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236
236화. 등용(騰龍)
“천룡, 괜찮으십니까.”
“응? 아하, 괜찮네. 안 괜찮을 것이 없지. 그저 아쉬울 뿐.”
“천룡.”
“너무 억지로 사람을 잡으려 하였던가.”
천룡은 고개를 돌렸다. 먼 곳을 보는 눈길에는 안타까움이 그득했다. 그런데 천룡을 보는 수하들의 얼굴이 언뜻 기이했다.
뭔가 못 볼 것을 보았다는 듯이 심히 민망한 얼굴이었다. 그렇다고 차마 말을 꺼내지도 못하여서 다들 고개를 돌리고, 분분히 딴청이었다.
주변 기척이 사뭇 기이하니.
“응? 너희 어찌 그러느냐?”
“그것이, 저어.”
천룡이 직접 묻는 말이다. 어찌 바로 답하지 아니하고 저리 머뭇거린다는 말인가.
“어허, 내 묻지 않느냐.”
차분한 목소리에 위엄이 새삼 일었다. 그런데 더욱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움츠리기에 급급했다. 그 판에 왕여정이 말했다.
“조부님. 코피가 흐릅니다.”
“응? 어엉? 아이쿠, 언제!”
천룡은 찔끔하여서 코 아래를 더듬었다. 아닌 게 아니라 진득하니 붉은 피 하나가 쪼륵 흘러내렸다. 코피만 문제가 아니었다. 한쪽 눈두덩이도 시퍼렇다.
소명은 바득바득 이를 갈아붙였다.
“망할! 헛소리라도 아주 작작하셔야지. 그게 뭔! 아이구!”
한 대 더 날리지 못한 것이 아쉬울 지경이다. 백보신권으로 바닥을 때리면서, 동시에 탄지신통으로 솟구치는 돌 파편을 연이어 날렸다. 모든 것이 채 반호흡 새에 일어났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천룡마저 금강부동신법이라고 여겼지만, 실상은 수미금강권 상에서 전하는 법문 한 줄로, 정극광(淨極光)의 보신경이다.
정한 빛이 닿지 않는 곳이 없으니 궁극의 보신경,
그렇게 에워싼 천룡대야와 천룡 무인의 눈을 피했다. 벗어나기가 무섭게, 날 듯이 뛰어서는 천룡궁의 외곽에까지 이르렀다.
물러나는 길은 여기서 멀지가 않다. 아직 궁에는 일행이 있었지만.
소명은 잠시 미간을 모았다. 짐짓 심각한 기색이었다.
“에이, 뭐 애들도 아니고. 어련히 알아서 처신하겠지.”
심각한 것은 잠깐, 소명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함의 뒤끝이 좀 걱정되지만, 그뿐이었다. 나중에 시달리면 될 일이다.
천룡세가에서, 천룡대야를 암습한 것이나 다름없건만. 소명은 조금도 크게 여기지 않았다. 손을 쓸 만하니까, 손을 썼다. 뭐가 문제인가.
아주 당당하다.
소명은 여하간에 숨을 잠시 돌렸다. 그러다가 문득 손을 내려다보았다.
“천외천이라더니.”
하늘 밖에는 또 하늘이 있다.
육절이라 손꼽히는 것이 심히 민망한 일이다. 천하오대고수가 어느 정도인지 헤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에 오르지는 않더라도, 천룡대야 또한 근접한 고수임은 분명했다.
천룡은 무수한 여력을 남기고 있었다. 아마 천룡이 자신을 붙잡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면, 이렇게 몸을 빼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소림공부가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천룡대야의 경지가 그렇게 드높은 것이다. 소명은 픽, 실소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서라, 아서. 소림의 공부는, 그리고 나의 공부는 선무(禪武)에 있지 않으냐. 무공으로 하늘에 오른다고 하늘이 더 없겠느냐.”
천룡대야와 굳이 비교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도 그렇지. 소명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 아무리 그래도 그런 말은 너무 심했지. 사람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더 심한 말이 수십이나 떠오른다. 소명은 그래도 애써 자제했다. 아직은 천룡궁 안에 있다. 주변 눈치를 살살 살피는데, 소명은 잠시 숨을 멈췄다.
멀지 않은 곳에서 기척이 있었다. 하필이면 딱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이런.’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었다. 소명은 입술을 살짝 물고서 허리를 낮추었다.
지금 소명이 있는 곳은 온갖 기화요초가 한껏 자라 있는 선경(仙境)이었다.
드넓은 정원으로, 옥돌을 다듬어서 벽을 둘렀고, 물을 내어서 실개천이 졸졸 흘렀다. 남방에서나 자라는 키 크고, 잎 넓은 나무가 무수하게 서서 군을 이루었다.
개천 위로 연기가 송골송골 솟아올랐다. 흐르는 온천이다. 아닌 게 아니라, 담 바깥과는 달리 이곳은 후끈하여서 덥다 할 정도였다.
‘여기도 뭔가 심상치 않은 곳인 듯한데.’
