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sassin necromancer RAW novel - Chapter 125
독일의 칠성, 율리안 첸빌츠.
그에게는 사실, 다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이 하나 있었다.
“…말씀대로 일단은 물러났습니다. 테시우스님.”
– 잘했다. 다행히 최악의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군.
이제는 모두가 변동의 날이라 부르는 그 하루, 율리안은 죽음의 위기 속에서 특별한 기연을 얻었다.
바로 이계의 영혼 테시우스가 그 주인공이었다.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우연의 일치로 차원을 넘어온 테시우스.
그의 도움을 통해 율리안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동시에, 그날부터 그와 함께 지내며 많은 것을 배우고 전수받았다.
이제 테시우스는 율리안의 하나뿐인 스승이었으며, 가족이었다.
그리고 조금 전 전투 당시, 그런 테시우스가 이렇게 말했다.
백은하와는 절대로 척을 져선 안 된다고.
‘지금껏 이런 식으로 선을 그으신 적은 없었다.’
즉, 그만큼 테시우스는 백은하에게서 특출난 무언가를 보았다는 것이 분명했다.
의문이 담긴 시선을 건네자, 영혼 상태의 테시우스는 나지막이 말을 이어나갔다.
– 율리안 자네도 어렴풋이 느꼈겠지. 그녀는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예. 확실히 기이한 느낌을 받긴 했습니다.”
– 나 역시 모든 것을 파악한 건 아니지만, 짧은 순간 볼 수 있었네. 그녀의 안쪽에 자리 잡고 있는 거대한 존재를.
“거대한 존재 말입니까?”
그런 표현은 처음이었다.
던전 속 유적에 잠들어 있던 저주받은 보물도, S랭크 던전의 보스였던 고대의 거신병도 모두 별것 아니라는 태도를 보였던 테시우스다.
그런 그가 지금 이 순간 백은하에게는 두려움에 가까운 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러한 사실에 율리안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어쩌면 헛것을 봤는지도 모르지. 그것은, 절대 한낱 인간이 얻을 수 있는 힘이 아니었으니까.
“…그녀의 실력이 그 정도란 말입니까?”
– 내가 있던 행성에서도 그만한 존재는 만나보지 못했다. 아마 그녀가 진짜 힘을 발휘한다면, 이 행성 자체를 서서히 죽음의 땅으로 물들이는 것조차 불가능한 일이 아니겠지.
완전히 스케일이 다른 표현이다.
행성 자체를 통째로 무너트린다니? 그런 일이 가능해지려면 대체 어느 정도 경지에 올라야 할지 율리안으로서는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그럼, 테시우스 님께서 전성기의 육체를 되찾는다 해도 이길 수 없다는 말입니까?”
– 그렇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아예 결이 다른 힘이다. 저 정도의 격을 가진 존재라면 어딘가에서는 신으로 떠받들려도 부족하지 않을 게다.
“…….”
정말로 백은하의 힘이 그 정도라면, 확실히 테시우스가 그리 다급하게 싸움을 말렸던 이유가 있었다.
적어도 지금의 율리안으로서는 도무지 닿을 수 없는 경지다.
“그렇지만, 그녀에게서 그 정도의 힘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라이언을 상대로도 압도한다는 이미지는 아니었죠.”
– 그 부분은 나도 의문이구나. 딱히 힘을 아껴두는 듯한 기색도 없었고, 손대중을 해줄 성격도 아닌 것 같았지. 하지만 뭐가 됐든 건드려서 좋을 일은 없는 상대다. 앞으로는 가능한 마주치지 마라.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제 스승은 지금껏 허튼 말을 내뱉은 적이 없다. 그러니 율리안 역시도 일단은 최대한 백은하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고자 마음을 정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훗날 그녀와 관련해 예기치 못한 불상사가 생기게 된다면, 다름 아닌 자신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국민들을 지켜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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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산동 부근에 위치한 백서하의 집.
그곳에는 지금 평소 이상으로 수많은 사람이 모여 혼돈의 장을 만들고 있었다.
자비에와 예시엘, 송하연과 이지철, 헤네시아와 아스트리데.
거기에 이제는 한국 헌터 협회와 정부에서 급히 파견된 인사들까지.
그 모두가 대화 주제로 삼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헤네시아와 아스트리데 두 사람에 관한 것이었다.
“그래서, 뭐 어떻게든 처리는 됐다고?”
“…예. 그렇습니다. 놀랍게도 두 나라 모두 이후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전의 일은 죄를 묻지 않겠다 전언을 보내왔습니다. 아마 독일의 칠성인 율리안 님의 입김이 있었을 것이라 사료됩니다.”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나? 영문을 모르겠네.”
그것은 비단 나만의 생각이 아니었는지, 자리에 있는 대다수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중 가장 큰 의문을 보여온 것은 다름 아닌 자비에였다.
“율리안과는 이전 몇 번인가 마주쳐 본 적이 있네. 허나, 내가 알던 그와는 조금 다른 행동 방식이군.”
