피를 토하여서 입가가 축축하게 젖은 것이 멀리서도 뚜렷했다. 기괴한 꼴의 그는 퍼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마찬가지로 눈구멍도 없이 천을 휘감고 있었지만, 소명을 보는 눈길은 선명했다. 그는 두려움에 흔들리고 있었다.
소명은 고개를 기울인 채, 그를 지켜보다가 느릿하게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자 그는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나더니 내처 물러섰다. 도망을 택한 것이다. 하얀 천이 꼬리처럼 길게 남아 마구 요동쳤다. 소명은 바로 뒤를 쫓으려다가, 일순 멈칫했다. 덜그럭 소리가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소명은 입매를 한껏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돌렸다.
널브러진 인형의 목이 돌아가더니, 턱이라고 있는 것이 덜커덕하고 벌어졌다. 그 안에서 주먹만 한 붉은 구슬 여럿이 데굴데굴 굴러 나왔다. 소명은 그 모습에 짧게 혀를 찼다.
“쯧!”
그는 인형을 냅다 걷어차 버리고는 서둘러 뒤로 물러섰다. 인형은 검은 천 자락에 뒤엉켜서 굴렀다. 이내 들썩거리더니 천 사이로 붉은빛이 번뜩였다. 충분히 불길한 신호. 소명은 엉거주춤한 암객들에게 버럭 소리쳤다.
“엎드려!”
아무리 넋을 놓고 있다지만, 그렇게 멍청한 작자들은 아니었다. 외침이 다하기도 전에 그들은 일제히 흙바닥에 고개를 처박았다. 때를 같이하여 폭발이 일었다.
수백의 벼락이 일시에 내리꽂히는 듯했다. 땅이 들썩이고 붉은 불꽃이 무섭게 치솟았다. 폭발의 위력은 생각 이상이어서 암객들마저 집어삼킬 듯했다. 소명은 한숨을 짓씹으며 암객의 전면을 막아섰다. 다른 도리가 없다. 새빨간 불길이 무섭게 달려들었다. 그런데 폭발의 위용은 실로 잠시간에 불과했다. 불길이 어느 한쪽으로 남김없이 휩쓸리더니, 이내 검은 연기구름과 함께 흩어져 버렸다.
소명은 시커멓게 타버린 흙바닥을 밟고서, 검댕이 그득한 손바닥을 대충 털었다. 폭발을 그대로 감당한 탓이었다. 아무리 곤음수의 손바닥이래도 저릿저릿했다. 소명은 고개를 흔들며 피식 웃었다.
“화탄을 도대체 몇이나 품고 있었던 거야? 아주 무리하셨구만.”
그는 새삼 폭발이 일어난 자리를 바라보았다. 폭발로 깊이 팬 땅바닥은 검게 타 있었고, 곳곳에는 잔불이 남아 넝마 꼴인 검은 천 조각을 야금야금 태워 먹고 있었다. 그는 입매를 찌푸리고, 괴인의 진체가 모습을 감춘 곳을 돌아보았다.
“뭐, 여하간에 오랜만이었소. 흑백괴상(黑白傀常).”
소명은 쓴웃음을 그린 채 중얼거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그의 등 뒤에서 다섯의 암객이 먼지를 옴팡 뒤집어쓰고서 연신 마른기침을 터뜨렸다.
“쿨럭! 쿨럭!”
“크헥, 아이고!”
소명의 곤음수 덕분에 큰 화를 모면했지만, 여력에 휩쓸려 나가떨어진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기침 사이로 앓는 소리가 흘렀다. 소명은 그네들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는 곧 큰 소리 나게 두 손을 힘차게 마주쳤다.
짝!
손뼉 소리가 크게 울렸다. 암객들은 그 소리에 흠칫 고개를 치켜들었다. 기침이고 앓는 소리고 딱 그쳤다. 소명은 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안녕들 하시오.”
* * *
붉은 천 자락이 하늘거렸다. 살짝 열어놓은 창가로 흙과 꽃 냄새가 흐릿하게 뒤섞여서 바람과 함께 스며들었다. 창 아래에는 놓다가 만 자수가 수틀에 걸려 있었고, 색색의 비단 실이 실패 바퀴에 걸려서 길게 늘어져 있었다.
