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171
무대 바닥에는 초록과 노랑색의 빛이 점점이 떨어진다.
무대 위에 설치된 세 개의 단 또한 알록달록한 빛을 머금고 깡총 뛰어오르고 싶은 놀이터같은 발랄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리고 포켓에서 뛰쳐나온 한 사람이 팔짝, 팔짝 뛰어 휘리릭- 묘기처럼 가운데의 가장 높은 단 위로 착지했다.
‘와우…’
중력을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가벼운 몸. 지름 1미터 정도의 원기둥 위에서도 여러 가지 어려운 동작들을 아주 쉽게 만들어보이는 그는, 피터팬.
아까 인사를 하고 들어간 차분한 배우와는 달리, 꺄륵- 웃음이 터질 듯이 천진난만한 얼굴로 그가 윙크를 한다.
“안녕- 나는 피터팬. 아름답고 멋진 생각을 하면서 날아야 떨어지지 않아!”
포인트는 목소리.
목소리는 얼굴보다 정직하게 나이를 먹는다. 그래서 어른이 아이의 목소리를 흉내낼 때는 그 동심을 흉내낼 수 없기 때문에 앵앵거리는 말투로 억지스런 귀여움을 강조하곤 한다.
그런데, 시원하고도 장난스러운 그의 목소리는 나이먹지 않고, 나이를 먹으려 하지도 않는 피터팬의 동심이 그대로 실려 앞으로 쭈욱 뻗었다.
다시 무대에 나올 때는 신유명이 아닌, 피터팬.
그 말을 단숨에 납득할 만큼.
“웬디- 이 쪽이라구- 이 쪽–”
“피터- 나는 너처럼 멋지게 날 수가 없어.”
피터팬이 나온 방향에서 팔을 크게 옆으로 벌리고 비틀비틀 걸어나오는 소녀의 아름다움에 관객들은 한 번 더 놀랐다.
새하얀 잠옷 아래 쭉 뻗은 맨발의 다리. 어깨까지 내려오는 창백한 금발이 곱슬하게 말려들어갔다. 눈썹이 처진 오목조목한 얼굴은 조금 심약해 보이지만, 보는 이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을 정도로 어여쁜 소녀.
“나는 너처럼 멋지게 날 수가 없어–”
“요정가루를 좀 더 뿌려줄게.”
대사를 치면서도 쉴새없이 무대를 휘젓는 피터팬과 눈이 번쩍 뜨이게 아름다운 소녀의 조합은, 그것만으로도 하루 동안의 눈의 피로를 단숨에 씻어냈다. 그리고,
“피터팬- 네 놈에게 복수하고 말겠다!!”
반대편 포켓에서 나타나는 후크.
한쪽 팔에 손 대신 끼운 갈고리를 휘두르며 엄포를 놓는 후크의 동작 하나하나가 몹시 우아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디z니에서 단순화시켰던 전형적 악당이 아닌, 원작에 충실한 귀족적인 후크.
[안색은 창백하고 거무튀튀하며, 검은 촛불처럼 보이는 긴 곱슬머리를 잘생긴 얼굴 위로 풀어내려 기묘하게 위협적인 분위기를 내고 있다. 어떤 귀족적인 분위기가 배어 있어서 사람을 잡아 찢을 때에도 점잖은 태도가 엿보인다.]음울하지만 매력적인 악당.
길고 검은 곱슬머리의 가발은 서류신의 미형의 얼굴에 무척 잘 어울린다. 그것은 관객들이 기대치 못했던 멋진 후크였다.
이로서 세 명의 주역이 모두 등장했다.
초록색, 흰색, 검은색.
동화다운 선명한 색깔의 캐릭터들은 세 배우들의 강렬한 존재감을 입고 보석처럼 반짝이며 무대를 가득 채운다.
그리고 그들이 각자의 단상 위에 자리잡은 순간,
텅-
무대 바에 매달려있던 아크릴케이스 세 개가 떨어져, 하나씩 그들을 집어삼켰다.
