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207
그리고 카이의 차례.
[와…카이는 정말 놀랍도록 달라졌네요. 이건 설마 데렉이 잘 가르쳐서 그런건가?] [가르치는 보람이 있는 참가자에요. 나도 나지만 참가자 중 한 명이 끼고 가르치는 것 같더군요.] [아, ‘그’요?] [네, ‘그’.]심사위원들이 한 명을 주시하며 빙글빙글 웃는다.
메인 디쉬를 기다리는 탐욕어린 눈빛으로.
그렇게 칭찬이 릴레이처럼 이어진 카이의 차례가 끝났고,
다음은 도효준의 차례였다.
유명은 무대 위에 올라선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도망치진 않았네.’
데렉에게 깨지고 유명에게 일침을 당한 날 이후, 도효준의 얼굴에선 완전히 웃음이 걷혔다.
유명은 그 모습이 눈에 밟혔다.
그 날 했던 말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고백한 과거와 많은 것을 결핍당하며 자란듯한 모습에 어쩔 수 없이 신경이 쓰였다.
‘과연, 조금이라도 성숙했을까. 참 아까운 재능이긴 해.’
15년간 무명 배우 생활을 하며, 참 많은 배우들을 봐왔다. 그 중에서도 저 정도로 재능을 타고난 배우는 거의 본 적이 없다.
내키는대로 적당히 연기하는 것이 분명한데도, 쉽게도 시선을 사로잡는 반짝이는 재능.
그 문유석의 원픽이니 당연한 건가.
그리고 시작한 도효준의 연기를 보고, 유명은 멈칫했다.
그것은 아이디어가 반짝이는 연기도,
튀는 매력과 태가 나는 동작들로 시선을 사로잡는 연기도 아닌,
기본에 충실하며 묵묵하게 극을 뒷받침하는,
‘조연’의 연기였다.
173 히든 스토리
도효준이 연기를 마친 후, 놀란 심사위원들이 질문했다.
[도효준씨…본인의 연기를 설명해 주겠어요? 갑자기 사람이 바뀐 것 같네, 참···] [진입과제 때는 제가 욕심을 부려 무리수를 뒀습니다. 이 극에서 왕의 역할은 조연이 맞는 것 같아서, 이번엔 정석대로 연기했습니다.]귀족과 상인의 공방에 추임새만 넣는 무능한 왕.
큰 임팩트는 없었지만 그가 어떤 왕인지는 아주 분명히 잘 전달되었다. 귀족과 상인의 대사를 치는 배우들 사이에서, 왕은 그 대사가 잘 전해지도록 균형을 잡는 조율자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정석대로 연기했다라…‘그림’을 연기했던 34조의 해석이 정석이라는 게 이미 확인되지 않았나요? 정석을 연기할 거면 34조의 해석대로 연기하는 게 맞았을텐데, 남의 해석대로는 자존심 상해서 연기 못하겠다는 건가요?]데렉의 날카로운 질문에 습관적으로 움찔한 효준은,
고개를 젓더니 조용히 대답한다.
[아뇨. 남의 해석을 노력없이 가져오는 게 염치없는 것 같아서요. 그냥 이 조각대본을 처음 받았을 때 느꼈던 인상 그대로 해석해서 연기했습니다.]첫인상대로 연기했다고 해서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눈이 가려지고 귀가 막힌 무능한 왕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호흡 하나, 리액션 하나하나를 고민하고 연구한 것이 보인다.
도효준의 연기에서 처음으로 보게 된 노력의 흔적.
‘정신…차린 건가.’
의심어린 시선을 던지던 데렉은 기습적으로 질문했다.
[왕의 이름은 뭐죠?] [헨리 카누트 스튜어트입니다.]그리고 망설임없이 튀어나온 대답에 데렉이 피식 웃었다.
이 대본에는 등장인물의 이름이 나와있지 않다. 즉, 효준이 붙인 이름이다.
예전의 효준이라면 배역은 배역일 뿐, 이름을 붙일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배역이 어떤 인간이고 어떤 삶을 살아왔으며 어떤 정체성을 가졌는지 고민해 보았다는 뜻.