어디인지 알고 들어선 것이 아니었다.
가장 가까이에 몸을 숨기기에 적당하여서 뛰어든 것에 지나지 않았다. 분명 없는 기척이 갑자기 나타났다. 그것은 기척의 주인이 경지가 드높거나, 아니면 너무 병약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소명은 숨죽인 채, 채 키보다 높이 자라있는 꽃잎 뒤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빠끔하게 고개를 내밀었다.
졸졸, 물 흐르는 소리 위로, 사르락 옷자락이 끌렸다.
구름처럼 머리를 올리고, 궁의 성장을 한 여인이었다. 여인은 느릿느릿 걸으면서 정원을 거닐었다.
작은 옥돌을 빼곡하게 깔아서 길을 만들었고, 흐르는 온천물 위로는 작은 구름다리가 놓여 있었다.
여인은 구름다리 위에서 멈춰 섰다. 난간을 잡고 선 채, 고개를 치켜들었다. 흐르는 물소리에 귀 기울이는 듯, 바람에 퍼져가는 꽃내음을 맡는 듯.
참으로 고요한 모습이다.
그런데 여인은 이내 고개를 돌렸다. 정확하게도 소명이 웅크린 곳을 향해서였다.
“거기 누구신가?”
“…….”
소명은 찔끔했다. 사뭇 난처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가만 살피니, 여인은 이쪽을 보면서 조금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숨은 것이 전혀 소용없는 일이다.
“크흠.”
소명은 헛기침하고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삼가 결례를 범하였습니다. 부인.”
“그대는 뉘신가?”
“아, 저는…….”
“전혀 기억에 없군. 가문의 사람이 아닌 모양이야. 그렇지?”
여인은 턱을 갸웃거렸다. 그런데 눈길이 망연하다. 얼굴은 소명을 향해 있지만, 눈길이 어딘지 모를 곳을 헤아리고 있었다.
소명은 바로 답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런.’
여인은 보지 못한다.
다리 난간을 잡은 하얀 손가락을 더듬으면서 여인은 이쪽으로 한 걸음을 움직였다. 불현듯 조심스럽던 걸음이 삐끗했다.
“엇.”
휘청하는 몸이 위태하다.
소명은 대번에 거리를 좁혀, 넘어질 듯한 부인을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부인.”
“아, 괜찮네. 괜찮아.”
그리고 귀부인은 탁한 눈을 들었다. 어깨를 받친 소명은 곧 한 걸음 물러섰다.
“죄송합니다. 제가 경황이 없어서, 그만 부인의 정원을 침범하였습니다.”
“음, 신경 쓰지 마시게. 딱히 금지도 아닌 곳인 것을. 그보다…… 그렇군. 가문의 큰 은인이라는 것이, 귀하로구려.”
“어디 큰 은인이라고 할 것까지야.”
“덕분에 죽은 줄 알았던 부군이 돌아왔고, 내 두 아이가 목숨을 부지했다니. 그보다 큰 은인이 어찌 있겠소이까.”
귀부인은 눈감으며 환히 웃어 보였다. 부인의 말대로라면, 천룡세가의 안주인이라는 뜻이다. 소명은 멈칫하였다가 재차 두 손을 맞잡았다.
“천룡대부인이시로군요. 졸자(拙者)는 소림 속가, 소명이라 합니다.”
“그러시구려. 헌데 바깥이 이리 소란한 것이 아무래도 은공을 찾는 것 같은데.”
“예, 아마도 아니. 확실히 저를 찾는 것이겠지요. 하하.”
소명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 어색함이 사뭇 기이했다. 귀부인은 하얀 얼굴을 갸웃했다. 다른 곳을 보지만, 탁한 눈가에 의아한 기색이 역력했다.
소명은 입술을 지그시 말아 물었다.
난처하기는 한데, 그리 말 못 할 일은 아니다. 소명은 헛기침 한 번 하고서, 말했다.
“실은 제가…….”
“어머나.”
천룡대부인은 퍼뜩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놀란 소리가 절로 나왔다. 앞뒤야 어떻든, 부군인 천룡대야에게 손을 썼다는 게 아닌가.
그런데 부군의 걱정보다, 천룡대부인은 그만 교소를 터뜨렸다.
부인의 웃음소리는 맑고 흥겨웠다. 옆에 있는 소명이 듣기에는 심히 민망한 일이었다.
‘아이쿠, 이런.’
“하아, 미안해요. 미안합니다. 소명 공.”
부인은 눈가에 글썽한 눈물을 소매로 찍어냈다. 겨우 진정하는 듯했지만, 그래도 어깨가 들썩거렸다.
“근래에 이보다 더 재밌는 일은 들은 바가 없구려.”
천룡대부인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들었다.
“괜찮으십니까?”
“하하, 괜찮지 않을 것은 또 무어랍니까. 그 사람이 쉽게 당했을 리도 없고. 주변의 어수선거리는 모양이, 어수선하기는 해도, 살기가 충천한 것도 아니니. 그저 낭패나 당한 정도이겠지요.”