‘뭐…뭐야.’
관객들이 흠칫, 몸을 뒤로 물렸고, 그들은 사방이 막힌 케이스 안에서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어느 새, 알록달록한 조명들은 온데간데 없고, 갇힌 배우들을 때리는 새파란 조명.
바로 머리 위에서 진하게 떨어지는 조명이 얼굴에 기괴한 음영을 만들었고, 경쾌하던 음악은 단조로 전조되어 점점 불길함을 끌어올렸다.
“꺼내줘! 으아아아–!”
“이게 뭐야, 흐아아앙-”
“왜이래, 우하하하하”
세 배우의 존재감은, 그렇게 좁지 않은 극장 무대를 꽉 채우는 데 만족하지 못하고, 터질듯이 부풀어 객석 전체를 꿀꺽 삼켰다.
놀란 관객들이 숨을 고르지 못하고 정신이 팔려있을 때, 조명이 탁- 하고 꺼졌다.
쿵쿵-
암흑 속에 관객들은 자신의 심장소리만을 듣고 있었다.
*
“신환을 소개합니다. 이름 웬디. 나이 17세. 거식증 및 반복된 자해 성향으로 가족 동의 입원하였으며, 의존성 인격장애를 동반한 가면성 우울증으로 진단되었습니다.”
무대 전면에 스팟이 하나 떨어지고,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걸어나와 조명 아래 섰다.
칼단발, 진한 아이라인, 어두운 색의 립스틱. 새하얀 가운을 입고 테가 없는 안경을 쓰고 있다.
일반적인 의사의 느낌과는 조금 다른, 연구직의 느낌을 주는 미모의 닥터.
“가면성 우울증이란, 우울한 기분이 마치 가면을 쓰고 있는 것처럼 겉으로 별로 드러나지 않는 상태의 진단명입니다. 이 환자를 보세요. 착합니다. 언제나 방긋방긋 웃고 있지요. 겉으로 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착한 아이에요. 이런 아이가-”
닥터의 손짓에 따라 웬디의 단상에만 조명이 켜진다.
그 안에 있는 여자아이는 얼굴에 여전히 입가엔 웃음을 띤 채, 가늘고 흰 손목을 들어 홀린듯이 응시한다. 객석과 무척 가까운 무대이기에, 하얀 손목에 새겨진 붉은 선들이 선명하게 보인다.
“이런 짓을 한다, 그러면 의심해 볼 수 있죠.”
입술은 웃는 그대로, 웬디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아직 극의 초반인데도 단숨에 웬디로 빠져든 수연의 엄청난 몰입력은, 웃는 입술로 눈물을 뚝뚝 흘리는 기괴한 장면을 만들어냈다.
그 실감나는 표현력에, 관객의 신경이 팽팽해진다.
수면제를 먹어도 결코 잠이 오지 않는 어느 밤처럼.
“웬디, 안녕?”
닥터가 웬디에게 말을 거는 순간, 격리실이 천장 위로 끌려 올라간다. 웬디는 주춤거리며 단 아래로 내려왔고, 그 때 닥터와 웬디의 스팟조명이 꺼지며 무대 중앙의 조명이 켜졌다.
그 곳에는 작은 책상 하나와 의자 두 개가 세팅되어 있었다. 상담실이었다.
“나는 닥터야. 웬디를 도와줄 사람이란다. 우리는 앞으로 함께 치료를 해나갈거야.”
“저 왜 여기 왔어요? 웬디는 착한 아이에요. 나쁜 짓은 하지 않았어요.”
“그럼 웬디는 착한 아이지.”
닥터는 웬디를 쳐다보지도 않으며, 서류에 무언가를 적는다.
다만, 그녀의 말을 받아주는 어조만은 몹시 상냥하다. 지나친 상냥함이 무성의함으로 느껴지는 딱 그정도의 어조.
이어서 그녀의 체크가 계속된다.