[내가 뭘 지적해왔는지, 조금은 이해한 것 같군요. 그것만으로도 큰 성과입니다. 기술적인 부분은 원래 뛰어난 참가자니 세세한 지적은 하지 않겠습니다. 잘했어요.]데렉이 효준에게 처음으로 진심어린 칭찬을 건넨다.
‘본인만 튀려 하지 않고 주변과 어우러지는 연기. 그것도 조연의 역할에 맞게 확실하게 연기하다니.’
사실 데렉이 이 졸업미션을 준비한 것은 효준 때문이었다.
같은 과제더라도 시간을 들였을 때 어떻게 변할 수 있는지, 다른 배우들의 변화를 보며, 뭔가 깨달았으면 했다.
너무 아까운 재능의 소유자에게 자신이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조언으로 준비한 것인데,
한 발 먼저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효준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변했지? 그 날 혼낸 게 먹혔던 건가···’
그렇게 효준의 무대가 끝났고, 이제 남은 것은 유명의 무대.
‘그 때 이상을 준비할 수 있었을까···?’
데렉의 발끝이 진한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신발 안에서 꼼지락거렸다.
*
[시작하겠습니다.]유명의 알림에 주변에 포진한 ‘목소리’ 역의 세 배우가 눈에 띄게 긴장한다.
아무리 목소리 연기 뿐이라 해도, 30분만에 ‘정물이 사람이 되어가는’ 연기를 습득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 탓이다.
그리고 연기가 시작되었다.
왕과 귀족과 상인의 목소리가 오고가는 사이, 한가운데 가만히 선 노예.
한 명에게 오롯이 집중하자 더욱 예민하게 느낄 수 있다.
힐끔 왕을 바라보는 시선, 귀족과 상인이 얘기를 할 때 짓는 리액션 하나하나가 군더더기 없이 적절하게 ‘노예’라는 인물을 설명한다.
그런데···
‘음?’
그 설명이, 지난 번과는 좀 다르다.
땅으로 꺼져들 것처럼 굽어졌던 등이 아니다. 그의 깊이 숙인 머리는 복종을 표하지만, 등줄기만은 꼿꼿이 서 있다.
‘왜···?’
이것은 데렉이 해석했던 것처럼, 다른 꿍꿍이가 있는 노예인가?
아니, 아니다.
그의 눈빛은 노예라 믿을 수 없을만큼 맑다. 공손히 손을 모으고 윗분들의 대화를 경청하는 태도에는 품위마저 서려있다.
이것은 또 어떤 해석인 것일까.
허업-
옆자리에서 에바가 숨을 머금은 채 뱉지 못하는 것을 느끼고, 데렉이 움찔했다.
에바를 돌아보고 왜 그러냐고 묻고 싶었지만, 신유명의 연기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저…비천한 소인이 한 말씀 올려도 되겠나이까?]비천하지 않다. 전혀.
나락에 떨어진 자의 마지막 단말마는 어디로 가고, 단아한 음성.
자신의 정의와 신념을 위해 목숨을 거는 자에게서 볼 수 있는 깨끗한 의지.
[저는 왕자 전하의 죽음이 자살이라고 생각합니다.]맑은 목소리는 망설임이 없어, 다소 무엄하게까지 들린다.
예전의 버전이 밟히고 밟히다 못해 마지막으로 들고 일어선 개미의 발버둥이었다면, 지금의 그는 자신의 의지로 목숨을 던지는 혁명가의 기개가 느껴진다.
좋은 캐릭터다.
하지만 왜?
이 대본만으로 일개 노예가 이런 의식을 가졌다고 해석하는 것은…너무 과한 것이 아닌가?
푸욱-
노예가 칼을 맞고 쓰러진다.
그조차도 비명없이 깨끗하게 쓰러지는 그는, 왕을 향해 어떤 간절한 시선을 마지막까지 놓지 않는다.
고통이 버거워 숨을 몰아쉬면서도, 추하게 죽지 않으려는 듯 자세를 갈무리하며 왕을 계속, 계속 쳐다본다. 어떤 메시지를 전하듯이.
그리고 눈을 부릅뜬 채로, 툭- 하고 고개를 놓는다.