“…아무래도 그쪽 역시 무언가 생각하는 바가 있다는 거겠지.”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는 문제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우리는 곧바로 다음 안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결론적으로 타국에서는, 우리 대한민국 측에서 두 분의 신변을 책임지고 맡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입장입니다. 허나, 정작 두 분의 의견이 어떠할지는…….”
“고민할 게 있나? 어차피 선생님이 속해 있는 곳이니까.”
“…나도 상관없어. 그렇게 해.”
“가, 감사합니다!”
생각 이상으로 골치 아픈 고민거리였던 것인지, 정부 측의 인사들은 헤네시아와 아스트리데에게 몇 번이고 감사를 표했다.
하긴, 실제 사이가 어떻든 그녀들을 거두었다는 것만으로 한국의 위상은 지금보다 훨씬 높아질 것이다.
비록 비공식적인 전투였다곤 하지만, 칠성과 붙어서도 밀리기는커녕 오히려 우세를 점했던 두 사람 아닌가?
게다가 실상을 알고 보니 그 둘을 억제할 방법 역시 눈앞에 있다.
테베 기준으로 헤어진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내 말이라면 껌뻑 죽는 두 사람이었으니까.
“그나저나 놀랍군요. 설마하니 인위적인 차원 이동이 가능했을 줄이야…….”
“안될 게 뭐 있어? 당장 나도 그렇게 왔는데.”
“예?”
그 말에 부협회장과 정부의 인사들이 금시초문이라는 눈빛으로 내게 시선을 돌렸다.
어라, 이건 내가 말을 안 했던가?
“백은하 님께서는 다른 귀환자분들과 같은 방식으로 지구에 돌아오신 게 아닌가요?”
“애초에 난 그 말 자체가 생소해. 이쪽은 백 년이 지나도 돌려보내줄 낌새조차 없더만.”
참으로 불공평한 일이다. 누구는 자동 반송 시스템으로 지구에 돌아와 부귀영화를 누리고, 나는 아득한 시간 동안 온갖 시행착오를 겪어서야 갖가지 부작용을 겪으며 귀환하고.
이게 무슨 차별 대우란 말인가?
“그, 그렇군요. 혹시 지금의 사항은 상부에 보고해도 괜찮겠습니까?”
“맘대로 해. 딱히 비밀도 아니었고.”
“생각할 것이 많아지네요. 그 말이 사실이라면 또 다른 누군가가 자력으로 지구에 넘어올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는 것인데…….”
확실히 가능성의 유무를 따지자면 그 말이 맞다.
나도, 아스트리데와 헤네시아도 넘어왔는데 다른 행성의 누군가가 지구로 전이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으니까.
다만, 그 확률은 무척이나 희박하다. 그에 관해서는 헤네시아가 단호히 의견을 내뱉었다.
“이쪽의 경우는 명확한 좌표, 그리고 협력자가 있었어. 특히나 차원 이동이란 것은 무척 섬세한 영역이야. 애초에 이 행성과 연관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넘어올 수는 없을걸?”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바로 그때, 줄곧 이야기를 경청하던 서하가 입을 열었다.
“그럼 던전은 어떻죠? 문외한인 제가 듣기에, 오히려 그 차원 이동이란 것은 던전의 출현과도 상당히 유사해 보이는데.”
그것은 또 새로운 관점이었다. 허나, 나 역시 이전부터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던 사항이기도 했다.
서하가 내 가족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헤네시아가 조금 부드러워진 태도로 그에 답했다.
“확실히 던전과 관련된 현상은 흥미로워. 아직 경험해보지 못해 단언은 못 하겠지만, 이 경우에는 이미 상대가 지구에 관한 명확한 좌표와 통로를 가지고 있고, 목적성까지 지니고 있다고 봐야겠지.”
“그럼 던전 사태가, 일종의 의도를 품은 외부인의 침략이라는 겁니까?”
“그렇게까진 말 안했어. 그렇지만 가장 단순히 생각하면 그런 식으로 보인다는 거지. 적어도 자연스런 현상은 아닐걸?”
결국, 수많은 전문가들이 주장했던 대로 던전의 출현은 인위적인 사태라는 것이었다.
이것만큼은 나 역시도 헤네시아와 같은 의견이었다.
“거참, 오늘 여기서 예상 밖의 충격적인 소식을 여럿 듣게 되는군요.”
“만일 이런 현상을 일으킬 수 있는 자가 있다면, 그 힘의 총량은 대체…….”
너무 분위기가 무거워지자, 헤네시아는 손뼉을 쳐 적당히 주의를 돌리며 말을 내뱉었다.
“너무 고민들 하지 말자고. 뭐가 됐든 다 추측일 뿐이니까. 그보다 이젠 다들 조금 다들 비켜줬으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나눌 이야기가 많아서.”
“…아무래도 그게 좋을 것 같군요.”
슬슬 화제도 떨어진 참이었기에, 외부인들은 저마다 인사를 건네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저마다, 속으로는 수만 가지의 복잡한 고민을 품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