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64
64화. 은원(恩怨)이란 따로 있지 않다
파팟!
골목길을 돌아서기가 무섭게 소명과 홍유선은 모습을 감췄다. 채 몇 호흡이나 지났을까. 백의를 걸친 사내가 그 골목 어귀에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접선을 손에 든 그는 흑선당의 소당주, 백운당이었다.
소명의 뒤를 따르던 그였다. 며칠 새에 몰골이 많이 추레해졌다. 하얗고 바짝 날이 섰던 비단 옷자락이 지금은 형편없이 구겨지고 때가 타서 거뭇했다.
돌봐줄 매향이 없으니 이 모양이었다.
급히 소명의 뒤를 쫓아서 골목에 들어선 그는 어이없는 얼굴로 햇빛 짱짱한 골목길을 바라보았다.
“이, 이게 뭐야? 대체 어디로 꺼진 거야?”
그리 오래 눈을 뗀 것도 아니었는데. 어떤 징조도 없이 모습을 감춰버린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황하는 그의 뒤에 스윽 매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홍유선을 감시하고 있던 중이었다.
“역시 놓치셨나요.”
그녀의 묘한 말에 백운당은 확 눈살을 찌푸렸다.
“역시는 무슨 뜻이냐? 역시는?”
“서둘러 움직이지요.”
매향은 사뿐히 백운당의 삐친 말을 무시하며 재촉했다.
“아니, 어디 간 줄 알고 움직이자는 거냐?”
“사람이 쓰러졌는데 달리 어디를 가겠어요? 보나마나 의원을 찾겠지요.”
* * *
홍유선은 번쩍 눈을 떴다. 그녀는 누운 채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이쪽저쪽으로 눈동자를 굴려 지금 누운 곳을 확인했다.
크게 낯설지는 않은 곳이었다.
‘여기가 어디더라…… 아!’
곧 떠올린 그녀는 누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머리에 얹고 있던 차가운 물수건이 툭하고 떨어졌다.
“일어났느냐?”
묻는 목소리는 송 의원이었다.
“대사형, 제가 왜 여기에 있나요?”
“그야…… 소명 그 친구한테 물어보려무나.”
“아!”
담담한 송 의원의 말에 홍유선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기억해낸 것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소명을 찾겠다고 정주일대를 헤매지 않았던가. 그녀는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러나 곧 휘청하더니, 다시 침상에 주저앉았다.
“어?”
무릎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게다가 가만히 있음에도 눈앞이 크게 기울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당황한 그녀에게 송 의원이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열사병이다. 이 미련한 녀석아.”
“열사병이요? 사형, 저 철방의 여식이에요.”
“거, 이 녀석이. 철방 사람은 어디 땀도 안 흘린다더냐?”
송 의원이 버럭하고 면박을 주었다. 그 서슬에 홍유선은 입술을 말아 물었다.
홍유선의 열사병은 상태가 심해서 자칫했다가는 생사가 오락가락할 지경이었다. 이렇게 정신이 들었다고 해서 다 나은 것이 아니란 말이었다.
“대체 얼마나 헤집고 돌아다녔던 거냐?”
“그냥 반나절 정도…….”
“이 더위에?”
송 의원은 기가 차다는 듯이 되물었다. 홍유선은 헤헤 웃어보였다.
장인지의 집에서 소명이 온다간다는 말도 없이 사라진 것이 수상해 한참 정주 곳곳을 헤집고 다녔던 것이었다. 바짝 열이 뻗친 상태에서 그러고 다녔으니.
웃는 홍유선 모습이 어이없어 송 의원은 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 화제를 돌리기 위함인지 홍유선이 물었다.
“그나저나, 소명 그 사람은요?”
“오늘은 우리 의사에 약재를 날라주는 날이거든.”
“그래서요?”
“그래서는 무슨. 지금 뒤에 약재창고에 있다는 말이지.”
송 의원의 말대로 소명은 뒤편 약재창고에서 지고 온 약재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좀 전에 초용이 와서 홍유선이 깨어났음을 알려주었다.
한결 마음이 놓였다.
자칫 홍유선이 잘못 되기라도 했으면 홍화철방의 홍 노반뿐만 아니라, 노 노사를 뵐 면목이 없다. 작두로 약재를 거침없이 썰어가던 손이 잠시 멈칫했다.
창고 밖으로 흐르는 구름이 맑았다. 소명은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대체 뭐라고 둘러대나.”
열사병으로 쓰러지기 직전까지 자신을 감시하겠다고 돌아다녔으니. 어지간한 핑계로는 홍유선을 진정시킬 수 없을 터였다. 그렇다고 팽가의 이야기를 털어놓자니 그 또한 마음에 걸리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것 같았다.