‘하아아···’
관객이 겨우 숨을 몰아쉬었을 때, 쓰러진 노예는 다시 그림으로 복귀한다.
자연스러워졌던 움직임이 다시 덜그럭거리며 둔해지더니, 덜걱- 고정되는 과정은 2주 전의 연기보다도 훨씬 정교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새, 또 발전했어.’
그렇게 유명의 연기가 끝났다.
데렉은 유명에게 처음으로 살짝 시비를 걸어보려고 했다.
연기 자체는 더욱 정교해졌지만, ‘그 대본에서 나왔다기엔 이번 노예는 좀 억지스러워 보인다, 극의 해석으로 봤을 때는 오히려 퇴보한 게 아니냐’는 질문을 하고 싶었는데,
에바가 먼저 마이크를 잡아챈다.
[뭐에요 유명씨! 노예의 히든 스토리는 어떻게 알아낸 거죠?!]이건 또 무슨 소리인 것일까.
*
에바의 뜬금포를 모두 이해하지 못하는 사이, 유명이 싱긋 웃음을 짓는다.
[재밌게 봤습니다.] [원 대본을 봤다는 말인가요? 어떻게?] [본선진입과제 때 대본들, 모두 한 대본이던데요?]에바가 헉- 하는 소리를 낸 후, 대답을 하지 못한다.
결국 제리가 끼어들었다.
[이게 무슨 소리에요? 우리도 좀 같이 압시다. 뭐가 한 대본이라는 거에요?] [본선진입과제 때 시드조까지 총 52조, 대본은 26개였잖아요. 그게 전부 한 작품에서 나온 거더라구요.] [아니, 그렇다기엔 이야기들이 이어지지 않았는데? 그리고 26개 대본이면 260분인데 너무 길잖아요?] [정확히는 같은 이야기 속에서 뽑아낸 여러 단면이라고 해야 할까요.]유명의 설명은 이러했다.
이 일어난 아리자데 왕국,
귀족과 상인이 실권을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으며, 노예는 고통받고, 왕족은 무능하다고 규정된 이 세계의 부분 부분이 26개의 대본으로 뽑혀나왔다.
26개의 대본 중 어떤 것에서는, 시장에 찬거리를 사러 갔던 부인이 상인의 횡포에 드잡이를 하다가 변을 당하기도 하고,
어떤 것에서는 왕궁의 요리사와 시녀, 귀부인이 맞닥뜨려 불길한 소문을 주고 받기도 한다.
어떤 것에서는, 아리자데 왕국의 현실을 상징하는 ‘그림들간의 난상토론’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작중 세계가 ABCDEFG라는 스토리로 이루어져 있다면, 영화에선 ACEF와 같은 방식으로 보여주잖아요. 지루한 파트는 잘라내고, 핵심적인 파트들만 이어붙이죠. 하지만 이 대본들은 아직 편집되기 이전의 단면 단면들을 보여주고 있달까요. 그게 모두 다른 대본으로 보이는 데서 에바의 대단한 능력에 감탄했어요.] [사실이에요, 에바? 우린 못 전해들었던 이야기인데.] […네.]에바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10분짜리 대본을 26가지 만들어달라는 요청만 받았어요. 분리된 단편들을 써도 됐지만, 이왕이면 평소에는 생략되는 이야기들을 조합해서 하나의 큰 세계를 그려내고 싶었어요. 그 얘기를 굳이 할 필요는 없었죠. 누가 알아볼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니까.]그걸 계획한 사람도, 알아본 사람도 대단하다.
[신유명씨는 그걸 어떻게 눈치챘어요?] [본선진입과제 때, 묘하게 이야기의 부분 부분들이 연결되는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서 계속 생각해 봤죠.]이미 끝난 과제를 계속 고민했던 유명.
