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159
*
류신은 두 눈을 부릅떴다.
놀라운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수연을 이끌어가는 유명의 전문가같은 능숙함, 수연의 과거를 자신이 연기해서 수연에게 객관적으로 보게 한다는 놀라운 발상, 그리고 보는 사람의 마음이 아릴 정도로 안타깝고 설득력있는 연기, 그걸 보고 정말로 끌려나온 수연의 감정.
언제나 웃고 있지만, 진짜 웃음인지조차 아리송하던 그녀가 화를 내고 눈물을 흘린다.
지난 몇 달간 그녀를 가르쳐 오며, 과연 그녀의 감정이 밖으로 드러나는 때가 올까 우려하던 자신의 걱정이 산산이 깨졌다.
마주본 고통에 몸을 떠는 그녀의 모습이 무척 안쓰러우면서도,
이제야 살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잘했어.”
유명이 달달 떠는 그녀의 등을 다독였고,
그 팔에서 수연은 한참을 꺽꺽 울었다.
“수연아, 봐.”
이윽고 조금 진정한 그녀, 유명이 주의를 끈다.
그녀가 새빨간 눈을 들어 그를 올려다 본다.
“네가 감정을 표현해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
“화를 내면, 소리지르면, 네가 힘든 걸 표현하면 세상이 무너질 것 같았지? 네가 망가질 것 같고.”
조심스레 끄덕여지는 머리.
“그런데 봐.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아. 너도 변하지 않았고, 나도, 그리고 네 엄마도. 표현한다고 상황이 나아지진 않겠지만, 나빠지지도 않아. 그러니까···”
수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가 다정하게 미소지었다.
“표현해도 돼. 그럼 최소한 네 마음이라도 덜 곪으니까.”
“…네…”
“네가 드러내지 않으려고 닫아 걸어둔 감정들이 많이 있을 거야. 그 감정들을 찾아가 보자. 그 모든 과정에서 꼭 기억해야 할 건,”
“……”
“화내도 돼. 너는 피해자야.”
그 말에 수연이 다시 한 번 눈물을 뚝뚝 떨궜다.
너무 어릴 때부터, 모든 것이 제 탓이라는 비난을 들으며 컸다. 자신의 인생이 그녀 때문에 망가졌다고 비난하던 엄마는, 그녀가 자라서 아름답게 피어날수록 그녀가 즐기고 행복해하는 모든 것들을 질투하고 증오했다.
네 잘못이 아니야. 너는 피해자야.
담당 주치의도 볼 때마다 해주었지만, 와닿기 전에 늘 마음의 성벽에 튕겨나갔던 말.
비로소 그 말이 온전히 와닿았다.
*
그로부터 13일.
그녀는 매일 한 살씩 어려져 갔다.
그녀를 위해 미호가 개발했다는 새로운 방법은, 한 해 한 해를 거슬러 올라가며 억눌러 놓았던 말과 감정을 불러오는 것이었다.
“싫어! 자르지마! 예쁜 것은 아무것도 사 주지 않아서 유일하게 소중히 길렀던 머리였는데…도대체 나한테 왜 이래요. 나 진짜 딸 맞아요?”
원망.
“소풍…나도 가고 싶어. 김밥은 안 싸 줘도 돼요. 나 점심 안 먹어도 되니까···보내주기만…”
소망.
“언젠가는 엄마가 나를 좋아해 줄 날이 올까? 엄마 말 잘 들으면…언젠가는?”
희망.
유명과 류신은 19살, 18살, 17살…7살의 그녀를 만나면서 울컥하는 눈물을 애써 참아야 했다.
그러나 마지막 날, 예쁜 머리띠를 사달라고 떼를 쓰다가, 엄마의 굳은 표정을 보고 잘못했다고 안 그러겠다고 비는 그녀를 보고, 결국 돌아서 입술을 깨물었다.
형벌같은 유년기를 보낸 그녀의 삶에, 앞으로는 행복만이 있기를 기도했다.
모든 과정을 끝내고 나서, 그녀가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오빠, 선배님…힘든 시간에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분은 제 은인이에요.”
그런 그녀를 무표정하게 바라보던 류신이 툭- 한마디를 던졌고,
“나도 오빠라고 불러.”
그녀는, 처음보는 듯한 밝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네, 오빠.”
{나도 오빠라고 불러랑.}
13일 내내 유명의 입을 통해 그녀를 이끌어 온 미호가, 대견한 눈빛으로 옆에서 덧붙였고, 유명이 그것을 듣고 피식 웃었다.
‘네 은인은 따로 있단다, 수연아.’
유명은 미호에게 마음깊이 감사했다.
사이코 드라마를 시작하기 전에 그녀에게 말했다.
과정은 어려운 데 비해 상처가 치유되는 것은 아니라고.
그렇다. 일어난 일은 돌이킬 수 없고 상처받은 마음은 그대로 남아있다.