소명은 피식 웃고는 고개를 돌렸다. 오래 고민하지는 않았다. 눈앞에 일이 먼저였다. 부지런히 손을 놀려 약재를 다듬고 정리했다.
오늘따라 일이 많았다. 등 뒤에 약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한참도록 묵묵히 일하던 소명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낯선 기척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송 의원이나 초용의 편한 기척이 아니고, 흑선이니 뭐니 하는 자들처럼 숨죽인 기척도 아니었다.
조심스런 기척이 창고 앞에서 목소리를 내었다.
“저, 계십니까?”
문이 빠끔하게 열리며 하얀 얼굴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 얼굴을 소명은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상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녀는 크게 놀라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쳤다.
“엇! 당신은 새벽에!”
여인은 팽문빙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지른 소리에 놀라서 두 손을 입을 덮었다. 놀란 그녀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 웃음을 참고 소명은 손을 털고 일어섰다. 그는 물었다.
“이곳은 어떻게 오셨는지요?”
“야, 약재를 구하러 왔습니다. 약재상을 찾았더니 제가 찾는 약재가 전부 이곳으로 갔다고 하여…….”
“그렇습니까.”
주저하는 그녀 모습에 소명은 그저 빙긋 웃어보였다.
팽문빙은 허락을 얻어 약재를 챙겼다. 그리 귀한 약재도 아니었고 많지 않은 양이었지만 챙기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그녀는 흘깃 고개를 돌렸다. 소명이 묵묵히 약재를 손질하고 있었다.
“저…….”
그녀의 조심스런 음성에 소명은 고개를 들었다.
“달리 찾으시는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아, 아뇨. 저…… 아까는 제대로 감사하다는 말도 드리지 못했습니다. 제가 경황이 없어서.”
더듬거리며 겨우 말했다.
“팽가의 문빙이라 합니다.”
팽문빙은 새삼 낯을 가다듬고 예를 취했다. 공수하여 고개 숙이는 그녀 모습에는 명가의 풍모가 엿보였다. 소명은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가 허겁지겁 일어섰다.
약재 가루로 지저분한 손을 급히 털고 그도 손을 맞잡았다.
“하남인 소명입니다.”
“하남…….”
팽문빙은 고개 숙인 채 잠시 눈매를 모았다. 기억을 뒤져보지만 모르는 이름이었다. 숙부인 팽오성과 어떤 관계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눈치를 보는 듯하던 그녀는 슬쩍 물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저희 오숙과는 어떤 관계이신지…….”
“……음.”
그 물음에 소명은 그만 말문이 막혔다. 딱 꼬집어 무슨 사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칼을 겨눈 사이? 손목을 부셔버린 사이? 무슨 사이?
팽문빙은 소명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긴 앞머리에 가려져 있었지만 난감해하는 기색을 엿볼 수 있었다.
‘뭐지…….’
고개를 갸웃하며 저도 모르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때 생각을 정리하고 고개를 든 소명과 눈이 딱 마주쳐버렸다.
“핫…….”
팽문빙은 당황해 급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귓불이 순식간에 뜨겁게 달아올랐다.
소명은 고개 들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저는 팽가의 두 분을 그렇게 만든 사람입니다.”
팽문빙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소명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지금…… 뭐라고…….”
순간적으로 멍해져서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더듬거리며 되물었다. 그러나 소명은 다시 말하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 약재를 정리했다.
우두커니 서 있던 팽문빙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녀 또한 강호의 재녀(才女)라 불리는 사람이었다. 사정을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팽오성이 그리 말을 않던 속사정 또한.
‘그럼, 그날의 일이…….’
그녀는 곧 심각하게 얼굴을 굳혔다.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팽문빙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고개 숙이고 일에 집중하는 소명을 보는 그녀의 눈이 달라졌다.
침묵 끝에 그녀는 입을 열었다.
“단순히 감사하다는 말로는 부족하겠군요.”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상념을 어찌어찌 정리한 모양이었다. 소명은 흘깃 눈을 들었다. 그러자 팽문빙은 냅다 무릎을 꿇고 아예 대례를 올렸다.
“아니, 왜, 왜 이러십니까?”
아무리 소명이라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다급히 달려가 그녀를 붙잡았다. 그러나 팽문빙은 끝까지 머리를 조아렸다.
“아니, 팽 소저.”
“…….”
팽문빙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소명은 과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팽문빙은 아니, 팽가의 입에서는 결코 과례가 아니었다. 그녀는 무릎을 꿇은 채 소명을 올려다보았다.
“팽가삼죄를 아십니까?”
그녀의 물음에 소명은 멈칫했다. 강호의 정세에는 무지하다고 하나, 아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명가라는 곳이 어디는 아니 그렇겠느냐만, 팽가의 가법은 엄하였다. 그 중 특이한 가법이 따로 있었다.