웬디의 기분과, 증상, 과거의 이력들을 하나하나 묻는다. 웬디는 그것에 꼬박꼬박 답하면서도 틈을 보아 자신은 멀쩡하다고 계속 말한다. 그 때마다 닥터는 언제나 긍정한다. 맞아- 웬디는 착한 아이지- 다만 몇 가지 증상이 있으니 치료는 해야해, 선생님이 도와줄게.
도돌이표같은 내용의 반복.
“좋아, 이제 병동으로 돌아가.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언제든지 선생님에게 말하고?”
“…네.”
자신을 간절히 올려다보는 소녀의 눈빛을 닥터는 아주 일상적으로 외면하고 돌아선다.
어두워진 상담실의 조명 아래 손톱을 물어뜯는 웬디.
닥터는 무대 전면으로 걸어나와 다시 밝혀진 스팟조명 아래에서 브리핑한다.
“중증 우울증, 병식(*병에 걸려 있다는 자각)없음, 장기치료가 필요한 난치성 환자로 진단됨. 드문 가면성 우울증 케이스로 진행중인 연구의 주요 샘플로 활용도 높음. 주의관찰 요망.”
그 말투는 섬짓할 정도로 건조했다.
*
윤기자는 어느새 몸을 앞으로 쑤욱 내밀고 공연에 몰입해 있었다.
1막 3장.
병동에서 피터팬과 웬디가 처음 만난다.
“새로 온 아이구나?”
“으…응.”
“내가 구경시켜줄게. 여기는 나의 네버랜드야!”
“네버랜드가 뭐야?”
“아이들이 영원히 어른이 되지 않고 즐거운 아이로 살아갈 수 있는 마법의 나라야. 나는 이 곳의 주인공 피터-팬~”
“우와 멋있다, 피터.”
피터팬이 정신과 병동을 자신의 네버랜드라고 소개하는 것에 윤기자는 살짝 닭살이 돋았다.
그럴지도 모른다. 아무런 책임없이, 영원히 어른이 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곳이 네버랜드라면, 병동은 정말로 그의 네버랜드가 아니겠는가.
1막 4장.
닥터가 다시 걸어나왔다.
이번에 그녀가 지목한 사람은, 오른쪽 단상의 후크였다.
격리실에서 난동을 부리고 있는 폭력적인 후크.
쾅- 쾅-
그가 마임으로 격리실의 벽을 두드릴 때마다 벽이 흔들리는 듯 불안한 소음이 음향으로 들려왔다.
“이름 후크, 17세. 시간강박과 정리강박으로 기존에도 통원 치료 중이던 환자입니다. 기존 병증인 강박 때문이 아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인한 시계 공포증으로 입원하였습니다. 이 환자는 모든 종류의 시계를 두려워하며, 특히 시계 ‘소리’에는 심각한 공황 발작을 일으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환자가 생활하는 2병동에는 시계를 없앴지만, 저희는 심리적 감작 치료(*서서히 자극량을 늘려서 적응시키는 치료방법) 프로그램을 통해 환자의 공포증을 개선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짝- 하고 손뼉을 치자 음향으로 똑딱똑딱-하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으으…”
그 소리를 들은 후크가 머리를 감싸쥐고 달달 떤다.
조금 전까지의 흥분은 어디로 갔냐는듯이 몸을 떨고 침을 흘리며 괴로워하는 그의 모습은 안쓰럽기까지 하지만, 닥터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녀의 손짓에 따라 시계소리는 커지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한다. 그리고 그 소리에 맞추어 후크의 떨림과 발작의 강도가 오르내린다.
그의 반응을 보며, 닥터는 서류에 일상적인 체크를 하더니, 다시 짝- 하고 손뼉을 친다.
소리가 끊긴다.
기절하듯 널브러진 후크의 무기력한 얼굴에 관객들이 눈을 떼지 못하는 사이, 닥터가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던진다.