[그 중 핵심이 되는 대본들은 다른 조에 부탁해서 읽어봤어요. 시드 조들이 연기했던 공주와 왕자들의 장면, 그게 ‘현재의’ 아리자데 왕국을 보여주는 핵심이었죠. 그 중엔 ‘로슈’ 왕자도 있었어요. 알아보지 못하게 다른 이름으로 바꿨지만.]다른 조의 대본을 구해보며, 짬짬이 대본 조각들을 맞추어 갔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힌트들이 거대한 하나의 스토리를 형성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게 오늘 연기가 달라진 이유라는 건가요?] [네. 왕궁의 홀에 걸려있던 네 장의 그림은 단순한 상징화가 아닌, 앞전 시대의 실존 인물들의 그림이었거든요.] […!!] [앞전 시대에 한 왕자가 있었어요. 그는 귀족과 상인의 이해 관계에 배치되어 제거될 운명이었으나, 왕비가 성 밖으로 빼돌렸어요. 그리고 자신이 왕자인 것을 모른 채 노예로 자랐습니다.]데렉이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분명 그런 내용을 담은 대본이 있었다. 그것이 여기서 이렇게 연결될 줄이야.
[출생의 비밀을 몰랐다 해도, 타고난 품위는 어디가지 않았습니다. 주변 노예들은 그를 따르기 시작했고, 그는 노예해방운동을 벌이다가 결국 귀족과 상인의 손에 처단당했죠.]참가자들은, 자신들이 연기했던 대본이 연결되어 가는 것을 듣고 있었다.
마치 마법을 보는 듯한 느낌.
[그리고 그는 그림이 되어서조차도, 현재 아리자데 왕국 살인 사건의 진실을 왕에게 알리려다 칼을 맞습니다. 신념에 찬 인물.왕의 핏줄은 노예가 되어서도 다르다는 사상이 다소 중세적이기는 하지만, 가장 높은 핏줄이 가장 낮은 이들을 해방시키려 한다는 드라마틱한 구조를 완성하죠.]
유명이 연기한 것은, 노예가 된 왕자.
그렇다면 그의 모든 연기가 설명된다. 흠잡을 데 없이.
모두가 할 말을 잃은 가운데,
직전에 과제를 마치고 유명의 연기를 지켜보던 효준의 눈동자가 누구보다도 크게 흔들렸다.
*
자신이 어떤 재능이 있는지도 모른 채,
그 재능을 활용해 먹고 살던 시절이 있었다.
-같이 한국으로 갈래요?
문유석은 처음으로 ‘도효준’이라는 사람에게 관심을 보여준 사람이었다. 아니 관심을 보인 건 자신의 재능이었겠지. 그렇기에 솔직하게 ‘나라는 사람에게’ 관심을 달라고 할 수 없었다.
연기를 쉽게 대해야, 기대 이상의 천재라는 것을 증명해야 그의 관심을 놓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유석은 자꾸 ‘마인드’를 거론했다.
-그런 식으로는 프로연기자가 될 수 없어.
-왜요. 지금이라도 어느 오디션에 가도 합격할 자신이 있는데요?
-합격하겠지. 그리고 떠오르는대로 네 맘대로 연기하다가 결국 민폐를 끼칠 거다. 설령 한두 작품에서 무사히 지나가더라도, 성공이 쌓여갈수록 연기를 쉽게 보는 태도는 더 심해질 거야. 네가 마인드를 갖추기 전에는 안 돼.
그렇게 2년.
유석이 허락해 준 제대로 된 첫 일거리는 ‘연예학개론’의 ‘보형’ 역이었다.
-아직 안심이 안 되긴 하지만…좀 정신 차렸으리라 믿는다. 가능성 넘치는 역이라 네 자리로 확정해 둔 거니까 시간 잘 지키고.
그런데 효준은 마지막 순간, 도망쳤다.
정식 배역만 받으면 잘 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뻥뻥 쳐 놓고 마지막에 도망을 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혹시 기대에 충족하지 못하면 유석에게도 버림받을까 겁이 나서?
혹은 잘잘못을 떠나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좋아해 달라는 반항이었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유석은 그 날, 자신이 도망간 자리를 차지한 한 배우와 계약했다.
신유명이었다.
그가 승승장구할 수록 효준은 초조해졌다. 연예학개론 오디션을 펑크낸 이후, 유석은 마인드가 바로 서기 전까진 다음 일은 없다고 공언했다. 그렇게 2년, 연습실에만 머무는 동안 신유명은 정상을 향해 달렸다.