이 과거는 평생동안 그녀의 상처로 남아, 불쑥불쑥 그녀를 괴롭힐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와 마주보았다.
말하지 못하고 속에 쌓여만 있던 수많은 말을 뱉어냈다.
그리고 표현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는 순간순간 슬픔이 치솟아도, 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화가 나면 화를 내고 기쁘면 웃으리라.
그리고 그 아픈 감정들을 연기를 통해서 발산하고, 거기서 오는 충만감이 그녀를 서서히 치유하리라.
“독백 하나 해볼까?”
유명이 그녀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넸다. 그것을 읽으며 감정을 잡아가는 그녀의 손이 떨린다.
이제는 정말로, ‘몰입’할 수 있을까.
그녀가 눈을 감고, 숨을 작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작은 어깨가 들썩였다.
“시작해 볼게요.”
그녀의 첫 ‘연기’가 시작되었다.
*이 글의 자문에 응해주신, 정신과 전문의 K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끝
ⓒ 글술술
현대 사실주의 연극의 대가인 안톤 체홉의 작품.
등장하는 세 자매중 막내, 일리나의 대사를 수연은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왜 이 대사를 골라줬을까.’
수없이 연습해 본 대사였다.
일리나라는 인물의 성격, 배경, 이 대사를 말할 때의 감정. 모든 것이 수십 수백번 분석되어 머리에 있다. 다만 몰입하지 못했을 뿐.
지금은 어떨까.
‘일리나…나는 일리나.’
때는 러시아 혁명 직전.
하루하루 변화없이 반복되는 평이한 삶에 권태를 느끼고, 변화를 갈구하는 사람들.
그 안에서도 일리나는 밝고 귀여운 막내이지만,
한 번씩 왈칵 올라오는 두려움과 어딘가 마음 속에 자리잡은 우울함은 그녀에게도 있다.
훅…하고 그녀의 눈빛이 돌변한다.
“중위님은 인생이 멋있다고 생각하시는군요.”
멋있다. 라는 단어에 어울리지 않게 슬픔이 반짝인다.
“나와 우리 언니들에게는 여태까지 멋있는 인생 따위는 아직 없었어요. 인생은 마치 잡초처럼 우리들이 자라는 길을 막고 있었어요.”
잡초같은 인생에 대한 회한. 멋있는 인생에 대한 갈망. 주륵 무언가가 흐른다.
밝은 목소리, 밝은 표정. 하지만 참을 수 없이 터져나오는 눈물.
그녀는 재빨리 눈물을 닦고 미소를 짓는다.
“일해야 해요, 일을 해야. 어쩌면 멋진 인생이 없었던 것은 일을 하지 않아서 일거예요. 일일일!!”
류신은 그녀의 첫 연기를 보고 등골이 찌르르했다.
‘기술은 아직 조악하지만···’
호흡, 제스처, 문장과 문장 사이의 간격.
많이 가르쳐 놓았다지만 아직은 어설프다.
그럼에도, 빨려든다.
이 순간에는 설수연이란 인간이 사라지고 일리나 쁘로조로프가, 겨울 들판에 머리를 내민 한 송이 봄꽃처럼 꿋꿋하게 말한다.
그것은 실로 엄청난 몰입력.
옆에서 그녀를 함께 바라보는 유명을 바라본다.
체홉의 그 중 일리나를 골라준 것은 바로 유명.
지겨운 인생, 무거운 인생. 그래도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린 라는 작품과, 그 중에서도 언제나 웃으려고 노력하는 일리나의 대사를 주었다.
‘일해야 한다.’의 의미.
인생이 나를 짓누르더라도, 슬픔에 파묻히지 않고 눈 앞의 것에 매진하다 보면, 삶이 멋있다고 생각되는 순간도 오리라.
그것이 그가 수연에게 하고싶은 말일까.
일리나의 대사를 끝낸 수연이 말했다.
“저, 세자매 중에서 좋아하는 대사 하나 더 해봐도 될까요?”
“물론.” “마음껏.”
그녀가 외고 있는 대사인지, 바로 무드를 바꾸고 입을 연다.
그것은 연극의 첫 머리를 여는, 맏언니 올가의 대사.
“일리나, 우리 아버진 꼭 1년 전 오늘, 5월 5일! 바로 너의 생일에 돌아가셨지. 그 날은 지독하게 추웠고 눈이 내리고 있었어. 그때 난 도저히 살 수가 없을 것 같았고, 넌 멍청히 죽은 사람처럼 누워 있었지.
하지만 이렇게 1년이 지나고 보니 우리는 태연히 그때 일을 회상할 수 있게 되고 너도 이젠 흰 옷을 입고 밝은 표정을 짓고 있구나.”
그것이 그녀의 대답.
힘들었지만 시간은 흘러가고, 당신들을 만났고, 나는 지금 웃고 있다.
살아있고, 살아갈 것이라는 대답.
그렇게, 그녀는 ‘성 안의 소녀’에서 탈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