“이 환자를 다루는 데 가장 유의해야 할 점은, A병동의 피터팬 환자와 함께 두지 않는 겁니다. 피터 환자가 동급생이던 후크 환자의 PTSD의 직접적 원인을 제공했거든요. 아, 그 사건의 개요를 브리핑해 달라구요? 음…후크 환자에게 병력채취한 내용을 토대로 간단히 설명드리죠.”
그녀는 다음 장에서 그들의 과거를 보여줄 것임을 예고했고,
윤 기자는 손에 땀을 쥐었다.
‘어떤 과거, 어떤 피터팬이…’
윤 기자는 오늘 공연을 오기 전에 당연히 원작을 찾아 읽어보고 왔다.
그리고 그 또한 놀랐다. ‘어른’이 되어 읽어보는 ‘원작’ 피터팬은 기억보다 훨씬 이상했으니까.
하지만 이 피터팬은 이상함을 넘어섰다. 윤 기자는 자신이 문화부로 발령받은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공연 쪽의 소양이 풍부한 사람이었지만, 이런 웬디와 이런 후크를 기대하지는 못했다.
아직 나오지 않은 피터팬의 과거는 어떠할 것인가.
그는 상상이 가지 않는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며, 눈을 세게 한 번 깜박였다
126 이상한 세계
“후~크~”
“안녕 피터.”
화제의 두 배우의 투샷에 객석이 숨을 죽였다.
티 한 점 없는 밝은 미소의 피터가 후크를 와락 끌어안자, 후크는 반가움과 불편함이 뒤섞인 묘한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그에게 너무 티나지 않게 옷을 털어내고 행색을 다시 정리한다.
곱슬거리는 검은 긴 머리를 단정하게 뒤로 묶은 후크. 교복으로 보이는 가운을 입고 있다.
옷매무새를 여미고 시계를 확인하는 동작에서 결벽적인 단정함이 느껴진다.
좋은 행실. 어릴 때부터 강요받은 좋은 행실에 대한 집착. 후크의 캐릭터가 선명하게 와 닿는 연기였다.
“후크는 오늘도 단정하구나. 갑갑하지 않아? 단추 하나 정도는 풀어도 되잖아.”
그가 그러든지 말든지 피터팬은 바닥에 대짜로 벌렁 누웠다.
마치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조합.
하지만 그렇기에, 동경한다.
후크는 바닥에 드러누워있는 피터에게 부러운 시선을 던지더니, 객석을 향해 빙글 돌았다.
우수에 젖은 검은 눈동자가 무대라는 공간을 벗어나 객석을 넘어오자, 관객들은 살짝 긴장했다.
“피터라는 녀석입니다. 얼마 전에 전학을 왔죠.”
그는 다시 한 번 시계를 확인하더니 말을 이었다.
“밝고 매력이 넘치는 녀석입니다. 그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금세 주변에 친구들이 몰려들죠. 쉽게 우쭐해하고 관심을 원하는 성격이라, 희한한 장난을 많이 치기는 하지만, 그래도 다들 웃어넘겨 줍니다. 저와는…아주 다른 인간이죠.”
칼칼한 목소리에는, 설명하기 힘든 우울이 스며있다.
부러움과 시샘이 교차하고, 호감과 열등감이 한층씩 교차되며 쌓인다. 그런 복잡한 표정으로 후크는 피터가 누운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이것 봐라?”
“웬 칼이야?”
피터가 녹슨 칼을 하나 내보인다. 후크는 더러운 물건에 닿을까 조심하면서도 그것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오는 길에 주웠어. 누가 버려뒀나봐, 하하.”
“이걸 어디에 쓰려고. 어서 버려.”
“이따 교실에 가져가서 장난을 쳐 보려고. 무슨 장난을 치지?”
“항상 장난칠 궁리만 가득하지. 피터는.”
“너는 맨날 시계만 보고 있더라? 시계 말고 세계를 봐! 세상에 즐거운 일이 이렇게 많은데.”