적에게 등을 돌리는 자, 도객의 수치.
적에게 사정을 구한 자, 무인의 수치.
적에게 구명을 받는 자, 가문의 수치.
이른 바, 팽가삼죄(彭家三罪)라 했다. 소명 역시 들은 바 있었다. 이 삼죄의 죄를 범한 이는 작게는 가문에서 축출되며 크게는 생명을 잃는다고 했다.
소명은 팽문빙이 뜻하는 바를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팽오성을 그리고 두 오라비의 앞날을 걱정하는 것이었다.
팽오성은 그 중 가장 큰 것을 어긴 셈이었다. 적에게 구명을 받는 것도 모자라 직접 청하기까지 하였으니.
엎드린 팽문빙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질끈 문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무엇을 어이하면 좋을까. 그때, 소명이 말했다.
“그럼, 적이 아니면 되지 않겠습니까?”
“예?”
팽문빙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에게 소명이 말을 이어갔다.
“저는 팽가에 대해 어떤 감정도 없습니다. 적의를 품을 것도 호의를 품을 것도 없지요.”
“……그건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뜻밖의 말에 당황한 그녀에게 소명은 웃어보였다. 일견 말장난처럼 보이지만, 뜻은 명확했다. 팽문빙은 주저하다가 곧 마주 미소를 보였다.
의사에서의 일을 모두 마무리 짓고 소명은 집으로 돌아왔다. 남호동으로 들어서자 날이 어둑했다.
“아이고, 소명 총각. 이제 들어가는 건가?”
“오늘은 좀 이르구먼?”
이웃들이 소명을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었다. 저녁을 마련한다고 분주한 모습들이었다. 굴뚝에서는 하얀 연기가 몽글하게 솟았다.
소명은 마주 인사하며 골목길을 지났다. 그리고 문 앞에 섰다. 문고리를 잡으려던 손이 멈칫했다.
얼굴의 미소가 설핏 굳었다. 그는 닫힌 문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너머의 기척이 심상치 않았다. 잠시 가만히 있던 그는 문을 툭하고 밀었다. 문고리에서 끼익하는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드러난 마당의 풍경.
장씨 모녀가 아니라 다섯의 낯선 사내들이 마당에 서 있었다. 그들은 문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소명 소협이십니까?”
문 앞에 선 소명을 향해 다섯 사내들이 일제히 공수했다. 그러나 소명은 무심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무슨 용무시오?”
“저희는 담가에서 왔습니다. 가주께서 소협을 청하십니다.”
선두에 선 사내가 말했다. 담 가주가 청했다. 결코 가벼운 일은 아닐 것이었다. 그러나 소명의 얼굴에는 다른 변화가 없었다. 가부간의 말이 없이 바라보고 있으니, 공수한 채 고개 숙인 사내들의 목이 탔다.
“저…… 갑작스런 일이라 불쾌하실 줄은 압니다만…….”
“정 부인과 장 소저는 어디에 계시오?”
소명은 길어지려는 담가 가인의 말을 뚝 끊고 물었다. 낮은 목소리에는 기이한 무게가 실려 있었다. 그는 퍼뜩 고개를 들고 서둘러 답했다.
“두 분은 가주 대행께서 청하셨습니다. 하여, 지금 본가에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가주 대행?”
소명은 낯선 이름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서둘러 말했다.
“지금 이공자께서 가주 대행직을 수행하고 계십니다.”
이공자라면 담아인.
소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른 말없이 가인들을 지나쳐 내실로 들어갔다.
담가 가인들은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그들은 달리 어찌할 수 없었다. 그저 자리만 지켰다. 이곳에 오기 전 가주 대행에게 신신당부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거슬리는 짓은 하지 마라, 담가의 위세를 내비치지 마라. 그러나 담아인의 거듭된 당부가 아니더라도 문 앞에 소명의 모습을 마주한 순간에 경시하는 마음이 일시에 사라져버렸다.
치렁한 앞머리 사이로 자신을 쏘아보는 담담한 눈빛에 저도 모르게 가슴 한쪽이 싸늘하게 식어버리는 것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두, 두려운 눈이었다.’
다른 것은 떠오르지 않았다. 마른침을 겨우 삼키며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곧 소명이 손을 털며 밖으로 나왔다.
두 손 가득 들고 있던 짐을 정리한 참이었다. 그는 굳혔던 낯을 풀었다. 마당에서 어찌할 바 몰라 하는 담가 가인들에게 말했다.
“앞장서시오.”
“예!”
가인 다섯은 기다렸다는 듯이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들은 서둘렀다. 가주의 명이었다. 어찌 소홀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