아침이 밝아올 무렵이었다. 새벽녘의 노을빛이 살갑게 비추는데, 붉은 옷자락을 길게 늘어뜨린 이가 등 돌리고 앉아서 경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곱게 다듬은 손가락이 세심하게 움직여 입술을 살며시 더듬었다. 붉은 연지가 잘 먹어서 입술은 한층 도톰했다. 면경으로 자신의 모습을 유심히 비추었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화장을 하고 살피는 모습은 신중했다. 검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고는 좌우로 고개를 돌리며 틀어 올린 머리카락을 톡톡 밀어 올렸다. 그제야 만족한 듯 미소를 머금었다. 불현듯 빨간 꽃잎을 올린 듯이 동화(瞳華)를 그린 미간이 일그러졌다.
“허락도 없이 무슨 일이오.”
고운 입술이 벌어지며 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불쾌한 심정이야 어떻든, 자태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거친 목소리였다. 그러자 방구석에 내린 그늘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불쑥 솟구쳤다. 망령인 양 흔들리더니, 이내 하나의 실체로 화했다. 그렇다고 꼴이 다를 것은 없었다. 검은 천으로 온몸을 둘둘 말고 있어 사람이 아닌 듯이 보이긴 마찬가지였다. 천 아래에서 쇠붙이를 긁어대는 듯한 목소리가 울렸다.
“요선.”
음산한 한기가 맴돌았다. 마치 서리가 앉을 듯한데 요선이라 불린 이는 그것을 탓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공들여 화장하는 중에 누군가 들어왔다는 것이 불쾌할 따름이었다. 괴인은 그 심정을 아는 모양이었다.
“급한 일이라, 알면서도 그만 들어오고 말았소. 미안하구려.”
검은 꼴의 괴인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렇다고 불편한 심기가 풀리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타박하지는 않았다. 그는 흐린 동경으로 자신의 외모를 다시 한 번 살피고는 곧 고개를 돌렸다. 분칠하여 곱게 단장한 얼굴에 입술은 붉었고, 눈가에는 분홍 칠을 옅게 하였으며, 그린 눈썹은 길고 짙었다. 두 눈썹 사이에 동화의 붉은 꽃잎이 다섯 장 내려앉아 있었다. 하얀 목이 드러나는 하늘빛 짧은 저고리에 붉은 비단 자락을 어깨에 걸쳐서 길게 늘어뜨렸다. 마찬가지로 풍성한 붉은 치맛자락도 곱게 펼쳐놓았다. 둥근 도자기 의자에 허리를 세워 앉은 자태는 분명 고왔지만, 화사한 화장과 붉은 치맛자락이 무색하게도 그는 여인이 아니었다.
요선, 본래 이름 하기로는 천약요선(天約妖仙)이라 하는 일대의 기인이 바로 이 사람이다. 그는 그린 눈썹을 살짝 치켜들고 괴인을 노려보았다. 칠한 눈가에서 눈빛이 서늘하게 빛날 새, 창을 통해서 들어오는 햇빛이 온기를 잃고 스산하게 흐려지는 듯했다.
“그래, 무슨 급한 일입니까.”
“권야, 그자가 나타났소.”
괴인은 거두절미하여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약요선의 얼굴이 일순 딱딱하게 굳었다. 곱게 화장한 것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치켜든 눈썹이 바르르 떨렸고 애써 미소 지은 붉은 입술도 들썩거렸다. 심중의 격동을 도무지 달랠 수도, 감출 수도 없었다. 괴인은 자리에 우두커니 있을 뿐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천약요선에게 권야라는 이름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괴인은 잘 알고 있었다. 요선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무리하게 여유를 가장하며 말했다.
“권야? 아니, 뜬금이 없어도 정도껏이지요. 권야, 그자가 어찌 산서 땅에 나타난다는 말입니까?”
괴인은 답하지 않았다. 그라고 해서 연유를 어찌 짐작할 수 있을까. 그 한 문장이 전할 수 있는 전부였고, 또 그가 아는 전부였다. 요선의 검은 눈썹 끝이 바짝 올라갔다가 이내 아래로 처졌다. 답이 없다는 것은 곧 괴인도 모른다는 뜻이다. 요선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숨을 삼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아요, 저 이역만리에 있을 권야가 산서에 나타났다면 응당 조심해야겠지요. 내 아랫것들에게 지시를 내려놓겠습니다. 그것이면 되겠지요, 묵월(默月).”
“그것이면 되었소. 이른 시간부터 방해해 죄송하외다.”