그에게 핀잔을 주면서도, 한편으로 그와 함께 있으면 자신도 조금은 숨을 쉴 수 있을듯한 기분에, 후크는 후- 하고 큰 숨을 뱉어본다. 그리고 다시 객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자유분방함이 껄끄러우면서도, 그를 보고 있으면 제 마음도 조금 살아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아, 자유로운 피터. 규칙에 구애받지 않는 피터. 행복한 피터. 왜 나는 그와 같지 못할까..
그래서 무심코 던진 말이었습니다.”
그 말에 흠뻑 젖어있는 후회에, 관객들은 오싹한 예감이 들었다.
“…후우..피터는 좋겠다. 나는 그게 잘 안돼. 성격도 타고나는 건가봐.”
“그게 어려워? 친구니까 내가 해결해줄까?”
“어떻게…?”
‘서…설마…’
스걱-
효과음과 함께, 피터가 오른손에 쥔 칼을 휘둘렀다. 뭔가가 툭- 떨어진다.
으아아아아악–
숨도 쉬지 못하고 얼어붙은 객석의 사이사이를 비명소리가 가득 메웠다. 붉은 물감이라기에는 너무도 붉은 액체가 무대 위로 파삭 터져 나간다.
그리고 비명소리에 리듬을 맞추듯이 시계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똑딱똑딱-
“시계를 숨기면 새로운 시계를 또 찰 거잖아. 그러니까 시계를 아예 못 차게 손목을 없애버렸어. 고맙지?”
손목을 부여잡고 나뒹구는 후크.
그의 단정한 머리와 옷매무새가 엉망이 되어가는 것을 즐겁게 바라보며 생글거리는 피터팬.
그 모순된 광경을 배경으로 똑딱똑딱- 소리가 커진다.
시계 소리는, 저 잘린 손목에 단단히 매어진 시계에서 울려 퍼지고 있는 것.
그 상상이, 객석을 소름끼치는 정적으로 이끌었다.
새카만 고통에 절어있는 후크와 새파란 웃음을 짓고 있는 피터팬.
두 배우의 눈이 시릴 정도로 선명한 대비.
1막이 끝났고, 관객들은 놀란 가슴을 겨우 부여잡았다.
*
하아-
수연이 손끝을 파르르 떨었다.
‘이것이, 연기.’
그런 동화가 있었다.
침대에 누워있다보면 누운자리가 쑤욱 꺼지면서 다른 세계로 내려가는 입구가 된다. 그리고 주인공은 온갖 모험을 즐긴 후 시간제한을 아슬아슬하게 맞추어 침대에 눕고, 눈을 떠보면 한 잠 잘 자고 일어난 후. 꿈이었나 생각하지만, 손에 다른 세계의 물건이 들려 있지.
그 이야기를 푹 빠져서 읽었다. 읽는 동안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만큼 집중해서.
그리고 그 후로는 잠자리에 누울 때마다 그런 상상을 했다. 이렇게 누워 잠들면 침대가 푹 꺼져서 자신도 어느 낯선 세계로 갈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오늘 자신은 이상한 세계에 와버린 것 같았다.
처음 무대에 등장했을 때 그녀는 가슴이 떨렸다.
너무 가까이에 있는 수많은 눈들. 그 눈들이 자신의 움직임을 집요하게 따라온다. 무섭다. 너는 가치가 없다고, 왜 네가 여기있느냐고 비난할 것 같은 눈동자들.
그렇게나 많은 연습을 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얼어붙었을지도 모른다.
겨우 자신의 힘으로 첫 대사를 밀어냈을 때,
저 너머의 피터팬과 눈이 마주쳤고, 그가 격려하듯이 다정하게 웃었다.
-웬디, 이 쪽이라고 이 쪽!
어서 내가 있는 곳으로 오라고, 같이 놀자고.
그 뒤로는 기억이 까무룩하다.
재미있는 책에 완전히 빠져있을 때처럼 주변의 기척들이 멀리 달아나고, 이 무대의 공간이 까마득히 확장되어 하나의 다른 세계가 된다.