천룡대부인은 한숨으로 겨우 웃음을 다잡았다. 대부인은 상황을 정확하게 짐작하였다. 크게 당황할 일도 아니다. 그리고 곧 소명에게 손을 내밀었다.
“부축 좀 해주겠어요. 같이 들어가서 차라도 하지요.”
“예, 부인.”
소명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내민 부인의 손을 팔에 얹고서 같이 걸음을 옮겼다. 정원을 따라서 안쪽의 내실로 향했다.
사방으로 창을 내어서 드나드는 바람에는 정원의 향기가 고스란히 머물렀다. 그곳에는 한 사람의 시비가 있어서, 다소곳한 모습으로 차를 우려내고 있었다.
시비는 다른 문양 없이 소박한 하얀 옷차림이었고, 긴 머리를 좌우로 땋아 올려서 둥글게 말아 올렸다. 하얀 얼굴에 눈 아래에는 주근깨가 가득했다.
앳된 모습으로, 막 스물에 들어선 듯했다.
“부인, 차를 다 준비, 어맛!”
시비는 소명의 모습에 놀라서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자 천룡대부인이 다른 손을 흔들었다.
“놀라지 마라, 놀랄 것 없어. 여기 이분은 가문의 귀한 은인이시다.”
“예, 부인.”
“이분께 차를 권해드려야겠구나.”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놀란 시비는 잠시 움츠러들었지만, 바로 고개를 숙였다. 돌아서서는 가슴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시비는 능숙하게 찻물을 준비했다.
데운 찻잔에 녹황색을 머금은 찻물을 길게 따랐다. 쪼르륵 소리가 맑게 울렸다.
넓고, 천장 높은 내실에 마련한 자리에서 세 사람은 우선 말이 없었다.
천룡대부인은 금룡을 수놓은 보료 위에 편히 앉아서 눈을 감고 있었다. 이는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듯했다. 마주한 자리에 소명이 앉았다.
따로 할 일도 없고, 할 말도 없는지라, 소명은 주변을 차차로 살폈다.
굵은 기둥은 붉게 칠했고, 주변에 다른 집기는 없어서 단출하다 싶을 정도였다. 그래도 하나, 하나가 명장의 손길이 아닌 것이 없었다.
그야말로 고아함과 기품이 차분하게 흘렀다.
“대협, 받으시지요.”
그 사이, 시비가 차를 권하였다.
“고맙습니다.”
“별말씀을요.”
시비는 슬쩍 고개 숙인 소명의 모습에 괜스레 얼굴을 붉히고는 종종걸음으로 물러섰다. 그리고 바로 대부인의 곁으로 가서 조용히 섰다.
“어찌 생기신 분이더냐?”
“네?”
대부인은 문득 짓궂은 미소를 머금고서, 시비에게 물었다.
시비는 퍼뜩 놀라서 눈썹을 치켜들었다. 소명이 찻물을 머금다 말고 흠칫 고개를 돌렸다. 둘이야 어떻든, 천룡대부인은 여전히 미소를 띠었다.
“어찌 생기셨는지, 참으로 궁금하구나. 어찌 설명 좀 해보련?”
“대, 대부인. 계신 자리에서 제가 어찌 감히.”
“호오, 네가 머뭇거리는 것을 보아하니. 참으로 못생겼나 보구나?”
“그건 아닙니다!”
시비는 바로 답했다. 그러고는 아차 하여서 어깨를 들썩거렸다. 주근깨가 어린 눈 아래가 괜스레 붉어졌다. 그러고는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몸을 배배 꼬았다.
소명은 목에 걸릴 뻔한 찻물을 간신히 넘겼다. 그리고 헛기침 몇 번을 겨우 흘렸다.
“크흠, 크흠.”
“하하, 이거, 이거. 내가 은인을 당황하게 하였구먼.”
“천룡께서도 그러시더니, 대부인께서도 그러시는군요.”
“그야 부창부수(夫唱婦隨)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아이쿠.”
이럴 때에 쓰는 말 같지는 않았지만, 소명은 고개만 흔들었다. 그런데 시비는 별빛을 머금은 것처럼 초롱초롱한 눈으로 소명을 빤히 보았다.
호기심도 호기심이었지만, 그것보다는 호감이 더욱 뚜렷했다.
그리고 슬쩍 고개를 낮추어서는 대부인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소명의 외견을 설명하는 것이다. 아무리 숨죽여서 속삭인다지만, 소명이 어찌 듣지 못하겠는가. 그저 난처함에 소명은 고개를 돌리고, 찻물만 들이켰다.
‘딱 보아도 호남입니다. 어깨가 엄청 단단하고, 머리는 크게 손질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단정한 편이어요. 앞머리가 들쑥날쑥하여서 눈 아래까지 다 가리지만, 턱이 갸름하고, 입매가…….’
뭘 그리 소상하게도 설명하는지.
천룡대부인은 귀 기울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대공자와 닮으신 듯해요.’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