괴인은 요선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뭐라 하여도 강호신비라 손꼽히는 강시당, 그리고 강시당의 실세인 요선이 하는 말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괴인은 요선이 손을 쓴 이상, 적어도 산서에서 권야의 종적을 놓칠 리 없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그는 온다 간다는 말도 없이 고개를 숙이는 것과 동시에 모습을 감췄다. 그림자 속에서 불쑥 솟구쳤던 것처럼 그림자 아래로 꺼져서는 어디에도 자취가 없었다.
천약요선은 그린 눈썹을 차갑게 가라앉힌 채, 묵월이라는 자가 모습을 감춘 방구석을 노려보았다. 냉기가 흐를 새, 그는 붉게 칠한 입술을 열어 험악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래, 무슨 수작질을 벌였길래 구적(仇敵)을 마주했다던가.”
권야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요선은 묵월이 속한 곳을 떠올리며 노기를 감추지 않았다. 언뜻 드러난 하얀 잇새가 맞물리며 ‘으득’ 소리가 흘렀다. 그러나 천약요선은 경지를 이룬 무인, 그는 이내 심중을 다잡고 고개를 돌렸다. 가까이 있는 놓다 만 원형 자수틀에는 색색의 꽃잎이 아직 여물지 못하여서 수줍은 봉우리를 맺고 있었다. 자수를 지켜보는 요선의 눈길에 햇빛의 장난인지 아련한 빛이 잠시 어리는 듯했다. 그러나 이내 신경질적으로 손을 떨치고는 급히 자리를 나섰다. 미닫이문이 열렸다가 큰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런데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 드는 모양이었다. 색 실패를 걸어놓은 여러 개의 바퀴가 덜걱거리며 돌아갔다. 그러자 자수의 실이 풀려나가며 맺다가 만 꽃봉오리가 한 송이, 한 송이 지워져 나갔다. 이윽고 자수틀에는 하얀 비단 자락만이 남아서 펄럭거렸다.
* * *
새벽하늘이 온전히 밝아왔다.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든지 간에, 인세(人世)의 일과는 무관하게 하늘의 도리는 흔들림 없이 이루어졌다. 북서에서 불어 드는 누런 바람이 신경질적으로 흙바닥을 할퀴고 지나쳤다. 오랜 세월 동안 버려져 있던 진성의 외딴 고보를 찾아오는 손님은 보통 거친 모래바람이 전부였다. 그런데 이날은 몇몇 사내들이 있어서, 고보의 구석에 맥없이 주저앉은 채 아침때를 맞이하고 있었다. 누런 바람이 흩어지는 사이로 드리우는 햇살이 희뿌옇기만 했다.
암객이라 하는 자들 다섯은 고보의 구석에 주저앉아서 혼이 쏙 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간밤에 워낙 큰일을 겪기도 하였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사람 아닌 자에게 크게 시달렸고, 거기에 더해 눈앞에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지금 살아 있는 것이 용할 지경이었다. 다섯 쌍의 눈동자는 노소(老小)할 것 없이 지쳐서, 폭발이 일어난 구덩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색 바랜 남색의 장삼을 걸친 사내가 주변 흔적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의 모습을 보기가 무섭게 흐리멍덩한 눈동자에 힘이 바짝 들어갔고, 기운 없이 축 늘어진 어깨도 덩달아 들썩였다.
‘그, 그 사람이 맞지요? 탄지공의 고수.’
암객 중 막내, 조가가 한껏 소리를 낮추어서 속삭였다. 행여 들릴세라 가슴 졸이는 모습이었다. 그러자 좌우에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섯 모두가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눈앞에 일어난 폭발의 여력으로 전신에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깊은 통증이 있었다. 위치는 각기 달랐지만, 당한 것은 같은 순간이었고 같은 사람에게서였다. 흑선당 소당주와 마주하였던 불명의 고수, 바로 눈앞의 사내였다. 그러니 살았음에도 살았다고 안도할 수가 없었다. 사내를 추적하기로 한 벽운 차롱은 대체 어디로 가 버리고, 저 이가 이곳에 있단 말인가. 덕분에 목숨을 구한 것은 사실이지만 대가로 무엇을 토해내야 할지 몰랐다.
‘하이고, 가슴 떨려.’
‘노대, 어쩌면 좋겠소?’
‘일단, 일단은 지켜보세.’