그리고 그녀는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늘, 일그러진 세계의 빈민같이 초라하던 자신이 아닌, 모두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주인공이.
웬디는 힘겨웠지만, 수연은 행복했다.
자신의 남은 힘겨움을 웬디에게 흘려보냈다.
웬디는 더욱 완전해졌고, 수연은 더욱 가벼워졌다.
관객들의 시선이 몰린다. 그 시선이 공간을 장벽처럼 차단하고, 그 안에서 움직이는 배우들의 열기가 점점 누적된다.
보지 않고 있어도, 무대 위의 작은 움직임조차 공기의 흐름으로 감지할 수 있을 정도로 뻑뻑해진다.
아- 하고 작은 소리를 내면 그 흐름이 부드럽게 일렁인다. 엄청난 압박감.
저 대단한 배우들 사이에서 힘을 내고 용기를 내어 자신의 존재를 주장한다. 그러자 그들이 선뜻 자리를 내어주면서 자신의 공간이 생긴다. 그렇게 맞물린 네 명의 배우들의 에너지가 빈틈없이 무대를 꽉 메운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1막의 마지막 장, 피터팬과 후크의 투샷이 펼쳐지는 동안 수연은 무대를 계속 노려보았다.
사라질까 두려운 것처럼, 어서 빨리 무대로 나가고 싶은 마음을 가득가득 실어서.
“잘 했어, 수연아.”
“그렇게만 해.”
퇴장하고 들어오는 최고의 배우들이 막간을 틈타 속삭여준다. 벅차오르는 고양감.
음울한 음악이 지직거리다가 뚝- 끊긴다.
2막이 시작되었다.
*
또각또각-
이제는 익숙해진 닥터의 하이힐 소리로 2막이 열렸다.
“이름 피터팬, 17세. 이 환자도 심한 ADHD와 망상장애로 본원에서 치료받던 환자입니다. 하지만 타인 위해의 가능성으로 병동에 강제입원된 것은 피터 환자의 또다른 정신적 결함이 돌출된 이후였죠. 말씀드렸던, 후크 환자의 팔을 잘라낸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후크환자는 저희 병원에서 대수술을 받았지만, 녹슨 칼 때문에 절단면이 참혹하게 손상되어 있어 접합수술은 실패했고, 의수를 달아야 했습니다. 저희 의료진은 피터팬 환자를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무시하는 패턴을 보이는 반사회적 인격장애로 진단하였습니다.”
팟-
이번에는 가운데 떨어진 조명.
허리춤까지 오는 단상 위, 아크릴로 된 격리실 안에서, 그는 객석을 향해 신나게 손을 흔든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양 손을 반갑게 흔드는 그 모습이 왜 이렇게 오싹한 것일까.
“저희 병원의 가장 문제 환자죠.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리고 그 문제 상황에서 자신이 주목받는 것을 즐기죠. 그런데도 그 매력에 빠져드는 사람이 많다는 점이 이 케이스의 재미있는 포인트입니다.”
격리실 속의 피터팬이 맑고 큰 소리로 말한다.
“거기 양복입은 친구, 나랑 재밌는 놀이할까?”
앞 줄에 앉아있던 정장차림의 회사원이 움찔 그의 시선을 피한다.
“같이 해적들을 무찌르자. 인어들의 노래도 구경하고, 그러다 재미 없으면 인어의 꼬리를 잡아올려서 산 속에 던져버리자구. 물이 없는 곳에서 거대한 꼬리를 퍼덕거리는 인어의 모습은 얼마나 재미있겠어? 그리고 같이 모닥불을 켜고 커다란 토끼도 구워먹자! 세상엔 즐거운 일이 정말 많아. 나와 함께 네버랜드로 가자~~”
사이클로라마에 사람그림자가 나타난다.
한 명, 두 명, 다섯 명, 열 명.
피터팬이 즐겁게 조잘거리는 바로 뒤쪽의 사이클로라마에 그림자들이 밀집되고, 그들의 얼굴 아래쪽에, 웃는 입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