재능만은 내가 위라고, 그런 위안이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유석의 기대가 완전히 식어갈 즈음, 효준은 마지막 카드를 던졌다. 캐스팅보트에 자신도 출전하겠다는 조름을, 유석은 한숨을 쉬며 허락해 주었다.
어릴 때부터 눈치밥을 먹던 그는 그 한숨의 의미를 쉽게 깨달았다.
이것이 그가 주는 마지막 기회라는 걸.
하지만 멀리서 보던 것과 달리, 가까이서 보게 된 신유명은,
-저는 도와달라고 요청하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굳이 돕겠다는 건, 도움이 아니라 참견 아닌가요?
만만한 상대도, 편한 상대도 아니었다.
엄청난 재능과 연기 실력보다도 효준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그가 스스로의 기준을 가지고 행동하는, ‘진짜 어른’이라는 점에 있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문유석의 뜻을 거스르더라도 관철했고, 나탈리나 데렉같은 엄청난 셀럽들의 관심에도 연연하지 않았다. 그렇게 잘하는 연기를 프로그램에서 과소포장하여 내보내는 것조차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질투는 호기심이 되고, 호기심은 호감이 되었다.
효준은 어느새 유명을 ‘경쟁 상대’가 아닌, ‘인정받고 싶은 대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런 그가 효준에게 처음으로 던진 일침은,
-남이 목숨걸고 있는 일을, 본인이 뽐내기 위한 수단 정도로만 사용하면서, 상대에게 이해받고 인정받길 바라는 건가요.
그의 뇌리에 강렬하게 쏘아 박혔던 것이다.
174 굴려도 되죠?
그날 이후로 효준은 변화하고자 했다.
그 전에 들었던 어떤 비판보다도, 혹은 ‘재능이 아깝다’던 데렉의 질타보다도,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걸 무시하는 사람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그 진솔한 한마디가 더 마음에 와닿았다.
‘무엇부터 해야 할까.’
그 날 이후로 연습실에 나가는 것이 두려웠다.
유명의 싸늘한 얼굴을 다시 보는 게 두렵고, ‘연기를 얕봐온’ 자신을 다른 사람들도 모두 싫어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면 더더욱 용기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할 수 있는 일.’
그럼에도 그는 처음으로 인내를 습득해 가며, 꼬박꼬박 클래스에 참석했다.
그리고, 하나의 캐릭터를 놓고 오래 고민해 보았다. 이 왕은 어떻게 자라서 이렇게 무능한 왕이 되었으며, 귀족과 상인, 노예에게 각각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그 감정을 드러내기 위한 말투, 제스처, 눈빛을 구상해서 기록하고, 하나하나 더하고 빼 가는 과정.
처음으로 연기가 ‘어렵다’고 느꼈다.
데렉이 해주었던 말이 떠오른다.
“피아노를 칠 때, 어떤 친구들은 음감이 좋아서, 멜로디를 대충 청음하여 코드를 맞춰 쳐낼 수 있어. 하지만, 악보를 보고 제대로 연습하기 시작하면 극도로 어려워지지. 페달을 밟고 떼는 타이밍, 크레센도, 디크레센도, 이음줄과 붙임줄, 피아노와 포르테. 음악이 아닌 마치 수학을 배우는 듯한 정교함으로 지루한 과정을 반복 끝에, 몸이 익은 손가락의 리듬에 음악성을 실을 때, 진정으로 청중에게 들려줄만한 ‘곡’이 탄생하는 거야.
그리고 지금 당신의 연기는, 타고난 음감을 자랑하며 제 흥에 겨워 치는 아마추어의 연주곡이고.”
그 말의 의미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렇게 기본에 충실한 연기를 해낸 효준은, 무대에서 내려오며 유명과 교차할 때 그의 얼굴을 필사적으로 훑었다. 조금이라도 기특해하는 기색을 찾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다음에 무대에 오른 유명의 연기를 보고, 그는 말로 질타당했을 때와 비교할 수 없는 충격을 받게 된다.
‘그 때 그 연기에서 더···’
‘앙투안과 시드니에게 진입과제 때 대본을 보여달라고 부탁했던 게 그래서···!’
‘이미 끝난 과제에 왜 그렇게까지···’