그들은 행여나 사내의 눈길을 끌까 두려워서 입을 꾹 다문 채 눈짓, 손짓으로 말을 주고받았다. 어쨌든 몸을 뺄 수도 없는 처지였다. 엉망인 몸 상태도 그렇지만 그에게서 도망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리고 암객의 심중이야 어떻든 사내, 소명은 사방으로 흩어진 검은 천 자락을 살폈다.
“흑백괴상, 하는 짓거리는 하나 달라지는 게 없구만.”
입가에 쓴웃음이 짙었다. 그는 피식거리고는 천 자락을 툭 던졌다. 낮은 목소리에 조소가 뚜렷했다. 그는 손에 묻은 검댕을 털어내고 허리를 세웠다. 불편한 속내가 솔직했다.
“하남 땅에서는 등용문이더니, 산서에서는 흑선당인가? 이것 참.”
소명은 입매를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멀리 천산 어귀에서 얌전히 몸을 웅크리고 있어야 할 자들이 무엇을 위해서인지 자꾸 고개를 내밀어, 소명 앞에서 얼쩡거리고 있다. 그는 고개 돌려 모래 섞인 바람이 불어오는 서북방을 헤아렸다. 눈매는 착 가라앉아서, 스산한 기세가 맴돌았다. 그는 잠시나마 이를 드러냈다.
“거슬려, 부쩍 거슬린단 말이지.”
소명은 이내 그 속을 다잡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다섯의 암객은 충분히 긴장하여서 소명의 눈치를 보던 참이었다. 그들은 소명의 눈길에 공연히 놀라서 어깨를 한껏 들썩거렸다. 입술은 굳게 말아 물고 크게 치뜬 눈동자가 좌우로 요동쳤다. 더없이 동요하고 있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소명은 가볍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힘든 하루였구려, 그렇지 않소?”
악의 없는 웃음이다. 그는 폭발이 일어난 구덩이에서 걸어 나왔다. 다섯 암객은 대꾸는커녕 숨소리도 내지 못했다. 가까이 다가온 소명의 모습만 빤히 볼 뿐이었다. 그네들 낯빛이 누구 할 것 없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언뜻 고요하게 보이지만, 눈앞의 사내는 괴인보다 더욱 두려운 자가 분명했다. 입을 꾹 다물고 눈치만 살피는데, 암객 중 하나가 애써 입을 열었다.
“귀, 귀하는 대체 누구십니까?”
소명의 고개가 그에게로 향했다. 얼굴이 붉은 암객, 홍귀자였다. 급한 성질머리를 어찌하지 못하고 대뜸 묻고 나선 것이다. 소명은 그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치렁한 앞 머리카락이 눈가를 가리고 있었지만, 언뜻 드러나는 맑은 눈초리가 홍귀자의 웅크린 복심을 예리하게 찔렀다. 홍귀자는 흠칫 어깨를 들썩이며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그가 감당하기에 소명의 시린 눈빛은 무거웠다. 붉은 얼굴이 검게 죽어갔다. 물론, 소명은 홍귀자를 비롯한 다른 암객들을 겁박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웃음을 삼키고 새삼 차분하게 말을 건넸다.
“그래,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시오?”
되묻는 말에 홍귀자는 마른침이나 삼킬 뿐, 딱히 답할 수가 없었다. 소명은 싱긋 웃어 보이고 바닥에 떨어진 죽립을 집어 들었다. 괴인의 폭발에 휘말려서 너덜너덜해진 탓에 다시 쓰기는 글렀다. 한쪽 귀퉁이가 손을 대기가 무섭게 바스러졌다. 소명은 입매를 찌푸리며 부서진 죽립을 멀리 날렸다. 그리고 긴장한 암객들을 다시 보았다.
“그래, 암운이시라고요.”
‘들었구나!’
혹시나 하여 가슴 졸이고 있던 사실을 확인하고 말았다. 누구는 눈을 질끈 감았고, 누구는 푹푹 고개를 떨구었다. 소명이 누가 되었든지, 괴인의 심문을 이기지 못해 미주알고주알 떠들어댄 모습을 보이고 만 것이다. 이 수치를 어찌 이겨낼 수 있을까.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는데, 소명은 한쪽으로 걸음을 옮겨서 쓰러진 바위에 걸터앉았다. 폭발에 휩쓸려서 고보의 토벽이 무너지는 통에 떨어진 바위였다. 그는 곧 편히 있으라는 듯이 암객들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그럼 간단히 얘기해봅시다.”
“무슨 얘기를?”
소명은 의아해하는 암객들에게 웃으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